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기차역은 늘 그렇듯 많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온 이차영은 본인의 차에 올라서 목적지를 입력했다.
나흘간의 출장을 마치고 복귀한 길이었다. 원래는 회사로 직행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에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점심때 잠깐 보길 바란다는 전언에 이차영은 군말 없이 응했다.
약속 장소는 서울 근교에 있는 요정이었다. 중요한 거래처 사람 또는 바이어를 접대할 때나 가는 곳인데, 그곳에서 보자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모양이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한옥 구조로 되어 있는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고고한 전통 복식을 한 사장이 나와서는 친히 길을 안내해 주었다.
단독으로 마련된 별채는 고즈넉하면서도 조용했다. 이차영은 식전 차를 마시면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름 모를 꽃나무에 시선을 두었다. 약속 시각까지 정확히 1분을 남겨 두고 장지문이 열렸다.
“오셨어요?”
“기다리게 했구나.”
이윽고 부자는 마주 보고 착석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이태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국내 CE 매출액이 눈에 띄게 늘었더구나.”
전자제품 사업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DS(Device Solution :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LSI 등을 다루는 분야)지만, 이태한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아들을 CE(Consumer Electronics : 일반 전자제품)의 기획부로 발령을 내렸다. 언젠가는 제 뒤를 이어 차기 총괄 사장직에 오르겠지만, 처음부터 요직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아직 나이도 젊겠다, 본인도 그랬던 것처럼 짧게나마 착실한 단계를 밟아 가면서 실전 감각을 체득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유 없는 아집은 아니었다. 매출 비중은 DS 부문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사업의 근간이자 실질적으로 대중들에게 기업 브랜드를 어필하는 분야는 CE였다. 그런 만큼 짧은 기간이라도 실전 업무를 통해 일이 돌아가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각종 진미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다른 가족들 없이 부자(父子)만 겸상하는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회사 일과 관련된 이야기만 오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이태한은 연잎차로 입가심을 한 뒤에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실 지금부터 할 말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늘 자리를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 둬.”
이차영은 말 대신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의 말이 이어졌다.
“송 사장 둘째 딸이 내일 귀국한다더구나.”
미국에 있을 때부터 나오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대도 해외 체류 중이라서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가벼운 언질만 두어 번 들었는데, 슬슬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한 번 만나 보고, 괜찮으면 약혼까지 진행해도 좋을 듯한데……. 차영이 네 생각은 어떠냐. 너도 곧 있으면 서른이니 슬슬 결혼도 염두에 둬야지.”
이차영은 대답을 아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 두어 달 전이기만 했어도 고민할 필요 없이 그러겠다고 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귀국하자마자 비슷한 말을 듣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 이차영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섹스 파트너가 있었다.
결혼과 연애는 별개라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서규하 또한 모럴 의식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설령 약혼자가 생겨도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미 없는 시간과 관심을 쏟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문득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면서 올라갔다. 센 척해도 끝내 흘러내리는 눈물, 박을 때마다 찰지게 감겨 오는 내벽과 흥분해서 흔들리는 성기. 바텀일 때의 서규하는 생각보다 색기가 있고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덕분에 처음엔 여유롭게 시작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본 이태한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아닙니다.”
즉각 부정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는 대답이었다. 이태한은 거듭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면서 부연했다.
“유달리 상성이 잘 맞는 사람이 있긴 한 법이지.”
이차영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외조모 소유의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던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해서 청혼한 것은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일화였다. 심지어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두 분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냈던 날에 어머니 배 속에 자신이 생겼다고 했다. 아버지 성격상 그런 실수는 결코 하실 분이 아니니 속된 말로 노린 게 분명했다.
“그래도 한 번 만나 보긴 해. 사람 인연은 언제 어디서 닿을지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네.”
“그리고 바쁜 건 알고 있다만, 시간 내서 네 엄마랑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 자주 못 봐서 서운한 모양이야.”
“데이트는 아버지가 하셔야죠.”
농담 섞인 대답에 이태한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보다 너랑 가는 걸 훨씬 좋아할 텐데 무슨. 아무튼, 잊지 말고 시간 비워 둬.”
당부의 말을 끝으로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올 때와 달리 부친의 차량이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이차영도 운전석에 올랐다.
출발하기 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자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왜.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자다 깨서 전화를 받았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잤어?”
- 어. 왜 전화했어?
오늘 돌아왔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따위의 대답이 나올 게 뻔했다. 이차영은 차 시트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섹스할까?”
-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 네 머리통엔 그 생각밖에 없어?
“그렇다고 하면 나올 거야?”
- 오늘은 안 돼. 밤에 애들 만나기로 했어.
그냥 던져본 말이었기에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바쁜 사람은 이쪽이었다. 회사에 가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며칠간 쌓인 업무를 처리하면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그럼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와. 지난주에 못 한 만큼 만회할게.”
- 봐서. 끊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가차 없이 전화가 끊겼다. 액정을 바라보는데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러는 것을 알기에 딱히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녀석의 부친조차도 뒷목을 종종 잡는다고 하니 말이다.
폰을 내려 둔 이차영은 뒤늦게 핸들을 돌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회사로 복귀했더니 예상대로 일거리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두툼한 자료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면서 수치를 입력하는데, 책상 위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차영은 잠깐 손을 멈추고 핸드폰을 켰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송나연입니다. 바쁘실 텐데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바로 좀 전에 부친과 이야기가 오갔던, 송 사장의 둘째 딸이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왔다. 잠깐 액정을 바라보다가 이차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잠깐 머리를 식힐 생각이었다.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창가로 걸어간 이차영은 다시금 핸드폰을 켜서 송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가실 듯한 일은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차영입니다.”
- 안녕하세요. 먼저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이차영은 대꾸 없이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주저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혹시 이번 주말에 약속 정해진 거 들으셨어요?
예상대로의 말에 이차영은 짧게 대답했다.
“네.”
- ……괜찮으시면 그 전에 따로 먼저 뵙고 싶은데, 잠깐만 저한테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을까요? 바쁘시면 제가 차영 씨 회사 근처로 찾아갈게요.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차영은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그렇게 하죠.”
***
송나연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모 호텔 1층에 있는 카페였다. 한창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실내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굳이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이, 안쪽에 앉아 있던 여성이 시선을 보내며 일어섰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 송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직원이 다가와서 메뉴판을 건넸다. 각자 마실 차를 고르고 나자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던 송나연은 이내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언뜻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전화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따로 연락드렸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차영 씨랑 만날 생각이 없어요.”
이차영은 섣불리 응대하는 대신 가만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심 이 비슷한 말을 듣게 될 것 같다고 예상하던 바였다. 맞선 상대가 좋아서 오늘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상대의 눈을 응시한 채로 이차영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말할 상대를 잘못 고르신 듯하네요.”
“네?”
“제가 아니라 송 사장님께 말씀드리면 금방 해결될 텐데요.”
배경도 그렇고 개인적인 커리어도 그렇고, 송나연 정도면 만족스러운 상대이긴 했다. 하지만 싫다는 사람과 미래를 약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정략혼인 만큼 쇼윈도 부부로 지내는 것은 상관없지만, 적어도 상대방 또한 비즈니스라는 자각은 있어야 했다. 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부끄럽지만, 아버지께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알 만했다. MH물산 사장은 괴팍하고 강압적인 데다 욕심도 많았다. 성인이 되기 한참 전부터 대놓고 자신을 눈독 들이던 사람이니,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자리가 마련된 것을 두고 쾌재를 불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가 먼저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려워요.”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이차영은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다음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 쪽에서 먼저 거절해 달라, 이 뜻인 거 같은데. 맞습니까?”
“……네.”
“유감스럽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군요, 저는.”
“……!”
송나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뻔히 보이는 걸 모른 척하면서 이차영은 여유롭게 커피 향을 음미했다.
딱히 내키거나 끌리지 않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미련이나 아쉬움이 있는 것도 아니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차영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었다. 단순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끼리 얽힐 수도 있는 문제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단은 약속 장소에 나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혹시라도 잘됐을 때 나중에 제 쪽에서 거절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드리게 됐어요.”
살며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이 다시금 위를 향했다. 찰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눈빛이었다.
“당황스럽고 언짢으실 수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알지만,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릴게요. 도와주시면 잊지 않고 다음에 어떻게든 꼭 갚을게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꼭 갚겠다’라. 과연 그럴 일이 있을까.
못 들은 척 그냥 일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똑같이 ‘비즈니스’라는 생각을 가진 상대이지, 싫다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시간 낭비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잔을 기울이자 부드러우면서도 씁쓸한 커피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이차영은 한 번 더 상대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디 한번 이유나 들어 보죠.”
“네?”
“제 쪽에서 거절해야 하는 이유 말입니다.”
***
“서규하 님! 서규하 님 계신가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대기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서도 잠깐 기다린 다음에야 담당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부터 확인한 뒤에 뻔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팔은 좀 어떠세요?”
“평소엔 참을 만한데 잘 때만 되면 아파요.”
“원래 밤에는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통증이 좀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순조롭게 잘 아물고 있네요.”
나름대로 성실하게 약을 챙겨 먹고 금주까지 하고 있는데 안 그러면 곤란했다. 한 팔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불편해서, 좋든 싫든 의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깁스는 언제 풀 수 있어요?”
“한 일주일 뒤에 오시면 될 것 같아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꼴로 일주일이나 더 있어야 한다니.
다음 진료 날짜를 예약한 뒤에 서규하는 진료실을 나섰다. 올 때는 택시에 타서 꾸벅꾸벅 조느라 몰랐는데, 나와서 보니 오늘도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 아까울 정도였다.
뒷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제일 만만한 박찬웅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는데, 액정을 켜자 ‘금요일’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쉬움을 접고 도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량인 자신과 달리 곰 새끼는 지금 회사에 있을 터였다.
‘카페나 가 볼까.’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퇴원한 뒤에 아직 한 번도 못 가 봤기도 했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했다.
***
“안녕하세요, 점장님.”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매니저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열렬한 환대 속에서 아이스 라떼 한 잔을 부탁한 뒤에 서규하는 프라이빗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매니저가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희수가 여행 가서 사 왔다고 초콜릿을 가져왔더라고요. 맛 한번 보세요.”
“오, 땡큐.”
곧장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은 뒤에 다시금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탕화면에 뜬 날짜와 요일이 거듭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섹스를 안 한 지도 꽤 오래됐다. 저번에 차에서 이차영이랑 급하게 했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팔이 이 모양이다 보니 클럽이나 술집에도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게 됐다. 거기까지 가서도 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
인지한 순간 갑자기 아래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화사한 얼굴이 떠올랐다. 두 달 넘게 계속 만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번 연락해 볼까.’
곧바로 이차영의 이름을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꽤 오래 신호음이 울린 뒤에야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불필요한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서규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 몇 시에 볼까?”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소파 팔걸이를 베개 삼아 누웠다. 내심 ‘빨리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기대를 완전히 비켜 가는 대답이 들려왔다.
- 오늘은 힘들 거 같아. 야근 확정이거든.
“뭐?”
저도 모르게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곧바로 웃음 띤 목소리가 이어졌다.
- 아쉽나 보네.
정곡을 찔려 뜨끔해진 서규하는 버럭 성질을 냈다.
“입만 열면 섹스 타령인 주제에, 네가 까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새끼야.”
말하고 보니 정말 그랬다. 각자 이유가 있어서라지만, 흡사 밀당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거든. 그리고 주말에는 중요한 선약이 있어. 일요일 저녁에나 시간이 날 거 같은데……. 아니면 지금 잠깐 회사로 올래?
“돌았어? 끊어.”
회사로 오라는 이유는 뻔했다. 이차영이라면 근처 화장실에서 붙어먹고도 남을 놈인데, 아무리 섹스가 고파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방금 매니저가 갖다 준 커피 컵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시는데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다음 주에는 시간 꼭 비워둘게]
[ㅗㅗ]
답장을 보낸 뒤에, 서규하는 곧바로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오늘 같이 마실 음주 메이트를 찾았다. 팔이 순조롭게 아무는 중이라고 하니, 오랜만에 거하게 마실 생각이었다.
***
“하암…….”
서규하는 긴 하품을 흘리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뒤늦게 이불을 걷고 비척비척 욕실로 들어갔다.
김모란에게 연락이 온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술집에 1등으로 도착해서 다른 놈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내일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을 꺼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김모란은 뜬금없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서 ‘밥이나 술을 먹자’고 말할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어김없이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서규하는 순순히 응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 건 피차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절했을 때 후환이 두려운 사람은 이쪽이었다.
‘이래서 처음에 기선 제압이 중요한 건데.’
눈도 못 뜬 채 양치질을 하면서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예쁜 얼굴에 혹해서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봤던 소싯적의 자신을 탓할 수밖에.
다행히 서규하는 늦지 않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잠시 후, 정각 1시에 뷔페로 들어서는 김모란을 보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것도 핏줄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1분 1초도 어긋나지 않고 등장하는 게 누군가와 똑같았다.
구두 굽을 또각거리면서 다가온 김모란은 맞은편에 앉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팔은 왜 그래?”
“사고가 좀 있었어.”
무슨 사고?
턱짓으로 묻는 말에 서규하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몇 번을 얘기하는 건지. 줄이고 줄여서 핵심만 이야기하자 김모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런 찌질한 새끼가 있네.”
“내 말이.”
“암튼 그래서, 합의로 퉁친 건 아니지?”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여튼 한 성질머리 하는 건 알아줘야 했다.
“일단은 합의로 처리하고, 나중에 따로 손봐 줬어.”
“어떻게?”
“이차영이 도와줬어.”
후루룩, 면 코너에서 말아 온 국수를 흡입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김모란은 한껏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어?”
“계속하는 건 아니고…….”
“왜 하필 도움을 받아도 그 자식 도움을 받아. 차라리 나한테 말하지.”
생각만으로도 무서운 말이었다. 그랬다간 답례로 또 뭘 뜯어 가려고.
서규하는 못 들은 척하면서 다시금 국수를 흡입하는 데 집중했다. 김모란도 식사를 이어 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참, 오늘 그 자식 선 본다더라.”
“응?”
“이차개 말이야. 선 본다고.”
그 말에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선을 본다고? 이차영이?
잠시 후에 입 밖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어떻게 알아?”
“뭐?”
“그 새끼 선 보는 거.”
“송 사장님 와이프가 우리 엄마를 들들 볶아서 마련된 자리거든. 어제 오랜만에 집에 갔는데, 나 보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하셔서 싸울 뻔했어.”
“…….”
“나연이가 눈이 있으면 거절해야 될 텐데 걱정이네.”
“…….”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놈이니까 넘어가지 말라고 말해 두긴 했는데…….”
계속 말을 잇는 김모란을 앞에 두고 서규하는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제 이차영과 전화로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말에는 중요한 선약이 있어.’
약속이라는 게 선 보는 거였나.
선을 보든 누구를 만나든 전혀 신경 안 쓰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구리긴 했다. 시발 새끼, 자기 내킬 땐 병실에서도 건드리고 차에서도 박아 대더니 선 좀 본다고 약속을 까? 무슨 놈의 선을 주말 내내 보나.
“야, 서규하.”
“…….”
“서규하!”
휙휙, 갑자기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무언가에 서규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넋 나간 멍청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내가 언제.”
“지금. 부러워서 그래?”
“……부럽긴 무슨.”
잠깐 멈췄던 젓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면발이 거의 없는 그릇을 휘적거리는데 맞은편에서 김모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님 내가 데리고 가 줘?”
고개를 들자 생긋이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말이야?”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시집와. 잘해 줄게.”
서규하는 김모란 앞에서 드물게 표정을 굳혔다.
“……뭔 개소리야.”
“존나 부러워하는 거 같아서. 근데 그 표정은 뭐야? 감사합니다, 하고 무릎부터 꿇어야 되는 거 아냐?”
알고 있는 모든 욕이 떠올랐지만 서규하는 현명하게 참아 냈다. 한 바퀴 더 돌고 올게.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접시 가득 채워서 돌아왔더니 김모란은 커피 잔을 앞에 둔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 진짜 가기 싫다.”
고개도 들지 않고 하는 말에 서규하는 되물었다.
“어디 가길래.”
“내일부터 두 달 동안 중국 출장이야.”
“두 달? 뭘 하길래 그렇게 오래 있어?”
“작업 현장 감독하러. 유능한 것도 피곤해.”
폰을 내려놓은 김모란이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 식사를 끝낸 듯한 느낌이었지만, 서규하는 개의치 않고 입 안으로 우걱우걱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오늘 점심은 김모란이 쏜다고 했으니 터지기 직전까지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차에 오른 김모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선심 쓰듯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집까지 제법 거리가 있는 탓에 서규하는 양심껏 거절했다. 사실 이건 핑계고, 가는 내내 잔소리만 듣게 될 게 뻔해서 택시를 타는 걸 선택했다.
대로로 나와서 팔을 뻗자 대번에 빈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에 타서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것도 잠시, 서규하는 겉옷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선본다며?]
‘……아니야.’
빠르게 입력한 글자를 지웠다. 깨끗해진 입력창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개새끼야지꼴릴땐벙실에서도덥치면서선보러간다고ㅗ못만난ㄷㅏ해?]
‘……이것도 아닌데.’
혀를 차며 다시금 글자를 지웠다. 괘씸해서 한마디 하고 싶을 뿐인데, 어째 꼭 이쪽이 안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엔 이런 걸로 고민하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결국 서규하는 핸드폰 액정을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도 실컷 퍼마시면서 불타는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
높디높은 담벼락이 늘어선 주택가 골목으로 대형 세단 한 대가 진입했다. 검은색 대문 앞에서 정차한 차에서 두 여인이 차례로 내렸다. 그동안 이차영은 후미로 가서 트렁크를 열었다. 작은 캐리어 두 개와 쇼핑백들을 꺼낸 다음, 각각 어머니와 여동생의 손에 들려 주었다.
“들어가세요.”
그러자 모친의 얼굴에 짐짓 서운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진짜 그냥 가려고? 온 김에 여기서 자고 바로 출근하라니까.”
“필요한 서류들이 집에 있어서요. 다음에 한 번 들를게요.”
“……그래. 그럼 가서 푹 쉬어. 집에 도착하면 엄마한테 문자하고.”
“수고했어, 오빠. 조심해서 가.”
두 사람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이차영은 다시금 운전석에 올랐다. 곧바로 출발하는 대신 목을 좌우로 젖히면서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주말에 가족 여행을 다녀온 것은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었다. 이틀 전, 업무 중에 잠깐 짬을 내서 저녁을 먹는데 웬일로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랑 같이 바람 쐬러 갈 건데 시간 되면 같이 가자는 말이 들렸다.
이차영은 짧은 고민 끝에 오케이했다. 그간 다소 소홀했다는 자각이 있기도 했고, 곧 있으면 어머니 생신이니 겸사겸사 동행하면 좋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가자 어머니는 놀라면서도 무척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차영은 이틀간 충실한 기사 노릇을 했고, 식당이나 상점에 들를 때마다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탁 트인 바다와 좋은 전망을 구경하면서 나름대로 리프레시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충동적인 결정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 아닌 문제가 있었다. 근 2주 가까이 섹스를 못 했더니, 밤이 되자 아래가 묵직하게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클럽 또는 바를 찾거나 콜보이를 부르면 금세 해결될 일이지만 어느 쪽도 딱히 내키질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한 사람이었다. 울먹이는 얼굴, 신음과 함께 내뱉는 욕설, 맞춤인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조여 대는 구멍. 예정대로라면 어제 실컷 풀었을 텐데, 여행 때문에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더더욱 아쉬웠다.
“…….”
생각 없이 차창 너머의 전경을 보고 있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섹스할 때의 순간을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도 앞섶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욕구 불만은 지금도 여전했기에 금방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뒹굴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없었다.
해결책은 한 가지뿐이었다. 판단을 끝낸 이차영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Trrr- Trrr-
오늘따라 신호음이 길게도 울렸다. 마침내 끊겨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기대하던 목소리 대신 ‘지금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가 들려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끊은 이차영은 그제야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느덧 여유로움은 가신 채였다.
급한 대로 폰 섹스라도 할 생각에 어젯밤에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서규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텀을 뒀다가 두어 번 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결과는 같았고, 마지막에는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왠지 일부러 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차영은 확신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고의로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을 테고.’
아무래도 이쪽에서 거절한 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욱하는 성질머리가 있는 놈이니, 앞으로는 일절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아쉬운 대로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잠시 후에 차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거의 다 와서야 ‘집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차에서 내린 이차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반응이 없을 걸 알면서도 일단 초인종을 눌렀는데, 웬일로 곧장 현관문이 열렸다.
“어?”
그런데 안에서 나온 사람은 서규하가 아니었다. 상반신을 탈의한 최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짤막한 신음을 흘렸다.
***
쏴아아아-
욕실 문 너머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운 서규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팔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좆같네, 진짜.’
미간은 한껏 구겨진 채였다. 주말 내내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젯밤,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서규하는 양주를 깠다.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잔을 들이켜고 있는데, VIP 전담 직원이 다가와서는 파트너가 필요하진 않은지 넌지시 물었다. 데려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이윽고 눈에 익은 사람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쓰리썸의 신세계를 열어 줬던 그 꽃돌이였다.
마시던 잔을 마저 비운 뒤에 서규하는 꽃돌이와 함께 위층 룸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키스하면서 허겁지겁 녀석의 옷을 벗겼다. 왜 이렇게 서두르냐고 앙탈을 부리면서도 꽃돌이는 자신의 몸을 밀착하면서 자극적인 신음을 흘려 댔다. 오른손은 서슴없이 서규하의 바지 지퍼를 열고 안에 든 성기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달아오른 분위기는 잠시 잠깐에 불과했다.
10여 분 뒤.
그 언젠가처럼 서규하는 혼자 침대에 누운 채로 소리 없는 숨만 내쉬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기엔 생각도 닿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리며 아래를 흘끗 내려다봤다. 잠자듯이 축 늘어진 성기가 보였다.
꽃돌이가 입으로 물고 빨면서 어떻게든 세워 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발기가 아예 안 되는데 찰진 구멍을 뚫고 삽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참으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룸을 나서기 전, 한심함을 넘어서서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바텀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앞으로 그놈과의 섹스는 영원히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재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오늘 오후에 배달시켜 먹은 음식이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가슴을 퍽퍽 두드리다가 결국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때부터 계속 토기가 치밀었다. 또 한 번 변기에 쏟아 내고 물을 내리는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러다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엉금엉금 기다시피 방으로 돌아가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최 비서는 금방 집으로 찾아왔다. 그에 안도한 것도 잠시, 또 한 번 엿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몸의 발악을 이길 수는 없었다. 화려한 분출과 동시에, 하필 바로 앞에 있던 최 비서가 끔찍한 봉변을 당했다.
쏴아아아-
그 결과가 지금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였다. 늘 침착하고 차분한 최 비서가 “억!” 하고 놀라던 모습을 떠올리니 이대로 코를 박고 죽고만 싶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했다. 몸을 일으킨 서규하는 옷장에서 트레이닝복을 꺼내 들고 거실로 나갔다.
욕실에서 나온 최 비서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고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넥타이까지 하고 왔던 정장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드로어즈 한 장만 입은 채였다.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입장을 바꿔서 누군가가 휴일에 자신을 불러내고 토사물 세례까지 했다면, 고용인이고 뭐고 간에 곧바로 쌍욕이 나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최 비서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내미는 옷을 받아 들면서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단 도련님이 큰일인데,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다 올렸으니까 이제 괜찮겠지.”
최 비서는 한 번 더 권유하는 대신 주섬주섬 바지부터 껴입었다. 한 번 결심하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는 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 정말 상태가 안 좋으면 본인이 먼저 병원으로 가자는 말을 꺼냈을 터였다.
“누워서 좀 쉬고 계세요. 좀 이따,”
딩동-
그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현관문을 향했다. 이내 짐작 가는 바가 떠올랐다는 듯 최 비서가 말했다.
“죽 배달 왔나 보네요. 받아 올게요.”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며 서규하는 식탁이 아닌 침실로 향했다. 성의는 고맙지만, 지금 뭔가를 배 속에 넣었다간 십중팔구 또 올릴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서규하는 오후 내내 방치하다시피 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켜자마자 인상이 찡그려졌다. 부재중 전화 표시가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왜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
어제 클럽에 있을 때도 계속 전화가 와서 결국은 전원을 껐다. 그러다 아까 최 비서를 부르느라 다시 켰는데, 지금 보니 또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는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문가에서 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차영 씨가 찾아오셨어요.”
“……!”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가 최 비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 이차영?”
“네.”
또 멋대로 남의 집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돌렸던 고개를 원위치하면서 서규하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없다고 해.”
“이미 계신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그럼 그냥 꺼지라고 해. 볼일 없으니…….”
“볼일이 왜 없어?”
“……!”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최 비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들어온 이차영은 신뢰감을 자아내는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들어왔어요. 주거침입으로 신고당하진 않겠죠?”
최 비서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문은 제가 열었는데요, 뭘.”
안경을 밀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차영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최 비서님, 옷차림이 많이 가벼워 보이시네요.”
“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최 비서의 입에서 아, 하는 짤막한 신음이 흘렀다. 바지만 입은 채로 급하게 문을 열러 간 바람에 지금도 그는 상반신 탈의 상태였다.
고개를 든 최 비서는 도련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에둘러 대답했다.
“방금 씻었거든요. 저녁은 드셨어요?”
서규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주인은 투명 인간 취급하고, 애먼 사람들끼리 남의 침실에서 살갑게 대화를 주고받는 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다시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서규하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식사하시는 것만 보고 갈게요.”
“형 말고. 이차영 너, 나가라고.”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릴 필요가 없었다. 누차 말하지만 집주인은 자신이고, 이차영의 방문을 허락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나가라고 말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차영은 나가는 대신 달갑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내 마음이야.”
“어제부터 몇 번이나 했는데.”
“못 들었어? 내 마음이라고.”
“…….”
이차영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틱틱거리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정도를 넘어선 까칠함이 느껴졌다. 옅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에 이차영은 고개를 돌려 최 비서를 바라보았다.
‘잠깐 나가시죠.’
눈짓으로 전한 말에, 최 비서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침실을 나섰다. 잠시 후 다시금 열리는 문소리에 서규하는 고개를 들었다. 이차영의 얼굴을 보고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꺼지라는 말 못 들었어?”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방문을 닫은 뒤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한테 전화했을 때, 안 된다고 한 거 때문에 그래?”
“개소리 그만하고 나가.”
까칠한 대답에도 이차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했잖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선 보느라 존나 바빴겠지.”
저도 모르게 비꼬는 말이 흘러 나갔다. 내뱉고 나서 흠칫했지만, 딱히 틀린 말을 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 번 축객령을 내리려고 하는데 이차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들었어?”
“네 몸에 도청기 붙여 놨다. 어쩔래.”
“…….”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차영의 얼굴이 보였다. 이내 픽 웃으며 하는 말이 이어졌다.
“선 안 봤어.”
서규하는 거듭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송 사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 딸이랑 만난 거 다 아는데 어디서 구라야?”
“안 만났어. 이야기가 오간 건 맞는데, 내 쪽에서 거절했어. 도청기 붙여 놨다더니 그것까진 못 들었나 보네.”
뒤돌아선 이차영이 문가로 걸어갔다. 다시 돌아온 놈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이차영은 멋대로 침대에 앉으면서 부연 설명을 했다.
“곧 있으면 어머니 생신이라서, 예영이까지 셋이서 여행 갔다 왔어. 정확히는 모녀끼리 가기로 한 여행에 운전사로 뒤늦게 합류했어.”
준비해 온 멘트처럼 들려서 되레 의심이 갔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차영이 선 본 것을 자신에게 숨길 이유가 없고,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만한 녀석도 아니었다.
새끼,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지.
할 말이 없어진 서규하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면서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가.”
“오해 풀렸어?”
“오해는 무슨.”
선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기분 나빴던 게 맞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차영의 입에서 괜한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안 가?”
그러자 이차영은 생뚱맞게도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
“? 네 폰을 내가 왜 받아.”
“어머니한테 전화 걸었어. 아무래도 안 믿는 눈치라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핸드폰에선 정말로 신호음이 울리고 있었고, 액정에는 ‘어머니’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서규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너희 어머니?”
“그럼 너희 어머니한테 걸었겠어?”
그와 동시에 신호음이 끊기면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이차영이 좀 더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얼른 받아.”
“시발, 내가 왜 받아? 네가 받아!”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한 번 더 ‘여보세요? 차영아?’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차영의 팔은 고집스럽게 서규하를 향했다. 시발, 존나 거머리 같은 새끼.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서규하는 마지못해 핸드폰을 받아서 귓가로 가져갔다.
“여, 여보세요?”
- ……여보세요? 차영이 맞니?
“저 규하예요, 이모.”
그러자 놀란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규하라고?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나야 늘 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갑자기 웬 전화야? 그동안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도 없더니.
묵직한 팩폭이 날아들었다. 우아하면서도 차가운, 재벌가 사모님의 포스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이차영의 어머니는 외모만큼이나 성격이 직설적이고 화끈해서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서규하는 그녀를 좋아하지만,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서요. 별일 없으시죠?”
- 그럼. 규하 너는, 잘 지내고 있어?
“네.”
- 다음에 한 번 이모 집에 놀러 와. 차영이 한국에 있는 건 알고 있지?
“네.”
- 잠깐, 그러고 보니 차영이 전화라서 받았는데……. 지금 같이 있어?
왠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여서 대답했다.
“네.”
- 어쩐지. 집에서 자고 가라 해도 부득불 가야 된다고 하더니, 너랑 약속 있었나 보네.
약속은 개뿔. 그러기는커녕 난데없는 전화 통화가 지금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 차영이랑 연락하고 지내는 줄은 몰랐네. 그런데 이모한테는 안부 전화 한 번 안 해주고, 좀 서운해지려 하는데?
“……다음에 놀러 갈게요.”
- 그래.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가.
“네. 들어가세요, 이모.”
통화를 끝내자 이차영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오해 풀렸어?”
던지듯 폰을 돌려주면서 서규하는 으르릉거렸다.
“오해고 나발이고, 왜 갑자기 이모한테 전화는 걸고 난리야?”
뜬금없는 통화에 당황해서 무슨 말을 듣고 내뱉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굳은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몹시도 여유로웠다.
“왜. 너 우리 어머니 좋아하잖아. 어머니도 너 좋아하고.”
“어릴 때랑 지금이랑 같아?”
“다를 건 뭐 있어. 아무튼, 진짜 어머니랑 같이 여행 갔다 왔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좀 꺼져.”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차영은 묘한 결벽증? 강박증? 뭐 그런 게 있어서, 상대방이 뭔가를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가 있다 싶으면 끝까지 바로잡으려는 지랄 같은 면이 있었다. 시발, 아예 말을 안 꺼내는 거였는데.
서규하는 등을 돌려 누우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제는 꺼지라는 말을 하는 것도 지쳤다. 때 되면 알아서 가겠지.
일찌감치 잠이나 자려는데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질투했어?”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서 뒤를 돌아봤다.
“질투?”
“너랑 만나는 것보다 다른 약속을 우선시해서 질투한 걸로 보였거든.”
“지랄 똥 싸고 있네.”
하지만 이차영은 어김없이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최 비서님은 왜 그러고 있었어? 옷에 뭐 흘리기라도 했어?”
흘린 게 아니라 아예 쏟아 부었다. 다시 생각해도 쪽팔린 실수였기에 서규하는 사실대로 말하는 대신 내키는 대로 대답했다.
“떡 쳤어.”
“……뭐?”
“떡 쳤다고. 집에서 벗고 있으면 뻔한 거 아냐?”
“…….”
짧은 침묵 후에 이차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전화 안 받았어?”
“당연하지. 너 같으면 그 짓 중에 전화 받을 정신이 있겠어?”
말하고 보니 ‘이차영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팔을 뻗은 이차영이 대뜸 턱을 붙잡았다.
“그럼 나하고도 해.”
“……!”
다가오는 얼굴을 본 서규하는 서둘러 이차영의 입을 막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오후 내내 몇 번이나 올린 게 생각난 탓이었다. 물론 양치질을 하고 가글까지 했지만, 키스를 한다고 생각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우웁!”
하지만 애써 피한 보람도 없이 입술에 물컹한 무언가가 와 닿았다. 말하려고 벌어진 입술 안으로 미끄덩한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곧바로 서규하의 혀를 찾아내어 얽으면서 이차영은 진득한 딥 키스를 퍼부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면서, 오른손은 민소매 티 안으로 들어가서 젖꼭지를 꼬집어 댔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비벼 대자 대번에 꼿꼿하게 일어섰다. 이어서 바지 속으로 침범한 손이 성기를 붙잡았다. 그런데 위와 달리 아래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실 같은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것도 잠시, 서규하는 깜짝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리를 벌린 이차영이 그 사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쳤어?”
“새삼스레.”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허벅지를 내리누르다가, 순간 이차영은 멈칫했다. 활짝 벌려진 사타구니 안쪽 깊은 곳에 희미한 붉은 자국이 보였다. 이런 곳을 모기나 벌레가 물 리는 없고, 긁은 자국도 아니었다.
이내 이차영의 시선이 서규하의 얼굴을 향했다.
“진짜 최 비서님이랑 잤어?”
“……!”
갑자기 구멍 안을 파고드는 손가락에 서규하의 몸이 튀어 올랐다. 미쳤냐고 새된 소리를 질렀지만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마이 페이스였다.
“……뒤는 안 쓴 것 같은데.”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열이 확 올랐다.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손날을 세워서 이차영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이어서 발바닥으로 놈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지만, 금세 커다란 손에 발목이 붙잡혔다.
일순 피부가 선득해지는 느낌이 확 치밀었다.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정신 나간 개새끼가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어붙은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더없이 나긋하면서도 여유롭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페팅만 했어? 아니면 펠라까지?”
서규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를 갈듯 대답했다.
“씨발, 내가 미쳤다고 진짜 성열이 형이랑 붙어먹었겠어?”
초딩 때부터 보디가드 겸 보모로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 최성열은 말 그대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붙어먹다니, 절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얼어 죽고 최성열 혼자 남는다 해도 제정신이라면 절대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누구야? 허벅지 안쪽에 자국 있던데.”
어제 클럽에서 만난 꽃돌이의 소행이었다. 더불어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한심하단 눈빛을 남기고 방을 나서던 뒷모습을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알 거 없고, 제발 좀, 앗!”
짤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숙인 이차영이 허벅지 안쪽 살을 빨아들이며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조금 더 아래로 이동해서는 말캉한 알주머니를 입에 담았다. 쪽, 쪽, 귀두 못지않게 민감한 성감대를 자극하는 애무에 허리가 멋대로 들썩거렸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알아챈 서규하는 퍼뜩 다리를 오므리며 이차영의 머리를 밀어냈다.
“뒤는 건드리지 마.”
“왜. 박히는 거 좋아하잖아. 오늘은 쓸데없이 질질 안 끌고, 기분 좋은 곳만 찔러 줄게.”
그럴까 봐 걱정이었다. 가뜩이나 계속 토하고 속은 텅 비어서 기운이 없는데, 오늘 같은 날에 놈을 받아들였다간 탈진할 게 뻔했다.
“종일 토해서 기운 없어. 주말에 시간 비워 둘 테니까 그때 해.”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화가 나서 ‘그만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꽃돌이를 안으려다가 또 허탕을 치고, 혼자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뒤가 근질근질했다. 빠듯하게 밀려 들어오는 무게감, 몸속 성감대를 짓이기듯 눌러 댈 때의 감각을 떠올리니 성기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서규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뒤로 하는 섹스에 완전히 길이 들어 버린 듯한데, 알지도 못하는 놈에게 다리를 벌리는 건 내키지가 않고 또 그럴 자신도 없었다. 어찌어찌 침대까지 간다 해도 삽입 직전에 깽판을 칠 제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니 이차영이 없으면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언젠가는 질리거나 싫증이 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최 비서님은 진짜 아니라는 거지?”
서규하는 한숨을 내쉰 뒤에 질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처먹을래?”
“그러면 최 비서님은 뭐 때문에 그러고 있었어?”
“성열이 형 옷에다 토했다. 어쩔래.”
이 새끼한테 농담 두 번 했다가는 화병 나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 달리 이차영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조금 전에 거실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 비서에게 ‘자신이 남아 있겠으니 그만 가 보시라’고 말하는데,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리면서 배달 직원이 찾아왔다. 종이 가방을 건네받은 최 비서는 도련님이 아프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라도 챙겨 먹여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먼저 집을 나섰다.
“…….”
이차영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근 2주간 풀지 못한 성욕이 묵직하게 쌓여 있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서규하를 만지면서 살 내음을 맡은 탓에, 손도 대지 않은 성기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구멍에 쑤셔 넣고 허리를 흔들고 싶지만 그러기엔 서규하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저 못지않게 섹스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다음에 하자는 걸 보니 정말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기와 달리 은근히 자주 골골대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뒤늦게 입을 열었다.
“죽 갖다 줄까?”
“생각 없어.”
“아니면 하던 거 계속해도 좋고.”
“꺼져.”
서규하는 황급히 바지를 끌어 올렸다. 그대로 등을 돌려 침대에 누우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배도 안 고프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자려고?”
대답 없이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시 후, 허리에 묵직한 무언가가 감기며 몸이 밀착하는 느낌이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차영이 등 뒤에 길게 누워 있었다.
“뭐야?”
“너 잠들 때까지만 있다 갈게. 그냥 가려니까 아쉬워서.”
뭐가 아쉬운지 알려 주겠다는 듯 엉덩이 사이를 꾹 누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대번에 정체를 알아채고 입술을 벙긋거리는데, 이차영이 거듭 서규하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겁먹지 마. 오늘은 안 해.”
“겁 같은 소리 하네. ……근데 안 한다면서 좆은 왜 세우고 있어?”
“바지만 벗기면 바로 넣을 수 있는데 안 서는 게 이상하지. 얼른 자. 잠들면 갈 테니까.”
“떨어져, 새꺄. 존나 무거워.”
“자꾸 버둥대지 마. 건드리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
한껏 인상을 쓴 채로 내뱉은 뒤에 서규하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들러붙는 걸 보니 정말로 제가 잠들 때까지 이러고 있을 모양인데, 떨어지라고 해 봤자 쓸데없이 힘 빼는 꼴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힘으로 제압할 수 있으면 진즉 했겠지만 빌어먹게도 이길 확률이 제로였다.
‘존나 거슬리네.’
아래가 밀착된 탓에 묵직하게 부푼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탓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뒤척이는 순간, 허리에 감겨 있는 놈의 손이 곧바로 위 또는 아래로 움직일 것 같았다.
잠이나 자자. 눈을 감은 서규하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을 머릿속으로 세기 시작했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어느 순간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은 이차영이 설마 하는 생각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자?”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자는 척을 하는 건가 싶어서,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움직여서 아래쪽으로 살짝 이동했다. 중심부를 가볍게 움켜쥐었지만 서규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서규하.”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서규하는 보기보다 몸이 민감한 편이었다. 평소였으면 대번에 움찔하며 반응했을 텐데, 잠잠한 걸 보니 정말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맥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라고 말한 건 본인이지만, 설마 이런 상태에서 진짜로 잠들 줄이야.
묵직하게 부푼 성기는 지금도 그대로였다. 이차영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저절로 가라앉기는 그른 것 같고, 혼자 빼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그럴 거면 진작 혼자서 처리했지 일부러 여기까지 걸음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
시선이 거듭 눈앞의 녀석을 향했다. 서규하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쉬며 잘도 자고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차영은 서규하가 입고 있는 반바지와 속옷을 천천히 아래로 끌어 내렸다.
배구공처럼 둥글고 탄력 있는 둔부가 드러났다. 손에 착 감기는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자신의 바지 앞섶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튕기듯 나온 성기를 세우는 것처럼 두어 번 쓸어 올린 뒤에 서규하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마음 같아선 다리 사이가 아닌 구멍 안으로 넣고 싶지만, 그랬다간 단잠을 깨운 죄로 이번에야말로 주먹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한껏 몸을 밀착한 채 이차영은 섹스할 때처럼 허릿짓을 했다. 행위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서규하가 다리를 붙이고 있는 데다 윤활제도 없다 보니, 허벅지 사이에 꽉 물리다시피 해서 조이는 감각이 구멍 못지않았다.
“으음…….”
“쉿, 괜찮으니까 자.”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금세 입술을 벌리고 보드라운 살결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왼손은 버릇처럼 옷을 들추고 들어가서 자그마한 젖꼭지를 꼬집고 비벼 댔다.
이것도 성적인 행위랍시고 흥분이 차올랐다.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서규하의 몸이 들썩일 정도로 점점 강하게 다리 사이를 들쑤시다가, 이차영은 급하게 페니스를 빼내서 손으로 쥐고 빠르게 훑었다.
“……!”
절정의 흔적이 왈칵 터져 나왔다. 기세 좋게 튀어 나간 정액은 서규하의 골반께를 흠뻑 적셨고, 일부는 민소매 티 밖으로 드러난 팔에까지 닿았다.
“후우…….”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여운을 만끽하는 동안 서규하는 세상모르고 계속 자고 있었다.
유난히 동그란 두상, 잘 익은 벼처럼 건강해 보이는 목덜미, 과하지 않게 잘 붙은 근육. 본인에게도 말했다시피 선호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마음이 동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이동했다. 이내 그럴 만한 이유가 떠올랐다. 베타와 오메가를 막론하고 서규하처럼 상성이 잘 맞는 사람은 없었다.
우성 알파라는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남들 위에 서서 이끄는 방식의 교육을 받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차영은 섹스할 때도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컨트롤하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난폭해도 머릿속으로는 별 감흥이 없을 때가 많은데, 희한하게 서규하와 붙어먹을 때면 무아지경으로 박아 대다가 자신도 모르게 싸지르기 일쑤였다. 흔히들 말하는 속궁합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섹스가 끝난 뒤 서규하의 목덜미나 가슴팍에 얼룩덜룩한 자국을 볼 때면 내심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본인이 본인 몸에 그러는 재주는 없을 테니, 자신이 한 짓이라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었다.
“…….”
둔부에 시선이 닿은 순간, 아직 죽지 않고 발기한 성기가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꺼떡거렸다. 이차영은 다시금 몸을 밀착하며 서규하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입술은 자연스럽게 목덜미로 다가가서 또다시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