二
황가는 예부터 손이 귀해 가족끼리 사이가 돈독했다. 태자는 황제와 황후께 예법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릴 뿐 아니라, 여유가 있을 때마다 부황과 모후를 찾았다.
전각 안으로 다과를 들일 준비를 하던 흠덕전의 궁인들이 태자를 보고 예를 올리려 했다. 태자의 손짓에 분분히 허리를 낮추던 여인들이 멈추었다.
“안에 누가 있는가.”
태자의 물음에 궁인이 흐뭇한 웃음을 띠우며 답했다.
“동궁의 세 분이 와 계십니다.”
“들어가 보게.”
“고하지 않으시고요?”
궁인의 물음에 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어.”
태자의 말에 궁인이 짧게 예를 올리고 분주히 안으로 들었다. 궁인들이 안으로 들고 그대로 돌아서려던 태자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말이 튀었다.
“태자비께서 너무하십니다.”
문 앞을 지키는 궁인의 어깨가 흠칫 울렸다.
“…….”
태자가 조용히 할 것을 소리 없이 명했다. 궁인이 더욱 자세를 낮췄다. 전각 안에 시선을 건네는 태자의 귀로 다시 전각 안의 소리가 닿았다.
“무어가 말이오?”
황후의 목소리였다.
“태자비께서 함월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하더이다. 함월전엔 그리도 자주 가면서 어째서 모후를 찾지 않는단 말입니까. 예법에 따라 조석에 문안 올리면 태자비의 할 도리는 다 하는 것이옵니까?”
맹소훈의 말에 태자비에 대한 불만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거 말고 무어가 필요하오.”
“모후.”
황후의 어진 음성에 맹소훈이 답답한 듯 황후를 불렀다.
“태자비께서 어려 일족이 그리운 것 아니겠습니까. 모후께서 마음에 두시지 않으실 겁니다. 허나, 폐하께서도 자주 들지 못하는 곳에 태자비 전하께서 너무 자주 오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옵니다. 태후께서 병환과 연로로 주위가 번다한 것을 싫다 하셔서 저희 세 사람은 뵐 수조차 없었사 온데, 태자비께서는 그리 드셔도 되는 것입니까.”
“예. 태자비께서 함월전에만 오가는 것은 보기 좋지는 않은 듯합니다.”
양제와 봉의의 말에 황후가 잔잔하게 웃었다.
“태자비가 이곳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걸 거요. 폐하께서 태자비의 연치 어림을 이유로 조석으로 올리는 문안 외의 모든 대외적인 것들을 막아 두셨지 않나. 아침저녁의 문안 외에는 모든 것을 막아 두었기에 태자비는 일족의 알현도 따로 받지 않고 있으니. 아침저녁 문안이면 충분하기도 하지만, 본궁도 그 사람을 부를 수 없고, 그 사람도 이곳에 오는 것을 청할 수 없달까. 무엇보다 우리가 이곳에 그이를 불러 무얼 하겠소. 태자비는 어린 소년이 아니오. 함께 단장하는 것을 논하겠소, 새로 나온 장신구에 대해 떠들겠소. 태후께 가는 것이야…… 먼 곳에서 와 그리운 일족을 배알하는 것이니 이상할 것 없지. 태후께서 태자비의 상시 방문을 허락하셨으니, 그곳에라도 가 적적함을 달래는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야. 앞서 간 공후께서도 태후마마를 자주 찾았다 들었소. 제북 땅 일족만의 특별한 유대가 있는 것 아니겠나. 이 사람도 태후께서 허락만 한다면 며느리 된 도리로 매일 뵙고 싶으나 본궁은 같은 일족도 아니고 태후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아쉬울 따름이네…….”
황후의 음성에 쓸쓸함이 짙게 묻어났다. 방 안이 묘하게 고요했다. 더 들을 것 없는 말을 끝으로 태자가 몸을 돌렸다. 궁인이 급히 예를 올리려 했고, 태자가 손을 내어 소리를 막았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흠덕전에서 나오는 태자를 본 등우가 아는 체를 했다. 황후전으로 들어가면 반 시진은 훌쩍 보내고 오는 태자가 이르게 나온 것이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영화대로 가자.”
“……예…….”
아침저녁 문안을 올리러 갈 때를 제외하고 태자비전에 시선조차 안 주는 태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등우는 빠르게 시선을 굴렸다.
“요즘 태자비가 함월전에 드나?”
“예? 예, 그러하옵니다.”
등우는 태자가 어린 태자비를 차라리 내버려 두기를 바랐다.
“얼마나 자주 들지.”
“사나흘에 한 번은 드신다 합니다.”
태자에 비하면 태자비는 어린애였다.
“함월전에 들지 않을 땐 뭘 하지?”
심드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알려진 바가 없사옵니다. 영화대 궁인들은 입이 무겁고, 다른 곳과 별다른 마찰이 없기에. 아마도 영화대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시지 않겠습니까. 산책마저도 영화대 안을 거니는 게 고작이라고 아옵니다. 영화대 자체가 넓기는 하지요. 함월전까지 가는 것이 태자비 전하의 가장 큰일일 것입니다.”
“누구 찾는 이는 없고?”
“영화대에서 말씀입니까.”
“태자비가 누굴 부르거나 뵙기를 청하기나 하는 것 말이다.”
“없사옵니다.”
“전혀 없단 말이야?”
“노비가 앞서 말씀 드리온 것처럼 태자비께서는 아침저녁 태자 전하와 정천궁에 들 때와 태후마마의 함월전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영화대 밖으로 나서시지 않습니다. 따로 돌아다니는 걸 즐기지 않으신 것 같았고, 간혹 정천궁 좌공공께서 폐하께서 주위를 물리실 때 태자비 전하를 찾아와 읍소하는 듯하지만, 태자비께서는 폐하께서 자신을 찾으셨냐 묻고는 아니라고 하면 그럼 갈 수가 없다고 주위를 물리는 것으로 아옵니다. 영화대는 동궁에 있는데 전하의 허락 없이 태자비께서 누굴 부르겠습니까.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폐하께오서 조석으로 문안하는 것 외에는 복씨 성의 홍문 들 나이가 될 때까지 다른 건 금하라 하셔서 중경에 머무는 일족을 만나는 것조차 몇 년 뒤로 미루어진 것을요.”
등우의 설명에 태자의 이마가 구겨졌다.
“하루 종일 영화대에만 꼼짝 않고 박혀 있단 말인가?”
“……예, 뭐어…… 그런 것 같습니다.”
“적적할 때 모후를 뵈러 갈 수도 있지 않나. 좌공공 부탁을 받으면 부황을 찾아뵈어 도움을 주거나. 제 일족 볼 때를 빼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단 말이야?”
태자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폐하께오서 아직 어리니 조석으로 문안 올리는 것 외에 동궁 밖으로 나오는 것이 걱정된다 하였기에, 동궁에서 떨어진 내궁까지 가는 것이 금지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사옵니까.”
“저 필요할 땐 이원까지 간 녀석 아닌가?”
“그것은…… 산보의 연장선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등우는 그때 전하가 영교를 때려 부셔서 그렇단 말을 눈으로만 내뱉었다.
“노공공의 도움을 뿌리치다니 마음 심보가 저어돼.”
태자의 말에 등우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것은 폐하 하명도 없으셨는데 함부로 나서는 게 염려되어 그런 것이니, 태자비께서 잘한 것이 아닙니까. 조정의 일에 내궁에 들 이가 나서는 게 걱정된다 하셨다 합니다. 좌공공께서 태자비께서 어리지만 영민하시다 하였는데요.”
등우의 말에 태자가 휙 몸을 돌렸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그 녀석 영화대 안에 박혀서 무얼 하는데?”
“……송구하옵니다.”
태감이 한껏 몸을 웅크리며 답했다. 태자가 다시 큰 걸음을 옮겼다. 영화대를 지키는 궁인들이 태자께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긴 다리가 인사에 대꾸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안에 있나?”
예를 올리는 모장을 향해 태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모장은 예를 올리던 그대로 답을 고했다.
“예.”
“아침에 들어온 후로 쭉 예서 있었나?”
“그러하옵니다.”
시큰둥한 목소리에 여인이 부지런히 답했다.
“식사는?”
“안에서 드시고, 식사 후 전각 안을 이동하시고 좋아하시는 걸 정리하는 것으로 산책을 대신하시었습니다.”
“좋아하는 것?”
문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옆을 돌아봤다.
“비전하께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하시옵니다.”
“책을 보고 있나? 지금도?”
“예. 거의 하루 온종일 책을 보시옵니다. 책을 보시고 보신 것을 정리하시고, 필요하시면 필사를 하시고는 합니다. 고할까요.”
모장이 뿌듯한 얼굴로 답하고, 물었다.
“아침저녁에 문안 가는 것 외에 어디 가는 덴 없고?”
“없사옵니다.”
“누가 부르거나 찾는 것도 없나?”
“없사옵니다. 그는 폐하의 명으로 금지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태자비가 누굴 뵙고 싶다 청할 순 있지 않나?”
“동궁 밖의 상대일 때 정천궁에 청해 폐하가 허하시면 뵐 수 있으나, 태후전에 가는 것 외에 청하신 바가 없습니다. 동궁 안에는 어울릴 만한 또래가 없는 탓인지 따로 찾으시는 이나, 어딜 가고자 하는 일이 없고요.”
“하루 종일 진짜 영화대에만 붙어 있단 말이냐.”
“예…….”
태자의 물음에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답하던 모장이 어린 주인이 너무 활동이 없지 않았나 뒤늦게 깨달았다.
“저 녀석 힘이 넘친다는 제북 땅에서 온 거 아닌가?”
“그렇지요.”
“하루 종일 책만 보다니, 저가 서생인가?”
“책을 보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태자의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모장이 능란하게 말을 고했다.
“한참 힘이 넘쳐서 짐승처럼 돌아다닐 나이잖아?”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모장은 태자의 말에 동의하며, 몇 년 전까지 툭하면 황궁을 월담하던 문제의 인물을 유심히 보았다. 월담보다는 지금의 어린 주인이 나은 듯했다.
“전각 안이 넓으니 움직이는 것이야 충분하옵니다. 최근에는 먼 함월전까지 며칠에 한 번은 꼬박꼬박 가시고 계시기에 활동량은 그것이면 부족하지 않은 듯합니다. 태후전에 가셔서는 쉬지도 않고 태후께 말씀을 올리니 누구와 만나는 것도 그것이면 충분하신 듯합니다.”
“할머님과 꼬맹이가 대화가 되나? 그분이야 무엇이든 다 좋다고 하시고, 아니, 저 녀석이 쉬지도 않고 떠들어?”
“먼 곳에 와 일족이 그리우신 것 아니겠습니까.”
찾아왔을 때와 달리 태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결과적으로 찾는 이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는 말인가.”
“함월전으로 가시옵니다. 찾아오는 것이야 태자께서 와 주시지 않습니까.”
“귀신 나오도록 적적한 곳에서 심심하지도 않다던?”
태자가 조금 질린 얼굴을 했다.
“귀신은 세상에 없다 하셨습니다.”
모장이 굳건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일 오전에 오겠다. 외출 준비를 해 두도록 해라.”
“예? 전하. 외출이라니요?”
“준비하라면 해 둬.”
태자는 고압적으로 말하고는 영화대를 벗어났다. 밖으로 향하며 그는 몇 번이나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전각을 돌아봤다. 전각 안에는 전각처럼 온종일 꼼짝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들어앉아 있었다.
새벽부터 모장은 행복했다. 그녀는 어린 주인의 침전 앞에서 기척을 보내고, 세안 수발을 들었다. 일찌감치 들여 둔 탕조로 모시겠다 고해 올렸다. 사내아이라 향내를 풍기는 향유며 꽃잎을 일체 넣지 못하게 하는 어린 주인을 잘 달래어 며칠에 한 번은 넣어 주어야 한다 설득한 끝에 물 위에 향기 좋은 꽃잎을 흠뻑 뿌렸다.
아침 문안에 입고 나갈 옷을 걸치는 사이, 이곳 공자들이 입는 외출복을 몇 개 가지고 와 색은 무엇이 좋은지 모양은 무엇이 좋은지 은근히 의향을 물었다. 소매와 발목의 통이 좁은 외출복을 선호한다는 아이에게 모장은 아이가 좋아할 법한 외출복을 가져와 색색마다 대어 봤다. 어두운 색이 때 안 타서 좋다는 어린 주인에게 그녀는 비전하는 화사한 색도 잘 어울린다며 조금만 방심해도 때가 탈 법한 밝고 화사한 색을 권했다.
용아는 아침부터 기분이 영 그랬다. 하루의 시작이 평소보다 다소 빨라 조금 멍했다. 묘하게 분주한 모장의 다급한 말들에 떠밀려 머뭇거리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게 몇 번이나 됐다.
사내애라도 씻을 때 향유 몇 방울, 꽃잎 몇 개 정도는 넣어야 좋은 냄새가 난다는 모장의 권유에 혹시 제 몸에 냄새가 나나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실랑이 끝에 꽃잎이라면 좋다고 했더니 소년의 수석궁인이 꽃잎을 한 바구니나 쏟아부었다. 역시 냄새가 나는 게 틀림없었다.
내일은 향유도 넣으라고 해야 하나 용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 모장이 색색의 외출복을 가지고 와 목 아래에 대었다. 빳빳한 옷감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갈 일도 없는데 괜히 옷을 꺼내 와 먼지만 맞게 하는 게 걱정스러웠다. 물론, 모든 고생은 모장의 몫이기 따로 입을 대지는 않았다.
아침 문안을 올리는 동안 용아의 기분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함께 문안을 올리기 위해 영화대 앞에서 소년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용아에게 보냈다. 뭔가 질려 하는 기색도 있었다. 요 근래 별 탈 없었는데 왜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눈치를 주는 건지 짜증이 치솟았다. 똑같이 한심한 걸 보는 시선을 보내 주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힘을 준 눈만 아렸다.
아침 문안은 무탈하게 지나갔다.
“비전하, 너 말이다. 친구는 있나?”
문안을 마치고 나올 때 내내 한 대 쳐 주고 싶은 얼굴로 용아를 보던 남자가 기어코 시비를 걸어왔다. 호칭도 잘못되었고 이어지는 말도 분노를 일게 했다.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무시했다.
재개 걷는 용아의 뒤를 바싹 붙어 걸으며 남자가 말했다.
“대가에 거리가 어떻게 난 줄은 알아?”
사람이 저처럼 다 모자란 줄 아는 모양이다.
용아는 한쪽 입술만 움칫 올렸다가 내리고 다시 무시했다. 이즈음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귀가 나빠 소리도 제대로 못 듣느냐, 질문에 대답도 못 하냐 따위의 고압적이고 으스대는 말이 들려와야 되는데 어째 잠잠했다. 문득 돌아보자 머리 위로 불쌍한 걸 보는 시선이 쏟아졌다. 더불어 한심해하는 기색이 전보다 더욱 선명했다.
별…….
용아는 기분이 확 상했다.
“책 보는 것도 좋지만 방구석에만 박혀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방구석 귀신도 아니고, 안 그래? 상대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게냐. 비전하, 네가 먼저 다가가서, 야, 야. ……저 버르장머리…….”
용아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쌩하니 영화대로 들어가 버렸다. 저 모자란 인간이, 사람을 뭐로 보고? 같은 불손한 생각을 분노하며 하다가 얼른 털어 버리고 안으로 향했다. 불쾌감을 곱씹어 봐야 기분만 나쁠 뿐이니 잊어버리는 게 나았다.
아이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비전하.”
“응.”
“이것으로 하시어요.”
용아는 평화로운 일상을 시작할 셈이었다.
“이것이라니?”
모장은 흰 비단으로 만든 화사한 착수포를 품에 들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이 안고 있는 것은 얼핏 봐도 외출복이었고, 자세히 보면 호화로운 외출복이었다.
“전하와 외출을 하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누가?”
“비전하께서요. 아까 태자 전하와 한참 말씀하시던 것이 오늘 외출하는 것에 관한 게 아니었습니까.”
모장이 선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태자 그…… 전하와? 외출을 해?”
용아가 드물게 소리를 높였다.
“태자께오서 비전하를 찾는 이도, 찾으시는 이도 없어 적적해 보여 염려가 되시어 함께 외출을 하실 요량인 것 같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잘못한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서 상의를 이미 끝마친 내용인 줄 아옵고 따로 아뢰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 오늘 외출은 어렵다 전할까요?”
모장이 쓸쓸한 얼굴로 흰 비단 옷을 팔에 걸며 말했다.
“어딜 간대?”
용아가 경계 가득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소인이 예상컨대 궁 밖을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궁 밖?”
“예. 비전하께서 입궁한 후로 영화대 밖도 잘 나가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그걸 태자께서 아시고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태자 전하께는 어려서부터 글 친구가 계시옵니다. 그분들과 궁 밖에서 이따금 어울리시는데 그곳에 함께 가시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장의 말에서 태자와 관련된 것 중 잘못된 게 몇몇 있는 듯했지만 용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친구라는 자들과 어디에서 보는데?”
중요한 건 방문하는 곳이다.
“궁 밖 친우의 댁에 방문할 때도 있고, 대가에 있는 객잔에 식사를 하러 가실 때도 있고, 세책점에 가실 때도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좋은 문인이나 명사를 초대하거나, 가까운 군영에 시찰을 가실 때도 있고요. 대개는 말을 타러 승명원에 가십니다. 승명원 호수 옆 전각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옵니다.”
모장이 정성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주게.”
작은 손이 불쑥 앞으로 내어졌다.
“소인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머리도 좀 더 올려드릴까요.”
풀물이 들면 절대 빠질 것 같지 않은 새하얀 옷이었다. 모장도 용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용아는 밖으로 나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모장은 태자비가 고귀하고 어여쁘게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대충 입고 한시바삐 나가려는 용아를 붙잡은 모장이 첫 외출을 기념하며 선물을 건넸다. 바깥에서 쓸 금편이 담긴 주머니였다. 금덩어리라면 용아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지만 첫 외출을 기념하며 받은 것이라 남달랐다. 은실로 해당화를 수놓은 어두운 적색 금낭을 받아 들며 아이가 미소를 흩뿌렸다.
“고맙네.”
모장은 마지막까지 매듭의 모양을 살피며 부지런히 말했다.
“태자 전하 말씀 잘 들으시고요. 태자 전하가 이리하자 그러면 오늘만큼은 냉큼 예, 전하 하셔야 합니다. 전하와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비전하 염려되어 외출까지 살펴 주시는걸요.”
“응…….”
“약속하신 거여요?”
“응, 알겠어.”
“다 되었습니다. 나가시지요.”
용아의 첫 출궁이었다.
마차를 끄는 말 달리는 소리가 상쾌하다.
반면, 마차 안은 더없이 고요했다.
첫 출궁이라는 즐거움을 품고 용아는 한달음에 밖으로 나섰지만 영화대 앞에 서 있는, 불쌍하고 한심해하는 시선을 뿌리는 얼굴을 보자 금세 기분이 뚝 떨어져 입 한번 떼지 않고 태감의 안내만 따랐다.
“말은 탈 줄 아느냐.”
긴 침묵을 깬 것은 태자였다.
“…….”
비단을 걷어 창밖을 볼까 말까 갈등하고 있던 어린 얼굴이 남자를 휙 돌아봤다. 기가 막힌다는 시선이었다. 소년이 태어난 땅은 말 타기를 걷는 것보다 빨리 배운다는 제북이었다.
“말 탈 줄 몰라?”
말 없는 불퉁한 침묵에 태자가 다시 시비를 걸었다.
“전하께서는 말 탈 줄 아십니까?”
내도록 다물려 있던 어린 입술이 열렸다. 얄밉고 울화통 터지는 말을 예의 바르게 건네는 입술에 태자가 눈썹을 잔뜩 구기며 웃었다. 오냐오냐하니 못 하는 말이 없다는 꾸짖음을 내리려던 그는 불현듯 자신이 소년에게 던진 질문이 그와 똑같다 싶어 멈칫했다.
“전하. 비전하. 도착하였습니다.”
그새 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해 멈춰 섰다. 태자가 내려도 되겠냐는 뜻을 담아 아이를 돌아봤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순해 보이는 촉촉한 눈망울이 된 어린 얼굴이 사내를 물끄러미 올려 보고 있었다.
“열어라.”
예상해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태자가 기대 가득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밖을 향해 명했다. 문이 열리고 드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등우가 앞서 내린 태자를 향해 말했다. 태감은 말을 한 후 곧장 손을 내밀어 마차 밖으로 내리는 소년을 살폈다. 용아는 괜찮다 말하며 혼자 내려 넓은 땅을 돌아봤다. 풀이 돋은 땅이 끝없이 펼쳐진 것도 좋지만, 시야를 가리는 까마득히 높은 궁벽이 없어 답답함을 주지 않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셨습니까. 곁에 계신 분은 어떤 귀인입니까.”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번엔 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태자의 곁으로 낯선 남자들이 다가와 예를 올렸다.
“모두 일어나라. 왜들 새삼스레. 밖에서는 이럴 것 없다 했잖아. 여기는…….”
태자는 왜인지 쉽게 답하지 못했다.
“태자비 전하이십니다.”
곁에 있던 등우가 얼른 고했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등우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남자가 예를 올렸다. 태자의 떨떠름한 얼굴과 다르게 고개를 숙인 이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용아는 무심한 말투로 대꾸했다.
“일어나세요.”
분위기가 어쩐지 자신 때문에 망쳐진 것 같았다.
“밖에서는 이럴 것 없다. 황족 위세를 부리며 다니겠다고 나온 게 아니다. 그 말은 태자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태자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자와 이목구비가 닮은 사내의 말에 허허 웃는 얼굴의 남자가 맞장구쳤다.
“태자께서 아무리 말하셔도 그것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치한 것을 휘감은 남자가 말했고, 허허 웃는 얼굴이 다시 동조했다.
“첫 인사는 예법에 맞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내 말이.”
넷 중 가장 선한 인상의 사내가 말하자, 허허 웃는 얼굴이 또 끼어들었다.
태자와 닮은 얼굴, 졸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시끄러운 족속.
용아는 빠르게 넷의 정체성을 정립했다.
중경 안에 머무는 황족과 귀족 중 네 사람의 소속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황족과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초에 혼례가 너무 다급하게 잡혀 황친까지 다 익히기에 시간이 없었고, 귀족에 관해서는 듣지도 못했다. 거기다 그쪽으로 용아는 무지하도록 무관심했다.
“나는 밖에 태자의 정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이다. 너희가 첫 인사는 제대로 하는 게 좋다면 태자비에게도 알려 주도록 하마. 이쪽부터 진군왕부의 진양군, 소군왕부의 소양군, 영군왕부의 영양군, 횡군왕부의 횡양군. 어려서부터 나의 글 친구이자, 지금은 동네 친구인 왕공 대신의 자제들이다.”
태자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소개말을 쏟아 냈다.
“진양군을 뵙습니다. 소양군을 뵙습니다. 영양군을 뵙습니다. 횡양군을 뵙습니다.”
용아의 인사에 네 사람이 가벼운 몸짓으로 답했다.
“태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밖에서 편히 친구로 지내고자 간단히 부르고 있다. 이쪽부터 진공자, 소공자, 영공자, 횡공자. 나는 윤공자다.”
태자가 손짓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용아는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꼬이는 것 같았다. 역시 세상에는 황족이 쓸모없이 많았다.
태자와 닮은 얼굴이 진공자. 졸부가 영공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 횡공자. 시끄러운 족속이 소공자.
머릿속으로 정리를 한 용아가 네 공자들의 자기소개를 받으며 손짓으로 답했다. 진양군이면 진양군이지 귀찮게 무슨 진공자인가 싶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너는?”
네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태자가 물었다.
“……용…… 공자라고 불러 주십시오.”
잠시 고민 끝에 용아가 답했다. 저만큼 위에 있는 태자의 얼굴이 용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용아는 드물게 시선을 피했다. 소년은 잘못한 것 없이 떳떳한데 자꾸만 시선이 이리저리 굴려지니 별일이었다.
“용공자는 정말 사내아이요?”
시끄러운 소양군이 용아의 곁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보면 모르냐. 애한테 무슨 존대야.”
“아니 아무리 밖이라도 초면에 막 편하게 말하면 용공자가 기분이 그렇지 않을까.”
“편히 말하십시오, 소형.”
용아는 일단 제일 말을 많이 주고받을 법한 상대부터 기억하기로 했다. 태자비의 겸손을 소양군은 넙죽 받아들였다.
“그래? 용공자가 그리 부탁하면 그러지 뭐. 용공자 몇 살?”
“열셋입니다.”
“아휴. 애기네, 애기. 파릇파릇하다. 좋을 때야! 윤공자가 진정한 공자라면 용공자와 밤에 예의를 지켜 줘야겠어. 아니지, 혼례 치르고 초야를 보냈으니 이미 선을 넘었나?”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질문을 한 소양군만 방긋방긋 눈치 없이 웃고 있었다. 용아는 저도 모르게 태자를 돌아봤다. 소양군이 그런 용아를 여전히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용아를 괴롭히는 또 다른 인간일 뿐이었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안 떼는 소양군을 돌아본 용아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소형께서는 장가가셨습니까.”
“그럼. 아버지가 얼마나 성미가 급한지 2년 전에 강제로 짝을 맺었지 뭐야. 아직 도성 처자들이 나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이 인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처자들이 아저씨를 왜 좋아할까요.”
용아가 진실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떠들었다.
“아저씨라니!”
소양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소형. 나이도 드셨고, 장가도 갔으니 아저씨 아닙니까. 자녀는 없으셔요?”
“용공자 너도 장가갔잖아!”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애기라면서요. 파릇파릇하다고. 소형이 아까 그랬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장가가 아니라 시집간 거예요. 제가 장가를 가면 윤공자께서 저한테 시집온 거게요. 여기 오기 전에 제북의 대가주께서 말하시길 나이 많은 형 마음에 고일 법한 말 하는 거 아니랬습니다.”
용아가 괴변을 무심한 얼굴로 늘어놨다.
“이 형에게 아저씨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고이는 말이야, 용공자!”
“아재를 아재라 하지 뭐라 합니까.”
“아재라니! 용공자, 너…… 아니, 용공자가 버릇이 좀 없구나?”
소양군이 조금 정색을 하며 웃었다. 웃는데 무서운 얼굴이 되다니 그도 범상한 사내는 아닌 것 같았다.
“제가 워낙 귀하게 커서요.”
“그렇지. 용공자가 제북 대가주의 조카라 했지. 우리 용공자, 삼촌 믿고 무서운 게 없겠네?”
소양군이 부드러이 웃었다. 사르르 소리가 날 것 같은 웃음이었다. 소양군이 웃는 순간, 곁에 서 있던 그의 친우들이 질색한 얼굴로 소양군을 주시했고, 하명이 내리기를 기다리던 태자궁의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네.”
용아가 너 뭐하냐는 듯한 얼굴로 담담히 답했다.
“…….”
그때 소양군이 옆에 서 있는 진양군을 휙 쳐다봤다. 진양군 주위의 남자들이 소양군이 웃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진양군이 싸늘한 얼굴로 용아를 내려다봤다. 뒤편으로 물러난 궁인들이 다급히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가지가지 한다.
용아가 뚱하니 둘을 올려다봤다.
너희 뭐하냐.
태자가 흠, 목을 울리며 두 남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괜한 힘 빼지 말고 가자.”
태자가 상쾌하게 말했다. 소양군과 진양군이 혼란한 시선으로 태자를 돌아봤다. 영양군과 횡양군 역시 두 왕공의 후계처럼 의아한 기색을 띠며 용아와 두 공자를 번갈아 봤다.
세상의 일부가 무너지기라도 한 표정이다.
“어서들 가자.”
태자만이 태연한 얼굴이다.
“…….”
태자와 네 남자는 뒤따르는 용아를 수시로 돌아봤다. 용아의 무심한 얼굴은 네 남자에게 관심이라고 없는 듯했다. 심드렁하니 사내들의 뒤에서 걷던 용아가 멈추었다.
“복아!”
은식기가 부딪치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가 반갑게 외쳤다. 남자들이 동시에 용아를 돌아봤다. 용아는 저를 향하는 시선 따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복이가 누구야?”
소양군이 영양군을 향해 속닥였다.
“모르는데. 새로 유행하는 비단 이름인가.”
“그럴 리가 있냐. 비단을 왜 부르냐. 누가 졸부 아니랄까 봐.”
영양군의 대꾸에 소양군이 구박을 해 댔다.
“그거 말인가 보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둘보다 키가 큰 횡양군이 끼어들었다. 소양군도 영양군도 그런 횡양군의 태도에 짜증스러운 표정을 건넸다. 작게 투닥거리던 셋은 문득 고요한 옆을 돌아봤다. 형제로 곧잘 오인 받는 태자와 진양군이 괴상한 걸 본 듯한 얼굴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
“…….”
과연 앞에 해괴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아, 복아, 형 보고 싶었어? 형도 너 보고 싶었어. 예쁜 복이, 잘 지냈어?”
태자와 왕공 후계에게 눈길 한번 안 주었던 어린 얼굴이 잘생긴 말을 붙들고 하하호호 행복하게 떠들고 있었다. 짧은 모 때문에 광택이 아름답게 돌면서, 갈기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준마는 사내들의 시선을 단박에 빼앗을 만큼 근사했다.
“그런데 이름이 복이가 뭐야.”
소양군이 너무하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야, 저거. 산융마 아니야? 산융마?!”
고가품을 알아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양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답을 청하는 영양군의 형형한 눈길에 횡양군과 소양군이 멀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지.”
“산융마는 산융에서만 나는 말 아닌가. 그거 한 필 가지려면 산융 거상한테 혼수를 제대로 꾸린 신붓감을 시집보내야 받을 수 있다고, 영공자 네가 말하지 않았어?”
세 사람의 혼란과 무관하게 닮은 두 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
“…….”
복이와 해후를 끝낸 용아가 돌아섰다. 아이가 웃음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 태자의 앞에 섰다.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쾌활하고 적극적이며 순종적인 얼굴로 용아가 남자를 불렀다.
“윤공자 형님.”
“어.”
태자의 대답이 한 호흡 느렸다. 형님, 하고 부를 때 어린 얼굴의 눈 끝에 화사한 웃음이 접혔다. 방긋 웃는 접힌 눈인 채로 용아가 말했다.
“복이 타도 돼요?”
“그래.”
“고맙습니다. 윤공자 형님.”
용아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는 빠르게 다가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가 버렸다. 복이에게로 돌아간 아이는 복이를 웃는 얼굴로 연이어 부르며 말을 데려온 시중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늠름한 준마에 훌쩍 올라탔다. 아이를 태운 아름다운 산융마가 그림 같은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 나갔다.
함께 온 이들의 주위로 넓게 원을 그리며 달리던 용아는 곧 방향을 바꾸어 비탈 형태의 기물이 있는 구간으로 향했다. 마상 장애물 구간이야 말을 제법 탄다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둥근 고리를 전부 가져가는 욕심 많은 인물은 잘 없었다.
아이는 움켜쥔 고리를 몽땅 왼팔에 끼우고 기물 구간을 내달렸다. 아래에 세워진 막대와 위쪽에 설치된 제각각의 각도로 누운 막대를 향해 용아가 고리를 하나씩 던졌다. 고리가 왼팔에 끼워진 채이고 오른팔로 던져야 했기에, 막대에 고리를 던지는 순간 말고삐를 놓고 달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차칵, 차칵, 던져진 둥근 나무 고리들이 나무 막대에 경쾌한 소리를 퍼트리며 걸렸다.
그때마다 기물 장치 인근에 서 있는 등우와 궁인들이 열심히 박수를 쳤다.
아이는 지켜보는 이들을 돌아보며 웃음을 건네고, 촉 없는 화살대를 몽땅 집어 갔다. 고리 던지기 다음은 막대 던지기였다. 어린애가 들어가 숨을 만큼 커다랗고 아름다운 화병 옆을 내달리며 용아가 화살대를 던졌다. 착, 착, 착, 소년의 팔이 옆으로 뻗을 때마다 화병에 화살대가 꽂혔다. 끝에는 한 번에 두 개, 세 개씩 던졌으나 엇나가는 것 없이 모두 병에 제대로 꽂혔다.
등우와 궁인들이 다시 격하게 박수를 쳤다.
“비전……! 용, 용공자, 훌륭하십니다!”
감탄과 칭찬의 말을 내뱉으려는 등우의 얼굴로 사내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등우는 얼른 호칭을 바꾸었다. 얼굴에 내리꽂히는 삐죽한 시선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았지만 등공공은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며 찬탄의 말을 내뱉었다.
“우리도 그만 오르자.”
태자의 말에 사내들도 각자의 말에 올랐다.
“윤공자 형님.”
기물 구간을 달리느라 저편에 있던 용아가 어느새 바로 곁으로 다가와 남자를 불렀다. 숨결 하나 흐트러짐 없는 해사한 얼굴에 태자는 물론, 네 남자가 당황한 기색을 건넸다.
“어.”
대답이 유난히 짧았다.
“어디로 갑니까.”
“저쪽.”
“연못 옆에 있는 전각까지 가는 거지요?”
아이가 몹시도 공손히 말했다. 조곤조곤 묻는 얼굴은 표정 없이 무심한데, 목소리에 즐거움이 한껏 묻어났다. 만약 아이에게 꼬리가 달려 있다면 풍성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게 여기서 보여?”
소양군이 눈에 힘을 주며 언덕 너머를 바라봤다.
“아까 비탈에 올라갔을 때 봤습니다.”
여유가 넘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물을 통과하느라 정신이 없어야 정상인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혹과 의심을 품은 시선들에 소년은 무심한 얼굴만 건넸다.
“거기까지 가는 거다.”
“네. 윤공자 형님. 저 먼저 가도 돼요?”
“어.”
대답을 하는 남자도, 곁에 있는 사내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어쩌면 얕잡아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네가 빨리 가 봐야 얼마나 빨리 갈 수 있겠나, 라는 생각이 컸다. 태자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용아가 말머리를 스윽 돌렸다. 팔을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아름다운 산융마가 제대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고는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아이가 탄 아름다운 말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빠르게 멀어져 점처럼 작아지더니 언덕을 너머 자취를 감추었다.
“……뭐, 뭐야?”
항상 의젓한 체하는 진양군이 어린애처럼 말했다.
“가, 빨리 가.”
소양군이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을 달렸다. 이어서 영양군과 횡양군과 진양군이 달려 나갔다. 태자가 가장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
윤제는 아이가 윤공자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윤공자 형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게 이상하도록 순종적인 미성이 좀 그랬다. 꼬박꼬박 착하게 부르는 것도 그랬고, 아이가 그 나이답게 구는 것도 그랬고, 자신을 볼 때마다 못날 걸 보는 것처럼 보던 아이가 순하게 구는 것은 더욱 그랬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윤공자, 저거 뭐야!”
언제나 침착한 척 왕공 자제의 위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진양군이 엄청난 속도로 말을 내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사내들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데, 조그만 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건.
소양군이 마지막 자존심으로 여기던 채찍을 꺼내 휘두르며 소리쳤다.
“쟤 황족 아니야?! 황가 혈족이 아니고 저럴 수가 있나?!”
“어려 몸이 가벼워서 그렇지! 저땐 나도 그랬다!”
중경에서 말 꽤나 타는 걸로 알려진 횡양군이 단호히 답했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아프게 두드려 댔다.
“아니야! 저건 다 말발이야! 말! 말 덕분! 장비 능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산융마가 보통 말인 줄 알아!? 우리도 산융마만 탔어 봐, 저런 쪼그만 녀석이 우리 상대나 될 수 있을 것 같아?! 용공자, 산융마를 어디서 구한 거지! 저거 진짜 산융마 맞지!?”
영양군이 용아를 태운 복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복아의 속도가 살짝 늦추어졌다가, 사내들이 성큼 다가오는 순간 다시 확확 멀어져 갔다. 반듯하게 앉아 내달리던 용아가 말 등에 몸을 뉘이듯 기울이며 해맑게 소리쳤다.
“복아, 저기 봐!”
그게 더 빨리 달리라는 뜻인 모양이다.
“…….”
“…….”
아이를 태운 산융마의 속도가 믿을 수 없게도 빨라졌다. 중경에서 첫 기승을 나온 소년을 따라잡아 보겠다고 전력으로 말을 내달리던 사내들이 자꾸만 속도를 높여 가는 산융마를 보고는 애쓰기를 그만 멈추었다. 남자들의 속도가 늦춰지자 순식간에 저만치 뒤처졌다.
전각에 거의 다다랐을 때 용아는 말을 다독여 멈췄다. 어린 발이 파릇한 풀이 돋은 땅에 내려섰다. 푸르릉, 부드러운 소리를 퍼트리며 아름다운 말이 용아에게 애교를 부렸다. 아이는 말의 옆몸을 다정하게 쓸며 웃음을 퍼트렸다. 말이 자신에게 그런 것처럼, 얼굴을 말에게 묻으며 친근함을 표했다.
“쟤네 둘이 사귀나?”
가볍게 달리는 속도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 소양군이 투덜댔다.
“나는 산융마라면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영양군이 진지하게 답했다.
“저 말, 저거 말 아닐지도 몰라.”
진양군이 평소의 성격과 전혀 다르게 엉뚱한 의견을 내뱉었다. 용아는 강건하고 빠른 산융마를 타지 않고 끌며 걷고 있었다. 아름다운 말이 곁에서 걷는 아이에게 얼굴을 드밀며 장난을 걸었다. 궁 안에서 오만하기까지 했던 어린 얼굴이 헤실헤실 웃음을 퍼트리며 장난을 치는 말에게 복이, 복이, 왜 그래, 라고 깔깔댔다.
“왜 말에 안 타고 걷고 있어.”
윤제가 속도를 살짝 높여 아이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가까이로 온 남자를 뒤늦게 인지한 용아는 푸르릉대는 말을 쓸어 주며 답했다.
“복이는 아직 어려서요.”
“어려?”
“아직 제대로 2살이 되려면 한 계절은 더 지나야 돼요.”
태자를 따라 속도를 높여 곁에 다가와 있던 남자들 사이로 침묵이 내렸다. 아직 완전히 장성하지 않은 게 이 정도면, 이보다 나이가 차서 제대로 달릴 수 있게 되면 저 산융마를 얼마나 넘어설까 싶었다.
“말이 어린 것과 네가 걷는 게 무슨 상관이야. 말이 너 정도를 무겁다고 생각할까 봐? 전각이 바로 보여도 생각보다 멀다.”
“괜찮아요, 윤공자 형님. 제북에서는 어린 말을 기를 때 기승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만큼 말에게 홀로 걷거나 뛰어놀게 합니다. 복이랑 같이 걷고 싶기도 하고요.”
용아의 복이라는 부름에 아름다운 말이 푸르릉 소리를 퍼트렸다. 마치 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아이의 말에 태자가 속도를 더 늦추자, 주위의 사내들도 속도를 늦췄다.
“용공자.”
영양군이 말에서 내려 용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예, 영공자 형님.”
“용공자네 복이 내년에 장가 보는 게 어때? 영왕부에 산융마 혈통이 섞인 암말이 몇 있다네. 봄에 잠깐 한 계절만 보내 주면 산융마 망아지 한 마리 돌려보내 줌세. 보통은 암말 주인이 망아지는 주지 않지. 나니까 준다는 거야. 봄에 장가올 때 지참금으로 미리 금도 스무 관 주지! 휴, 이러면 안 되는데. 열기국에서만 나는 홍옥도 주겠다! 내 인심 어쩔 거야. 어때?!”
영양군이 분위기 있는 외향에 어울리지 않게 뒤로 갈수록 과도한 자화자찬을 해 댔다. 입 다물고 말 시작할 때는 제법 근사한 사내처럼 보였는데, 말을 할수록 묘하게 깨는 남자였다. 용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왜!”
“싫으니까요. 영공자 형님은 말씀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왜, 왜? 내가 말할수록 장가보내기 싫어져?”
“복이는 장가가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영공자 형님은 말씀을 하실수록 못나 보입니다. 가만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용아가 벙찐 영양군의 팔을 손으로 툭 치고는 말에 올라 훌쩍 가 버렸다. 뒤따르던 사내들 사이에서 큭, 억눌린 웃음이 올랐다. 태자였다.
“용공자가, 쟤가 버릇이 없어. 이해해라.”
윤제는 용아가 치고 간 영양군의 팔을 다독이고 아이처럼 훌쩍 가 버렸다. 산융마는 아니지만 태자의 말 또한 훌륭한 것이었다.
“이야. 힘내, 친구야.”
소양군이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역시 용아가 치고 간 영양군의 팔을 툭 치고 가 버렸다. 횡양군이 뒤이어 그곳을 도닥도닥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나쁜 뜻은 아닐 거다.”
정신을 못 차리는 영양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진양군이다. 진양군은 팔을 뻗는 성의도 보이지 않고, 모든 이가 치고 간 곳에 흘깃 시선을 내렸다가 올리며 입을 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영양군은 진양군마저 훌쩍 가 버리고 홀로 남게 되었을 때야 상황을 파악했다.
“야이……!”
꼬맹이에게 동조하는 친우들을 아득아득 이를 갈며 욕을 하는 한편, 재빨리 말에 올랐다. 그가 제시한 뭐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고민하며 다음에 무엇을 달리 제시할까 골몰에 잠겼다. 어린 태자비 전하, 용공자는 괜찮은 말 친구가 될 듯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를 탔다. 고요한 마차 안에 남자의 목 울리는 소리가 올랐다가 사그라졌다. 흠. 소리의 잔향이 사라지고, 잘난 체하는 듯한 목 울림이 잊힐 만하면 다시 흠, 소리가 울렸다.
복이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것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용공자.
태자의 한마디에 용아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에 다음에 또 오면 돼, 라는 위로 아닌 위로가 내렸다.
다음에 언제 와요?
아이는 괜한 자존심 부리지 않고 궁금한 것을 공손히 여쭈었다.
사흘 안에는 올 거다.
윤제의 대답에 너무 좋다고 말하며 마차에 탄 후로 내내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에 올 일정에 대해 샅샅이 캐물을 줄 알았던 아이는 영양군의 청탁을 이미 아는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윤제는 창을 보고 있는 아이의 옆얼굴을 틈틈이 보며 말을 던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양군의 청탁 때문은 아니었다.
용아는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남자를 못 본 체했다. 마차에서 내려 가마에 오를 때까지 머리꼭지로 내리는 집요한 시선에 딴청을 부렸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모장의 마중을 받으며 던지듯 예를 올리고 후다닥 도망치듯 가 버렸다.
정천궁 안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 낮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와 태자비가 올리는 저녁 문안이었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 하루 간 강녕하셨나이까.”
영화대 앞에 태자가 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용아는 순간 멍했다. 저녁 문안을 올리러 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드물게 시무룩해졌다. 전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는 용아를 보며 씨익 악당처럼 웃는 얼굴을 보고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빌어먹을.
용아는 눈을 착 깔고 정천궁으로 직행했다. 예법에 맞춰 예를 올리고, 부황과 모후의 염려와 애정이 담긴 말을 듣고 얼른 다시 예를 올리고, 후딱 몸을 빼나왔다. 전각을 빠져나오는 소년의 뒤로 평소라면 별 관여하지 않을 키가 큰 사내가 바싹 붙어서며 걸었다. 아이가 남자를 피하는 것처럼 몸을 틀었다. 아이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지만, 남자가 단 몇 걸음 만에 따라잡았다.
낮은 목소리가 용아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화아야.”
뒷머리에 낚싯바늘이 걸려 당겨진 것처럼 용아의 머리가 움찔했다. 그게 누구냐, 라는 뜻이 담긴 얼굴이 윤제를 올려다봤다. 이미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났는데,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참으로 아이다웠다.
“…….”
정색한 얼굴에 대고 남자가 말했다.
“용용이는 좀 그렇지 않느냐, 화아?”
잔뜩 위해 주는 말인데 듣기에 몹시 거슬렸다.
“나는 용…….”
“용아가 되면, 화아도 되는 거지. 안 그러냐, 화아.”
급하게 말하려는 얼굴에 대고 윤제가 꼬박꼬박 화아라 부르면 말을 건넸다. 용아는 온몸에 소름이 오르는 걸 느끼며 제 이름에 꽃 화(花) 자를 넣은 집안 어른들께 잊고 있던 분노를 떠올렸다.
“화, 화 자는 사촌 아우와 돌림자입니다. 제 이름은 용아입니다.”
“네 사촌 아우를 내가 볼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 않겠냐, 화아. 그리 용이가 하고 싶으면 용용이라고 불러 줘?”
“차라리 그러십시오!”
사내애 이름에 꽃 화 자를 넣은 가문 어른들의 죄가 컸다. 질색하는 용아를 보며 윤제가 웃음을 퍼트렸다. 남자가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단호히 거절했다.
“부르는 내가 싫다.”
틀림없이 싫어하는 자신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빌어먹을 태자.
용아는 뭐라고 하고 싶은데, 어떻게 강제할 방법이 없어서 살살 웃는 얼굴을 눈이 아프도록 쏘아 올려 보기만 했다. 약이 올라서 괴성이 내질러질 것만 같았다. 친구나 아우였다면 한 대 때려 줬을 것이다.
“듣는 제가 괜찮다지 않습니까.”
“부르는 사람이 우선이지. 내가 부르는 거 아니냐, 화아. 헌데, 너 내 이름 자는 아느냐.”
“알 게 뭡니까! 물러갑니다.”
용아가 홱 몸을 틀며 빠르게 걸었다.
“화아.”
분주히 걷는 등 뒤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퍼졌다. 곧 온 동네에 다 소문이 나겠구나, 싶었다. 황가에 신부로 시집올 거라 이름이 그 모양이냐는 말을 하겠지란 생각을 하자 다시 분노가 들끓었다.
“왜요!”
용아가 무엄하게도 태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부르지도 못하냐.”
남자의 무해한 말에 용아는 감정을 내려앉히고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 하실 말이 뭡니까.”
“없다.”
역시 그냥 놀리려고 이러는 거였다. 자신을 괴롭히고,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게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저만치 위에 있는 윤제의 얼굴을 후우, 숨을 침착히 내쉬며 바라보던 용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응, 화아. 왜 부르느냐.”
꼬박꼬박 답해 주는 게 절대로 약 올리려는 거다.
“태자 형님. 황궁에 와 뵈니 새삼 참 못나셨습니다.”
용아가 잘난 얼굴을 향해 또박또박 말을 전하고 쌩하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등 뒤에서 태자의 품격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외침이 날아들었다.
“야!”
용아는 못 들은 체했다.
“화아, 인마!”
커다랗게 울리는 저음이 부르는 소리를 알 수 없었다. 어휴, 저 버르장머리. 뒤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용아는 꿋꿋이 걸어 나갔다. 험악한 소리가 들려와야 할 등 뒤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아가 저도 모르게 웃는 돌아보자,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내일도 말 타러 간다, 화아.”
내내 치솟았던 발끈함이 왜인지 발동되지 않았다.
“네……? 네, 윤공자 형님.”
기묘한 감동은 짧디짧았다.
“화아, 너 이름이 약점이구나. 아, 화아가 아니라 용용이랬나. 그냥 내 마음대로 부르마.”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얄밉게 이어졌다. 분노를 외칠 틈도 없이 긴 다리를 가진 사내가 저 멀리로 가 버렸다. 용아는 분노로 소리 없이 부들부들했다. 한 걸음을 걷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용용이에 부들거리고, 한 걸음을 더 걷다가, 씨익 웃는 입술로 화아, 라고 놀림 같은 부름을 떠올리고 부들부들했다. 약 오름으로 부들대는 밤이 천천히 깊어 갔다. 부디 내일은 별 탈 없기를 바라며 잠을 청했다.
태자의 놀림은 끝이 없었다.
“용용이 일어났느냐.”
아침부터 여지없이 일격을 당했다. 용용이의 아침은 울컥울컥했다. 이름 같은 걸로 장난을 치는 건 어린애나 하는 짓이었다. 머리로 다 아는 데도 화가 났고, 분노가 일었고, 어떻게든 반격을 하고 싶었다.
유치한 인간.
오늘은 아침 문안을 드리고 점심이 지난 후에 나가기로 했다. 오후에 한바탕 말을 타고, 다점에도 가고, 저녁도 먹고 돌아가는 일과였다. 궁을 나오기에 앞서 저녁 문안을 대신 할 서편을 올렸다. 입궁한 시일도 꽤 되었으니 가끔이라면 글로 문안을 대신해도 괜찮을 때가 되었다.
“화아.”
고요한 마차에 둘만 남겨지자 다시 약 올리는 말이 건네졌다. 태자는 사내애 이름에 꽃이 들어가는 게 어떠냐며 상처를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투로 말을 이었다.
덜 큰 게다.
용아는 창밖 보기에 몰두하려 애썼다. 복아를 타고 달리는 순간만을 간절히 고대했다. 말을 달릴 때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오늘도 산융마는 아름다우며 강건했다. 그리고 빨랐다. 아주 빨랐다. 영양군은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는 듯한 우아한 산융마를 사랑에 빠진 사내처럼 바라봤다. 어제 태자와 헤어지기 전 긴히 부탁한 내용이 꼭 이루어지도록 다시 청탁을 넣기로 마음먹었다.
“윤공자, 내가 말한 거 어떻게 됐어?!”
“몰라.”
윤제가 무성의하게 말했다.
“쟤는 왜 어제보다 더 빠른 거야!”
어제와 달리 가진 말 중 제일 혈통 좋은 말로 바꾸어 가지고 오게 한 소양군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역시 산융마!”
영양군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산융마 찬양을 이어 갔다.
“어제보다 훨씬 더 빠른데……?”
횡양군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도 어제와 달랐다. 분명 횡군왕부에서 가장 좋은 말일 터였다. 내심 말은 않지만 중경에서 제일 말 잘 타기로 소문난 횡양군은 오늘 아이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작정인 듯했으나, 시작과 함께 용아를 태운 복이가 어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버렸다.
“당연하지, 저건 산융마야! 내 눈은 틀림없다! 너희가 다들 말 갈아탔지만 산융마 이하는 무의미하지! 산융마가 아니면 산융마를 이길 수 없어!”
영양군이 잔뜩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외치며 내달렸다.
“그렇게 좋은 거면 구해 와 봐! 이 녀석이 중경에서 제일 빠른 말이라고 나한테 금편을 몇 개나 뜯어 갔냐!?”
소양군이 영양군을 열렬히 구박했다.
“산융마 이전에는 네 말이 제일 빨랐지!”
“아, 시끄러. 산융마. 산융마. 그놈의 산융마. 산융마가 중경에 온 순간 내 말은 더 이상 제일 빠른 말이 아니게 됐다, 이 말 아니야?!”
“그거야!”
소양군이 성이 난 얼굴로 영양군을 쏘아보고 앞질러 나갔다. 뒤이어 횡양군이 바람을 일으키며 영양군을 지나, 소양군의 곁에서 나란히 달렸다. 횡양군의 위협을 받은 소양군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산융마 빼고 중경에서 제일 빠르다며!”
영양군이 속도를 유지한 채로 혼잣말을 궁시렁댔다.
“말이랑 한 몸 같은 인간을 어떻게 이기냐? 바보.”
윤제가 영양군의 곁으로 다가왔다.
“영공자.”
태자와 영양군, 진양군이 나란한 선상에서 내달렸다.
“윤공자. 용공자에게…….”
윤제가 영양군의 간곡한 말을 듣지도 않고 수락했다.
“알겠다. 산융마 망아지가 태어나면 내게 첫 번째로 팔아라. 예약한 거다, 잊지 마.”
태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속도를 높여 달려 나갔다. 산융마를 타지 않고도, 중경 제일의 말을 타지 않아도,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다만 산융마를 탄 소년이 너무도 빨랐다.
말을 타고 달리며 뒤처진다는 것, 내가 탄 말이 가장 빠른 말이 아니라는 것은 사내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가게 하는 사안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꽤나 예민한 문제였다.
“나는 두 번째로 예약. 두 배로 줄게.”
태자가 달려간 후 진양군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튕기려는 영양군의 얼굴을 본 그는 튕기는 말을 듣기도 전에 더 높은 조건을 제시하고 훌쩍 가 버렸다. 말이란 것은, 그러니까 사내에게 아주 예민한 문제였다.
대답도 안 듣고 가는 진양군의 등을 보며 영양군이 작게 투덜거렸다.
“저…….”
인상을 그리던 얼굴이 곧 천천히 풀어졌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질풍처럼 달린 후 전각이 보일 즈음 내려 선 아이가 아름다운 산융마를 웃는 얼굴로 쓸며 걷고 있었다. 산융마의 우아한 갈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모양 좋은 골격이 걸을 때 유독 돋보였다. 오늘도 산융마는 몹시도 빠르고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역시 산융마를 가지는 것은 옳고, 또 옳았다.
중경의 다점은 고즈넉했다. 짙은 색 비단이 내려진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자, 다점의 일꾼이 다가와 맞았다. 시끄럽기로 제일인 소양군이나, 금전에 있어 예민한 면모를 지닌 영양군이 나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일행을 이끌며 일꾼을 상대한 것은 진양군이었다.
“오셨습니까.”
고아하게 차려입은 여일꾼은 손끝 매무새까지 고왔다.
“이 층으로 다오.”
“송구합니다. 선객이 계십니다. 안채에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진양군이 모두를 돌아보며 의견을 묻고는 거부하는 얼굴이 없는 걸 확인하고 대꾸했다.
“그러지.”
평복을 하고 있다지만 진양군은 평범한 인상이 결코 아니었다. 함께 다니는 다른 이들도 어디에 두어도 혼자 튈 인상들이었다. 그런 일행을 상대로 우아한 일꾼은 능숙하기까지 했다.
“모시겠습니다.”
각자 적당히 자리를 찾아 앉자 주문을 받았다. 이런저런 호화로운 차 이름이 귓가에 오갔다. 진양군은 본인의 것을 가장 먼저 시키고, 이어 네 남자의 것을 확인하며 주문했다. 그가 주문을 하는 사이사이 소양군과 영양군이 용아에게 중경의 다양하고 우아한 차를 소개했다.
“소공자께서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고아한 일꾼이 용아에게 특별히 말을 건네었다.
“저는 배를 달인 물로 하겠습니다.”
온갖 호화로운 차가 다 있는 중경 최고의 다점이었다. 그곳에 와 배를 달인 물을 청하는 아이의 주문에 한 탁자에 앉은 사내들이 곤란한 것을 본 듯한 시선을 던졌다.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고아한 일꾼만이 넉넉한 얼굴로 용아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용공자야.”
입을 쉴 줄 모르는 소양군이었다.
“예, 소형.”
“너, 아니, 우리 용공자는 취향이 약간 남다른 것 같다?”
“소제가 그렇습니까.”
탁자에 놓여 있는 물을 말시며 용아가 답했다.
“여기가 되게 비싼 다점이야.”
“그렇다면서요. 탁자도 으리으리하고, 창문도 으리으리하고, 입구도 고상한 게 좋은 곳 같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여기 와서 겨우 배 물 마시니?”
“배를 달인 물이 나쁜 겁니까.”
용아가 선한 얼굴로 비딱하게 대꾸했다.
“내가 언제 배를 달인 물이 나쁘댔어! 에끼! 딴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어. 이 형님의 말씀은 이런 곳에 와서는 잘 마실 일 없는 차를 마셔 줘야 하지 않냔 말이지. 궁에서도 손이 많이 가 잘 마실 일 없는 눈이 호강하는 화차도 종류별로 있는 곳이야.”
소양군이 열변을 토했다.
“네…….”
아이가 열의 없이 끄덕였다. 소양군은 고요히 괴로워했고, 지켜보는 이들은 자신과 부친의 다툼이 타인의 눈에 저리 보이겠거니 쓸쓸히 짐작했다.
“언젠가 고얀 고집 때문에 후회할 것이다.”
부친이 권유 끝에 협박을 할 때도 꼭 저것과 같았다.
“저도 고심하여 고른 겁니다.”
용아의 말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탁자에 앉은 남자들은 아이의 말을 조금 이해했다. 그럴 때가 있는 법이었다.
“네 취향 이상해.”
소양군이 끝내 막말을 했다. 그도 부친과 같았다. 말을 하다 듣지 않는다 싶으면 기분 나쁘게 훅 찌르고 폄하하는 게 보기에 흉했다.
“배를 달인 물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영양군이 불쑥 동조했다.
“본인 좋아하는 것 마시게 둬라.”
횡양군이 사람 좋게 웃으며 용아를 두둔했다. 그는 소양군이 본래 취향이 편협하니 용공자는 신경 쓸 것 없다고 다정하게 덧붙여 말하기도 했다. 용아는 소양군의 속이 뒤집어지게 다 안다며 괜찮다고 답했다.
“아니. 배 달인 물은 됐다. 용공자 네 말 산융마냐?”
소양군이 삐쭉한 눈을 음습한 내리깔며 말했다.
“음…….”
아이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영공자가 네 말 산융마라더라. 그래서 영군왕부 암말에게 잠시 장가보내라고 한 거잖나. 용공자 네가 거절한 것 잊었느냐.”
소양군이 성격 급하게 떠들어 댔다.
“아마.”
아이가 말을 끌었고, 같은 탁자에 앉아 있는 남자들 모두가 눈을 빛내며 아이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마?”
“맞겠죠, 뭐. 저야 말을 압니까.”
용아가 손사래를 치며 대충 우물댔다.
“네 말인데 왜 몰라? 형이 묻는데 성의 있게 답하지 못하겠어? 쪼끄만게. 형님이 묻는데 성심껏 답해야지.”
소양군이 최고로 못난 짓을 해 보였다. 영양군과 횡양군이 시선을 회피했다.
“쪼끄마니까 뭘 모르나 보죠.”
아이의 말을 심정적으로 모두 동의했으나, 다그치는 소양군 또한 이해가 되었다.
“용공자는 버릇이 없어.”
내내 침묵하던 진양군이 끼어들었다. 아이가 오기 전에 여기서 제일 버릇없는 인사의 말에 모두가 휘둥그레 한 시선을 보냈다. 소양군 마저 잠시 비껴 뜬 눈으로 진양군을 바라봤다.
“복이는 하후가 가주 마방에서 태어난 말입니다. 하후가 가주의 마방에는 순혈 산융마가 해마다 새로 들어오죠. 산융과 하후가는 형제처럼 지내니 말입니다. 산융 외에도 좋은 말이 많기로 유명한 반중, 완국, 연국 여기저기서 말을 보내옵니다. 하후가 가주 마방지기는 산융마 혈통을 유지하면서 다른 곳에서 온 준마들의 장점을 담아 오랫동안 관리해 왔습니다. 겉보기에는 산융마지만 복이는 그럼, 정확히는 산융마라고 하기 어렵겠죠? 하후가 가주의 마방의 말이죠. 가주의 마방에서 태어난 산융마들은 매해 들어오는 일반적인 산융마보다 키가 크고, 광택은 더 우수하고, 발바닥이 튼튼해 바위로 된 지반 위도 잘 달리고, 갈기는 길지만 꼬리는 약간 짧고 풍성합니다. 설명 더 해요?”
얼이 빠진 것 같은 모두를 향해 용아가 투덜댔다.
“그거 말고 장점이 더 있어?”
영양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날씨를 크게 가리지 않고, 사람 태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산융에서 온 산융마들과 다르게 사람도 좋아합니다.”
“아니, 그런 엄청난 말한테 이름을 복이라고 지어 줬단 말이야? 대체 이름 누가 지어 준 거야? 너냐.”
소양군이 오랫동안 하려고 준비해 온 말을 잽싸게 내뱉었다.
“복이가 왜요?”
용아가 당당하게 정색을 했다.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복이 뜻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다른 거 좋은 거 많잖아.”
“복될 복에, 빛날 희, 빛나는 복, 좋잖아요?”
용아가 으스대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복이 정식명이 ……복희야?”
소양군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고, 한 탁자에 둘러앉은 다른 이들의 표정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은희 아들이니까!”
“어미 말 이름은, ……은희야?”
숨 쉴 틈 없이 장점을 늘어놓을 수 있는 늠름한 산융마의 친근한 이름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윤제였다.
“은희 이름은 누가…….”
남자는 말을 하다 말았다. 용아가 말보다 빠르게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이 지었음을 알려 왔다.
“제가 지었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무척 심각해졌다.
“용공자, 너는 네 이름 때문에…….”
용아가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입술을 손으로 다급히 눌러 막았다. 동그랗게 치뜬 눈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입술이 막힌 것은 남자이고, 입술을 막고 있는 것은 소년인데, 소년은 제 입술이 틀어 막힌 것처럼 도리질만 연방했다.
작은 손을 떼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금방 다시 막힐 것 같아 윤제는 하지 마? 라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내젓고, 격렬하게 끄덕이는 소년을 따라 알겠다 라며 함께 끄덕였다.
모두의 관심이 소년의 이름으로 옮아갔다.
“태자가 뭐가 그렇게 입이 가벼워요?”
용아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투덜거렸다.
“태자는 말도 못 하나.”
입술이 틀어 막힌 채로 남자가 우물거렸다.
“말만 해.”
때마침 고아한 일꾼이 차를 가지고 왔다. 용아는 부릅뜬 눈으로 윤제를 주시하며 남자의 차를 재빨리 앞으로 가져다줬다.
“고맙다.”
남자가 보란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서 드세요, 윤공자 형님.”
소년이 윤제에게 차 마시기를 강권했다.
“마신다고 말 못 하냐.”
“마시는 순간에는 못 하겠죠. 여기요.”
용아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아한 일꾼에서 마시고 먹을 것을 줄줄이 불러 주며 더 가져다주기를 청했다. 모두 남자의 몫이었다.
고아한 일꾼이 웃으며 곧 가져다주겠다며 떠나갔다.
“복이 형제는 없어? 걔 이름은 뭐냐.”
“옥희입니다.”
질문을 던지고 노려보는 눈에 남은 차를 마시려던 윤제는 그만 차를 뿜을 뻔했다. 용아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것도 용공자 네가 지었냐?”
“네. 이부동생이 생길 거라 그 아이들까지 다 지어 뒀습니다.”
“뭐라고……?”
“순희랑 춘희예요.”
“진짜 악취미다.”
짧고 강하게 던지듯 말을 내뱉은 윤제가 아이의 배를 달인 물을 빼앗아 마시며 눈썹을 꿈틀댔다. 그걸 보며 다른 사내들 역시 침잠한 얼굴로 자신의 차를 들이켰다.
용아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만 홀짝였다.
최근 모장의 하루는 착수포로 시작해 착수포로 끝났다. 팔다리의 통은 좁고, 몸통 옷자락 끝은 넉넉해 움직일 때 흩날리는 멋이 있는 착수포는 활동에 좋은 외출복이었다. 사냥 가거나 말을 타러 갈 때 입는 게 보편적이지만, 대가에 놀러가 입고 있어도 거슬리지 않게 만드는 게 모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었다.
여인의 하루는 앞으로 입고 나가도 좋을 착수포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실 한 올, 한 올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것을 가려냈다.
옷을 보관하는 전각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여인의 뒤에 살며시 인영이 어렸다.
“그것 입을 수 있잖아.”
“아니 되옵니다.”
“내가 볼 땐 괜찮다.”
그녀만 볼 수 있는 작은 흠으로 치워지는 착수포를 도로 제자리에 넣는 어린 손과 실랑이가 일었다. 언제나 어린 주인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 하는 모장이지만 착수포에 대해서는 타협을 몰랐다.
“소매 자수에 실이 날렸고. 보십시오, 여기 수에 색이 다른 실이 잘못 들어갔습니다. 이런 건 못 입습니다.”
“멀쩡한데.”
“아니 된다면 아니 되는 줄 아셔요. 비전하께 이런 걸 입혀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모장이 아주 엄격한 상궁마마님처럼 말했다.
“난 괜찮아.”
요즘 모장뿐 아니라 영화대 궁인들 모두가 옷 만들기와 수놓기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좀 무서울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태자 전하와는 나가서 잘 지내시지요?”
“그냥저냥.”
용아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태자지만, 밖에 나가 가장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복이었다. 태자와 둘이 있을 틈은 거의 없고, 둘이 따로 말을 잘 하지 않으며, 둘만 있을 땐 오히려 침묵하게 됐다.
최근 가장 많이 용아와 떠드는 인물은 태자가 아니라, 소양군이었다. 그다음은 복이 장가보내기 모임의 주최자인 영양군이고, 체감상 가장 많이 말을 주고받는 것 같은 이는 진양군이었다. 앞선 두 사람과의 투닥거림과 달리, 마지막 인물과 말을 하고 나면 머리에 열이 오르고 분노가 치밀었다.
진양군은 사사건건 용아에게 시비였다.
후궁의 인물이 이리 밖에 돌아다녀도 되는가. 어린 게 버릇이 없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라. 표정은 말을 잘 듣는 척하나 진심이 없는 가식적인 아이. 좋은 말 가졌으면 다냐. 네가 말 잘 타는 건 전부 말 덕분이라고 하더라. 네 기마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진양군과의 시시한 다툼 덕분에 태자와 덜 싸우는 기분이었다. 곱씹어 보면 다독이는 척하며 더 괴롭히는 것 같기도 했다.
용용이는 친구가 없다. 복이라도 만나야지. 용용이는 원래 버릇이 없었다. 말을 듣긴 듣는다, 들으니 꼬박꼬박 상대의 말을 죄 격파하지.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어딘가. 네 말이 제일 좋은 말이다, 사내는 가장 빠른 말 가졌으면 다 가진 것. 제아무리 빠른 말 가져도 기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빠르지 않다. 검증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니 네가 뭘 해도 다른 걸 해내라고 할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응.”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독려하는 모장의 말에 용아가 성의 없이 답했다. 모장이 그런 아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소년은 손을 팔랑여 볼일 보라는 뜻을 전했다.
“왕공 자제분들과도 잘 지내시지요?”
모장의 부드러운 말에 소년이 솔직히 답했다.
“뭐. ……진양군과는…… 사이가 나빠.”
새로 만든 착수포 중 취할 것과 더 추가가 필요한 것으로 가리는 과정으로 넘어간 모장이 손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봤다. 용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살짝 구긴 얼굴을 내저었다.
“태자 전하보다 더요?”
모장이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와 별로, 그렇게까지, 크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잖아?”
용아가 드물게 머뭇머뭇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이의 말에 모장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영 동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전하하고 보다 더 나빠. 싸워. 짜증 나.”
용아가 볼을 불퉁하게 키우며 툴툴댔다.
“태자 전하의 친구분인데 좋게, 좋게 받아 주셔야죠.”
“됐어. 괜찮아.”
“진양군 드릴 옷이라도 한 벌 지을까요?”
모장의 다정한 말에 용아가 못 들을 소릴 들었단 얼굴로 되물었다.
“진공자 형한테 옷을 왜 줘?”
“사이를 유하게 할 때 적당히 베푸는 것도 방법입니다.”
여인의 어르는 말을 용아가 단호히 거부했다.
“됐네. 그럴 거 없어. 그치들이 바라는 건 복아의 장가야. 복이는 겨우 두 살인데. 사람이란 정말 잔인한 것 같아. 숙부가 내게 복이를 주기로 결정했을 때, 제북 장로회에서 복이를 거세마로 만들려고 했어. 그러면 더 튼튼해진다나. 더 오래 살 거라면서 저희들 좋은 소리만 해 댔지. 복아가 귀한 품종이라 제북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는 걸 내가 모를까 봐. 다행히 복이의 소중한 걸 지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찍 장가가기를 바란 것도 아니야…… 모르겠다. 나보고 너만 빠른 말 타려고 나이 찬 수컷 장가도 안 보내는 못된 주인이래. 친구 없어서 말한테 집착을 부리냐고 막말을 하잖아. ……못된…….”
소년이 억울함을 표했다.
“허면 비전하께서는 복아를 언제쯤 장가보내실 계획이십니까.”
“글쎄. 복아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용아의 대답에 모장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황궁 마방에서도 특별한 말인 태자비의 산융마는 독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홀로 있는데 좋은 친구를 만날 일이 언제나 생길까 싶었다.
“좋은 친구가 생기게 왕공 공자분들의 말씀대로 놀러 보내 보는 건 어떠셔요.”
“영공자 형은 할 수만 있다면 영군왕부 마방에 있는 암말들을 전부 복아와 짝짓기 시키려 들 거야. 그치들은 좋은 말을 가지겠다는 거에 제정신이 아니야.”
“비전하. 좋은 말을 쓰셔야지요. 복아가 노총각이 될까 형님 공자분들이 걱정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장은 무엇이든 좋게 말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하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비밀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다.
“내가 점찍어 둔 복아 짝이 있기는 해.”
“어떤 귀한 말입니까?”
“아마 안 될 거지만. 은록이라고 복이 어미 말과 같은 때에 태어난 말인데. 은록이는 정말 멋진 수말이야. 마방지기 말로는 씨수말로 쓰게 될 거라 했으니까 지금쯤 자식도 여럿 보았겠지. 은록이 딸 중 하나를 빼돌릴 수 있으면 최고잖아. 여기로 오기 전에 정화에게 복아와 짝지어 주게 은록이 딸 하나만 보내 달라고 했는데, 아마 안 될 거야. 그나마 복아는 수말이라 보내 준 거고, 가주 마방의 산융마 혈통이 섞인 암말은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정화는 거기다 눈치도 없고, 변변치가 않은데다 꼬맹이 중에 꼬맹이라 그런 걸 보내 줄 힘이 없어.”
“훌륭한 계획이지 않습니까. 이 계획을 형님 공자분들께 말씀드려 보시지요?”
“안 돼.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만 주면 어떡해. 이걸 알려 주면 제북으로 가서 말을 훔쳐 오자고 할 사람들이야. 산융마를 가져 보겠다고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용아가 무심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언질이라도 해 놓으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됐다니까.”
용아는 되었다 하면서도 숙부가 복이 짝으로 말 한 필 보내 주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듯한 말을 웅얼거렸다. 모장은 고민하는 어린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퍼트렸다.
“예까지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오늘은 나가지 않는다 알려 주려고 왔네.”
“함월전에 드시는 날이지요.”
모장이 하던 일을 손에서 내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채비하셔야죠, 라고 말하며 문을 여는 그녀에게 혼자 할 수 있다, 용아가 말했지만 들어 주지 않았다. 황실 웃어른을 뵈러 갈 때는 반듯하고 정갈해야 한다로 시작되는 모장의 말이 오늘도 되풀이되었다. 용아는 알겠다, 응, 응,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모장은 만사에 나른한 시선을 건네는 우아한 소년을 곱게 단장해 주며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말을 정성들여 아뢰었다.
짧은 봄은 흔적도 없이 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을 지나, 어느새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었다. 그래도 한낮에는 쨍한 햇살이 내렸다.
영화대를 나서는 용아의 얼굴로 화사한 빛이 쏟아졌다. 소년의 옆과 뒤에 촘촘히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순간 우르르 물러나고, 무방비한 얼굴이 의문을 품었을 때.
“웍!”
머리 위에서 유치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아악!”
용아가 허술한 괴롭힘에 답삭 걸려들었다. 놀라 소리치는 아이의 외침에 주인의 곁을 원치 않게 벗어난 궁인들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철없는 키득거림이 바람결에 떠돌았다.
“뭘 그런 걸로 놀라.”
철모르는 저음이 용아에게 건네졌다.
“윤공자 형님.”
용아는 엄격한 얼굴로 예법을 늘어놓거나, 무심한 표정에 차가운 태도로 화를 내지 않고, 또래 아이다운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가 차근차근 화를 꾹 가라앉혔다. 별로 안 친하지만 집 밖에 데리고 나가 주는 형에 대한 예우 같은 것이었다. 소년의 얼굴 가득 그런 말이 떠 있긴 했다.
저 못난……!
윤제는 어린 얼굴에 오른 투덜거림을 모른 체했다.
“그래.”
놀라움이 가시고 나자 의아함이 들었다.
“오늘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안다.”
“헌데 여기서 뭘 하십니까.”
용아의 얼굴에 왜 필요도 없는데 왔냐는 불만이 뚝뚝 묻어났다. 자신을 귀찮은 것 취급하는 아이를 비스듬한 눈길로 보던 남자가 친한 척 굴어 댔다.
“태후전에 가는 것 아니냐?”
“예, 갑니다.”
“너 앞세워서, 이 몸도 오랜만에 할머님께 문안 올릴까 한다.”
남자의 말에 용아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전하.”
아이가 걸음을 옮기며 태자를 불렀다.
“무섭게 왜 그리 부르냐.”
윤제를 자신을 떼어 놓고 가고 싶은 기색인 아이의 곁에 보란 듯이 붙어 걸었다. 애초 소년의 걸음으로 남자를 따돌릴 수 없기에 기대도 않았다.
“태자 전하를 이루고 있는 많은 부분이 제북의 것인데, 전하께서는 제북을 너무 모르십니다.”
“최근에 용용이 훈계를 듣지 않았지.”
윤제가 나태한 소년처럼 투덜댔다.
“폐하께서 조모를 굳이 효를 내세워 강제로 뵙지 않는 이유를 모르십니까. 제북의 일족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영화롭게 생각하지만, 병이 들어 죽는 것은 수치스러워 합니다. 내원에 속한 이들은 그것과 무관하지만 조모께서 가까운 친족마저 가까이 두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런 연유겠지요.”
소년의 말에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게 아니겠나 생각했었다.”
태자의 말에 용아가 그럼 이만 가 보라는 듯 걸음을 멈췄다. 윤제가 소년을 지나쳐 성큼성큼 앞장서서 갔다.
“……?”
사내가 황당해하는 아이를 철없는 얼굴로 돌아봤다.
“우리 할머니야.”
“제가 한 말을 듣기 한 겁니까, 윤공자 형님.”
용아는 어떻게든 좋게 말하려고 애썼다.
“어허. 여기선 태자 전하지. 너에게는 같은 내원에 머무는 일족이라 곁을 내주시는 건가? 할머님을 좋아하고, 어려서는 몹시 따랐고, 존경하나, 그분께서 친인들을 멀리하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네 설명대로라면 같은 내원에 머무는 모후께 곁을 내주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족과 구분하는 것은 특히 더 이해하기 어려워.”
장난을 치는 것 같던 남자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무엇이? 같은 일족이지 않아서 차별하는 게 옳다는 뜻인가?”
“제북에서 후가주는 독특한 위치입니다. 태후께서는 제북에서 온 후가주이시고, 저는 할머님의 뒤를 이어 후가주가 될 겁니다. 제북 내원의 이들은 모두 후가주를 따릅니다. 제가 조모를 따르는 것은 그분께서 후가주이기 때문일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후가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연로하시어 후가주의 역할을 다 하기 어려우시고, 저는 연소하고 아직 제대로 된 후가주가 아니지만, 서로를 아끼고 따르는 것은 본능적인 가르침입니다. 모후께서 후가주가 되시지 못하는 것은 제북의 일족이 모후와 같은 중경의 귀족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 아닙니까.”
아이의 설명은 모호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족에 대한 애착이 있어 조모를 따르는 것은 알겠다. 아끼고 따르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후께도 종종 찾아가 봬라.”
윤제는 드물게 너그러이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용아가 순순히 끄덕였다. 태후를 좋아하고 찾는 것은 본능이라고 하나, 황제의 명이 있었다 해도 황후를 뵙는 것은 예법 안에서만이었으니 태자의 말이 그르지 않았다. 다만, 아끼고 따르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내가 입은 포에 놓인 아름다운 수가 눈에 걸렸다. 황궁에 와 처음 본 특이한 당문 자수는 남자가 아끼고 따르는 이가 새겨 준 것일 터였다.
“가자.”
윤제가 앞장서며 말했다.
“전하.”
용아가 여태 주고받은 말은 무엇이었냔 얼굴로 남자를 책했다.
“이 몸의 할머니시다.”
“저의 빛나는 후가주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못난 소리 하시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이가 답지 않게 과장된 몸짓을 하며 소리 높였다. 후광을 이만큼 그리는 어린 팔이 우스꽝스러운지 남자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냥 문안 올리러 가는 거다.”
“모후에 대해 한 말씀이라도 해 보십시오.”
용아가 전투적으로 대꾸했다.
“내게도 친모후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만, 계후이시긴 하나 지금의 모후가 내게는 어머니다. 좋은 분이시다. 나를 당신의 아들처럼 길러 주셨다.”
“저도 압니다. 모후께서는 존귀한 분이시고, 존경받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이 흉흉했다.
“아무 말 안 한다, 정말.”
윤제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두고 볼 겁니다.”
용아가 실로 오랜만에 아이답지 않게 고상하면서도 냉엄함이 돋보이는 표정으로 태자에게 말을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아이는 단 네 걸음 만에 훨씬 긴 다리를 가진 남자에게 따라잡혔다.
태자에 대한 허락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전각 안으로 들어갔던 궁인은 별달리 난처한 기색 없이 문을 열고 예를 표하며 태자와 태자비를 맞았다.
전각 안으로 들자 침상에 누운 채인 태후가 둘을 반겼다.
“빛나는 아이가 오셨는가. 태자께서 왔는가.”
“할머님, 용아가 왔습니다.”
태자는 꽤 오랜만에 뵙는 태후의 병색이 전보다 더 심해진 것에 당황했는지 답례가 늦었다. 친인에 대한 조모의 외면을 이해했으나 섭섭했고, 받아들였으나 아쉽고 의아했다.
“조모를 뵙습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땐 혼자 의자에 앉아 가족들을 맞이하셨고, 세월이 끼어들었으나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셨다. 손자를 마지막으로 볼 때, 선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인이니 당신의 아름답던 때만 기억해 달라 새침하기까지 한 기색으로 말하셨다.
“할머님. 용아가 오지 않는 동안 적적하셨지요? 어서 예뻐해 주셔요.”
용아는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며 제북의 예법을 올렸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침상에 놓인 메마른 손을 부드럽게 당겨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주름이 가득한 가는 손가락이 아이를 가만가만 만졌다.
“…….”
그것을 보며 윤제는 기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곳만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머무는 주위로 좋은 웃음과 따듯한 온기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좋아지고,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왜인지, 까마득히 어린 때의 천진하고 순진한 기억들이 몰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함월전 전각 안에서 내내 웃고 귀염을 떨던 아이는 전각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에 떠돌던 웃음을 지웠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태도였다.
“태의는?”
“비전하의 명대로 기다리게 해 두었습니다.”
“불러다 주세요.”
어린아이를 굳건하게 믿는 함월전 궁인의 태도는 실로 올바른 것이었다. 허나 겉보기에 낯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귀하게 태어나 높으신 신분으로 살아가는 아이에게 이것이 일상이고, 윤제에게도 일상이었지만, 방 안에서 할머님을 연방 부르던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를…….”
“인사는 되었네. 긴말 않겠소. 어째서 더 나빠지신 건가?”
용아는 빠르게 말을 쏟으며 크게 걸어 전각 권역을 벗어났다. 태의는 어깨를 한껏 웅크린 모양으로 소년을 분주히 따르며 송구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비전하.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황궁이라 하나 모든 약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더군다나 태후께서는 먼 땅의 출신이 아니십니까. 몸이 좋아지지 않을수록 나신 곳의 약재가 더 맞기도 하고, 병환과 노환이 겹치신데 쓰는 약재가 이 인근에서는 나지 않습니다. 비전하의 명으로 백방으로 구해 보았으나 금이 있어도 살 수가 없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
“벌은 무슨. 뒷말은 할 것 없습니다. 황궁 내의원 모두가 손 놓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고태의 뿐인데 벌을 어떻게, 뭐하러 내립니까. 약재 목록이나 써 주시오.”
“예?”
“이 사람이 구해 오겠소.”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께서 함께!”
모장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고태의가 태자와 저를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는 말에 용아가 냉랭한 표정을 건넸다. 아이는 또한 태의가 공손하고 조심스레 꺼내는 종이를 홱 빼앗아 갔다.
“함께는 무슨. 내가 구하는 겁니다. 고생하세요.”
“송, 송구하옵니다.”
아이의 야무진 구박에 고태의가 다급히 예를 올렸다. 휑하니 가는 듯하던 용아가 걸음을 멈추고 먼 데서 기다리는 모장을 돌아봤다. 온화한 인상의 여인이 분분히 움직여 고태의의 손에 묵직한 금덩이를 쥐여 주었다.
“비전하께서 항상 고태의께 감사드린다 전해 달라 십니다.”
아까 그 냉랭하고 도도한 소년 비전하께서 말씀입니까. 고태의는 못된 입술이 달싹이는 걸 손바닥을 누르는 묵직한 금으로 내리누르며, 겸양 가득한 미소를 전했다.
“성심을 다하겠다 전해 주시오.”
“예, 물러가옵니다.”
모장이 온화함 가득한 웃음을 건네고 총총히 걸어갔다. 용아는 모장이 고태의와 말을 끝내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몸을 돌려 걸었다.
“…….”
윤제는 오늘 꽤 여러 가지를 보는 날이 아닌가 생각했다.
함월전에서 돌아오는 길은 고요했다. 용아는 용아대로, 윤제는 윤제대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동궁이 보이고 방향을 잡아야 할 때 윤제가 말을 꺼냈다.
“조모께서 너를 많이 어여뻐 하시고, 또 너를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다.”
“그렇습니까.”
“다 크고 나선 들어 본 바 없지만 내게도 빛나는 아이라고 불러 주신 적이 있다. 가장 아끼는 이에게 해 주는 말 아니겠느냐.”
태자의 말에 용아가 무심한 얼굴로 답한다.
“그저 해 주시는 말이 아닐까요.”
제북에서는 소년 소녀에게나 호감을 표할 때 흔히들 하는 표현이다.
“그러냐. 조모께 보여드리고 그리 불러 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내게는 무척 부러운 모습이다만. 내 기억인지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네가 조모께 일족의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볼 때 친모후께서 그분께 그처럼 예를 올렸던 게 떠올랐다. 친모후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착각이겠지.”
“기억일 수도 있죠. 본 적 없으나 돌아가신 공후께서도 저 못지않게 할머님을 따르셨을 겁니다. 일족 안에서도 조모와 제가 친밀함을 느끼는 것은 서로밖에 없습니다. 공후께서 계셨다면 공후께도 같은 친밀함을 느꼈을 겁니다. 몇 없는 동족이랄까요.”
“나는 동족에게 불쾌감을 느끼는데?”
윤제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그런 것치곤 사이가 좋으시지 않습니까. 제북에서도 외원이든, 내원이든 같은 곳에 드는 이들끼리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다툼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족 혐오라 설명해 주더군요. 하지만 결국 일족끼리 무리를 이루고 살지 않습니까. 제북이든, 황족이든.”
용아는 조금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들어가라.”
영화대 앞까지는 금방이었다.
“살펴 가십시오. ……윤공자 형님.”
일별하는 사내에게 예를 올리고 돌아서던 용아가 돌아서는 중인 등을 불렀다.
“응?”
윤제가 아이를 돌아봤다.
“……내일 궁 밖에 나갑니까.”
남자를 물끄러미 보던 용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가자.”
윤제가 흔쾌히 웃으며 대꾸했다. 남자의 웃는 얼굴에 용아가 입술만 올리는 웃음을 건넸다. 들어가라, 다시 권하는 남자에게 용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예를 표했다.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아이의 눈썹이 흐릿하게 좁아 들었다가 본래대로 반듯해졌다.
당신의 그분은 빛나는 아이가 아닙니다.
용아는 상대에게 전할 수 없는 말을 빈 허공에 소리 없이 던지고 돌아섰다. 남자가 화를 낼지, 어째서냐고 물을지, 그럴 줄 알았다 상관하지 않을지 모르기에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고, 어째서 그는 빛나는 이가 아니냐 물을 때 해야 할 말이 너무도 오만해서 용아 자신조차 웃음이 났다.
당신의 그분이 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는 빛나는 아이라 불릴 사람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 헛웃음이 다 났다.
“비전하.”
모장이 전각 안으로 드는 문을 열어 주며 용아를 불렀다.
“응.”
태후를 뵙고 오면 항상 기운이 넘치는데 오늘 소년은 묘하게 기운이 없었다.
“선황후이신 공후께서도 태후마마를 어머니처럼 따랐습니다.”
“그랬나?”
“예. 서로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비전하께서 짐작하신 대로 태후께서 비전하께 그러신 것처럼 공후께 빛나는 아이라 자주 부르셨습니다.”
겉옷을 벗으며 용아가 가벼이 웃었다.
“제북에서는 듣기 좋으라고 그리들 잘 말하네.”
모장은 시중을 들며 유려하게 속삭였다.
“아닙니다. 태후께서 지금의 황후께는 한 번도 빛나는 이라고 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야 제북에서 나신 분이 아니니까.”
용아는 대수롭 잖은 투로 대꾸하고 방을 벗어났다.
모장은 태후가 공후와 태자비를 이칭으로 부르는 것은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라 다시 한 번 주장하고 싶었다. 건넛방으로 간 용아가 분주히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뒷정리를 하던 여인은 어린 주인께 아이가 정말로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 주장하려던 것을 잊고, 어린 주인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집중했다.
“무얼 하십니까.”
“큰일이야. 이걸 다 열어 봐야 돼.”
모장이 눈을 뗀 잠깐 사이 방은 난장판이 돼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비전하.”
“혼수.”
용아가 불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겨우 하루를 걸렀을 뿐임에도, 용아는 외출을 한다는 것에 설레었다. 궁 밖이란 그런 곳이었다. 즐거운 외출을 나온 용아에게 소양군이 반가운 얼굴로 악담을 했다.
“용공자! 어제 안 오길 정말 잘했다!”
기쁘기 그지없는 얼굴은 오롯한 진심을 품고 있었다. 유쾌한 표정으로 어제 만나지 못한 것을 격렬히 반기고 칭찬하는 소양군을 용아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도 오지 말지 그랬느냐.”
용아의 원수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 진양군이 툭 끼어들었다.
“에헤이.”
소양군이 잽싸게 진양군을 옆으로 치웠다.
“어제 용공자가 왔으면 하마터면 좋지 않을 뻔했다. 기물 구간의 상단부 고리 꽂는 막대가 어제 갑자기 떨어졌지 뭐야. 진공자가 저리 심술을 부리는 건 상단부 기물이 통째로 떨어졌는데 저 녀석이 맞아서 그렇다. 용공자가 이해하게.”
“진공자가 맞아서 정말 다행이지.”
소양군의 설명에 영양군이 격하게 말했다.
“상단부 기물이 통째로요?”
승명원의 장애물 구간은 꽤나 본격적이었다. 설치된 기물의 규모도 크고, 일회성이 아니라 오래도록 보존하여 쓰기 위해 만든 것들이었다. 웬만한 가옥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진 기물이 떨어졌다는 것이 의아했다.
“승명원 관리 태감의 말로는 며칠 전 폭우 때 바람이 많이 쳐 그때 상단부 연결 고리가 헐거워진 거 같다고 하더라. 진공자가 맞아서 정말 다행이었지. 아아. 어제 용공자가 오질 않아서 우리끼리 적적해 용공자처럼 기물 한번 오랜만에 통과해 보자 내기를 했거든. 가장 점수가 좋은 사람에게 금편을 몰아주기로 했지. 시작과 함께 사고가 나서 오늘 다시 해 볼까 해. 용공자도 왔으니 같이하면 되겠다.”
“나는 반대다. 어제 진공자가 한 말처럼 단순히 바람에 훼손된 게 아니라, 누가 일부러 승명원 기물에 손을 댄 것 같아. 진공자의 말대로 용공자는 승명원에 와 항상 기물 구간을 통과하고 말 타기를 시작하지 않나.”
소양군의 반가워하는 말을 횡양군이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게. 승명원 관리가 허술하지 않은데 하필 용공자가 자주 드나드는 곳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게 석연치 않아.”
영양군이 동조의 말을 건넸다.
“오늘도 안 나온 셈치고 돌아가라.”
진양군이 용아에게 거만하게 턱짓을 하며 권했다.
“싫습니다.”
용아가 불퉁하게 답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다만, 너는 귀하게 컸다는 녀석이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안일함은 누구에게서 배운 거냐. 너처럼 일상이 빤한 목표를 함정에 빠트리기가 얼마나 쉬운지 제북에선 가르쳐 주지 않던?”
진양군의 말에 용아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의 지적이 옳았다. 주위에 사람이 많고, 궁밖에 나왔다는 들뜬 마음에 안일하게 굴었다.
“제가 미련하였네요. 송구합니다. 헌데, 진공자 형님은 떨어지는 그 큰 기물을 맞고만 계셨습니까.”
소년의 얼굴에 이렇게 이렇게 잘 피해 보지 그랬냐는 불손한 투덜거림이 묻어 있었다. 진양군이 금세 발끈했다.
“뭘 피할 새도 없이 떨어지는데 내가 하늘이라도 날 수 있는 줄 아냐? 너, 지금 내가 너보다 말 못탄다고 은근히 시비 거는 게냐.”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밖은 위험하니까 그만 돌아가라.”
둘의 부끄러운 다툼을 영양군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척 담담히 방관했다. 횡양군은 틈틈이 진공자, 용공자를 부르며 싸움을 말리려 했다. 소양군은 용아가 말할 때는 용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진양군이 말할 때는 진양군의 말에 동조하듯 끄덕였다.
윤제는 왜인지 진양군을 보며 암담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용아를 보면서는 진양군 본인처럼 불만을 품는 한편, 금세 무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투의 얼굴이 되었다.
“그만들 해라.”
태자의 제지에 용아도 진양군도 입을 떼다 말고 멈췄다.
“…….”
“…….”
둘 모두 불손한 시선을 태자에게 던졌다.
“애랑 싸우고 싶냐.”
윤제가 진양군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싸우긴.”
“어. 그래. 혼내는 거지.”
“…….”
윤제의 대꾸에 진양군이 울컥하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진양군을 탓하는 윤제의 말에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용아가 기묘하게 표정을 흐렸다.
소년의 시선이 태자의 얼굴에 고정돼 움직일 줄 몰랐다.
“뭘 그리 봐.”
“아닙니다.”
“아니긴. 보고 있었잖아. 너는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너 만날 다니던데 대신 갔다가 눈먼 덩치에 맞아서 액땜해 준 고마운 이 아니냐. 환약이라도 사서 선물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윤제의 말에 용아가 진양군을 올려다봤다.
“됐다, 누굴 환자 취급이야.”
진양군이 유난하게 투덜댔다.
“……저, 형님들.”
승명원에 와 복이가 곁에 있을 때가 아니면 결코 너그러워지지 않는 소년이 드물게 공손한 음성으로 사내들을 불렀다.
“응? 뭔데 그리 나긋하냐. 용공자. 너, 나쁜 짓 하려 그러니?”
소양군이 음흉한 웃음을 퍼트리며 말했다.
“나쁜 짓이라면 나쁜 짓이겠지요.”
“무언데?”
“형님들께서는 제북에서 온 일족들을 가까이에 두는 걸 영 내켜 하시지 않지요?”
“그건 왜 물어볼까.”
“제북에서 온 일족을 불편해하는 건 무서워하기 때문입니까?”
소양군과 용아가 주고받는 대화를 관심 없는 척 듣던 이들이 무서워해서냐는 소년의 말에 모두가 정색했다. 다섯이 한 몸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시에 불쾌한 기색을 뿌렸다. 일순 정색을 한 다섯 남자는 또한 동시에 질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불편하게 돌아봤다.
“무서워하다니, 우리가 걔들을!?”
소양군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화를 냈다.
“……어,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무서워하는 게 아니니까 가까이에 가도 별문제 없는 겁니까?”
용아가 순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소양군이 소리 높여 답했다. 용아가 그렇군요, 안도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돌아봤다. 소양군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도 문제 따위 없다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저, 제관에 가고 싶은데요.”
용아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거길 왜 가?!”
“용공자.”
“어딜 간다고? 제관?!”
“안 돼!”
소년의 갑작스러운 말에 왕공 자제들이 다시 한 몸처럼 같은 의견을 표했다. 용아가 못된 소년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무서워해서…….”
소양군이 격하게 부정하며 말을 쏟아 냈다.
“아니거든! 무서워하긴, 우리가? 왜!? 그런 게 아니라 거길 갈 필요가 없어서고, 가도 제북인이 아니면 그자들이 상대를 안 해 줘. 거길 가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그자들이 우리가 거길 가는 걸 더 싫어한다니까!”
제관은 중경 주위에 사는 제북 출신들이 모여 사는 곳 중 하나였다.
“저 제관에 용무가 있습니다.”
“용공자, 아랫사람 시켜.”
항상 인덕 높고 타인을 잘 배려하는 횡양군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꼭 가야 되는데요…….”
소년이 간절히 웅얼거렸다.
“용공자, 안 돼.”
횡양군이 매우 엄격히 말했다.
“역시 무서운 거죠?”
용아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무섭다니!”
“그거 아니야, 용공자!”
“설령 무서워한다 오해받더라도 안 돼.”
소양군과 내내 딴청 부리던 영양군이 소리 높여 부정했다. 횡양군의 단호한 말에 먼저 말을 한 두 남자와 말없이 있던 두 남자가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서워하긴 누가 무서워해!?”
무서워한다 오해 받는 걸 무서워하는 남자들을 용아가 빤히 봤다.
“제관 앞까지만 같이 가 주시면 안에 들어가는 건, 저 혼자…….”
소년의 차선책에 남자들이 다시 소리쳤다.
“안 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용아가 울적하게 투덜거렸다.
“윤공자께 여쭤 봐라.”
“맞아. 윤공자의 뜻을 따르마.”
진양군이 윤제에게 결정을 떠넘겼고, 소양군이 찬동했다.
“윤공자 형님은 당연히 같이 가 주실 겁니다.”
용아가 물을 필요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잠깐. 내가 왜 당연히 같이 간다고 생각하는 건데?”
윤제가 소년을 다급히 막으며 말했다.
“어제 궁 밖에 나가냐고 했을 때 그런다고 했잖아요.”
“궁 밖에 나가냐 물었지, 제관에 간단 말은 없었잖아.”
함께 어울릴 때 필요한 만큼만 말을 나누던 둘이었다. 적어도 밖에서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소년은 태자의 말을 따랐고, 태자는 소년을 박대하지 않았다. 용아가 억지를 부리거나, 태자가 소년을 강압적으로 결정을 강요한 적은 없기에 적당히 알고 지내는 형, 아우처럼 보였다.
“제관에 귀신이라도 있어요? 거기가 그렇게 무서워요?”
“무서운 게 아니라, 어쩐지 싫어! 그냥 싫은 거, 모르냐. 네가 나를 어쩐지 무시할 때와 같은 거다.”
“윤공자 형을 언제 무시했다고 그러세요? 지금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네가 나를 모자라다고 꿍얼대는 걸 설마 몰랐겠냐.”
“윤공자 형님. 그러니까 이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제관에 갈 거예요, 말 거예요? 형님들이 싫으면 저 혼자라도 가겠다고요!”
용아의 말에 사내들이 하나 되어 소리쳤다.
“그건 더 안 돼!”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었다.
복이 위에 탄 용아의 얼굴은 뚱하였다. 용아와 복아는 말과 사람으로 앞뒤, 옆이 가로막혀 있었다. 앞에는 소양군과 영양군이, 좌우에는 진양군과 윤제가, 뒤에는 횡양군이 소년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다. 소년의 불퉁한 얼굴 못지않게 사내들의 얼굴도 불만 가득하였다.
내가 죄수냔 말이야.
잘생긴 말의 옆얼굴을 토닥이며 소년은 소리 없이 툴툴댔다.
“뭐?”
용아의 오른편을 가로막고 있는 윤제가 곧장 아는 체했다.
쓸데없이 귀도 밝지.
용아는 아무 말 않은 체하며 고삐만 만지작댔다. 흡사 죄인 호송하는 듯한 이들과 할 말 없다는 얼굴이었다. 사내들은 소년의 끈질긴 호소에 결국 제관으로 가기로 했다. 물론 거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출발에 앞서 긴 문답이 오갔다.
용공자 네가, 지금, 제관에 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며,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꼭 있는가 몇 번이고 따져 보고, 추가 질의가 오간 끝에 제관행이 결정됐다. 용아의 짧은 생에 그토록 고단한 문답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따져 대는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다섯 남자는 황태후께 필요한 약재를 제관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걸, 긴 문답 끝에 겨우 이해했다. 벌써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 강제로 이해한 얼굴들이었다.
제관 입구에 당도했을 때 영양군이 말 머리를 홱 돌렸다.
“용공자.”
“예, 영형. 하문하실 게 있습니까.”
용아의 얼굴에 뭘 또 물어보려고 그러냐는 나태함이 흘렀다.
“제관에서는 제관이나 제북 출신이 아니면 물건을 잘 팔지도 않고, 흥정이 통하지 않는 데다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다. 그건 알고 가는 게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용아가 단호히 답했다.
“너, 돈 많니?”
영양군이 어쩐지 졸부 같은 얼굴로 말했다.
“있을 만큼 있습니다.”
여유롭게 답한 용아가 앞이 트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 나갔다. 입구를 지키는 무관은 제북에도 몇 없는 아름다운 산융마를 보는 순간부터 소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사이 용아를 놓친 다섯 남자는 불만스러운 소리를 흘리며 빠르게 내달렸다.
“모두 내 일행입니다.”
용아가 손에 쥔 것을 보여 주며 말하자, 제북 특유의 복식을 한 무관이 엄격한 예를 올리며 문을 열 것을 손짓으로 알렸다.
“드시지요.”
오만하고 불손하기로 유명한 제관의 수문장이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으로 소년에게 예를 취했다. 혹여 실랑이나 다툼이 있을까 염려했던 사내들은 조금 당황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소년의 등을 바라봤다.
“드시죠, 형님들.”
소년이 느긋한 얼굴로 사내들을 돌아봤다. 여기가 왜 싫으냐는 얼굴이었다. 머리를 숙여 공손한 체하고 있지만, 입구부터 깔린 제북인들이 다섯 남자를 경계하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오직 무덤덤한 얼굴의 소년만 몰랐다.
“어쩐지 진짜 싫다.”
영양군이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좁혀.”
윤제는 크게 속도를 내지 않는 것 같은데도 순간순간 멀어져 가는 소년의 어린 등을 보며 말했다. 다섯 남자의 말이 용아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섰다.
“저 녀석 정말 겁도 없다. 정말 모르는 건가? 여기 사방에 짐승이 우글대는 거 같잖아.”
소양군이 빠르고 낮게 말했다.
“알아도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횡양군이 불쾌해하는 기색 가득한 얼굴로 뒤이었다.
“진짜 기분 나쁜데.”
진양군이 거들며 윤제를 돌아봤다.
“더 붙자.”
윤제가 말했고, 사내들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걱정 없는 소년 곁으로 더 가까이 붙어 섰다. 사내들이 불쾌해하는 기색만큼 제관 안의 이들도 언짢은 얼굴로 그들을 급히 피했다. 입구에서 대략적인 위치는 알아 왔으나, 골목 안으로 들어서기 전 다시 한 번 지나는 이에게 확인하려던 용아는 무시무시한 기색을 뿌리며 뒤따르는 잘난 남자들을 돌아보며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소년은 아름다운 말을 기습적으로 재촉해 앞으로 훌쩍 튀어 나가 사내들과 멀어진 틈에 지나는 행인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어린 공자께서 ……무, 무엇입니까.”
중년의 부인이 부드러운 얼굴로 용아의 말을 받다가, 소년 뒤로 흉흉한 인영들이 불시에 붙어 서자 대번에 표정을 굳히며 겨우 질문을 마쳤다.
“뒤에 있는 바보들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부인. 산약방으로 가려는데 이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소년은 앞말은 아주 조그맣게 뒷말은 분명하게 건넸다.
“예, 맞소.”
용아와 복아에게 친근함이나 반가움을 표하려던 부인은 소년의 뒤쪽에서 흉악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들을 피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후다닥 멀어져 갔다.
“꼭 그리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어야 됩니까? 형님들.”
형님들이라 부르는 용아의 입가가 불편하게 실룩였다.
“우리가 뭘.”
윤제의 말에 못난 사내들이 동시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용아는 말을 말자는 얼굴로 목적지를 향해 말을 재촉했다. 고개를 돌리며 휴, 한숨짓는 입술이 무어라 소곤거릴지 알 법했다.
참으로 못나셨습니다.
윤제는 말끼리 부딪힐 만큼 소년의 곁으로 더욱 가까이 붙었다.
“뭐라고?”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진짭니다.”
“왜 화를 내냐.”
용아는 앞을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웃는 것 같다 의심하며 고삐를 조종했다. 다그닥, 다그닥 좁은 길 가득 말발굽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산약방의 관리인 팽요선은 낯선 소리에 입구 문을 닫으려 했다.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에 약재가 상하는 것도 염려가 되었고, 어쩐지 바깥에서 풍겨 오는 기색이 영 께름칙했다.
팽 선생이라 별칭으로 불리는 사내는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깨끗한 문사복을 즐겨 입고, 글방 서생처럼 약방 한쪽 벽 전체를 책장으로 꾸려 놓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계십니까.”
팽요선이 입구 문을 닫으려 할 때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듣는 귀를 달래 주는 것 같은 음성에서 아직 어린 태가 났다.
“뉘시오.”
약방을 부친에게 물려받고 혼자 꾸려 온 지 십여 년.
“여기가 산약방이 맞습니까.”
팽요선은 입구 안으로 들어오는 여린 체구의 소년을 보고 미소 지었고, 소년의 등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헌앙한 미남자들을 발견하고 히익! 질겁한 소리를 내뿜을 뻔했다.
“……맞소, 공자.”
팽 선생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입구 안으로 들어와 놓고 부드러이 묻는 얼굴은 묘한 데가 있었다.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와 예의 바른 태도에 팽요선의 입가로 금세 웃음이 솟았다. 하지만 소년은 무서운 짐승 떼를 몰고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였다.
팽요선은 마음 같아선 소공자만 들어오시고 뒤에 흉악한 자들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상대들이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존재만으로 팽요선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사내들은 필경 그와 상성이 나쁜 인물들일 터였다.
“드십시오.”
용아가 웃으며 안으로 들었다.
“고맙소.”
소년의 등 뒤를 바싹 따르는 사내들도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었다. 등 뒤에 딱 붙어 따르는 거대한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정말이지 성가셨다.
“꼭 이렇게 달라붙어야 됩니까?!”
용아가 귓속말을 하듯 잔뜩 낮춘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다 너를 위해서다.”
윤제는 숨기는 기색도 없이 당당히 말했다.
“허허허. 헌칠한 미장부들이 이리 따르시는 분이라니 소공자께서 대단한 귀인이신가 보오.”
팽요선이 껄껄 과장되게 웃음 지으며 용아를 향해 말했다.
“커다란 짐덩이들이지요. 이 약재들을 구하려 합니다.”
소년은 등 뒤에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이들을 떼어 내고 싶다는 얼굴로 답하며 품에서 처방전을 꺼내 내밀었다. 팽요선은 대단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온 소년의 손끝에 털끝만치도 닿고 싶지 않았다. 그는 큰 체구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섬세한 몸짓으로 종이를 받아 펼쳤다.
“이것들을 전부 다 말이오?”
처방전을 읽어 내려가던 사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전부 다 있습니까.”
“물론이오.”
팽요선이 기묘하긴 하지만 못 줄 건 없다는 얼굴로 처방전에 쓰인 순서대로 약재를 꺼내기 시작했다. 먼지 낀 빈 탁자 위로 턱턱 올라가는 약재 뭉치들을 용아가 지켜보고 있을 때, 소년의 등 뒤에 철벽처럼 서 있던 사내들도 여유를 가지고 조금 시시덕거렸다.
“저게 그거 아니야?”
“그거다, 그거.”
소양군의 속닥거림에 영양군이 날래게 답했다.
“…….”
팽요선이 쑥덕거리는 두 사내에게 잠시 시선을 줬다. 주인장의 얼굴에 묘하게 자부심이 가득 흘렀다. 용아는 의아해 했고, 비슷한 표정의 진양군이 저희들끼리 좋아서 키득거리는 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라니?”
“그거 있잖아.”
진양군의 의문에 소양군이 수줍은 총각처럼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양군이 재차 물었다.
“그게 뭔데?”
“정력에 좋은 거.”
횡양군이 진중한 목소리로 선선히 답했다.
“정……!”
진양군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눈앞의 조그만 머리통의 존재를 깨닫고 벌컥 소리치려다 말았다. 애가 듣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너희는 그딴 말을 꼬맹이를 앞에 두고 하고 싶냐고 투덜거리려던 그는 횡양군의 손짓에 벌겋게 붉혔던 얼굴을 평연히 가라앉혔다.
횡양군이 답하는 순간, 윤제가 용아의 귀를 가볍게 틀어막았다.
소년은 갑자기 귀를 막는 커다란 손에 팔을 휘두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의 체구가 소년보다 압도적으로 컸고, 몸놀림도 몇 배는 빨랐다. 짧은 팔이 이리저리 바동거리는 게 자신이 봐도 볼품없어 항의의 움직임을 빠르게 관뒀다. 역시 근접전은 좋지 않았다.
“소공자, 이걸 모두 살 거요?”
“네.”
윤제가 용아의 귀에서 손을 떼어 내는 걸 보며 팽요선이 물었다. 그는 재빠른 속도로 저울 위에 약재들을 올렸다. 약재마다 값어치가 달라 올라가는 추들이 달랐다.
“저거 한 올에 금덩이 10개 무게랑 같은 추가 올라간다지?”
“그렇다더라.”
두 남자의 시시덕거림은 끝이 없었다.
“으음.”
진양군이 눈치를 주듯 목을 울렸다. 둘은 과장되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고 말았다. 셋이 하는 양을 보던 팽요선이 추들을 챙겨 셈을 하며 용아에게 말했다.
“소공자. 소공자의 뒤에 선 헌앙한 사내들 중에 소공자의 짝은 누구신가?”
팽요선은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소년이 일족이라 확신했다. 일족 중에서도 팽요선과 달리, 아마도 사내와 짝을 이루는 쪽. 용아는 내내 선한 손님의 순한 표정을 지우고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런 것 없다.”
독특한 분위기의 어린 손님이 사실 이 중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년이 답하는 순간, 소년의 뒤에 선 사내들이 일순 시시덕거림을 멈추고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값은…….”
팽요선은 머쓱함을 아무렇지 않게 떨치고 노련한 상인처럼 말하려 했다.
“받게.”
용아가 제관 입구에서 보여 준 옥패를 꺼내 팽요선에게 건넸다. 제북 하후가의 표식이 있는 옥패를 본 팽요선이 급히 옥패를 향해 예를 취했다.
“노복이 가주를 뵙습니다.”
용아는 옥패를 탁자 위에 놓고 예를 취하는 팽요선을 피해 섰다.
“일어나게. 이 사람은 가주가 아니고, 옥패의 주인도 아니니.”
“옥패를 가지고 계시다는 게 곧 귀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팽요선이 무릎걸음으로 용아 앞으로 다가가며 다시금 예를 취했다.
“아니라니까.”
“아니긴요. 소공자 뒤에 따라온 사내들만 보아도 엄청난 귀인이란 걸 알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 노복의 예를 받으십시오. 제북에서 오신 게지요?”
“아니야. 그냥 심부름 온 거요. 약재나 어서 챙겨 주시오.”
용아가 손을 파닥이듯 흔들며 팽요선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 발뺌하실 게 무엇입니까.”
“발뺌 아니네.”
“대를 이어 가문을 모시는 이 노복이 그릇된 소문이라도 내실까 그러십니까. 섭섭합니다. 제북에서 오신 거면 소식 한 자락 주실 수 있는 게 아니옵니까.”
팽요선이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얼굴을 했다.
“우선 일어납시다.”
용아가 긴히 말했다.
“예, 공자.”
“묻고 싶은 말이 있으시오?”
용아의 허락 같은 물음이 떨어지자 팽요선이 신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공자께선 가주가 되셨습니까. 최근 대가주께서 새로 서셨다는 풍문은 들었으나 이곳까지 소식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대공자께 후계가 될 아기씨가 태어날 거라는 소문과 태어났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시기가 오락가락해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대공자 누구를 말하십니까.”
“대공자 도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팽요선의 말에 용아의 표정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는 죽었소.”
“예? 대공자께서요? 어쩌다가……!”
“그는 죽은 지 한참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고, 대략 6,7년쯤 되었소. 현재는 공자 정화가 하후가 대공자요. 하후가의 대가주는 공자 도의 둘째 형님이시오. 대공자 정화는 현재 대가주의 유일한 아들이며, 장자요.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전쟁 중에 활이라니, 대공자 도는 하후가에 다시없을 무사라 들었는데! 지금의 대공자 정화가 현재 대가주의 장자면, 대공자 도의 후계가 될 거라던 아기씨는 어찌 되었습니까.”
“아기는 태어났지만 숨을 쉬지 않아 태어나자마자 죽었소.”
“대공자 도의 짝은…….”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가 죽고, 임신 중에 짝을 잃은 슬픔에 그도 죽었소.”
용아의 말에 팽요선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한다.
“송구합니다.”
용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선생이 내게 송구할 일이 뭐가 있소. 옥패는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소공자께서 가져오신 옥패와 똑같은 옥패가 이 집안의 가보요.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요. 하후가에서 내린 옥패는 우리네처럼 짝이 있다 들었는데 실물을 보게 되어 영광일 따름이오. 옥패의 주인께서는 이곳에 있는 무엇이든 원하시는 만큼 가져가실 수 있지. 이곳 전체를 가지실 수도 있는데, 고작 약재 얼마 챙겨 가는 것으로 끝입니까.”
팽요선이 용아에게 옥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다음에 부탁할 게 있으면 또 오겠소.”
소년이 웃으며 답했다.
팽요선은 분주한 움직임으로 준비한 약재를 꼼꼼히 챙겨 바치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라 말했다. 그러겠다, 하고 돌아서는 용아를 향해 팽요선이 말했다.
“태자비께서는…….”
용아가 움칫 멈췄다.
“……?”
소년은 말없이 의문이 담긴 얼굴만 건넸다.
“태자비께서는 가족을 다 잃고 그곳을 떠나오셨는데 괜찮으시오. 아직 어리시다 들었는데 상심과 충격이 크셔서 걱정이오. 소공자께서 그분을 잘 보살펴 주시오. 옥패의 진주인은 그분이시지 않소?”
팽요선의 말이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모호해졌다.
“알려 줄 수 없다는 것 알고 있겠지요. 이만 가 보겠소.”
용아를 따라 걸음을 멈춘 사내들이 소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용아는 얼굴에 와 닿는 걸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들의 시선에 혼란함이 가득했다. 전쟁터에서 죽은 전(前)대공자가 소년의 아버지이고, 태어났으나 숨을 쉬지 못했다는 아기가 소년의 아우이며, 짝을 잃고 아이를 잃은 슬픔에 죽은 대공자의 짝이 소년의 또 다른 가족이었다.
지독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리 다오.”
말을 매어 둔 곳으로 와서야 윤제가 용아에게 말을 건넸다. 용아는 순순히 약재를 남자에게 넘겼다. 소년이 아름다운 산융마를 쓰다듬고 있을 때 저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자!”
팽요선이었다.
“잡아요.”
용아는 제 말의 고삐를 후다닥 윤제의 손에 쥐여 주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팽요선에게로 향했다. 얼결에 산융마 주인인 척하게 된 윤제는 잘생긴 말을 어색하게 두들기며 친한 척을 시도했다.
푸르릉.
제 주인이 아닌 탓인지 복아는 남자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오, 선생.”
용아는 제 말에게 찝쩍대는 남자를 힐끗 살피며 팽요선에게 물었다.
“아까 저 다섯 중에 소공자의 짝이 없다고 했지요?”
“그렇소.”
팽요선의 말에 용아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약재를 받아 준 사내로 하시오.”
팽요선이 목소리 잔뜩 낮추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풉. ……하하하하하! 하하하. 미안…… 크, 미안하오, 하하하하하.”
아까의 고요함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소년이 웃음을 격렬하게 터트렸다. 한번 웃기 시작한 용아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해 끅끅 괴이한 소리를 흘리기까지 했다.
“괜, 찮소?”
팽요선이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걸 알려 주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 사람 말 허투루 듣지 마시오.”
너무 웃어서 눈가에 눈물이 다 맺힌 용아를 향해 팽요선이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선생.”
“말하시오, 소공자.”
“약재상 문을 닫게 되시거든 관상가를 해 보시오. 조언은 고맙소. 내 깊이 숙고해 보겠습니다. 오늘 고마웠소.”
용아가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일별했다.
“약재를 받아 준 사내요! 산융마 고삐를 쥔! 알겠소? 살펴 가시오.”
돌아서는 소년의 등을 향해 팽요선이 낮춘 목소리로 재차 당부하듯 말을 소곤거렸다. 용아는 손을 살살 저어 주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뭘 그리 웃느냐.”
“아닙니다.”
팽요선이 아직 거리 끝에서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년의 웃음에 의문을 품었던 윤제의 얼굴에 산융마를 내가 타고 가야 하나 하는 탐욕스러운 고민이 어렸다. 용아는 후다닥 말고삐를 맡길 때 조심스럽던 것과 달리, 획 하니 커다란 손에 있는 고삐를 빼앗아 가며 말에 올랐다.
아름다운 산융마에 오른 소년이 일족에게 살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기묘한데…….”
팽요선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소년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용아가 말 머리를 돌렸다. 탐스러운 산융마의 갈기가 바람에 우아하게 흩날렸다. 소년이 말을 내달렸고, 이어 사내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용아는 촘촘하게 주위를 막는 걱정 많은 인사들을 교묘한 움직임으로 벗어나 앞으로 치고 나갔다. 용아를 태운 복아가 순식간에 휙휙 앞으로 내질렀다.
“설마…….”
그걸 보던 팽요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