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RP절갠-一 (1/25)

#TRP절갠

여름 밤하늘에 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름다운 별비에 감탄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하늘에서 펼쳐진 기이한 현상에 두려움과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국혼에 다다랐다.

황실의 국혼 언급에 제북의 십일 후족(后族)은 곤란함을 표했다. 유일한 태자비 내정자가 너무도 어렸다. 아직 제북 복씨 성의 홍문(虹門)도 치르지 못하였으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청이 한참 이어졌다. 그러나 황실과 백관들의 강경함에 결국 국혼이 결정되었다.

새신부가 가까워져 올수록 땅 울음이 커져 갔다. 상륜부에 붉은 칠을 하고 황금과 주옥으로 장식한, 네 개의 둥근 기둥으로 지어 올린 집은 호화롭고 정연하였다. 집의 사방에 달린 붉은 난간의 겉에는 운룡(雲龍)을, 안에는 운봉(雲鳳)이 그려져 있었고, 처마 또한 세밀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람이 일 때면 늘어뜨려 둔 얇은 비단이 사락사락 흔들리며 교교한 소리와 빛을 퍼트렸다.

화려한 신부 가마와 가마를 둘러싸고 있는 기병이 퍼트리는 말발굽 소리와 달리, 신부를 기다리는 이들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표면을 울리는 거친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질 수 없도록 커졌을 때, 새신랑의 호위가 앞으로 나가 새신부가 지날 길옆에 장엄하게 도열했다.

휘잉.

기괴한 모양의 창을 든 무사가 멈추어 선 가마 옆에 내려서며 거창(巨槍)을 휘둘러 예를 올렸다. 익히 들어온 대로였으나, 험악하고 커다란 창이 휘둘러지는 순간 신랑 일행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들의 경악과 무관하게 슥, 가마에 드리워져 있던 비단이 올려지며 어린 발이 밖을 내디뎠다. 바람에 흩날리는 가마의 얇은 비단보다 더 조붓한 움직임으로 13겹의 신부 혼례복 끝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

“…….”

“…….”

새신부의 등장에 고요하던 사위가 더 집요한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앞서 나와 있던 일행 사이에 소리 없는 술렁임이 요동쳤다. 백관의 주름진 얼굴이 복씨 성 무사의 창 휘두름에 놀랄 때보다 더 핼쑥해졌고, 도열해 있던 호위들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신부의 시중을 위해 허리를 깊이 숙이고 예를 표하는 궁녀들의 눈동자로 당혹과 괴로운 외침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열두 살이라고 하지 않았어!?

신부의 제1호위인 창병이 아무리 거구라 하지만, 신부의 머리꼭지가 어른 사내의 허리와 가슴 사이에 닿을 듯 말 듯한 것은 예상치 못한 모양새였다.

열두 살이라며?!

수석 시비들이 눈동자만 굴려 서로 외치는 사이 신부가 문 앞에 당도했다. 놀라움과 곤혹스러움 속에서도 황궁 제일의 궁인들은 재빨리 제 할 일을 해내었다.

혼례를 치를 보화전 앞 은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앞에 혼례의 또 다른 당사자인 새신랑이 서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신부를 본 태자의 첫마디가 울렸다. 혼인을 축하하러 온 이들 사이로 지독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13겹의 혼례복과 짝을 이루는 정교한 수가 놓인 붉은 쓰개를 쓴 신부가 안으로 걸어 들었다. 마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걸음걸음 흐트러짐 없는 움직임으로. 단단하고 올곧으며, 성큼성큼 긴장감 하나 없는 걸음으로 다가섰다.

신부가 아름다운 교(橋)를 건너, 짧은 계단을 올랐다.

어린 체구와 다르게 씩씩하기까지 한 신부의 걸음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눈에 이체가 돌았다. 반면 짧은 계단 끝, 두 번째 교 위에서 기다리던 사내의 무뚝뚝한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반듯한 입매 끝에 삐뚜름한 웃음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능파교 끝에 서 있던 새신랑이 한 걸음 가볍게 물러섰다.

주렴에 가리어져 있는 얼굴에 냉소가 잦아들고 삭막함이 짙어지자,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주춤주춤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신랑과 함께 신부를 기다리던 황가 종친들마저 능파교 곁에서 완전히 벗어나 깊이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실의 혼인은 능파교 위를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걷는 것으로 끝맺었다.

오직 제위를 이어받을 황가의 적통과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존재만이 우아하고 가벼이 걸을 수 있는 곳. 기묘하게도 황가의 적통이 아닌 자와 그의 첫 번째 반려가 아니면 걷기는커녕 올라설 수조차 없는 곳이, 능파교였다.

신들이 걷는 다리.

황족의 지엄한 권능을 드러내는 사내 앞에서 모두는 바르게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텅 빈 교 위에 어린 신부가 우아하고 가벼이 올라섰다.

“신랑이시여, 그대의 신부가 예를 올리옵니다.”

어리고 어린 목소리가 혼례의 끝을 알리는 말을 고했다. 완강한 거부 따위 전혀 모른다는 듯, 황족의 권능이 내리는 힘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듯, 태연한 몸짓으로 예를 올리는 신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내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무게감 없이 포개어졌다.

신부와 신랑이 조용히 걸음을 이어 갔다. 황가의 일족 중에서도 단연 체격이 좋은 신랑의 옆에서 신부는 더욱 어리고 자그마했다. 신랑의 가슴에 겨우 닿을락 말락한 높이에 있는 신부의 머리에는 호화로운 쓰개가 드리워져 있기에 어떤 감정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고, 호화로운 붉은 쓰개 위로 태자의 의아함 가득한 시선만이 분주히 건네졌다. 연화문을 지나 운문, 다시 연화문, 다시 운문이 시작되고 끝맺어 능파교의 끝에 다다랐을 때야 주렴에 가리어진 얼굴이 느릿느릿 입술을 열어 인정했다.

“환영하오.”

한겨울의 혼례식은 서늘하였다.

신혼 동방 앞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전각 앞을 지키는 궁인들은 잠잠하기만 한 전각 문밖을 안타까이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훅 쉬는 나인을 본 수석 시비가 엄중한 눈길을 보냈고, 눈이 마주친 나인은 숨을 급히 들이켜며 더욱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신혼 동방 안 역시 고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붉은 비단이 겹겹이 늘어뜨려진 호화로운 침상 끝에, 피보다 더 짙은 붉은 쓰개를 쓴 어린 신부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신부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사락사락 부드러운 울림과 함께 신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겹겹의 붉은 쓰개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붉은 쓰개는 가볍지만 몇 겹이나 더해져 덮어쓰고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호화로운 쓰개를 걷어 내고 드러난 얼굴은 앳된 아이의 것이었다. 소녀라고 해도 좋을 법하지만, 아이는 사내애였다.

사내라기에는 한참 모자란 소년은 옆으로 길면서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얇은 눈꺼풀의 살짝 접혀 보일 듯 말 듯한 선은 눈을 사납게 치켜뜰 때면 짓눌리는 것처럼 누그러트려 조금은 사납고 흉하게 보이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긴 눈초리를 아래로 내리뜰 때면 아이답지 않은 우아함이 도드라졌다. 눈을 가늘게 내려뜬 소년은 밖에는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환영하오…….”

그는 잘못된 말이다.

“흠.”

아이는 반나절이 넘도록 제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붉은 쓰개를 무성의한 손길로 내던졌다. 일정에 맞추느라 바쁘게 만들어진 화려한 쓰개가 팔락팔락 안쓰러운 몸짓으로 탁자 위에 흐트러졌다. 쓰개를 벗어 낸 아이는 곧 무거운 머리 장식을 풀어 떼어 냈다.

본디 첫날밤 신랑이 찾아와 풀어 주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신부의 상징인 붉은 쓰개와 머리 장식에 이어 어깨를 진득하게 누르고 있는 열세 겹의 혼례복도 훌훌 벗어 던졌다. 그것 또한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할 것들이었으나 어린 신부는 상관치 않았다.

꼬박 하루 가까이를 머리 장식에 움켜쥐어져 있던 머리칼을 손으로 살살 풀어 준 소년은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오른쪽 어깨로 모아 대충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푹신하게 금침이 깔려 있는 텅 빈 침상으로 몸을 가볍게 날렸다.

풀썩, 이부자리가 흐트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시침 궁인들이 손끝이 아리도록 놓은 아름다운 수가 비벼지며 사각사각 까칠까칠한 소리를 퍼트렸다.

“그 여자 가슴이 수박만 하다고 했었나.”

소년은 나지막하게 웅얼거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태자래도 열두 살짜리 소년과 첫날밤을 같이 보내느니 미모가 휘황찬란하다는 어여쁜 첩을 찾아갈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는 게 도리어 불한당 같은 짓이다.

아무렴.

신혼 동방 밖 궁인들이 초야에 소박을 맞는 태자비를 불쌍히 여겨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낼 걸 알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드넓은 침상을 온전히 홀로 쓸 수 있어 좋았다.

한겨울 밤인데도 방 안은 따스했다. 곳곳에 꽃잎이 펼쳐진 듯한 모양의 야트막한 화로와 방 중앙의 꽃과 우아한 넝쿨 문으로 뒤덮인 커다란 사각 화로에서 나오는 온기가 훈기를 더해 주었다.

그저 한 가지가 거슬렸다.

‘나의 신부가 되어 주심에 감사드리오.’

혼례를 끝맺는 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새신랑의 모자람이 염려되었다. 호사스러운 이불 속을 파고들며 아이는 속살거림이 새어 나가려는 입술을 꼭 다물고 다리 사이에 끌어안은 이불을 더욱 꽉 안았다. 부디 소년의 모자란 새신랑이 더 이상 바보짓을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정천궁은 당금 천자인 황제가 거하는 전각이다. 정천궁 전각의 처마 끝은 날아갈 듯 날렵한 모양으로, 안으로 바람이 들지 않고 처마 아래에서 맴돌다 나가게 하는 구조라 했다.

전각을 지은 이의 뜻대로 찬바람이 휘이잉, 우아한 처마 밑으로 매섭게 휘어들었다. 뒤이어 처마 바로 아래에 선 어린 얼굴로 칼바람이 불어 들었다. 충분히 도톰하지만, 겨울 찬바람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비단 옷의 끝자락이 파락파락 종잇장처럼 흩날렸다.

“비전하. 태자전으로 사람을 보낼까요?”

태자비의 수석 시비는 걸음마를 뗀 직후부터 궁인으로 커 온 이였다. 상전을 모시는 데에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상전의 손끝만 보아도 그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 바칠 수 있었다.

아이는 의젓하였다.

신혼 첫날밤 새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초야를 치르고 부군과 함께 맞아야 할 아침에, 아이는 홀로 일어나 담담히 바깥에 기척을 보내왔다. 밖에 있느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음성은 앳되었으나 위엄이 있었다. 태자비 전각의 궁인들은 주인의 뜻에 따라 의연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태자비는 물만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켜고, 곧장 웃전에 문안을 올릴 준비에 들었다. 나무랄 데 없는 주인이었다. 궁인들은 꼼꼼히 문안 준비를 돕고 함께 문안을 올릴 태자의 연통을 기다렸다.

황궁 안 전각과 전각 사이의 거리는 결코 가깝다 할 수 없다.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태자비는 태자의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다 늦어질 수 있으니 정천궁으로 우선 갈 것을 알렸다. 태자전으로 사람을 보내오리까, 예의상 궁인이 말을 올렸다. 태자비는 그리하라 했으나 별반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초야에 소박을 맞았으니 신랑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게 이상치 않았다. 그러나 국혼 후 첫 문안 인사였다. 아무리 태자가 어린데다 사내아이인 태자비가 마음에 차지 않고, 양제(良娣)라는 감투까지 씌워 둔 첩이 어여쁘다 해도 첫 문안 인사를 무시할 순 없었다.

처음 반각은 태자의 심술이 심한 탓이라 믿었다.

다시 반각이 지났을 때, 새벽 칼바람에 태자비의 겉옷 끝이 홀라당 뒤집어졌다. 궁인들은 태자비의 발치에 붙어 서서 옷자락을 펴 주며 태자전에 사람을 보낼 것을 청했다. 어린 태자비는 지독한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 라고 궁인들을 치하했다.

순식간에 반 시진이 지났다.

궁인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다시 홀라당 뒤집어진 태자비의 겉옷 끝을 정돈해 주며 태자전에 사람을 보낼 것을 청했다. 태자비는 더는 옷자락 끝을 펴지 말 것만 명했다.

시간은 차근차근 빠르게 흘렀다.

온전히 한 시진이 지나자 정천궁 안에서 밖을 살펴보는 이가 나왔다. 태자비는 예법에 따라 얌전히 시선을 내리고 서 있기만 했다. 상황을 아뢰고, 홀로 문안을 올리는 방법을 청하고 싶었으나 들어줄 얼굴이 아니었다. 궁인들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정천궁 안에서 짧은 고성이 터져 나왔다.

새벽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태자비가 제대로 위엄을 갖추었다 하나 아직 아이였다. 어린 볼이 찬바람에 시시각각 발갛게 부어 갔다. 제북이 아무리 추운 곳이라지만 한겨울 새벽바람을 두 시진 가까이 맞고 서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의 불호령도 두렵지만, 이러다 태자비가 잘못될까 그게 더 무서웠다.

“……가까이.”

옆으로 긴 눈을 치뜨며 아이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울림이었다. 수석 시비에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궁인은 오물거리는 입술이 내뱉는 말을 듣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예?”

그녀의 얼굴이 입술 가까이 왔을 때.

“잘 받으시게.”

아이가 이전보다 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다시 한 번 명을…….”

귓속말을 할 때보다 더 조그만 목소리에 궁인은 예의 바르게 청하려 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속삭이던 아이의 몸이 순간 옆으로 넘어갔다. 수석 시비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비전하!”

겨울 찬바람에 꽁꽁 언 머리가 여인의 팔 안으로 쓰러져 내렸다.

“태의! 어서, 태의를 불러라!”

“비전하! 들리시옵니까.”

정천궁 앞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태자비 전각 안은 나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따스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이는 정천궁 앞과는 완전히 달랐다. 찬바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기만 했다. 용아는 뺨에 와 닿는 따스함에 느릿느릿 눈을 떴다. 쓰러질 땐 잠시 엄살을 부릴 요량이었는데, 진짜로 쓰러진 것처럼 푹 잠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용아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격렬한 외침이었다.

“비전하!”

“…….”

“시끄럽게 무슨 호들갑이냐! 조용하지 못할까.”

용아를 지켜보고 있던 궁인의 외침에 수석 시비가 다가와 엄중히 호통을 내렸다. 귀에 닿는 소리는 궁인 쪽이 컸으나, 머리로 와 닿는 소리는 수석 시비 쪽이 훨씬 컸다. 용아는 둘의 짧은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용아의 말에 궁인이 재빨리 고해 올렸다.

“쓰러지셨습니다, 마마.”

염려가 가득한 어린 궁인의 목소리에는 묘한 반가움이 묻어났다.

“태의는?”

용아의 말에 방의 문이 열렸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태의가 문밖에 서서 예를 올리려 했다. 용아는 여전히 누운 채였다. 아이는 흘러내린 이불을 목 위까지 당겨 올리며 손을 침상 밖으로 삐쭉 내밀어 살살 저었다.

용아의 손길을 본 수석 시비가 태의를 향해 말했다.

“예는 되었소.”

작은 손짓도 곧바로 알아보는 여인을 아이가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망극하옵니다.”

태의는 다시 한 번 예를 차리고 안으로 들었다. 또래보다 작은 아이의 손이 수석 시비의 옷 끝을 살그머니 쥐고 짧게 흔들렸다.

“너희는 물러가도록 해라.”

별것 없는 손짓을 이해한 것인지 여인이 다시 명했다.

“예.”

방 안 곳곳에 서 있던 궁인들이 머리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섰다. 곧 문이 닫혔다. 용아의 손이 여인의 옷자락을 놓고, 태의가 쥐기 쉽도록 침상 밖으로 내어졌다.

태의가 태자비의 손을 잡기에 앞서 다시 예의를 차린 말을 늘어놓으려 했다.

“어떤가.”

아이는 태의가 예를 올릴 틈을 주지 않았다. 주름진 손안에 어린 손을 쑥 들이밀고 짧게 말했다. 태의는 맥을 짚으며 쓰러진 아이를 달랠 만한 말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혼례일이 잡혀 심적으로 무척 고단했다네.”

게으르게 누운 아이가 고압적으로 떠들었다.

“제북에서 중경까지 얼마나 먼지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온몸이 다 아팠어. 거기다 이 몸은 어리지 않은가? 심신을 달래려면 얼마나 요양을 하는 게 좋겠나.”

열두 살 아이가 엄히 말했다.

“…….”

태의는 말이 없었다. 아이는 아픈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건강한 상태였다. 쓰러졌다고 해 왔을 때도 달리 아픈 곳은 없었다.

“반년은 너무 기옵고, 석 달 정도가 어쩔는지요.”

방 안에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다.

“…….”

태의가 말없이 눈동자를 굴려 소리가 난 쪽을 살폈다. 궁인 중 유일하게 남은 수석 시비였다. 태후와 황제, 황후가 삼중으로 걸러 고른 태자비 전각의 수석 시비는 온후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눈길은 서늘했고, 표정은 후궁 마마님들보다 더 삼엄했다.

“석 달 정도면 괜찮겠지.”

아이가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그리 말하는 얼굴은 태의를 직시하고 있었다. 어서 말을 하라는 표정이었다.

“석 달 정도 정양하시는 것이 좋, 좋겠나이다…….”

태의가 더듬더듬 동의했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하였네.”

치하의 말까지 빈틈없이 건넨 아이가 손을 거두었다. 순식간에 어린 손이 쑥 빠져나갔다. 태의는 자신을 본체만체할 고귀한 분께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몸을 일으키던 그는 비척비척 돌아눕는 어리고 가는 아이의 등을 보고 주춤했다. 방금 전까지 오만하게만 느껴졌던 태자비가 새삼 조그만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찬바람을 맞은 후유증이 남아 있는지 아이가 몸을 옹송그렸다. 어린 등이 더욱 가련한 모양이 되었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한 번 예의를 올린 태의가 방을 나섰다.

가짜 환자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태자비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채비하고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기보다 이부자리에 붙어 어리광을 부릴 나이다. 함께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할 태자가 혼례일 이튿날부터 바람을 맞춰, 두 시진 가까이 겨울 찬바람을 맞았으니 없는 병이라도 가지고 싶을 터다.

무엇보다 태자비의 말 중 그른 것이 없었다. 아이는 긴 여정을 오기에 어린 나이였다. 바삐 치러진 혼례에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했으니 심적으로도 고단할 것이다.

“대인.”

태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수석 시비가 그를 불렀다.

“상궁. 비전하의 정양에 힘써 주시오.”

슬쩍 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든 시비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여인이 안도 가득한 웃음을 퍼트리며 예를 올렸다. 그녀는 어느 틈에 손을 내밀어 태의의 손에 은전 주머니를 쥐여 주며 온후하게 속닥였다.

“예, 안쓰러운 분이시죠.”

“으흠. 그러게 말이오. 이 사람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부르시게.”

“살펴 가소서.”

태의는 받은 뇌물을 잽싸게 챙겨 넣으며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이러면 안 되는데 말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살펴 가라는 여인의 말에 부지런히 끄덕이고는 전각을 빠져나갔다.

전각의 큰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요한 전각 안에서 울리는 소리는 예의 바르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고운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어 소리의 끝이 비틀댔다. 잠결에 들려온 분분한 인사에 용아는 눈을 떴다가 다시 천천히 감았다. 평화롭던 공기가 조심스럽게 술렁였다. 삭막한 침묵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방 앞을 지키는 온후한 수석 시비 역시 휘청이는 목소리로 예를 올렸다.

“……전, 전하…….”

방을 지키는 문들이 연이어 열렸다. 한겨울이라도 한낮은 햇살이 화사했다. 경첩이 사납게 접히며 침상이 놓인 방 안 깊은 곳까지 밝은 햇살이 파고들었다.

공포, 혹은 위엄.

그것은 당금 황가의 권능이다. 황족의 혈통을 이은 특별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위엄. 그가 권능을, 위엄을 드러내면 사방이 고요에 잠긴다. 숨소리마저 잦아드는 침묵을 부르는 것이 황족이 드러낸 권위가 가지는 힘이다.

황가의 혈족이 그가 가진 권능을 떨치면 상대는 숨을 쉴 수 없고, 오한을 느끼고 겁에 질리며, 저절로 굴종을 표한다고 했다.

황족, 황실 적통이 갖는 권능은 황가 안에서도 가장 드높다 하였다.

열어젖힌 문 안으로 키가 큰 사내가 들어왔다. 남자가 걷는 걸음마다 황족의 고결한 권능과 권위가 담겨 있었다. 빛 속을 성큼성큼 걸어 든 남자가 침상 위의 금침을 뜯어내듯 걷어 냈다. 휙, 소리와 함께 이불이 저만큼 날아갔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위는 공포에 질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같은 소리를 퍼트렸다. 겁에 질린 걸음들이 주춤주춤 두려움에 휩싸여 물러났다.

순식간에 주위가 텅 비었다. 사위가 기묘하도록 고요했다. 모두 도망간 모양이었다.

호화로운 침상 위, 어린 소년만 남았다.

“얼마나 아프시기에 석 달이나 정양을 하시나.”

용아의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자신과 아이 사이를 가로막는 침상의 천개를 옆으로 치웠다. 손길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얇고 섬세한 천개가 커다란 손에 곧장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빈 침상에 앙상한 모양으로 누워 있던 아이가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방금 잠에서 깬 듯한 굼뜬 움직임이었다. 한 호흡 느리게 현실을 이해하는 소년의 행태에 사내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송구하게도 죽을병은 아닙니다.”

용아는 잠이 달라붙은 눈가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뭐.”

침상 앞에 선 사내가 기가 차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아이는 저보다 두 배는 큰 것 같은 남자를 말갛게 올려다봤다. 남자는 소년의 신랑이었다. 소년은 남자의 신부였다. 그가 용아를 질색하듯이, 용아 역시 사내에게 관심 없었다.

“송구합니다.”

제 몸이 짓눌러 구겨진 보료를 손으로 펴며 용아가 말했다.

“너.”

태자의 낮은 목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없었다. 전각 전체가 정말로 텅 빈 것 같았다. 아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소인이 미령하여 일어나 태자 전하를 맞을 수 없습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 송구합니다.”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 무심히 속닥였다.

“당장……”

아이의 무례한 태도에 사내가 소리를 높이려 했다. 용아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태자께 아름다운 양제가 있다지요.”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죠. 전하께서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말이죠. 아침에 양제와 노셨습니까?”

아이의 말에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투기하는 것이냐?”

남자의 말에 용아야말로 코웃음을 쳐 주고 싶었다.

“태자께 광증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뭐라.”

“혼례에 앞서 예법을 가르치기 위해 온 상궁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예법을 무엇보다 중히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태자와 태자비는 아침과 저녁으로 웃어른께 문안을 올린다 들었죠. 얼마나 바쁘시기에 그리도 중한 예법을 거스르셨습니까. 궁금하여 여쭌 것입니다. 혹, 양제와 노는 것 외에 태자께 더 중한 일이 있습니까.”

소년의 뒷머리로 큼직한 손이 겹쳐졌다.

“감히!”

침상 안에 있던 용아가 태자의 손에 휙 끌려 나왔다. 남자의 큰 손이 당기는 대로 아이가 그의 앞에 놓였다. 아이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힘없이 휘청였다.

“태자께서는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불한당인가 봅니다.”

머리채를 움켜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고 싶으냐.”

“나를 죽이면 황실은 장군부와 전쟁을 하시겠지요.”

“감히……!”

“십일 후족은 1년 전에 새로 수장을 정했습니다. 결집을 위해서 가장 좋은 건 전쟁이라. 역사에 길이 남을 태자가 되시겠습니다. 제북 복씨 성들과 불화를 이끌어 낸 태자가 되시겠어요. 6대만에 제북 복씨 성들과 황실이 전쟁을 다시 하면 흥미롭겠습니다. 누가 이길지 궁금하네요. 당장 이 손 치우시죠.”

소년을 억압하고 있던 커다란 손이 물러났다. 멈칫멈칫 분노로 떨리던 사내의 손은 금세 고요해졌다.

“그런 건 누가 알려 주었지?”

저만큼 높은 곳에서 저음이 울렸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러신가.”

남자가 험악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석 달 뒤에 예법이나 제대로 익혀 오십시오.”

소년이 야무지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짧은 정적 후에도 대답은 울리지 않았다. 어린 얼굴에 침묵으로 감싸인 묵묵한 시선만 건네졌다.

고요함에 지친 용아가 무심히 시선을 내렸다.

“……다시 오지.”

한참 뒤에야 남자가 목에 뭔가 걸린 듯한 목소리로 답하며 돌아섰다.

오지 마.

커다란 등을 보며 소리 없이 입술 모양으로 용아가 웅얼거렸다. 제멋대로 열린 문을 나서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

돌아선 남자가 물었다. 용아는 어설피 딴청을 부렸다.

“…….”

황가는 특별한 일족이라 했다. 사내는 키가 크고 헌앙했다. 반듯한 이마에 그린 듯한 눈썹, 우아한 콧대에서 입술, 턱으로 내리는 선이 훌륭했다. 황족만이 가지는 권능을 부린다고 했으나 그것은 용아와 무관했다. 용아는 혼례 후 처음으로 황가, 황족, 사내의 특별함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소리 따위 내지 않았다. 기척으로 알아챌 수 있겠으나, 용아는 뒷말하기에 서투르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을 나서던 사내가 돌아왔다.

“아까 머리 잡아챈 건 미안했다.”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

용아는 침상 끝에 앉아 모르쇠로 일관했다.

“곧 다시 오마.”

태자가 선전포고 같은 말을 건네고 갔다. 용아가 돌아선 뒷머리를 향해 불손한 시선을 올리려 했고, 순간 문을 나서던 얼굴이 돌아보려 했다. 용아가 한 발 더 빨랐다. 소년은 내린 시선을 재빨리 먼 곳으로 던졌다. 안을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그대로 떠나갔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궁인들이 돌아왔다. 난장판이 된 방 안을 본 궁인들은 재빨리 수습하였다. 순식간에 방이 평온을 되찾았다.

“수차(茱茶)를 들여라.”

잘 정돈된 침상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비전하께서 수차를 즐기시옵니까.”

침상 안을 향해 온후한 목소리가 물었다.

“응.”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태자비 전각 영화대의 시녀 목교는 오늘도 서고로 향했다. 영화대 앞의 영교 건너에 있는, 월주대에서 가장 큰 전각이 동궁의 서고였다. 열두 살 소년은 고아한 시서가 담긴 서책과 병법서를 동시에 읽는 재미난 취향의 웃전이었다.

아침이면 일찌감치 서고로 향하는 그녀에게 빌려 올 책의 이름을 이르는 태자비에게 목교는 배시시 웃고는 했다.

영화대 수석 시비 모장이 듣는다면 필시 무엄하다 엄히 화를 낼 테지만, 태자비다운 고아한 서책과 사내애다운 병법서의 간극이 퍽 귀여웠다.

서고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는 목교의 앞에 불쑥 그림자가 내렸다.

“어허!”

갑작스레 날아든 목소리는 얇고 신경질적이었다.

“……마마님을 뵈옵니다.”

목교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적당한 예를 올렸다. 요령이라면 부족치 않았다. 건넨 말이 불손하거나, 그르지도 않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정숙해야 할 궁인이 어디 넋을 놓고 다니는 것이냐?!”

귓가에 날아드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목교의 어깨가 움칠했다. 짧게 올린 시선에 스쳐 가는 얼굴은 소문이 자자한 상대였다. 태자가 그토록 아낀다는 양제의 수석 시비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목교는 얼른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렸다. 그럴 필요까지 없다 생각하였으나 혹여나 괜한 시비에 말리는 것보단 피해 가는 게 상책이었다.

“허허허. 네가 나를 아주 고약한 것으로 만드는구나?”

그러나 돌아온 것은 비틀린 말이다.

“송, 송구하옵니다…….”

내뱉을 말은 하나뿐이었다. 목교는 그저 운이 없다 생각하였다. 태자비 전각의 시비로 가면서부터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조금 과하게 이를 뿐이었다. 힘없는 아랫것의 삶이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 부족함을 알렷다?”

“네, 마마님. 송구하옵니다.”

“네 뺨을 스스로 치거라!”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처사였다.

“…….”

목교는 어처구니가 없어 무엄하게도 양제의 수석 궁녀를 빤히 올려다봤다. 담 상궁은 내려진 명에 건네지는 황망한 시선을 보고는 얇은 눈썹을 팍 찡그렸다.

“버릇없는 것!”

목교의 뺨으로 철썩! 무서운 소리가 내려쳐졌다. 노회한 상궁의 손은 매섭고 단단했다. 철썩! 철썩! 사나운 소리가 영교 위에서 끊이지 않고 울렸다.

용아는 방 안에서 수차를 들고 있었다. 눈치 빠르고, 그보다 손은 더 빠른 수석 시비 모장이 챙겨다 준 것이었다. 수차의 부드러운 맛이 입 안에 번질 때 바깥에서 소란한 소리가 쑥덕였다.

방 앞에 있던 모장이 급히 시비들의 소리를 가라앉혔지만, 놀란 소리와 훌쩍이며 설명하는 어눌한 목소리를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재주 좋은 모장은 모여 있던 시비들을 얼른 물렸다. 격렬한 술렁임 후의 정적은 썰렁하기까지 했다.

용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밖에 있는가.”

기척도 없이 문이 열리고 엄격하게 머리를 조아린 모장이 안으로 들었다.

“찾으셨습니까.”

“밖에 무슨 일이지?”

“별일 아니옵니다.”

용아는 내렸던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태자비의 시비가 맞고 들어온 게 별일이 아니야?”

“비전하.”

“아랫것들의 일은 모장에게 일임하기로 했지. 그렇다고 모자란 상전이 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일이지? 대답해.”

여인의 얼굴에 곤란함이 잔뜩 서렸다.

“양제 마마의 수석 시비 담 상궁이 저희 아이의 버릇없음을 문제 삼아 손찌검을 하였습니다. 이는 궁인들 간에 위계와 예의범절 문제이오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아이의 얼굴에 기묘함이 흘렀다.

“맞은 이는 누구지?”

“목교이옵니다.”

“월주대 서고에 책을 빌리러 다녀오는 궁인 말이지.”

“기억하시옵니까.”

“칭찬은 되었어. 내 방에 드는 궁인 이름 정도는 아는 방 주인이 되고 싶으니. 그런 건 대단한 게 아니거든. 의원을 불러 다친 궁인의 상처를 살펴 주고, 당분간 책을 빌리러 서고에 가는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어. 그만 물러가도 좋다.”

용아의 명에 모장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물러가옵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어린 입술에서 한숨이 훅 내뱉어졌다. 평온은 짧고도 짧았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귓가로 내리는 목소리는 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영기 발랄했으나, 모장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이것 봐. 용두문이야!”

용아가 웃는 얼굴로 타박타박 달려 나갔다. 모장의 얼굴은 용아가 돌아보는 순간 잠시 펴졌으나 이내 다시 염려로 가득 차올랐다.

“비전하! 뛰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비전하!”

궁인들은 수선을 부리며 앞서 달리는 상전을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녀들은 말로는 아니 된다고 하지만, 이곳에 온 후로 처음으로 열두 살다운 모습으로 웃으며 뛰노는 태자비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함께 내달렸다.

모장은 태자비가 다친 궁인이 다 나을 때까지 직접 서고에 가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불온한 의심을 품었다.

설마?

의혹은 짧고도 강렬했으나 곧 지워 버렸다. 태자비는 어리지만 위엄이 있는 웃전이었다. 어설프게 굴 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분주히 상전을 뒤따르며 생각했다. 바깥의 날이 좋고, 겨울이라도 산책 정도는 하는 게 맞았다. 그러니 어떤 문제도 없을 거라고, 최면을 걸 듯 긍정적인 것만 떠올리려 애썼다.

“어서 뒤따르거라. 비전하를 놓쳐선 아니 된다.”

모장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편, 낮춘 목소리로 궁인들에게 명했다.

“여기는 용두가 있다!”

아이가 웃는 얼굴로 궁인들을 돌아봤다. 웃는 얼굴에 구김이라고 없었다. 무얼 해도 어여쁠 때였다. 떼쓰지 않고, 느닷없는 신경질도 없고, 의젓한 아이의 아이다운 웃음에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이곳에 용두가 많으냐고 순진하게 조잘대던 아이의 얼굴에 표정이 없어진 것은 일순간이었다. 만복을 기원하는 무늬가 새겨진 조벽을 따라 걷던 한 무리가 태자비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태자 전하이십니다.”

저편의 일행을 살핀 모장이 낮춘 음성으로 아뢰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장의 말을 들은 궁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일사불란하게 줄을 맞추어 선 궁인들이 태자 일행을 향해 예를 올렸다. 예를 올리는 궁인들의 앞으로 나선 용아 또한 태자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가 영화대에 다녀간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일어나세요. 모두 일어나라.”

모두 알 수 없는 조마조마함 속에 있을 때 태자가 관대한 음성으로 말을 내렸다. 태자비가 몸을 일으키고, 이어 뒤에 서 있던 궁인들도 예에 거스르지 않을 만큼만 몸을 일으켰다.

모장과 궁인들은 보고 말았다.

산책 중인 태자의 곁에 중경제일미로 소문난 양제가 있었다. 청초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양제는 들은 대로 부드럽고 순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마친 용아를 향해 양제가 예를 올렸다.

“…….”

양제의 예는 그른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희고 갸름한 얼굴을 알맞게 내려 웃전에 대한 예를 보이고, 눈은 내려뜨고, 한쪽 무릎은 완전히 굽히고 다른 쪽 무릎은 살짝 굽혀 붙여 완전히 낮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단 끌리는 소리 하나 퍼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몸짓에 입가에 살며시 어린 미소까지. 아름답고 음전한 후궁의 표본 같았다. 트집 잡을 곳이라곤 없는 예를 올리는 아름다운 여인을 어린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낯선 침묵이 감돌았다.

“으흠.”

태자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눈치를 주듯 목을 울렸다.

“누구십니까.”

아이가 순박한 얼굴로 속살거렸다.

“이 사람의 정인이네.”

태자가 재빨리 답했다. 특정 누구에게 답을 구한 건 아니었다. 용아는 아아, 하고 느릿하게 깨달음의 소리를 흘렸다. 낯선 침묵이 조금 더 짙어졌다. 태자의 시선이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용아의 얼굴에 건네졌다. 아이는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 따위 알지 못한다는 듯 말간 시선을 아름다운 여인에게 던졌다. 예를 올린 상대가 일어나라 하명하지 않았기에 양제는 여전히 예를 올리고 있었다. 굽힌 무릎과 낮춘 몸은 후궁의 여인답게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귀인이셨군요.”

아이가 순수하기까지 한 어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양제가 반듯하게 답해 올렸다.

“듣던 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용아가 흑심이라곤 없는 맑은 목소리로 양제를 치하했다.

“과찬이시옵니다.”

양제가 다시 답했다. 태자의 양제가 된 후로 이토록 오랫동안 예를 올리고 있었던 적이 없어 그녀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 용아는 용두를 바라볼 때와 같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양제의 주위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만.”

낮게 깔린 목소리가 경고조로 울렸다. 태자였다. 남자의 삼엄한 저음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이가 순진하게 떠들었다.

“뒷머리 비녀가 아름답네요.”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양제의 대답이 있고, 다시 아이의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이어졌다.

“어디의 진주인가.”

“송구합니다, 비전하. 소인이 미욱하여 그런 것에 밝지 못하옵니다. 혹 알게 되면 비전하께 아뢰겠나이다.”

“진주를 좋아하시는가.”

양제를 향해 순진한 물음을 던지는 얼굴은 선하기만 했다.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사옵니다.”

답하는 양제가 위태위태하게 흐트러졌다.

“지금 무엇 하는 것인가.”

용아와 양제 사이에 끼어들며 태자가 예를 갖추어 험악하게 하문했다.

“궁금한 것이 있어 묻는 것이옵니다.”

“일으키고 물어.”

“태자 전하께서 잠시 잊으신 듯한데, 태자비에게 주어진 몇 가지 권한이 있습니다. 예를 받고, 하문할 권한이지요. 제게 주어진 것을 쓰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저는 그저 동궁에서 후궁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낯설어 관심을 갖고 살펴본 것뿐입니다. 이 사람의 과한 호기심이 그릇되었다면 송구하옵니다.”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

할 말이 많은 듯한 사내의 얼굴이 잠깐 머뭇거렸다.

“제가 방해를 한 것 같아 송구합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만 가자. 갑자기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아.”

“괜찮으시옵니까, 비전하.”

모장이 재빨리 용아를 싸고돌며 주인을 이끌었다.

“응, 괜찮아.”

“어서 들어가 누우셔야겠습니다.”

그곳에 머물렀던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열두 살 어린 태자비가 신분을 앞세워 양제를 예의 바르게 핍박했다.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태자비는 끝까지 양제를 일으켜 주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일어나라.”

태자는 잘못 손대면 혹여나 부서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양제를 일으켜 주었다. 부드럽고 순한 인상이지만 황궁 예의 법도에 밝은 양제는 태자의 명에도 불구하고 예를 올린 당사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송구합니다.”

“그 녀석이, 태자비가 아직 어려 철이 없다.”

“그런가요.”

태자의 두둔해 주는 듯한 말에 양제의 순한 얼굴이 묘하게 차가워졌다.

“데려다주마.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해라.”

“예.”

어깨를 감싸 오는 태자에게 자연스레 몸을 기대며 고운 얼굴이 답했다. 양제의 얼굴은 건드리면 눈물이 묻어날 것처럼 처연했다.

아름답고 순하며 우울한 얼굴을 살피는 담 상궁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동궁 안 위계를 적당히 알려 주려 한 것인데 어린 태자비가 이리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태자에게 초야에 소박맞고, 이튿날 아침에도 외면 받아 쓰러진 어린아이가 태자비의 본모습인 줄만 알았다.

고귀한 출신에 오냐오냐 자라 성격이 있는 모양이지만 담 상궁의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지금도 태자가 손수 처소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제 주인의 현재 위세였다. 황궁 후궁이란 자고로 총애의 순서에 따라 급별이 정해지는 것이었다.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총애가 없다면 허명에 불과했다.

“그만 쉬거라.”

양제의 처소를 나서며 태자가 다정히 읊조렸다.

“예, 전하.”

처연한 여인은 무도하게도 침상 위에서 가볍게 예를 올렸다. 그녀 자신도 그녀의 정인도 그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 부드러운 시선이 오갔다.

“헌데.”

전각을 나서기 직전 태자가 침상 위의 양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유순한 여자의 얼굴에 순한 의문이 떠올랐다.

“……?”

“동궁의 후궁들이 태자비에게 예를 올리러 가지 않았나.”

건네진 말은 부드러웠다.

“송구합니다, 전하.”

침상에 앉아 연인과 일별하던 여자가 다급히 침상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며 분분히 떠든다.

“일어나라.”

태자가 침상 곁으로 돌아와 다정하게 명했다.

“송구하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옵고, 태자비께 인사를 올리러 가야 하는 날 비전하께서 쓰러지셨다 하여 예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예를 올리러 가는 것이 맞사오나, 그날 융각의 맹소훈(昭訓)이 아파 가지 못하였나이다.”

“탓하려는 게 아니다.”

“송구합니다.”

태자의 부드러운 말에도 양제는 쉬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귀족 출신이긴 하나 변변찮은 가문,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태고자 황궁의 시중 궁인으로 들어온 여자는 조심성도, 겁도 많은 유한 성격이었다.

“몸이 나아지거든 태자비에게 예를 올리도록 해라.”

“예, 전하.”

“어서 일어나, 안안. 그만 쉬어라.”

태자는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여자를 달래어 주고 전각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태자의 곁으로 재빨리 태감이 붙어 섰다. 태감의 뒤로 어린 소공공들과 궁인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어디로 모시오…….”

태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태자가 걸음을 옮겼다.

“영화대로 간다.”

툭 던지듯 말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었다.

“영화대로 모시겠습…… 전하, 소인이 모시겠…… 전하! 혼자 가시면 위험하옵니다.”

긴 다리로 앞서 가 버리는 태자를 따라 태감과 궁인들이 종종 걸음을 이었다. 영화대로 향하는 남자의 뒷등이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태감의 손짓에 뒤따르는 이들의 움직임이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그러나 앞서 가는 태자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남자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영화대 안으로 들어선 태자를 향해 예가 올려졌다. 태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전각의 더 깊은 안으로 향했다. 영화대 침전 앞을 지키고 있던 모장은 가까워져 오는 소리에 미리 하명 받은 말을 올리려 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어…….”

주무시고 계시다, 라는 모장의 목소리 위로 벌컥! 전각문이 사납게 밀쳐지는 소리가 겹쳐졌다. 태자를 따라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열릴 때처럼 험악하게 닫힌 문 너머로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곁에 있는 태자비 전각의 궁인들과 태자를 뒤따라 온 태자의 궁인들마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침전에서 한참 먼 곳으로 떠밀리듯 물러난 이들이 곤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전하께서는?”

태감이 울적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안에 드시었소.”

“비전하는……?”

“안에 계십니다.”

답을 뇌까리는 모장의 얼굴 역시 울적했다.

“양제께서 벌선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시어 전하께서 해원으로 직접 데려다주시었소.”

태감이 넌지시 건넨 말에 모장이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앙큼한 년.”

모장의 말에 태감의 얼굴이 흠칫 굳혀졌다. 두 사람은 뒤따라서 선 궁인들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기에 저들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모장답지 않은 말과 행동이었다.

“모 상궁.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하지 않소. 안에는 태자께서 들어 계시고 말이오. 양제께서 첩실이라 하나 좋은 상전이라 동궁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인에게는 앙큼한 년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심하지 않소.”

태감이 다독이듯 말하였다.

“태자께서 비전하께 저러시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지요. 이 사람도 동의하오.”

“안에서 무얼 하실까요.”

“알 수가 있나…… 장군부 후족이 특별하긴 하군. 전하께서 성질을 부리면 우리네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숨이 막히는데 비전하께서는 아무렇지 않은가 보이.”

“태자께서 언제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전각에 단단히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럴 거라는 걸 알기는 했다.

“일어나.”

밖에서 제법 예를 따지는 태자 전하인 척하던 사내가 문을 다 때려 부술 것 같은 기세로 들어와 험준한 음성으로 명했다. 덮고 있던 이불이 걷어지고, 침상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익히 예상했기에 용아는 반항 없이 명에 따르며 우선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키가 저만치 큰 남자가 아이의 머리꼭지에 대고 말한다.

“꿇어.”

게으름뱅이 깨우듯 이불을 걷더니 이제는 멍멍이 취급이었다. 용아는 벌 받는 애처럼 무릎을 꿇으며 태자비에게 이럴 수 없음에 대해 항의하려 했다. 아이의 얼굴을 본 남자가 무릎을 접어 시선을 낮추었다.

“태자비가 잠시 잊은 듯한데, 태자에게 주어진 몇 가지 권한이 있다. 예를 받고, 하문할 권한이지. 내게 주어진 것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먼 곳에서 어렵게 온 신부가 신기해 관심을 표하는 것뿐인데.”

귓가로 흐르는 익숙한 말에 아이의 얼굴로 야유가 흘렀다.

따라쟁이.

용아는 힐긋 시선을 올렸다가 금세 내렸다. 얼굴로 내리는 남자의 차가운 시선에 비틀린 분노가 가득했다.

“더불어 본 태자는 동궁에 기거하는 이들의 발을 묶고 풀 수 있지. 금족령을 내려드릴까. 아니면, 전각에 드나드는 사람의 발길을 전부 끊어드릴까.”

아이의 얼굴에 울컥함이 치솟았다.

가진 게 권력뿐이냐? 나쁜.

입술 안에서 오만 가지 투덜거림이 울렁였지만 소리 내어 내뱉지는 않았다. 자신이 한 짓이지만 그게 칭찬받을 행동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안함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태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하는 태자비의 주위를 거닐며 떠들었다.

“복씨 성의 의복은 아무리 봐도 구분하기가 어려워. 이건 사내 옷이냐, 여인의 옷이냐.”

태자가 손끝으로 툭, 옷자락을 건드리며 왈패처럼 시시덕거렸다.

유치하다, 진짜.

용아는 묵묵히 모른 체로 일관하려 했다. 볼 때마다 희한하단 말이야, 라고 신경을 긁는 소리에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복씨 성의 성인식인 홍문에 들기 전까지 입는 소년 소녀의 옷입니다. 사내의 옷도, 여인의 옷도 아니지요. 폐하의 모후이신 태후마마도, 전하의 모후이시며 돌아가신 공황후께서도 이와 같은 것을 입으셨을 겁니다. 복씨 성의 의복은 성인의 것도 사내의 옷, 여인의 옷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불충한 소인은 태후마마와 돌아가신 공황후마마와 같은 의복을 입을 테지요. 볼 때마다 희한한 그것 말입니다.”

남자의 눈썹이 사납게 좁혀지다가 머쓱하게 펼쳐졌다.

“한마디도 안 지냐.”

태자가 구겨져 앉으며 투덜거렸다.

“…….”

용아는 다시 못들은 척, 모르는 척, 들리지 않는 척했다. 무릎을 꿇고 시각이 꽤 지나 있어 슬슬 발끝부터 저려 왔다. 말문이 막혔으면 그만 자리 털고 일어나 주었으면 싶지만 태자는 갈 기미가 없었다. 콩콩. 주먹 쥔 작은 손이 무릎과 종아리를 조심스레 두들겼다.

“어허.”

쓸데없는 위엄을 갖춘 저음이 귓가로 내린다.

쳇.

용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묵묵히 있던 아이가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비 다 털었으면 그만 가라는 투의 눈이었다. 소년과 시선을 맞춘 채로 태자가 말했다.

“그이는 나의 하나뿐인 정인이다.”

용아는 답하지 않았다.

“태자비라는 허울뿐인 신분을 내세워 동궁을 어지럽히지 마라.”

“약속할 수 없습니다.”

“인마.”

“제게 예의를 갖추세요. 태자 전하. 제가 황실과 전하께 예를 갖추는 것처럼. 태자께 주어진 것을 쓰십시오. 금족령을 내리시고, 이 전각에 오는 발길을 다 끊으시면 되겠습니다. 저도 필요하면 제게 주어진 것을 쓸 겁니다.”

남자가 웃으며 용아를 내려다봤다.

“태자비가 귀하게 커서 뭘 모르나 보군.”

서늘하고 음험한 웃음이었다. 워낙 흉흉한 기세라 순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지만 용아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아이가 야무지게 대꾸했다.

“알았다, 인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태자의 형상을 한 사내가 불한당처럼 껄렁하게 굴었다. 태자비에게 예를 갖추라고 용아는 엄히 말할 작정이었다. 남자의 큰손이 아이의 부드러운 귀를 장난과 포악함을 담아 비틀었다.

“아야, 야야.”

낯선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다.

“나중에 후회해도 늦었다.”

태자는 음험한 얼굴로 험악하게 협박을 건네고 성큼성큼 가 버렸다. 훌쩍 가 버리는 남자를 쏘아보며 무릎을 일으키려는 용아를 향해 전각 안을 돌아본 영준한 얼굴이 예의를 갖춰,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모양새가 딱 뒷골목 왈패 같았다. 후회하긴 누가 후회를 하냐고 얼른 일어나 쏘아 주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아야야.”

긴 시간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온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일어나려던 무릎이 콩 바닥을 찧었다. 얼얼한 아픔과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울컥 치밀었다.

그날 밤 모장과 영화대의 궁인들은 용아가 수차례 되었다 거부했음에도 날이 샐 때까지 어린 발을 주물러 주었다. 궁인이 궁주(宮主)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도움을 받을 때마다 고맙다 서슴없이 치하의 말을 건네는 어린 주인은 그날 밤에는 드물게도 조그만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모장과 영화대의 궁인들은 다 쉬어 버린 것 같은 어린 목소리가 가여워서 더욱 열성적으로 주인을 보살폈다. 아이는 방탕한 상전이 된 것 같다고 말하며 열없이 키득거렸다.

다정하고 서러운 밤이 쓸쓸히 지나가고 있었다.

영화대의 호화로운 전전 앞으로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자가 차례로 들었다. 세 명의 여자가 직책에 맞게 서자, 영화대의 궁인들이 일제히 예를 올린다.

“영화대의 노비들이 양제를 뵈옵니다.”

“영화대의 노비들이 소훈을 뵈옵니다.”

“영화대의 노비들이 봉의(奉儀)를 뵈옵니다.”

세 여자는 궁인들의 예에 짧게 고개만 까닥였다.

“송구하옵니다. 양제마마. 소훈마마. 봉의마마. 바쁘게 연통을 받아 준비가 미흡하지는 않을는지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세 분께서 영화대를 찾아 주신 것에 태자비 전하께서 무척 기꺼워하셨사옵니다. 하오나 아직 연치가 어리신 분이라 오늘처럼 때때로 기별도 없이 잔병치레를 하십니다. 혹여 몰라 천개를 내려 두었습니다. 오늘은 짧게 예만 올리고 가 주소서.”

모장의 부드러운 말에 양제가 순한 얼굴을 끄덕인다.

“그리하겠네.”

여자의 답에 모장이 전전의 문을 밀쳐 열었다.

“드시지요.”

전각의 문이 열리고 천개가 꼼꼼하게 내려진 침상이 드러났다. 침상 곁에 선 어린 시비가 천개 너머를 향해 나직하게 속닥였다.

“양제이십니다.”

유순한 미인은 시비가 말을 마치길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천개가 내려진 침상을 향해 곧 양제가 예를 올렸다.

“진가의 안이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미욱한 양제의 인사가 늦어 송구하옵니다. 고귀하신 비전하를 모실 수 있어 광영이옵니다.”

“찾아와 주어 고맙네, 양제. 물러가 보세요.”

“물러가옵니다.”

천개 안의 용아가 유려하게 대꾸했다. 까딱까딱.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아이는 발끝을 까딱이며 다음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한 사람이 들어오고 한 사람이 나가기를 기다리는 틈틈이, 달콤한 것을 집어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훈이십니다.”

시비의 말이 있을 때만 잠시 먹는 것을 중지했다.

“맹씨가의 위이가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부디 무탈하시기를 비옵니다.”

“찾아와 주어 고맙네, 소훈. 물러가 보세요.”

“물러갑니다.”

천개 안을 유심히 보는 맹씨를 용아 역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맹씨가 나가고 잠시 문이 닫힌 틈에 시비가 낮춘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비전하, 앉으시는 게 어떨까요.”

“내 곤하여.”

“맹소훈께서 눈치채셨음 어쩌죠? 맹소훈의 부친은 우승상 맹방 대인이라고요. 지금 중경에서 맹씨가 위세는 왕공 대신들만큼 높습니다.”

“앞을 봐.”

“……봉의이십니다.”

용아의 말에 시비가 재빨리 열린 문을 보고 속닥거렸다. 익히 듣고 배워 아는 것이라 시비의 말은 허례에 가까웠지만 없어선 안 되는 역할이라고 했다.

“경가의 수가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비전하, 홍복을 누리소서. 비전하를 모실 수 있어 광영이옵니다.”

“찾아와 주어 고맙네, 봉의. 물러가 보세요.”

“물러가옵니다.”

전전의 문이 닫히자마자 용아가 침상 위에 벌러덩 누웠다. 내내 속닥속닥 잔소리를 하던 시비는 피로해하는 아이의 모습에 걱정 어린 말을 건네었다.

“비전하. 피곤하시어요?”

용아는 누운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태평히 웅얼거렸다.

“나도 문후 올려야 해.”

“비전하께서 정양하시어야 하니 석 달 후부터라고…….”

“그야 형식상이지.”

소년은 데구루루 옆으로 굴려 몸을 일으켰다. 전전의 문이 열리고 주위를 물린 모장이 안으로 들었다. 천개를 곱게 접어 거두고, 붙잡을 수 있게 손을 내어 기다렸다. 용아가 온후한 여인의 손에 손을 겹치자 모장이 입을 열어 말하려 했다.

“응, 그렇게 해.”

아이가 듣지도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모장이 웃었고, 어린 시비는 상궁의 명이 내려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영화대에서 나온 긴 무리는 차분히 영교를 지나고 있었다. 월주대 권역을 지나고 있을 때, 맹소훈이 코웃음을 치는 것 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상궁이 빗장 하나 놓치지 않고 걸어 잠근 영화대를 보는 눈길에 삐딱함이 잔뜩 번져 나왔다.

“꾀병이 아닐까요?”

의심 가득한 그녀의 말에 양제가 얼른 대꾸한다.

“그런 말 마세요.”

“으흥. 열두 살이라고 했지요? 낯선 누이들이 한참 무서울 때지요.”

깔깔 웃기까지 하는 맹소훈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넘쳐 났다.

“아이들은 이유 없이 잘 아프다고 했습니다.”

곁에 나란히 걷고 있던 봉의도 양제를 거들었다.

“양제 언니. 봉의 동생. 선량한 자매님들과 달리 본궁은 태자비가 아픈 게 꾀병 같습니다. 열두 살이면 어리긴 해도 클 만큼 컸지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빨리 크는데요. 본궁의 친정에 어미 다른 어린 남동생들이 많은데 그즈음 남자애들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답니다. 어쩌면 투박한 비전하의 외모를 전하의 후궁들에게 보여 주기 두려워 숨은 것일지도 모르죠.”

맹소훈의 자신만만한 말에 양제가 한쪽 윗입술을 구겼다.

“위이.”

“왜 그리 부르오.”

“비전하는 우아한 소년이야. 투박함과는 멀어. 동생의 기대를 벗어나 아쉽겠어.”

“봤습니까.”

“전하와 산책을 하다 마주쳤었지.”

“평이 아주 후하십니다.”

맹소훈의 시비를 거는 듯한 말에도 양제는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유순한 미인은 친절한 표정으로 어린 태자비에 대해 말했다.

“제북에서 한참 먼 황궁에 홀로 와 있으니 혼란하지 않겠어? 내가 부족해 예를 올리는 게 늦어진 게 부끄러울 따름이야.”

“지금 열두 살이라 까마득히 어린 것 같지만 금세 커서 우릴 다스리려 할 거요.”

“태자비 전하이시니 태자 전하의 후궁인 우릴 다스리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까.”

양제와 봉의의 너그러운 말에 맹소훈이 고운 얼굴을 마구 구겨 댔다.

“그게 무슨 천신 같은 소리들이에요. 애들은 금방 커요. 지금 이런 말한 걸 후회하게 될걸.”

“아직 한참이나 어리잖아.”

“미리미리 틀을 잡아 두어야죠.”

맹소훈이 지지 않고 경고를 날려 댔다.

“어린애한테 투기하여 무엇해.”

“이제 겨우 열두 살이죠.”

양제와 봉의의 말에 맹소훈이 한숨을 훅 내쉬었다.

“두 분은 천계의 상제라도 되시나 봐요. 본궁은 아닙니다. 설마 지레 포기한 건 아니죠? 황실 종친들이 말하는 것처럼 후족 출신 태자비가 오면 모든 게 다 알아서 된다는, 근본 없는 말에 넘어간 건 아니겠지요? 입궁할 때에도 그랬지만, 본궁은 입궁하기 전부터 장군부 비가 오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그 말이 정말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지금껏 선제들께서는 복씨 성 정후를 얻고 나면 유일한 정인으로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며 사셨다지만, 지금의 태자께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궁에 후궁을 들인 것도 특이한 이력이라지요.”

봉의의 동조하는 말에 맹소훈이 즐거운 얼굴로 덧붙였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맹소훈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먼저 가 보겠다, 말을 건네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떠나가는 맹소훈을 향해 양제와 봉의 또한 인사를 건넸다. 갈림길에 서서 떠나가는 맹소훈을 보며 양제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저러다 혼쭐이 날 거야.”

“별일 없겠지요.”

“별일이 있어선 아니 되지. 봉의도 이만 들어가 봐. 이 사람도 가 보겠네.”

양제의 말에 봉의가 날렵하게 예를 올렸다.

“들어가시어요.”

양제는 선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순한 인상의 미인은 영화대와 한참 멀고, 태자의 침전이 있는 금당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자신의 처소로 가만히 걸어갔다. 태자가 특별히 마련해 준 거처인 해원으로 들어선 유순한 미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호락호락하지 않단 말이야.”

태자는 말했었다.

‘나중에 후회해도 늦었다.’

그때 용아는 들은 체도 않았다.

후회는 무슨!

비웃었던 것도 같다.

“…….”

동궁의 세 여자가 다녀간 오후부터 영화대 밖이 소란했다. 싸움이 일었거나, 사고가 난 게 아니었다. 공사였다. 토목공사. 별안간 시작된 공사는 이튿날에도 이어졌다.

영화대 앞 영교가 해체되었다.

덕분에 영화대의 궁인들이나 영화대로 찾아오는 이들은 빙 둘러 다녀야 했다.

내가 왜 그랬지.

해가 뜨자마자 시작된 공사에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용아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태자께 주어진 것을 쓰십시오. 금족령을 내리시고, 이 전각에 오는 발길을 다 끊으시면 되겠습니다.’

태자는 태자비에게 금족령을 내리지도, 전각으로 향하는 발길을 강제로 끊지도 않았다. 그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했다. 금족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둘러가는 수밖에 없어져 영화대 궁인들의 외부 출입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영화대를 찾아오는 발길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가기 번거로운 탓에 드물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오지 않는 거야 용아에게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보다는 부지런한 인부들이 만들어 낸 소음이 문제였다. 커다란 돌을 정으로 때리는 깡깡! 사나운 소리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깡깡깡! 깡깡!

안으로 들어온 모장이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밖은?”

“송구하오나, 언제나 끝날지 모른다 합니다.”

“비겁한…….”

태자가 친히 명한 공사라고 했다. 몇 날 며칠 이어지는 중인 공사가 끝나지 않는 것 또한 태자가 친히 내린 명일 터였다. 절대로 일부러였다.

나쁜.

용아가 아픈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끙끙 앓았다. 모장이 힘겨워 하는 소년의 귀에 손을 겹치며 안타까운 얼굴로 그 얼굴을 살폈다. 어린 주인이 아무리 가여운 아이이고, 그녀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하는 궁인이라도 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안타까움에 애타는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비전하.”

영화대의 궁인들은 며칠째 끊이지 않는 소음에 태자비가 고집을 꺾고 태자를 찾아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금세 담 상궁에게 이유 없이 핍박을 당하고 돌아온 목교를 떠올리고는 태자비께서 하신 행동은 그른 게 하나 없다고 덧붙였다.

모장 또한 갈팡질팡했다. 종일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태자비를 달래어 태자의 심술을 거두게 하는 게 좋지 않나 생각했다. 소리에 괴로워하는 아이와 힘겨워 하는 궁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 결말을 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영화대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터였다.

“안 되겠다. 나가자.”

침상 위를 뒹굴며 괴로워하던 용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예? 예…….”

잠시 불충한 기대에 설레었던 모장이 얼른 표정을 정돈하며 답했다. 침상에서 내려온 아이는 의심의 기색조차 없었다.

“태후전에서는 소식 없는가?”

“아직 없사옵니다.”

“아무튼 얼른 나가자.”

용아는 따듯한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향했다.

영화대의 문이란 문은 전부 걸어 잠그고 모든 궁인을 챙겨 나온 용아는 동궁 가장 외곽에 있는 이원으로 향했다. 모장과 궁인들은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 두려고 했다. 아이는 되었다고 말하며 큰 종이에 ‘외출 중’이라는 날렵한 글씨를 써 정문 입구에 붙이고 모두에게 나갈 것을 명했다.

“아이…… 머리 울려.”

용아의 과장된 투덜거림에 궁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퍼트렸다. 한적하고 소란 없는 곳으로 와 모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왕 나왔으니 이원의 기암괴석 동산과 폭포를 보고, 방문객을 위해 마련해 둔 전각으로 가 따뜻하게 몸 녹이며 식사를 한 후, 해 떨어져 공사를 멈출 즈음에 영화대로 돌아가자고 야무지게 계획을 세웠다.

“그나저나 영교 공사는 언제쯤에 끝날까요.”

목희의 걱정 가득한 말에 모장이 따끔한 시선을 보냈다.

“그야…….”

어린 얼굴이 불온함이 확 느껴지는 말을 내뱉으려다 멈칫했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나!?”

위엄이 켜켜이 스며 있는 엄격한 외침에 모두 잠시간 얼어붙었다. 이원 안 영화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제집 두고 다른 곳에 와 눈치를 보게 되니 서럽기까지 했다.

그때 고요하던 이원 곁으로 분주한 발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겁에 질린 듯한 발소리에 궁인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저희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모장의 곁에 서 있던 목희와 목담이 곱게 고해 올리고, 이원의 입구로 향했다. 이원은 동궁의 서쪽을 넓게 감싸고 있는 화원을 가리키는 말로, 특별히 입구와 출구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이원 권역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었고 살펴보겠다고 나선 이들이 향하는 곳은 이원의 권역이 끝나는 경계 부근이었다.

“금죽헌에서 들려온 소리 같습니다.”

저편으로 향하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금죽헌? 폐하의 별원 말인가.”

“예…….”

용아의 물음에 모장이 답하고 있을 때. 태자비 전각의 궁인다운 품위를 갖추어 걷고 있던 목희와 목담이 겁에 질린 아이처럼 걸음을 멈추더니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쳐 댔다.

“가 볼까.”

“비전하, 아무래도…….”

금죽헌에 객을 들였던 황제가 분노하여 주위를 물린 것 같았다.

“할 일도 없잖아.”

용아는 위로하듯, 자조하듯 히죽거리는 말을 내뱉고 재빨리 뒷걸음질 치고 있는 궁인들 곁으로 향했다. 태자비의 허락하에 이원 곳곳에 흩어져 꽃을 구경하던 영화대의 다른 궁인들 역시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제 주인을 찾아왔다. 모장이 궁인들을 다독여 열을 맞추고 있을 때. 휘리릭, 바람 소리가 나도록 재빠르게 한 사내가 이원 앞으로 도망쳐 달려 나왔다.

“정군 왕 전하…….”

머리에 쓴 관모가 벗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짓누르며 내달리는 중년 사내를 모장이 알아보았다.

“아, 모 상궁, 본 왕은 바빠서 이만.”

정군 왕이라면 황가의 종실 어른이었다.

“살펴 가시옵소서.”

수염이 휘날리도록 내달리는 황친을 향해 모장이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모장의 인사에 알은체도 않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리던 중년 사내는 이원을 한참 벗어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거 말도 못 하게 하시나!”

질색하며 도망치던 황실의 어른께서 뒤돌아서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뭐라!?”

금죽헌이 있을 법한 곳에서 험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

불쑥 든 생각은 귀도 밝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청도 정말 좋은 것 같다.

“비. 비전하.”

모장과 궁인들이 용아의 옷깃을 손끝으로 감쳐 잡으며 뒤로 끌려 했다. 우르르르. 정군왕이 뛰어온 곳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뒤이어졌다. 발소리와 마찬가지로 영화대의 궁인들 또한 전보다 훨씬 뒤로 물러났다.

“좌공공……!”

모장이 다시 한 번 알아본 얼굴을 향해 말했다. 옷 끝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내달려 나온 공공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장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아, 모 상궁…… 여기는 어인…… 태!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즈음 멈출 수 있다는 것에 겨우 안도하던 공공이 용아를 보고 다급히 예를 올렸다.

“모두 예는 되었습니다. 숨부터 고르세요.”

“송구하옵니다, 비전하.”

공공과 궁인들의 어깨와 등이 들썩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괜찮으신가.”

용아는 법도에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만 친근하게 말했다.

“그럼요. 아무렇지 않사옵니다.”

대답하는 공공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용아는 이원에 놀러 오며 챙겨 온 물과 마실 것들을 내주라 손짓으로 명했다. 좌공공을 따라 뛰어 왔던 공공과 궁인들은 질서정연하게 서는 한편, 영화대 궁인들이 건네는 마실 것들을 감사히 받아 들었다.

달려온 이들이 한숨 돌렸을 때, 용아가 좌공공의 곁으로 가 섰다.

“저곳에 폐하가 계신가?”

“예, 비전하.”

“홀로 계신가?”

용아의 물음에 좌공공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렇사옵니다. 허나 전혀 염려하실 것 없사옵니다. 소인들이 잠시 멀어졌으나 주인께서 찾으실 때 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탓하는 것이 아니네.”

“아옵니다. 폐하께서 주위를 물리실 때 가까이 갈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요. 태자 전하 외에는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하지요. 다행히 이후로 특별한 일과가 없으니 잠시 예서 머물렀다가 폐하가 부르실 때 돌아가도 되옵니다.”

좌공공의 친절한 말에 용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장.”

“예, 비전하.”

“잠시 다녀오겠다.”

용아가 모장을 향해 말했다.

“예……?”

모장은 용아를 챙겨 몇 걸음쯤 더 뒤로 물러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기다리고 있어. 입궁한 지 한참인데 내가 부족하여 아직 폐하께 문안 한번 제대로 올리지 못했지 않나. 얼른 다녀오겠다.”

“비, 비전하.”

“나는 괜찮다. 있어라.”

용아는 모장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훌쩍 돌아섰다. 영화대의 궁인들이 기겁하여 아이를 말리려 했으나, 용아가 금죽헌 쪽으로 몇 걸음 내딛자 더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금죽헌으로 향하는 길은 짙은 정적뿐이었다.

개미 하나 없는 것 같은 고요한 계단을 올라, 텅 빈 회랑을 걸어 든 용아는 난간 앞에 서 있는 금빛 용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키가 큰 용포의 주인이 자그마한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돌아서는 이를 향해 용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태자비인가.”

“이리 늦게, 법도에 어긋나게 문안을 올려 송구하옵니다. 불효를 용서해 주소서.”

“아니다. 어서 일어나라.”

황제의 너그러운 말에 용아가 다시 예를 올렸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폐하라니. 부황이라 부르렴, 아가.”

황제가 눈가가 다 접히도록 웃으며 용아에게로 다가섰다.

“제가 고작 열두 살이라고 하나 아가는 아니옵니다, 부황.”

용아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며 조곤조곤 떠들었다. 황제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고, 용아가 내리고 있던 시선을 설핏 올렸다. 황제가 돌아서는 순간 잠시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용포의 주인과 태자는 탁본을 찍은 것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세월이 조금 덜 흐르고, 더 흐르고의 차이밖에 없었다.

“어찌 그리 멈추었느냐.”

잠시 완전히 잊고 있던 얄미운 얼굴이 새삼 생생히 떠올랐다. 순식간에 기분이 꿍해졌다. 용아는 얼굴 위로 표정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잘 다잡으며 얌전히 답했다.

“아니옵니다.”

황제는 웃음을 지우고 한참이나 작은 아이를 바라봤다.

“나를 닮은 놈이 너를 괴롭히기라도 하느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이가 움칫했다.

“……조금요.”

조금 많이 괴롭히는 것 같지만 당신 아들을 너무 욕하면 싫으실 테니 적당히 타협하였다. 아니라고 위로 담긴 말을 고해 올릴 수도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날 것 같았다.

“어허. 고얀 놈. 짐이 놈을 때려 줄까?”

황제와 태자의 말버릇마저 같아서 용아는 진심으로 움칫했다. 용아는 말없이 그저 살짝 웃기만 했다. 대답 없는 아이를 향해 황제가 다시 말했다.

“말만 하거라. 이 부황이 황제니라.”

용아가 조금 더 웃었다. 소리가 옅게 실린 아이의 웃음은 새 지저귐처럼 어여쁘고 깨끗했다.

“다시 한 번 부황이라 불러 보거라, 아가.”

황제의 명에 용아가 입을 열었다.

“부황.”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오냐. 왜 부르느냐.”

황제의 능청스러운 말에 용아가 끝이 올라간 눈을 올려 짓궂게 웃는 얼굴을 보았다.

“부르라고 하시기에 불러 보았습니다, 부황.”

“오냐. 잘하였다.”

“부황께서 홀로 쉬시는데 허락 없이 온 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란다.”

“다행이옵니다.”

“네가 와 주어 정말 좋구나, 아가. 짐이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거늘 못된 성질을 다스리지 못해 모두를 쫓아 버렸구나. 황가 적통의 고약한 습생이지. 나를 닮은 놈이 어쭙잖게 굴어 우습겠으나, 부디 가엾게 여겨 살펴 주련. 황족은 외로운 자들이란다.”

용아의 얼굴에 드물게 서늘함이 감돌았다.

“태자께는 소중한 정인이 있으십니다.”

“아직 나를 닮은 녀석이 부족하여 저의 짝을 못 알아보는 것뿐이야. 태자의 진정한 짝은 아가, 너뿐이란다. 놈이 너에게 많이 못나게 구느냐?”

“아닙니다.”

용아가 고개를 내리며 답했다.

“우리 새아가는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부황께서는 지금의 황후마마와 잘 지내시지 않으십니까.”

“짐은 황후를 존중한다. 황후도 짐을 존중해 주지.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긴 하나, 그이가 나의 짝은 아니다.”

“저는 부황과 황후마마처럼 태자 전하와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용아의 말에 황제가 멈추어 서며 인자하게 답했다.

“너희가 아직 어려 서로가 반려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곧 알아볼 날이 올 거다. 운명이란 거스를 수 없단다.”

“반드시 운명이 정한 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부황.”

“냉정한 말을 하는구나. 그런 말 말아라. 나를 닮은 놈이 정말로 못나게 구는 모양이야. 큰일이군. 그리 밀어내지 말고, 못난 녀석이 잘못하더라도 한번쯤 더 기회를 주련. 짐도 오며 가며 좋은 이들이 있었으나, 짐의 짝은 오직 공후밖에 없다. 나는 짝을 잃었지. 한번 짝을 잃은 자는 잃은 짝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평생 짝을 가질 수 없고, 홀로 황량한 시간을 보낸단다. 네가 없으면 태자 또한 그렇다. 외로운 녀석을, 태자를 가엾게 여겨 주렴.”

용아는 시선을 내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염려 가득하고, 안타까운 시선이 아이의 얼굴에 건네어졌다. 앞서 걷는 황제는 강건했고, 외로움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무례한 말을 올릴 수는 없었다.

“부황의 말씀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아가.”

“하지만 저는 운명이 정한 대로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황. 어쩌면 정해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 무례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문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물러가 보고자 합니다.”

“물러가도 좋다.”

“물러가옵니다, 부황.”

텅 빈 금죽헌 안을 어린 발이 부드럽게 거닐었다.

“…….”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는 비단처럼 소리도 없이 물러가는 등을 주름진 얼굴이 침통하게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던 황제가 떠나는 어린 등을 보다 의아한 소리를 내뱉었다. 부드럽게 걷는 어린 뺨의 곁으로 시커먼 사내가 다가서고 있었다. 당신의 아들, 태자였다.

“못난 놈.”

황제는 태자를 본체만체하는 용아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황제를 뵌 것은 좋았다. 황제는 위엄이 있으시고, 현명하시며, 넓고 깊은 너그러움 또한 가지고 계셨다. 황제를 뵙고 나오며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물러가기를 청하기 직전 조금 방자하게 굴었으나 당신을 부황이라 칭하는 분이 들려준 말들은 거스를 것 하나 없는 좋은 것들이었다.

좋은 대화를 곱씹으며 걷는 길은 만족스러웠다. 헌데 어째서 즐거워야 할 되돌아가는 길이 갑자기 혼란해진 것인지 용아는 짜증스럽기만 했다.

“부황을 뵈었느냐.”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사내가 불쑥 말했다.

“예.”

용아는 길을 걷는 중이라는 핑계로 태자에게 예를 올리는 것을 임의로 생략했다. 거기다 태자는 뒤에서 나타났다. 태자가 따로 시비를 걸지 않아 그대로 쭉 무시하고 갈 요량이었다.

“혼자서도 문안을 잘 드리는군.”

사내의 말에 어린 얼굴에 픽 웃음이 번졌다. 황제와 독대할 때 퍼트렸던 웃음과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용아가 예고도 없이 멈추어 서며 뒤따르던 남자를 올려다봤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잘난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눈에 밟혔다.

외로운 이?

그것만큼은 황제께서 완전히 틀렸다.

“이유가 뭡니까.”

용아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갑자기 이유라니…….”

태자의 어울리지 않는 발뺌에 용아는 버릇없이 입술만 오물거려 웅얼댔다. 모자라긴. 태자라면 충분히 입술 모양을 읽어 용아의 버릇없는 말을 알아챘을 테지만 용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따져 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따지고 들 틈을 주지 않았다.

“태자께서 저와 함께 부황과 황후께 문안 인사를 올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씀입니다.”

용아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매일 밤 양제와 한 침상을 쓴다.”

태자가 머쓱한 얼굴로 목을 울리며 나지막이 고백했다.

“송구하오나, 저는 태자 전하의 밤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용아의 비딱함 가득한 말에 태자가 다시 목을 울렸다.

“제 나이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쓸데없는 말들은 안 하실 수 없습니까.”

“거 송구하게 되었다. 매일 한 이불 덮고 자는 정인을 두고 다른 이와 부황과 모후께 문안을 드리는 게 가당치 않아 태자비 전하께 폐를 끼치게 되었네.”

“그게 이유입니까?”

“정인을 속상하게 할 수 없다.”

태자의 말은 진솔하기까지 했다.

“못나셨습니다.”

용아가 자신보다 저만치 더 큰 사내를 향해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평생 살며 누구에게 못났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는 태자가 어린 소년이 쏘아 올린 말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멈추었다.

“못났…… 어이. 야, 거기 안 서?”

남자가 순식간에 조그만 아이를 따라잡아 앞을 가로막았다.

“왜,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너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태자가 차마 어린애를 칠 순 없어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것만으로 위협이 될 텐데 비틀린 말을 쏘아 댄 어린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제가 워낙에 귀하게 커서 배움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한 말은 결단코 틀리지 않았다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전하, 참으로 못나셨습니다.”

“나도 귀하게 컸다, 비전하.”

태자가 비스듬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아도 삐뚤게 웃었다.

“양제께서도 귀하게 크셨답니까?”

“지금 양제가 왜 나오지.”

“양제가 당신 속이 상하니 태자께 주어진 책무를 거스르라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몹쓸 첩이네요. 그게 아니면 양제도 전하처럼 모자랍니까. 전하께 정혼자가 있고 태자비가 오면 언제고 자신 위에 정부인이 올 줄 몰랐답니까.”

“내가 아껴 주고 싶은 것뿐이다.”

남자의 단단한 음성이 정적 속에서 울렸다.

“양제는 모자라지 않고 무능한 모양입니다.”

“그 입 다물어.”

“양제가 가련한 정인이라 지켜 주어야 하신다는 뜻 아닙니까. 그녀가 무능하고 연약하기에 전하께서 지켜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의 말이 잘못되었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침을 주시지요.”

아이의 말은 무례했으나, 그의 분노는 합당한 것이었다.

“너도 언제고 좋아하는 이가 생기면 알게 될 거다.”

“웃기는 소리.”

“이봐, 비전하.”

태자는 그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인내 속에서 말했다.

“못났다, 못났다 하니 진짜 못나게 구십니다. 나라고 태자비가 되고 싶어 이 먼 황궁에 끌려온 줄 알아? 나라고 아저씨 같은 형한테 시집오는 게 좋겠어?! 황가만 없으면 나는 평생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고귀하게 태어난 만큼 그에 따르는 책무가 있으니 나는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여기에 있어야 해. 전하도 태자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요. 태자의 권한으로 동궁 안 다리는 부수겠으나, 태자의 책무는 모른 척하십니까. 그것참 편리한 황족이 아닙니까. 태자께서 황족으로 태어나 영화로운 삶을 사시는 만큼 황족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셔야 할 겁니다.”

용아가 말을 쏟아 내듯 내뱉었다.

“…….”

남자는 쌩하니 돌아서서 가 버리는 소년을 멈춘 채 바라보기만 했다. 모자라는 것을 대하는 우아하고 어린 얼굴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떤 질책도 할 수 없었다.

태자를 지나쳐 냉랭히 걸어가던 아이가 몹시도 울컥한 얼굴로 돌아왔다.

“소중한 정인을 아껴서 지켜 주어야 한다고요? 이곳, 황궁이 보살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까.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이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 했습니다. 전하의 정인께서는 험준한 황궁에서 오랫동안 무탈하게 살아온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하긴 입궁한 지 고작 며칠인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실례하였습니다.”

용아가 다시 한차례 말을 쏟아 내고 획하니 가 버렸다. 내내 표정 없는 얼굴로 차갑게 지적하던 아이의 말도 남자를 거세게 두들겼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바들거리며 분통을 터트리는 작은 얼굴이 쏘아 내는 말은 또 다르게 그를 흔들었다. 조그만 뒷모습이 시선에서 사라졌을 때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정말 못났군.”

돌아서는 태자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자의 직속 태감인 등우의 눈이 쉴 새 없이 옆을 힐끗거렸다. 오늘 결판을 내겠다, 금죽헌으로 바람처럼 갔던 주인은 무섭도록 고요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원에서 금당대로 향할 때 영화대 앞을 지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나, 다른 길도 있는데 굳이 이쪽으로 지나는 것도 평소답지 않았다. 영화대 앞은 영교 공사로 소란하고 빙 둘러가야 했다.

먼 길을 돌아 금당대로 향하던 태자가 문득 멈추었다.

“등우.”

“예 있습니다.”

“태자비가 일전에 용두를 구경하러 나왔다 마주치기 전에 동궁 주변을 구경하고자 영화대에서 나온 적이 있나.”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이후에는?”

“오늘 이원으로 나서시기 전까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태자가 시선을 내려 태감을 바로 보았다.

“영화대와 해원 사이에 별고 없나.”

태자의 의문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등우는 한껏 몸을 낮추고 답했다.

“그것이 영화대와 해원 사이의 일이라 할 수는 없사 온데…….”

“무슨 일이 있나?”

낮은 목소리가 등골을 타고 고르는 것만 같았다.

“황궁 안에서 궁인들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야.”

“노, 노비의 불찰이옵니다. 부디…… 그것이…… 해원 양제마마의 수석 궁녀인 상궁 담씨가 영화대 궁인을 예가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핍박하였다 합니다. 영교를 지나는 어린 궁인을 불러다 담씨가 뺨을 치는 걸 본 이가 여럿이옵니다. 담씨가 평소에도 궁인들을 엄히 다스리고, 영화대에 속해 있다 하나 그릇된 궁인을 혼내는 걸 잘못이라 볼 수 없기에…… 담씨에게 혼나지 않은 동궁 궁인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상궁이 새로 들어온 궁인을 상대로 질서를 바로잡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등 태감이 부지런히 변명의 말을 늘어놨다.

“아니, 틀렸다.”

태자가 완전히 몸을 돌려 태감과 궁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등우를 비롯 뒤따르고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죄를 청하며 무릎을 꿇었다.

“노비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왜 내게 고하지 않았나? 시끄럽다. 헛소리 말고 대답이나 마저 해라.”

“죽여 주십시오…… 그것이 태자비 전하께서도, 영화대의 상궁도, 피해 궁인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서 으레 있는 위계 잡기로 취급하고 넘어가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태자의 눈썹이 한껏 좁아 들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소인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담씨 행패에 당하지 않은 궁인이 있는 전각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허니 영화대에서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가나 보다 한 것이지요.”

태자가 긴 한숨을 토했다.

“태자비께서는 자신의 것은 스스로 지키는 똑똑한 아이라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곳에 괜한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알아서 처리한 것이다. 나와 너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게지. 아주 책임감 투철한 상전이야. 본받도록 해. 앞으로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제대로 해라.”

“허면 담씨를 치울까요.”

태자의 명에 몸을 일으킨 등 태감이 큼, 목과 코를 울리며 말했다.

“치워라.”

고민 없는 목소리가 명을 내렸다.

“명을 따르옵니다. 하온데, 전하. 담씨는 양제께서 해원에 들기 전부터 아껴 온 궁인입니다. 어머니처럼 따른다 하더이다. 전하께서 양제를 귀애하시지 않습니까. 양제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기에, 양제의 주위를 깨끗이 하는 담씨를 묵과해 주신 게 아니옵니까.”

등우가 조심스럽게 주인의 의중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귀애하는 총희는 총희. 위계는 위계다. 궁인들 간의 위계를 잡는다? 틀렸다. 총희의 궁인이 제 주인의 총애를 믿고 위계를 거스르려 하는 것이지. 양제가 나의 정인이라 하나 태자비 위에 설 수는 없다. 모두 명심하도록 해라.”

“분부 받잡사옵니다.”

“오늘밤은 금당대 침궁으로 가겠다. 내일 아침 식사에 세 사람을 초대해라. 태자비전의 다친 궁인에게 내릴 약재를 보내 주고, 문후를 올릴 수 있는 시일을 확인받아 오도록 하라.”

태자가 하명을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등 태감은 바쁜 걸음으로 주인의 뒤를 따르는 한편, 뒤따르는 공공에게 시선을 보내어 명을 내렸다. 태자 뒤로 길게 따르는 궁인들 중 일부의 태감과 궁녀가 유려하게 떨어져 나와 각각 제 할 일을 찾아 떠났다.

해원 안 후전은 고요하고 분주했다. 사방으로 소리 없이 뛰어다닌 발들이 곤란한 움직임으로 문 앞에 돌아왔다. 궁인들의 조용한 내저음을 본 벽 상궁이 눈을 뾰족하게 했다가 닫힌 문을 향해 고해 올렸다.

“마마, 더는 지체하기 어렵사옵니다. 등 태감이 해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에 어리는 그림자에 궁인들이 재빨리 문을 당겨 열었다.

“담 상궁은?”

문이 열리고 양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양제의 단장을 덜한 얼굴을 본 벽 상궁의 눈이 한번 더 삐쭉해졌다.

“어젯밤 나선 이후로 보이지 않습니다. 쇤네가 아이들에게 명을 내려 일대를 다시 샅샅이 훑어보겠습니다. 어서 준비하셔야지요.”

벽 상궁은 수심 가득한 얼굴을 능숙하게 경대 앞에 앉혔다. 고상한 손놀림으로 장식대에 나와 있는 머리 장식을 차례로 상궁이 올려 보였으나, 처연한 인상의 순한 미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내내 돌아오지 않은 건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닙니까. 깊은 밤에 들어온 걸 아이들이 못 본 걸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이니 누가 깨기 전에 나가서 간혹 이리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자 전하를 뵈러 가는 것인데 웃는 얼굴을 보여 주셔야지요.”

한참 걱정에 잠겨 있던 양제가 희미하게 관심을 드러냈다.

“등 태감이 직접 와 있다고?”

“예, 그렇답니다. 일어나 보시지요. 너희들은 무엇 하느라 장신구도 덜 챙겨드렸단 말이야! 시각이 다급하니 우선은 이것들로 단장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시지요. 양제께서 나가시니 문을 열거라!”

벽 상궁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각의 문이 열린다.

“그리 노여워 말게. 본궁이 게으름을 부린 탓이지. 이 사람 위해 고생하는 고마운 이들이 아닌가.”

“양제께서 이리 너그러우니 혹여 못된 이들에게 괴롭힘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소인은 걱정이 크옵니다.”

양제의 유순한 말을 벽 상궁이 엄격한 태도로 받았다. 상궁의 말에 해원 궁인들의 어깨가 잔뜩 좁아 들었다. 주인이 너그럽다 하여 아랫사람 역시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벽 상궁이 순한 주인을 재촉해 해원 밖으로 바삐 나갔다. 벽 상궁이 나가고서야 전각 안의 궁인들이 긴 숨을 토해 냈다. 주인과 주인 곁에서 위세를 떨치는 상궁이 떠나자, 전각 안에 정적이 깔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 앞을 지키는 궁인들이 낮춘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담 상궁께서는 어찌 되신 걸까.”

“궁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끝이 좋게 났단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잖아.”

고요 속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봤어요? 양제마마 얼굴이 하룻밤 새 반쪽이 됐어요.”

“해원 밖에선 드세다, 험악하다, 여인네 같지 않다, 흉흉한 소리를 듣지만, 순하다 못해 물렁한 양제께는 담 상궁 같은 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벽 상궁 마마 으스대는 걸 앞으로 어떻게 봐. 양제마마님보다 좋은 집 출신이라 본래도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담 상궁께서 언사가 거칠긴 해도 따듯한 분이시지. 그에 비해 벽 상궁께서는 우릴 사람처럼 보시지 않잖아.”

앞으로를 걱정하는 속닥거림이 끊이지 않고 고요 속에서 울려 퍼졌다.

동궁 전체를 관할하는 등 태감이 직접 모시러 온 것은 좋은 징조다. 해원으로 태자께서 직접 납시어 주는 것도 좋지만, 양제는 태자의 침전이 있는 금당대로 부름을 받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태자비가 입궁했다고 하나 오늘의 이 부름은 태자의 정인은 그녀라는 걸을 알려 주는 것이리라. 그녀의 정인은 너그럽고 다정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니 태자비가 있다 해도 이 정도 특혜는 당연했다.

“드시지요.”

양제 얼굴이 흐려진 것은 짧은 복도를 거닐어 안으로 들기 직전이었다. 유순한 입매 끝에 걸쳐 있던 부드러운 웃음이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맹소훈의 목소리와 봉의의 동조와 태자의 웃음.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굳어 든 얼굴에 억지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세 부드러운 웃음으로 탈바꿈했다. 웃음은 천천히 잦아들어 처연하고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고해 주시게.”

양제의 말에 문이 열리고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왔느냐.”

앞서 들려온 소리가 예고한 대로 안에는 소훈과 봉의가 이미 와 있었다. 태자의 말에 옅은 웃음으로 답한 양제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올리는 양제에게 미리 와 있던 두 여자가 몸짓으로만 예를 취했다. 태자가 손짓으로 세 사람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늦었다. 어서 앉아라. 넷이 다 같이 식사하는 것은 오랜만이던가?”

정사각형 탁자에는 벌써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태자의 앞자리에 앉은 양제가 짧게 대답했다. 양제의 성의 없는 대꾸에 각각 탁자의 다른 면에 앉은 소훈과 봉의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오랜만이 무업니까. 한참 되었습니다. 섭섭합니다, 전하. 이제 태자비까지 계시니 저희한텐 얼굴도 아니 보여 주시는 것 아닙니까? 해원에는 끊이지 않고 드시니 양제마마야 전하 뵐 일이 가득하겠지만, 저희 둘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이러다 전하의 얼굴을 잊어버리겠습니다.”

평소 사람 좋은 얼굴만 하고 있는 봉의까지 한마디 더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

태자가 장난스레 웃으며 아부를 하듯 두 여자의 그릇에 음식을 챙겨 올렸다. 소훈도 봉의도 평소 없는 호사에 웃음을 흘리며 송구함을 표했다.

“…….”

양제의 얼굴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안안. 네가 뭐라도 말해서 나를 도와주어야지.”

“그런가요. 제가 무어라…….”

“헌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인다. 힘들 때는 내가 부르는 것이라 해도 거절하여도 괜찮다. 무리 마라.”

태자의 부드러운 말에 내내 표정 없던 양제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아닙니다.”

소훈과 봉의 사이에 짧은 시선이 오갔다.

“오늘 셋을 따로 부른 것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다. 세 사람도 이미 들어 알겠지만 동궁에 새 사람이 들어왔다. 셋은 잘 볼 일 없는 먼 곳에서 온 사람이다.”

“태자비 전하 말씀입니까?”

“세 사람도 인사를 하고 왔으니 보았나.”

“태자비께서 몸이 좋지 않아 천개를 내린 채로 인사를 올려 아쉽게도 얼굴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태자의 말에 소훈과 봉의가 차례로 말을 받았다.

“아직 연치가 어려 종종 그리 아픈 것 같더군.”

“몸이 약하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마지막으로 양제가 말을 건넸다.

“워낙에 귀하게 자란 사람이라 주위가 조금만 바뀌고 번다하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인 듯하다. 장군부의 수장이자 대가주이며, 하후가(家) 가주의 조카로 귀하게 큰 이이니 그럴 수밖에. 거기다 아직 한참 어리지 않느냐. 태자비가 어리고 귀하게 커 까다로운 신분이니, 혹여 아이가 모나게 굴어도 세 사람이 전부 이해해 주도록 해라. 나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태자비 전하이니 말이다. 비전하 허락이 떨어져야 부황과 모후께 문후를 올릴 터인데. 말만 이럴 게 아니라 보약이라도 지어 보내야 할까 싶다. 태자비가 허한다고 해도 문안 올리러 가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황족이 다 그런 거지. 황족이 이리 살기 팍팍한 것이다. 모쪼록 동궁이 시끄럽지 않도록 세 사람이 수고해 다오.”

태자의 긴 당부에 세 사람이 머리를 조아려 답했다. 시야를 내린 얼굴들 사이로 짧은 시선이 오갔다.

“어서들 들자. 식사하다 무엇들 하느냐.”

태자의 명에 세 여자가 재빨리 수저를 들었다.

새벽이 걷히지 않은 어스름한 시각. 찬바람이 부는 길을 조심스러운 발길이 분주히 내디뎠다. 금당대에서 영화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거리를 내달린 등우가 영화대 앞에 당도했을 때.

“오셨습니까.”

영화대 앞에 일찌감치 나와 있던 궁인이 태감을 반갑게 맞았다.

“준비되셨는가.”

“예.”

등 태감의 물음에 궁인은 곱게 답을 올리고, 안을 향해 격한 끄덕임을 건넸다. 바깥을 살피고 온 목희가 전각 안을 빠르게 달려 닫힌 문 너머를 향해 웃는 얼굴로 외쳤다.

“왔습니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소란은.”

앞서 나온 모장이 웃는 얼굴로 궁인을 흘기며 방 안을 향해 손을 내었다. 다정한 손 위에 어린 손이 살며시 겹쳐지고, 빈틈없이 단장한 소년이 밖으로 나왔다.

“고생하였다.”

아이가 먼 전각과 전각 사이를 한달음에 달려온 궁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목희는 무얼요, 겸손히 말하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다. 다른 쪽 손을 잡아 시중을 돕는 궁인에게 손을 내준 채 용아가 휴우,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힘드셔요?”

“응. 힘들다. 문안 한번 드리기가 녹록지 않아.”

아이의 너스레에 두 여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퍼트렸다.

“비전하.”

“그런 말씀 마셔요.”

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하며 용아가 걸음을 옮겼다. 전각 밖으로 발을 내딛던 소년이 조금 더 느릿느릿, 움직임을 늦추며 혼잣말을 소곤거렸다.

“왔군.”

영화대 앞에 선 태자가 표정으로 가볍게 아는 체를 해 왔다. 밖으로 나선 용아가 태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

“오셨소.”

태자 또한 살짝 몸을 움직여 예를 표하며 말을 내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문안에 앞서 부부간에 예를 올리고 받았다. 나란히 선 태자와 태자비가 정천궁을 향해 거닐었다. 일찌감치 태자 내외가 오기를 기다리던 정천궁의 태감이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았다. 따로 고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전각 안으로 모셔졌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을 뵙습니다.”

태자와 태자비가 나란히 예를 올렸다.

“모후를 뵙습니다.”

“모후를 뵙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를 미소로 받은 황제와 황후가 둘을 일으키며 따듯하게 맞아 주었다. 짧은 덕담과 후인을 아끼는 부모의 선물 공세가 이어졌다.

첫 문안이 무탈하게 끝났다.

“들어가라.”

첫 문안을 마치고 나온 태자가 일부러 태자비를 영화대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용아는 낯선 친절과 껄렁하고 짧은 말 중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무난한 예를 올렸다.

“살펴 가십시오.”

반듯하게 말하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깊은 안으로 향하는 어린 발끝에 바람이 일었다. 입춘이라, 봄이 되었지만 새벽을 채운 바람은 아직 차기만 했다.

황궁 안은 외인의 방문이 어려운 곳이다. 그 황궁에서도 심처 중의 심처는 태후가 거하는 함월전이다. 황궁 북서 방면 일대 대부분을 차지하는 함월전의 권역은 거대하고 광활했다. 천자의 황궁 안에 황제의 것보다 황태후의 땅이 더 많다는 무엄한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태후에게 드넓은 함월전 권역에 부디 머물러 달라 청한 것은 천자 본인이었다.

“소인은 어쩐지 무섭습니다.”

뒤를 따르는 궁인의 속닥거림에 용아가 옅은 웃음을 퍼트렸다.

“그러하냐.”

모든 것이 큼직큼직한 풍경에 녹음으로 가득한 함월전은 소년에게 떠나온 땅의 그리움을 느끼게 했다. 투박하지만 따듯하고, 소박하고 정겨운 것들. 거칠고 큰 계단을 오르는 어린 입가에서 끊이지 않고 웃음이 번져 나왔다.

“태자비 전하.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나무 그늘을 돌아서는 태자비 일행에게 연이어 예가 올려졌다.

“귀인을 뵈옵니다.”

“귀인을 뵈옵니다.”

황제마저 달포에 한 번만 방문을 허락하는 태후에게 소년은 매사 무심한 아이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해 계속해서 문안을 청했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소년은 일면식조차 없는 태후를 뵈러 가기 전에 드물게 들뜬 얼굴로 옷을 고르고 장신구를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안에 계신가.”

아이가 웃음이 흠뻑 묻어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함월전의 궁인이 정중하게 고하며 전각의 문을 열었다. 예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반가움이 한껏 번져 나오는 걸음으로 아이가 한달음에 안으로 걸어 들었다. 영화대의 궁인들도 어린 주인을 뒤따랐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미욱한 이의 청을 들어주시어 광영이옵니다. 태후마마, 홍복을 누리소서.”

반듯하게 예를 올리는 태자비를 따라 영화대의 궁인들 또한 머리를 조아렸다. 깊이 내렸던 시야를 예에 거스르지 않을 만큼 올리던 궁인들의 얼굴에 당혹과 걱정이 어렸다.

최근 몇 년, 궁을 떠나 계속해 행궁행을 청하는 태후의 병색이 완연하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태후의 연세가 있으니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나 실제로 마주한 태후의 병환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홀로 앉지 못해 곁에 붙어선 궁인에게 몸을 기대어 겨우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가 태후의 행궁행을 왜 그리 반대하는지, 태후가 수차례 행궁으로 향하려던 이유가 무엇인지 태후의 안색 하나로 이해가 됐다.

연로한 태후의 병색 완연한 모습에 당황한 궁인들과 달리, 어린 태자비는 천진한 반가움만 표하고 있었다.

“빛나는 아이가 왔구나.”

태후의 말에 용아의 얼굴에 더 깊은 웃음이 번졌다.

“하후가의 후인이 후(后)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아이가 궁중 예법에 없는 깊은 예를 연달아 조모에게 올렸다. 조심스레 주위만 살피는 영화대의 궁인들과 다르게 함월전의 궁인들이 그리운 가족을 본 것 같은 얼굴로 태자비의 낯선 예법을 지켜봤다.

“가까이 오세요.”

태후가 느릿느릿 입술을 열었다. 예를 마치고 몸을 일으킨 용아가 태후의 곁에 다가가 움직임 없는 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도 없이 주름진 손을 붙잡아 앞으로 부드럽게 기울인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이의 손에 손이 붙잡힐 때부터 희미한 웃음을 퍼트린 여인은 메마른 손끝에 닿는 무방비하고 어린 이마에 재차 웃음을 퍼트렸다.

용아의 이마에 오른 가느다란 손이 가만가만 움직여 아이를 만졌다. 아이는 제 얼굴을 순순히 내준 채 쓰다듬는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내리감은 눈이 이마로 내려온 주름진 손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표했다.

“이 인사를 다시 받게 될 줄 몰랐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용아가 감았던 눈을 뜨며 웃는 얼굴로 태후를 올려다보았다.

“인사는 이리 받는 것이 좋지만 부르는 이름은 황가의 것이 더 좋은 것 같소. 이 할미를 한번 불러 주시겠습니까.”

여인의 손에 얼굴을 감싸인 채 용아가 입술을 열었다.

“할머님.”

“예까지 오느라 고생하였소. 앞으로 고운 얼굴 많이 보여 주시오. 부끄럽게도 이 후가주가 늙고 허약하여 이만 누워야 할 듯하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쫓아내지 마십시오.”

“이 몸은 늙어 이제 힘도 없다오.”

“홍문의 후가주께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 홍문의 아이들은 기껍습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또한, 저는 아직 홍문에 드는 때도 지나지 않았으니 후가주께서는 염려 않으셔도 되옵니다.”

용아의 말에 태후가 웃음을 퍼트렸다.

“하후가의 후가주들은 항상 놀랍도록 영민하다지. 뜻대로 하세요.”

태후가 궁인에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궁인과 용아가 굳은 여인의 몸을 조심스레 뉘였다. 태후의 침상 곁에 붙어 앉은 용아가 전각 안에 함께 들었던 영화대의 궁인들에게 명했다.

“저녁 문안 때까지 이곳에 있을 터이니 물러가 있어라.”

“예, 비전하. 물러가옵니다.”

영화대 궁인들이 방금 나선 전각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온종일 같이 있어도 하명할 때가 아니면 입을 잘 떼지 않는 어린 주인의 조잘대는 목소리가 전각 밖으로 부드럽게 번져 나왔다. 쉼 없이 속삭이는 어린 목소리에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던 궁인들은 좋은 게 다 좋은 거라 여기며 놀란 얼굴에 머쓱한 웃음을 올렸다.

함월전 후전 앞에 오후 내내 아이의 속닥거림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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