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2/28)

Chapter 2.

***

그날 이후로 서규하는 꼬박 사흘간 집에 처박혀 있었다. 만사가 귀찮고 짜증 나고,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유는 날짜를 본 순간 알게 됐다. 정확히 사흘 전이 30일, 그러니까 원래라면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페로몬 분비를 막아서 성적인 충동은 들지 않지만, 대신 다른 부작용들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약한 무기력증이 오는 선에서 그치는데, 이번에는 감기 기운까지 겹쳐서 몸 상태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이틀 더 폐인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며칠 만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아버지 생일 때문에 가족들이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마음 같아선 생일이고 나발이고 간에 꿈쩍도 하기 싫지만, 정말 그랬다가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원조가 끊길지도 몰랐다. 저에게 약한 어머니도 집안 행사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챙기는 탓이었다.

얼추 저녁 시간에 맞춰 갔더니 자신을 제외한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시선 집중을 받게 된 서규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작은 형 옆에 앉았다. 아버지의 못마땅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얼굴 꼴이 왜 그래? 피죽도 못 먹고 다니는 놈처럼.”

보자마자 태클을 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서규하는 뒷목을 주무르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잠을 잘 못 자서요.”

그러자 아버지의 눈매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쯧, 다 큰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니, 원. 어디서 저런 놈이 나왔는지 참…….”

“어디서 나왔긴요. 내 배 속에서 나왔죠.”

“크흠.”

이번에도 어머니가 구원 투수가 되어 주었다.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삼 형제의 모친인 정은희는 막내아들을 살갑게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얼굴이 많이 상하긴 했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괜찮아요.”

그나마 오늘은 좀 괜찮은 편이었다. 곧 가족들 사이에서 이야기꽃이 피었다. 말이 좋아서 이야기꽃이지, 늘 그렇듯 서규하는 관심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고루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간의 경험상 저녁 식사를 하기 전까지 계속될 게 뻔했다.

‘올라가서 잠이나 잘까.’

일어설 타이밍을 노리는데 핸드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렸다. 서규하는 외투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이차개-

일전에 전화했을 때 제 번호를 저장해 둔 모양이었다. 액정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왜.”

- 여보세요? 나야, 이차영.

슬며시 몸을 일으켰지만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웬일로 이차영이 도움이 될 때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서규하는 복층 계단을 올랐다.

“왜 전화했어?”

- 빌려줬던 돈 받으려고. 저녁에 볼까?

“오늘은 안 돼.”

방문을 열면서 대답하자 웃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저번에 안 가서 삐졌어?

“뭔 개소리야. 아버지 생신이라서 본가에 왔어.”

- 아, 오늘이었어?

“다음에 전화해. 끊는다.”

전화를 끊은 서규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뒤척이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

개꿈을 꿨다. 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현 가능성이 제로인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서규하는 혼자가 아니었다. 침대에 엎드려 엉덩이만 높이 치켜든 채 뒷구멍으로 누군가의 거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앗, 윽, 으응, 앗!’

퍽, 퍽, 몸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강하게 쑤셔 박는 움직임에 서규하는 꼴사납게 울부짖었다. 두툼한 귀두가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꺼떡대는 성기에서 선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허릿짓을 멈추지 않으며 상대가 물었다. 거친 움직임에 어울리지 않는, 나른하고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좋아?’

‘흐읏, 조, 좋아! 더, 세게, 하앗, 해 줘!’

‘얼마든지.’

또 한 번 격렬하게 몸이 흔들렸다. 두 팔을 붙잡아 뒤로 당긴 남자 때문에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고꾸라진 상체를 침대에 처박은 채 서규하는 엉엉 울었다.

‘자, 흣, 잠깐만!’

진저리를 쳐도 달아날 곳이 없었다. 퍽, 퍼억, 연이어 같은 곳을 때려 박는 움직임에 기어이 소변 같은 물줄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잠시 후, 간신히 풀려났지만 안도는 일렀다. 빼지 않고 기술 좋게 서규하의 몸을 뒤집은 남자는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친 다음 또다시 안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주르륵-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며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혼이 빠질 정도로 박아 대며 생긋이 웃는 개새끼는 이차영이었다.

***

짧게 눈을 붙인 다음, 서규하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1층으로 내려갔다.

“입맛이 없니?”

걱정스럽게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규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사실은 잠에서 깬 이후로 계속 저기압 상태였다. 사춘기 때도 거의 해 본 적 없는 몽정을, 그것도 그런 꿈을 꾸면서 했으니 기분이 좋은 게 이상할 일이었다.

“많이 먹어. 너 먹이려고 만들어 달라 한 거야.”

맛깔스러운 찬이 담긴 접시가 앞쪽에 놓였다. 하지만 없던 입맛이 갑자기 생길 리가 없기에 서규하는 깔짝대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지만 서창식은 잔소리를 눌러 참았다. 모처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밥상머리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엎드려 절 받기 식이긴 해도, 생일이랍시고 집에 먼저 찾아온 것만으로도 기특한 일이었다.

흘끗, 테이블 끝 쪽을 쳐다봤다. 막내아들 놈의 얼굴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직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했다는 생각에 서창식은 헛기침을 한 다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규하 너는, 만나는 사람은 있는 거냐?”

“없어요.”

주말마다 붙어먹은 예쁜이들은 많지만 서규하는 대답을 아꼈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대번에 숟가락이 날아올 것이 뻔했다.

“너도 이제 슬슬 좋은 사람 만나야지. 아빠가 좀 알아봐 줄까?”

그 말에 서규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베타요? 아니면 알파요?”

“당연히 알파지.”

“그럼 헛수고하지 마세요.”

“뭐야?!”

기껏 참은 보람도 없이 대번에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송이버섯 전을 입에 밀어 넣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말했잖아요. 저 애 안 낳아요.”

“누가 대뜸 애부터 낳으라고 했어? 참한 여자 만나서 서로 의지도 하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면 좀 좋아? 서른이 코앞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망나니처럼…….”

격하게 말을 쏟아 내던 서창식이 멈칫했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네 엄마한테 한번 알아보라고 하마.”

“됐다니까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오메가로 절 키우시든가요.”

“저놈의 새끼가 진짜!”

“고정하세요, 아버지.”

큰형이 서둘러 서창식의 팔을 붙잡았다. 작은형은 서규하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모르는 척하며 밥만 퍼먹었다. 먼저 건드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해 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가사 도우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이요?”

정은희의 물음에 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차영 님이라고 하셨어요.”

순간 서규하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른 가족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서 들라고 해요.”

그 새끼가 왔다고? 왜? 그보다 진짠가?

시선이 저도 모르게 거실을 향했다. 잠시 후,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쇼핑백을 손에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이차영이었다.

“어머나, 어서 오렴 차영아.”

정은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을 반겼다. 예정에 없던 방문에도 불구하고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서창식 또한 표정이 한껏 풀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어떻게 왔어?”

“근처 지나는 길이었는데, 규하가 오늘 아저씨 생신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잠깐 들렀어요. 이거 받으세요.”

“그냥 오지 뭘 이런 걸 가져와. 저녁은 먹었어?”

“아뇨, 아직 못 먹었어요.”

“그럼 얼른 앉아. 우리도 이제 막 시작한 참이야.”

순식간에 한 자리가 더 채워졌다. 형들도 이차영을 반가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저 새끼가 이 집 막내인 줄 알겠네.’

속으로 구시렁대며 식사를 이어 가려는데 모친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차영이한테 인사 안 해?”

“아까 했어요.”

짧게 대답하고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새 식탁에는 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회사는 어떠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서창식은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이차영에게 말을 붙였다.

덕분에 잔소리가 사라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모친이 붙잡았다.

“좀 더 앉아 있어. 차영이도 왔는데.”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못마땅하게 변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서규하는 거실로 나갔다.

방문을 연 순간 멈칫했다. 침대 위에 흐트러진 이불이 보였다. 좀 전에 꿨던 개꿈이 떠올랐지만, 서둘러 지우면서 창가로 향했다.

“후우.”

내뱉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갔다.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끈 서규하는 침대에 길게 누우면서 핸드폰을 켰다.

어머니한테는 잠깐만 자리를 비운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하는 대화는 못 알아먹는 게 태반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차영까지 합세했으니, 앉아 있어 봤자 허리만 아플 게 뻔했다.

뿅, 뿅- 콰쾅!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효과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엔 폰 게임만 한 게 없었다. 엉뚱한 곳에서 삽질하는 드래곤을 잡아 오는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과일 접시라도 들고 온 모양이었다.

“들어갈게.”

“……!”

그런데 어머니가 아니었다. 방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놀라서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금 원위치하며 서규하는 무심하게 물었다.

“왜 왔어?”

“말했잖아. 근처 지나가는데 아저씨 생신인 거 생각나서 잠깐 들렀다고.”

“그게 아니라, 내 방엔 뭐 하러 왔냐고.”

“아아.”

이차영이 턱을 매만지면서 다시금 대답했다.

“아저씨한테서 도망치느라.”

픽 웃음이 나왔다. 존나 듬직하고 착실한 표정으로 아버지랑 대면하고 앉아 있더니, 실상은 저처럼 탈출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웃음도 잠시, 대놓고 방 안을 둘러보는 행동에 서규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봐?”

“그냥, 오랜만이라서. 거의 15년 만인가?”

한때는 매일같이 얼굴을 봤던 적도 있긴 했다. 어머니끼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서 한 번씩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가게 된 태권도 학원에도 이차영이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한때였다. 초딩 고학년일 땐가 중딩일 때 이차영이 해외 유학을 가면서 연락이 완전히 끊겼었다. 그러다 몇 달 전에 단골 클럽에서 뜻하지 않게 재회했다. 참으로 뭣 같은 우연이었다.

“할 일 없으면 집에 가.”

다시금 폰 화면을 보면서 퉁명스레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차영은 순순히 나가는 대신 엉뚱한 소리를 해 댔다.

“저거, 앨범 같은데. 봐도 돼?”

“구질구질하게 그딴 건 왜 봐?”

“왜. 추억 돋잖아.”

“추억 같은 소리 하네.”

비꼬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이차영은 한 번 더 허락을 구한 다음 앨범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많고 많은 자리를 놔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딴 데 앉아. 매트리스 꺼지는 거 안 보여?”

“그럼 좀 더 당겨 앉지 뭐.”

멋대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쭉 뻗은 놈이 팔락대며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사진도 꽤 있네.”

이유는 모친 때문이었다. 잘 찍지도 못하면서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어머니는 틈만 나면 여기 좀 보라면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어렸을 땐 나름대로 교류가 있었으니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이때부터야?”

“? 뭐가.”

뜬금없는 말에 서규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싱긋이 웃고 있는 면상이 보였다.

“나한테 반한 거.”

“……!”

“지금도 좋아하려나.”

경악스런 표정이 떠오른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개소리 집어치워. 언제적 얘길 들먹이는 거야?”

수치스러운 흑역사 중 하나였다. 집안 대대로 특별한 유전자라도 있는지, 김모란은 물론이고 이차영도 어릴 땐 홀릴 정도로 예쁘장한 외모를 자랑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했는데……. 눈치 빠른 모친이 알아채고는 이모, 그러니까 이차영 어머니한테 말하는 바람에 그만 당사자도 알게 되어 버렸다. 얼빠 역사의 시작이자,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이땐 너도 꽤 귀여웠는데.”

“지랄.”

“입은 험했지만.”

서규하는 다시금 시선을 거두면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불만스러운 표정과 달리 심장은 멋대로 박동이 빨라졌다. 언제적 얘기냐며 타박을 주긴 했지만, 사실은 지금도 이차영의 얼굴에 약했다.

쌍꺼풀 없이 날렵하고 시원하게 뻗은 눈매에 그린 듯한 콧날, 조화를 더하는 단정한 입술. 만일 이차영이 지금보다 10cm만 더 작았어도, 자존심 다 버리고 쫓아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해서 앨범을 넘겨 보던 이차영이 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아픈 거 잘 참는 편이야?”

“왜. 또 무슨 시비 걸려고.”

“피어싱 말이야.”

펼쳐진 앨범에는 고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억지로 찍은 사진답게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손에는 꽃다발과 졸업장을 들고, 귀에는 피어싱을 한 채였다.

“뚫었을 때 꽤 아팠을 거 같은데.”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

귀 곳곳에 피어싱을 한 건 어린 날의 치기였다. 아는 형네 가게에서 있는 엄살 없는 엄살 다 부리면서 뚫었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나란히 침대에 앉아 있단 사실이 뒤늦게 신경 쓰였다. 좀 전에 꿈속에서 한 짓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 나가지 그래?”

“자고 갈 건데.”

그 말에 거듭 서규하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네가 왜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내일 아저씨랑 같이 등산 가기로 했어.”

“등산?”

“어. 아까 어쩌다 보니까 이야기가 나와서.”

언제 찌푸렸냐는 듯 서규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걸. 산에서는 존나 날다람쥐야.”

풍채도 좋은 양반이 산에서는 완전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그건 그렇고 등산이라니. 앞구르기를 하면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고, 뒤구르기를 하면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취미였다. 올라가면 잠깐 쉬었다가 또 내려와야 하는데, 뭐 하러 그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적당히 핑계 대고 까지 그랬, 앗!”

갑자기 귓불에 닿는 손길에 서규하는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팔뚝에 소름이 쫙 돋았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인상을 팍 구겼다.

“뭐 하는 짓이야?”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뭔지 몰라도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코 듣기 좋은 대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놀리는 상대방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귀 빨아 주니까 진짜 좋아하더라.”

“……!”

“꽉꽉 조이면서 들썩이는데, 그땐 나도 꽤 흥분됐어.”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열 오른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가, 새끼야.”

시근덕거리면서 발로 등짝을 밀어냈다. 하지만 돌처럼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가라는 말 안 들… 앗!”

한 번 더 발을 치켜들었지만 그대로 발목이 붙잡혔다. 앗 하는 사이에 몸이 반대로 뒤집혔다. 곧바로 올라타서 엉덩이에 대고 뭔가를 문지르는 느낌에 서규하는 사색이 되었다.

“미쳤어? 당장, 우웁!”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나직한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쉿, 큰 소리 내지 마. 누가 오면 어쩌려고.”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대번에 멈췄다. 이런 꼴을 가족에게 보인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손쉽게 바지를 벗기면서 이차영이 개소리를 지껄여 댔다.

“끝까지 안 해. 한 발씩 빼기만 하자.”

“윽…!”

살덩이를 움켜쥐는 손길에 서규하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좀 전에 몽정을 한 탓일까. 성의라곤 없는 손놀림에도 아랫도리에 금세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만 대도 커지는 건 여전하네.”

“……닥쳐.”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이차영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씩씩대면서도 얌전히 있는 걸 보니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여튼 어이없을 정도로 쾌락에 약한 몸뚱이였다.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의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벨트를 풀고 드로어즈를 살짝 끌어 내리자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엎드려 있는 놈의 엉덩이를 벌리고 끝부분을 갖다 대자 대번에 치켜뜬 눈이 뒤를 향했다.

“뭐 하는 거야?”

“비비기만 하려고. 아니면 네가 만져 줄래?”

“미친,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기분 좋게 해 줄게.”

다시금 엉덩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서규하가 다리를 딱 붙이고 있는 탓에, 귀두가 조여지면서 제법 그럴싸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힘주어 찌를 때마다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문득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이차영의 취향은 늘씬하면서도 몸 선이 예쁜 베타였다. 한 줌 허리를 붙잡고 가학적이다 싶을 정도로 박아 대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탄력 있고 건강한 몸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불현듯 제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에 느꼈던 실한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곧 피식 웃으며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있던 페니스를 빼냈다.

“젤 없어?”

“씨발, 집에 그딴 게 있을 거 같아?”

본가가 아니라 혼자 사는 집에도 없는 물건이었다. 잠시 후, 허리를 내리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거듭 욕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지만 안도는 아직 일렀다. 이차영이 곧장 뒤에서 안는 자세로 들러붙으며 성기를 다시 손에 쥐었다.

왼손으로는 젖꼭지를 꼬집듯이 당겼다. 불시에 가해지는 쾌감에, 발가락이 멋대로 옴찔거리며 시트 위에 비벼졌다.

“기분 좋아?”

“읏…!”

네가 아니라 누가 만져도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입술을 한껏 깨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열자마자 큰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섹스할 때마다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신음하고 반응하는 게 버릇 아닌 버릇이 돼 버린 까닭이었다.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무는 감각에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아래를 쥔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쾌락에 약한 육체가 오늘처럼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들어가도 되니?”

들썩이던 몸뚱이가 흠칫 굳었다. 이차영도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이 방 주인이라도 되는 양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과일 좀 가져왔어.”

“나중에 내려가서 먹을게요. 지금 규하랑 뭐 좀 하고 있어서요.”

서규하는 그제야 더듬더듬 이불을 끌어 와서 간신히 아래를 가렸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뭘 하고 있느냐면서 당장에라도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알았어. 이따 꼭 내려와.”

천만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얼마나 쫄았는지 목이 다 뻐근했다. 이내 서규하는 원흉인 놈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당장 안 떨어져?”

“너, 심장 엄청 빨리 뛴다.”

이차영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딴소리를 해 댔다. 젖꼭지를 조물딱거리던 손이 청진기라도 되는 양 가슴께에 닿아 있었다.

“씨발, 너 같음 안 그러겠어?”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땐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기세등등하던 좆도 쪼그라들었다.

품에서 벗어난 서규하는 한 번 더 발을 치켜들었다가, 멈칫하며 도로 내리고 말았다. 이유를 눈치챈 듯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밀어도 상관없는데.”

“……제발 좀 닥치고 꺼져.”

“이건 어떡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수치도 모르고 꺼떡대는 좆이 있었다.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늦은 후회였다.

“알아서 처리해.”

“너무하네.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아, 좀 꺼지라고!”

결국 먼저 일어선 사람은 서규하였다.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계속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뻔했다.

테이블 위의 담뱃갑과 라이터를 낚아채듯 챙겨 들었다. 방문 앞에 이른 순간, 서규하의 입에서는 또 한 번 욕이 흘러나왔다.

손잡이 아래쪽에 있는 잠금장치가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참으로 뭣 같은 놈이었다.

***

모처럼 하늘이 맑았다. 햇볕은 따갑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야외 활동을 즐기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리고 산에는 우거진 나무들이 많아서 내리쬐는 태양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서창식은 왕복 2.3km에 달하는 코스를 한 시간여 만에 다녀오는 기록을 세웠다. 늘 동년배 친구들과 다니다가, 모처럼 아들뻘인 녀석과 함께 하니 소싯적의 추억도 생각나고 또 은근한 자극이 됐다.

성공적으로 하산한 뒤에 서창식은 근처 한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자고로 등산 후에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이 제격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주문해 둔 음식들이 차례로 상을 채웠다. 둘만 남게 되자 이차영은 술 주전자를 넙죽 들고 말했다.

“한잔 받으세요.”

“좋지.”

콸콸 소리를 내며 탁주가 채워졌다. 잔을 받은 뒤에, 이번에는 서창식이 이차영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가볍게 건배한 다음 서창식은 단숨에 막걸리를 들이켰다. 맞은편에서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잔을 비우는 녀석을 보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 드물다는 우성 알파에 인물 훤칠해, 머리도 좋아. 그야말로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녀석이었다. 듣자 하니 장기 유학을 마치고 와서 제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했다는데,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을 와이프로부터 전해 들은 참이었다.

남의 자식이지만 참으로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부친인 이 사장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닐 만도 했다.

“만나는 사람은 있어?”

“아직 없어요.”

“그럴 리가 있나.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을 텐데 말이야.”

“진짜 없어요.”

“녀석, 어지간히 눈이 높은가 봐.”

이차영은 빙긋이 웃었다. 눈이 높다기보다는 까다롭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원나잇 상대야 널리고 널렸지만, 진지한 만남을 이어 갈 만한 상대는 아직 찾지 못했다. 상류층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에게 있어서도 결혼은 비즈니스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결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형님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 자네 같은 아들이 있어서.”

이차영은 거듭 웃는 얼굴로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야말로 아저씨를 엄청 부러워하세요.”

“형님이 나를?”

“네. 듬직하고 유능한 아들들이 셋이나 있다면서요.”

“허허…….”

씁쓸한 웃음을 흘린 뒤에 막걸리 잔을 들이켰다. 첫째와 둘째는 자랑거리가 맞지만, 막내는 그야말로 애물단지였다. 그나마 지금은 좀 잠잠한 듯하지만 한창 엇나갈 땐 위장 장애를 달고 살다시피 했다. 일가친척들 중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돌연변이 같은 녀석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사내자식이면서 오메가로 태어난 것부터가 일반 범주를 벗어난 일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아비로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규하랑은 계속 연락하고 있고?”

“네. 가끔요.”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차영이 네가 잘 좀 챙겨 줘. 나이만 먹었지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야. ……지 형들 반만 닮아도 좋을 텐데…….”

“한잔 더 드릴까요?”

눈치껏 주전자를 든 이차영이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창식은 말을 이었다.

“혹시 말이야, 우리 규하 만나는 사람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런 이야기는 도통 안 해서 말이야.”

“……글쎄요. 저도 그런 이야기는 해 본 적이 없네요.”

사실이었다. 재회한 뒤 어쩌다 보니 섹스까지 하게 됐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딱히 나눌 일이 없었다. 그마저도 서규하가 발칙한 바텀의 도발에 넘어가서 쓰리썸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오며 가며 눈인사나 하는 사이로만 남았을 터였다.

“참한 아가씨 있으면 규하한테 소개 좀 해 줘. 혹시 또 모르지 않겠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그 녀석도 변할지.”

“네. 한번 알아볼게요.”

잔에 가려진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참한 아가씨라니, 아들이 남자한테만 흥분하는 건 알고 하는 말일까.

‘……알 리가 없지.’

이제는 자신과 둘이서만 붙어먹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

시원하게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끊겼다. 샤워를 끝낸 서규하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러다 수건 끝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신음을 흘렸다.

욕실 거울을 등지고 섰지만 뒷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방에 가서 거울 두 개로 겨우 목덜미를 확인했고, 그 순간 욕이 절로 나왔다.

“아오, 썅…….”

보라색으로 변한 멍과 옅은 잇자국이 보였다. 범인은 두말할 것 없이 이차영이었다. 진짜 무슨 개새끼도 아니고, 남의 목덜미를 얼마나 씹어 댔으면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뒤늦게 옷을 꺼내 입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카페의 매니저였다.

“어.”

- 여보세요? 점장님 전데요, 혹시 지금 바로 카페에 오실 수 있으세요?

딱 들어도 다급한 목소리였다. 서규하는 핸드폰을 고쳐 잡으면서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 미선이가 손님이랑 트러블이 좀 있어서 난리가 났……, 꺄악!

와장창, 하고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갈게. 15분 정도 걸릴 거야.”

서규하는 전화를 끊자마자 차 키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

“점장님!”

카페 문을 열자마자 매니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뒤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쪽이 점장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저 새끼가 원흉이구나. 찰나에 스캔을 끝낸 뒤에 서규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는데, 무슨 일입니까?”

질문을 받은 남자의 얼굴이 한층 아니꼽게 변했다.

“쓰레기 버리다가 실수로 살짝 스쳤는데, 소리를 지르고 생난리를 쳐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요? 핸드폰으로 사진 찍는 인간들도 있던데, 얼굴 팔리면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요.”

서규하는 잠깐 대답을 보류하고 옆을 돌아봤다. 매니저 뒤편에 한껏 웅크린 채로 서 있는 김미선이 보였다. 고갤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눈물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곧장 매니저에게 눈짓을 보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매니저가 김미선의 어깨를 감싸고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남자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어어? 지금 도망치는 겁니까? 사람 쪽 다 팔리게 해 놓고, 질질 짜면서 튀실려고?”

다가가려는 것을 서규하가 퍼뜩 막아섰다. 와중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목청을 높여 틱틱 쏘는 말을 해 댔다. 성질 같아서는 좀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가게 곳곳에는 CCTV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또 아직 남아 있는 손님들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남자의 주장처럼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면, 일을 크게 키워 봤자 이쪽만 손해였다. 생각을 끝낸 서규하는 성질을 눌러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CCTV부터 먼저 봐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하세요. 누가 겁날 줄 알고?”

코웃음을 친 남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년이 오버해서 난리 친 게 확인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장 문 닫게 해 줄 테니까.”

기고만장한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서규하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미선이 바로 퇴근시켜. 택시 태워서 보내고, 확인 부탁해.”

“네, 점장님.”

이윽고 서규하는 턱짓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가시죠.”

***

프라이빗 룸으로 남자를 데려간 서규하는 금세 난관에 부딪혔다. CCTV의 존재를 떠올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녹화본을 재생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제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발, 좆 됐네.’

남자의 눈을 피해서 초조해하던 서규하는 결국 SOS를 보냈다. 오랜 시간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서 하다가, 몇 해 전부터는 아버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 비서였다. 하지만 회사 사무실에 있는 양반이 1, 2분 만에 카페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려는 생각에 서규하는 남자에게 커피와 스낵을 제공했다. 남자는 순순히 커피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 처먹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CCTV 있는 거 맞아요?”

“저기 있는 거 안 보여요?”

서규하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나고 있었다. 미간에 힘을 준 채 턱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하지만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밉살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그럼 빨리 틀어서 확인하든가요. 내 시간 어쩔 거냐고요.”

“…….”

그냥 한 대 칠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드디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규하는 팔짱을 풀고 걸어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숨 막힐 정도로 단정한 슈트 차림인 최 비서의 얼굴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최 비서는 곧장 컴퓨터 책상으로 다가갔다. 달칵, 달칵, 분주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더니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질문했다.

“시간대가 대충 언제쯤입니까?”

그 말에 서규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신이 도착했을 때가 대략 30분 전이니, 넉넉잡고 한 시간 전으로 잡으면 될 것 같았다.

“4시쯤.”

최 비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2배속으로 재생되는 화면을 함께 보고 있으니, 금세 문제의 장면이 나타났다.

셀프 정리대 앞에 선 김미선이 어질러진 컵을 분주하게 치웠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찬가지로 제 옆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고, 김미선이 화들짝 놀라며 트레이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이어졌다.

‘흐음…….’

서규하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문제의 장면이 찍히긴 했지만 각도가 애매했다. 앞모습과 옆모습 위주로 찍혀서, 남자의 주장대로 단순히 스친 것인지 아니면 고의적인 어떤 행동을 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남자가 이내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거봐요. 저년이 혼자 오바한 거라니까요.”

서규하가 말을 내뱉기 전에 최 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도 한 번 확인해 볼까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최 비서는 곧장 다른 화면을 클릭해서 그래프를 찾았고, 다른 각도에서 찍힌 장면이 재생됐다.

‘이거다!’

눈이 번쩍 뜨였다. 반대편에서 매장을 찍는 카메라인지, 김미선의 뒷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이윽고 또 남자가 나타났다. 왼손에 컵을 든 채로 붙어 서더니, 제 몸으로 김미선의 몸을 반쯤 가리면서 오른손으로 엉덩이를 꽉 움켜쥐는 장면이 고스란히 재생됐다.

“…….”

서규하의 시선이 천천히 옆을 향했다. 지금 심경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씨발아, 뭐가 어쩌고 저째?”

“시, 실수예요, 진짜.”

언제 목에 힘을 줬었냐는 듯 남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읊어 댔다.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울려서, 꺼내려다가 스친, 아아악!”

서규하가 순식간에 남자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뼈가 툭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으깰 것처럼 힘을 주자,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의 엉덩이에서 핸드폰을 찾는 이런 손모가지를 뭐 하러 달고 다녀. 응?”

“진짜 실수였어요! 좀 놔 봐요.”

“……개새끼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네.”

남자가 바라는 대로 손목을 놓음과 동시에 서규하는 발을 치켜들고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몸뚱아리가 볼썽사납게 뒤로 나자빠졌다. 남자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꼴에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는 있는 모양인지 앉은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사, 살려…….”

퍼억-!

또 한 번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놀라서 다가온 최 비서가 서둘러 서규하를 붙잡았다.

“그만하시죠, 도련님.”

하지만 서규하는 좀처럼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만일 다른 각도에서 찍힌 영상이 없었더라면, 좀 찝찝해도 위로금 명목으로 봉투를 건네고 무마할 생각이었다. 가장 쉬우면서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깟 돈은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지만, 하마터면 김미선이 큰 상처를 받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거듭 발을 치켜들었지만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다. 최 비서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한 탓이었다. 나직하게 욕설을 뇌까린 뒤에 서규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꺼져. 한 번 더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릴 줄 알아.”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나 해코지할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그땐 진짜 콩밥 제대로 처먹게 해 줄 테니까.”

남자는 눈치를 살피다가 도망치듯 사무실을 벗어났다.

뭐 눈에는 뭐 같은 놈만 보인다고, 사실 보자마자 놈팡이 새끼라는 감이 왔지만 혹시나 해서 나름 정중하게 대응한 거였다. 두 번째 영상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봉투를 건넸으면 좋다고 낄낄댔을 거라 생각하니 또다시 열불이 났다. 아예 손목을 밟아서 아작 내는 거였는데.

“그냥 보내도 괜찮을까요?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하는 최 비서의 질문에 서규하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미선이도 경찰서에 가야 되잖아. 겁 많고 여린 애라서 안 한다고 할 거 같은데……. 내일 한 번 물어보고, 신고하겠다 하면 그때 할게.”

“보복하러 오진 않을까요?”

“저런 새끼는 다시 찾아올 배짱도 없어.”

“그럼 다행이긴 한데…….”

말끝을 흐리던 최 비서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비쳤다. 셔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옅은 멍 자국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물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뭐?”

“목 뒤에 상처가 있는 것 같……은데,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뒤늦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최 비서는 자체적인 결론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아직도 습관처럼 남아 있는, 보호자로서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키스 마크 같은 건 되도록 안 만드는 편이 좋습니다. 피부 아래에 혈액이 고이는 거라서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하여튼 잔소리는.”

어쨌거나 최 비서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기에 서규하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가방을 챙겨 든 최 비서가 먼저 사무실을 나섰고, 이어서 서규하도 카페로 돌아갔다.

그새 카페에는 새로 온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서규하는 매니저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미선이는?”

“점장님 말씀대로 택시 태워서 보냈어요. 좀 전에 잘 도착했다고 문자 왔어요.”

“다행이네. 내일 오면 잘 좀 다독여 줘.”

“네, 점장님. ……근데 아까 그 사람 말이에요, 혹시 또 오면 어떡하죠?”

“그러진 않을 거야. 만일 왔는데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 나한테도 바로 연락하고.”

이어서 서규하는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아이스 라떼 한 잔만 만들어 줘.”

“네. 사무실로 갖다 드릴게요.”

“아니, 밖에 앉아 있을 거야. 맛있게 부탁해.”

걸음을 옮긴 그는 구석진 곳에 있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방금 그런 일도 있었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생각이었다.

***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여러 개의 잔들이 허공에서 경쾌하게 부딪쳤다.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어느 누구도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금요일인 오늘, 서규하는 카페 문을 일찍 닫고 직원들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회식을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또 며칠 전 험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한 위로를 겸한 자리였다.

“다들 많이 먹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껏 시키고.”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흘러나왔다. 다들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오픈 때부터 같이 한 직원들이라서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옆에 앉은 매니저의 잔에 맥주를 따라 주면서 서규하가 물었다.

“바쁘진 않아? 저번 달 매출 보니까 많이 올랐던데.”

“사람들 몰리는 시간대나 주말에 좀 바쁘긴 한데, 그래도 할 만해요.”

“아니면 남자 알바생 하나 구해 볼까?”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카페 직원과 알바생들은 전부 여자였다. 그중 둘은 오메가지만 다들 성실하고 힘쓰는 일도 곧잘 해서 불만도 걱정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문득 ‘남자 직원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물론 며칠 전의 그 미저리 같은 새끼 때문이었다.

“전 상관없어요. 뺀질뺀질한 사람만 아니라면요.”

“그런 사람은 나도 싫지. 내일 사이트에 글 올릴 테니까 문에도 하나 붙여 줘.”

“네. 이왕이면 베타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렴. 누구 부탁인데.”

“크, 역시 점장님이 최고예요!”

한껏 추켜세워 주는 말을 들으면서 서규하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남중 남고 출신에 섹스도 남자하고만 하는 서규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 아닌 환상이 있었다. 입 거칠고 난잡하게 노는 친구 놈들과 어울리다가, 카페 직원들을 보면 확실히 느낌이라든가 분위기가 달랐다. 뭐, 물론 김모란처럼 거칠 것 없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식당 자체의 분위기도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퓨전 레스토랑이라서 적당한 템포의 팝송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느긋한 식사를 즐기는데, 문득 매니저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점장님 전화 온 거 아니에요?”

시선을 따라 고갤 돌리니 핸드폰 액정에 ‘이차개’라는 글자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잠깐 내려다보다가 서규하는 전화를 받았다.

“어.”

- 여보세요? 뭐 하고 있어?

“밥 먹는 중이야.”

- 저녁이 늦네.

늘 그렇듯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어느 정도 허기도 채웠겠다, 서규하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전화했어?”

- 전에 빌려준 돈, 아직 못 받은 게 생각나서.

일순 서규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일이 꽤 흐른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달라 하지 그랬어.”

- 그땐 나도 까먹고 있었지. 다른 짓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간에 진한 주름이 생겼다. 뭘 일컫는지 대번에 알아챈 까닭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서규하는 뒤늦게 대답했다.

“그냥 기부한 셈 쳐. 돈도 많은 새끼가 쪼잔하기는.”

-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많겠어.

“월급쟁이 같은 소리 하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월급을 받는 건 틀린 말이 아닐지 몰라도, 돈이 없다는 건 지나가던 개가 듣고 웃을 일이었다.

“계좌 번호 불러.”

- 그러지 말고 집으로 와. 전에 하던 거, 마저 이어서 할 생각 없어?

이 또한 뭘 일컫는지 명확했다. 서규하는 잠깐 대답을 보류한 채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하다 만 이후로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어차피 돈도 줘야 되니까.’

툭, 바닥에 던진 꽁초를 발로 비벼 끈 다음 뒤늦게 대답했다.

“주소 찍어 보내.”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조용한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서규하는 못마땅한 듯 한쪽 입가를 비틀었다.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동네에서 빌라 꼭대기 층을 혼자 처쓰는 주제에 월급쟁이는 개뿔.

벨을 누르자 잠시 후에 현관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카락에 검은색 가운 차림인 이차영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와.”

실내도 눈 돌아갈 정도로 넓고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묘하게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피부를 약하게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잠깐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며 서규하는 운을 뗐다.

“샤워 좀 하고 올게.”

“안 씻어도 되는데.”

“더럽게 무슨 소리야. 발 냄새 풍기는 놈이랑 뒹굴고 싶어?”

“……산통 깨기는.”

이차영이 픽 웃으며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욕실로 들어간 서규하는 훌렁훌렁 옷을 벗은 다음 샤워기 밑에 섰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바디 워시를 손바닥에 짜서 대충 몸을 닦고, 씻는 김에 머리도 감았다.

이제는 거기만 남았다. 서규하는 샤워기를 등진 채 뒤돌아섰다. 살짝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옆으로 벌리자 그곳에 물줄기가 닿았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입구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으, 기분 더럽네.’

더럽다기보다는 낯선 감각이었다. 여전히 기억은 희미하지만 애널 섹스도 하고, 딜도로 재미를 본 적도 있긴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서규하는 망설이다가, 입구 주변을 배회하던 손가락 하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후.”

묵직한 숨을 토해 낸 뒤에, 이번에는 두 개를 동시에 넣었다. 조금 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러고 있으니 그날 일이 떠올랐다. 전동 딜도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넣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뒤에 안에 든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넣고 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최대한 깊게 넣고 더듬어도, 발작 같은 쾌감이 일던 그 부분까지는 닿지 않았다. 아예 깊숙한 곳에 있으면 시도도 안 할 텐데,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포도나무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애가 탔다.

‘시발,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거 같은데…….’

벌컥-

그때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욕실 문이 활짝 열렸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서규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어붙은 표정을 본 이차영이 느슨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혼자 하고 있었어?”

“……!”

얼굴로 열기가 확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목까지 붉어진 채로 허리를 폈다. 육두문자를 퍼부으려는 순간, 일그러진 표정에 금세 당황스러움이 덧입혀졌다. 닫히는 문소리에 이어서 이차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들어와?”

“집주인이 욕실에도 마음대로 못 들어와?”

“그런 뜻이 아니,”

튀어나오던 말이 멈췄다. 순식간에 다가온 이차영이 코앞에서 서규하를 내려다봤다.

“돌아서 봐. 내가 해 줄게.”

먼저 움직인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그는 여전히 굳어 있는 서규하의 몸을 어렵지 않게 반대로 돌려세웠다. 왼손으로 어깨를 누른 채, 오른손을 엉덩이 골 사이로 가져갔다. 누구와 달리 망설임 없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열심히 풀었나 봐. 부드럽네.”

“씨발, 안 떨어져?”

내리누르고 있는 어깨 쪽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납게 이를 갈며 내뱉는 말이 들렸지만 이차영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되레 여유로운 목소리로 엉덩이를 좀 빼 보라고 말하면서 거침없이 안을 넓혀 갔다.

“앗…!”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서규하의 허리가 꿈틀거렸다. 여기네. 이차영의 미소가 깊어졌다. 손톱을 세워서 긁어 대자 온몸으로 당황해하더니 벽을 짚은 양손을 그러쥐는 것이 보였다.

억눌린 신음이 물줄기 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급기야 서규하의 허리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몸을 겹치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동안 탑은 왜 한 거야? 뒤로 이렇게 잘 느끼면서.”

“크, 흣…!”

입을 벌린 순간, 또 한 번 저릿한 쾌감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왼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서규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멋대로 발기한 자지 끝에서 정체 모를 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여튼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딱 한 번 붙어먹었을 뿐인데, 곧바로 포인트를 자극하는 바람에 화를 내거나 거부할 틈도 없었다. 와중에도 길쭉한 손가락으로 한곳만 집요하게 긁어 대는 것은 여전했다. 손톱으로 긁을 때마다 몸이 멋대로 꿈틀대면서 발기한 자지가 꺼떡거렸다.

“이대로 박을까? 아니면 침대에서?”

여전히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음성에 솜털이 바짝 섰다. 어디 솜털만 그러할까. 다이렉트로 와 닿는 입김에 손도 대지 않은 젖꼭지도 꼿꼿해졌다.

“떨어져, 새끼야. 소름 돋아.”

이차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봐란듯이 귓바퀴를 핥아 대면서 왼손으로 자신의 가운 매듭을 잡아 당겼다. 몸을 감싸고 있던 가운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안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내고, 발기한 중심을 엉덩이 골 사이로 가져갔다. 거의 동시에 서규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서 해.”

“여기서 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답답해서 싫어.”

어쩐지 유달리 숨이 가쁘다 했더니, 샤워기에서 계속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내 서규하는 멈칫했다. 한껏 발기한 상대의 중심이 뒤늦게 시야에 들어왔다. 새삼 질린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도 크기로는 어디 가서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저 새끼는 정말 볼 때마다 바텀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였다.

웬일로 이차영은 순순히 물러섰다. 배스 타월을 꺼내서 건네주더니 자신의 몸도 닦은 다음 허리에 두르는 것이 보였다. 서규하는 또 한 번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솟은 중심부가 적나라하게 부각돼 보이는 탓이었다.

“이쪽이야.”

먼저 걷는 놈을 따라서 서규하도 걸음을 옮겼다.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어차피 자신의 집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렸다. 대수롭지 않게 발을 내디딘 순간,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경계선 같은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찌릿하는 느낌이 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열이 날 때처럼 선득하기도, 약한 정전기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팔뚝을 슥슥 문지르고 서 있자 이차영이 의아한 듯 뒤돌아보았다.

“왜 그래?”

“뭐, 새끼야.”

늘 그렇듯 띠꺼운 대답이 나왔다. 추워서 그런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괜히 방 안을 둘러보려는 찰나, 갑자기 우악스럽게 턱이 붙잡히면서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으웁…!”

벌어진 입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이차영은 능숙하게 혀를 휘감으면서 손으로는 서규하의 젖꼭지를 꼬집어 댔다. 또 한 번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새낄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서규하는 생각을 바꿔 이차영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놈의 입 안을 마구 휘저었다. 받으면 그만큼 되돌려 줘야지 꼬리를 내리는 짓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서로 잡아먹을 것 같은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혀를 비비고 섞을 때마다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이차영이 먼저 입술을 뗐다.

“하아….”

가쁘게 변한 숨을 내뱉으면서 서규하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이겼다는 만족감도 잠시, 이내 못마땅한 시선이 상대를 향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은 하고 그래?”

“안 하긴.”

“뭐?”

“그때 우리, 키스도 엄청 했어. 물론 넌 기억 못 하겠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일만 화두에 오르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부러 목에 힘을 주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지만 서규하는 놈을 밀어내지 않았다.

착실하고 반듯하기는 개뿔. 얼마나 굴러먹었으면 키스도 수준급이다. 비비고 있는 곳은 입술인데, 저만치 떨어진 아랫도리가 반응하며 껄떡댔다.

그에 질세라 서규하도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침대 위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어김없이 긴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이차영은 서규하의 다리를 벌렸지만 앉아 있어서 뒤쪽을 만질 수가 없었다.

“풀어 줄 테니까 누워 봐. 아니면 엎드리든가.”

“그냥 박아. 방금 화장실에서 쑤셨잖아.”

포인트를 자극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떠올리자마자 성기가 꿈틀하며 부피를 키웠다.

“그 정도로 괜찮겠어? 좀 더 풀어 주는 게 나을 텐데.”

“…….”

얼굴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이차영의 몸을 타고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골반 위로 아슬아슬하게 배스 타월이 둘러진 가운데, 유달리 치솟은 중심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 풀어 보겠답시고 만졌던 구멍과 놈의 성기를 차례로 떠올렸다. 판단을 끝낸 서규하는 말없이 몸을 뒤집었다. 이내 퍼뜩 뒤를 돌아보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찢어지면 죽을 줄 알아.”

“어련할까 봐.”

픽 웃음을 흘린 이차영이 베드 테이블 서랍을 열고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이내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 까닭이었다.

“상체 숙이고, 엉덩이 더 들어 봐.”

“……존나 바라는 것도 많네.”

툴툴대면서도 어김없이 요구한 대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여전히 허리 위치가 낮았기에 서규하의 상체를 누르면서 엉덩이를 좀 더 들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은밀한 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힘 빼고 편하게 있어.”

젤을 쭉 짜서 엉덩이에 발랐다. 차가운지 서규하의 몸이 움찔한다. 그러든 말든 이차영은 입구 위를 대충 문지르다가 구멍 안으로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안쪽은 여전히 뜨겁고 비좁았다. 고작 손가락 두 개인데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때, 시트를 움켜쥔 서규하의 손이 보였다. 골격도 그렇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것만 봐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손만 그러할까. 이렇게 체격이 있는 상대를 안는 것도 서규하가 처음이었다.

문득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그랬다간 대번에 성질을 내겠지. 쌍욕은 옵션이고. 그러면서도 개처럼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이렇게 순순히 뒤를 내 주는 걸 보면 어지간히 쾌락에 약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버거워하면서도 첫 경험에 뒤만으로 갔겠지.

어릴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뒷일 따윈 안중에도 없이, 당장 눈앞의 좋은 것에 이끌려 행동하는 건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했다.

“그 뒤로 한 적 있어?”

“뭐?”

“여기로 한 적 있냐고.”

“……닥치고 풀기나 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그 뒤로 여길 사용해서 섹스한 적이 있단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차영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내 픽 웃음이 나왔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뚫어 주자마자.”

“뭐라는 거야?”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서규하가 다른 놈한테 박든 박히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잘 맞는 구멍을 찾았고, 전화 한 통에 냉큼 찾아온 걸 보니 녀석도 나름대로 기대한 게 있을 터였다. 그러니 서로 기분 좋게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손가락을 하나 더 늘리자 조임이 훨씬 빠듯해졌다.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면서 둥글게 솟은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 철썩 내리쳤다. 몸이 좋아서 그런지 확실히 탄력도 남달랐다. 그대로 한 손 가득 쥐고 주무르면서 안을 계속 긁어 대자 몸 전체가 꿈틀댔다. 금세 안이 젖어 드는 느낌이 났다.

“좋은가 봐. 베타가 이렇게 빨리 젖는 건 처음 봤어.”

멈칫, 순간 서규하의 몸이 굳었다. 흘끗 뒤를 돌아봤지만 다행히 뭔가를 알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부러 불쾌한 듯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서규하는 말을 돌렸다.

“네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야. 누가 쑤시든 똑같아.”

“다른 놈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런데.”

“아흣…!”

갑작스러운 자극에 허리가 또 한 번 요동쳤다. 이후로 이차영은 아까처럼 대놓고 한곳만 계속해서 긁어 댔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아랫배가 한 번씩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꼿꼿이 발기한 성기에서 정액을 닮은 무언가가 한 번씩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한참 뒤에 이차영은 손가락을 빼냈다. 젤과 뒤섞인 묽은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헐겁게 감겨 있던 타월을 풀자 발기한 성기가 드러났다. 콘돔을 씌운 다음 엉덩이 골 사이로 가져갔다.

“넣을게.”

“천천히 해!”

어김없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느긋한 표정과 달리 아래는 여유가 없었기에, 구멍에 끝을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크, 윽….”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름대로 열심히 풀어 줬건만 그래도 버겁긴 한 모양이었다. 데자뷰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녀석의 뒤를 뚫었을 때, 그때도 꼭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몸짓이 생각났다.

“힘 좀 빼 봐.”

하지만 경직된 몸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이차영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넓혀 줬으니 단숨에 넣어도 유혈 사태가 날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성가셔질 것 같았다. 이차영은 놈의 골반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서 성기로 가져갔다. 아파하는 것치곤 여전히 꼿꼿한 살덩이를 붙잡고 타이트하게 훑었다. 손끝으로 귀두를 둥글리자 잠잠하던 허리가 꿈틀댔다. 그대로 계속 흔들어 주면서 조금씩 안으로 진입했다.

마침내 끝까지 다 넣었을 땐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이차영은 그 상태로 잠깐 숨을 골랐다. 온전히 감싸인 내벽은 몹시도 뜨거웠다.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박아 대다가 갈수록 속도를 빨리했다. 살끼리 부딪칠 때마다 특유의 소리가 났다. 빼면 속살이 딸려 나오고, 찌르면 놀라서 수축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응, 하앗, 으읏!”

이차영은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벌어진 둔부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여전히 좁게 느껴지는 안쪽에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안에, 길이 생긴 거 같아. 내 모양대로.”

“흣…, 흐읏!”

안이 한층 수축하며 성기를 꽉 물었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조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찔러 대는 움직임에 맞춰 탄력적으로 꿈틀대면서 깊은 곳으로 잡아끄는 느낌이 났다. 남자를 받기 위해서 타고난 구멍 같았다.

이례적으로 빠른 사정감이 차올랐다. 조루냐는 얼토당토않은 비아냥거림은 사양이었기에, 이차영은 다시금 속도를 줄이며 완급을 조절했다. 한 번 더 서규하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끈적하게 묻어나는 체액을 가슴에 대고 문지르자 아래를 꽉 조이며 진저리를 치는 게 느껴졌다.

“응, 흑, 흐읏!”

한동안 침실에는 살 부딪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힘들게 버티고 있던 서규하의 상체가 허물어졌다. 기다린 것처럼 쫓아간 이차영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짭조름한 피부를 핥다가 이를 세워 잘근잘근 깨물었다. 믿을 수 없게 그조차도 쾌감이 되어 서규하를 덮쳤다. 손도 대지 않은 성기가 꺼떡거리며 투명한 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퍼억, 힘주어 박아 올리는 움직임에 자지러지며 뒤를 조였다. 천천히 페니스를 빼낸 이차영이 들썩이는 서규하의 등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그런 것치곤 몹시 힘겨워 보였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이차영은 서규하를 일으켜 세워서 벽을 짚고 서게끔 했다. 엉덩이를 벌리자 젖은 구멍이 드러났다.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은 다음 또다시 힘차게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하앗, 학, 으응…!”

내리깐 시선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척추를 따라 움푹 팬 등골도 그렇고, 깊숙이 박을 때마다 엉덩잇살이 탄력 있게 흔들리는 것도 흥분을 더했다.

잠시 후, 이차영은 서규하의 단단한 복부를 끌어안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벽에서 떨어진 손을 뒤에서 그러잡은 채 온전히 허릿심만으로 섹스를 이어 갔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에선 통제되지 않는 신음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뒤치기를 하면 깊숙이 들어와서 좋긴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벽을 짚고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는데, 무슨 도둑놈 잡은 것처럼 뒤에서 두 손을 결박하고 있으니 자칫하면 꼴사납게 주저앉을 것 같았다.

“손, 흐읏, 좀 놔 봐.”

“왜. 좋은데.”

뒤늦게 서규하의 손을 놓아주면서 이차영은 그의 등에 몸을 겹쳤다.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쥔 채, 선명한 잇자국이 남아 있는 목덜미를 다시 한번 잘근잘근 깨물었다.

흥분하면 할수록 이차영은 상대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섹스할 때의 버릇이자 본능적인 행위였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서규하와는 몸의 상성이 꽤나 잘 맞았다. 피부는 탄력이 있으면서도 의외로 부드러웠고, 닿는 곳마다 손에 착착 감겼다.

“침, 대로, 흣, 가.”

“힘들어?”

“흑, 응, 너 같으면, 읏, 안 힘들겠냐?”

찔러 대는 박자에 맞춰 말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순순히 수긍하는 걸 보니 꽤나 힘든 모양이었다.

이차영은 서규하의 말을 들어주었지만 페니스를 빼지는 않았다. 삽입한 상태로 침대에 올라서 서규하의 몸을 옆으로 뉘었다. 한쪽 다리를 팔에 걸어 올린 채 뒤에서 안을 쑤시기 시작했다.

“흐앗, 앗, 으응!”

가슴을 쥐어뜯듯이 꼬집자 서규하가 자지러지며 꿈틀댔다. 아래를 들쑤시는 움직임도 더욱 격렬해졌다. 언제부턴가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한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정의 기미를 느낀 이차영은 막바지를 향해서 박차를 가했다. 단단한 페니스가 쉼 없이 구멍을 드나들며 움직였다.

잠시 후, 한계에 달한 그곳에서 정액이 왈칵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찔러 박힌 순간, 서규하의 페니스에서도 희뿌연 정액이 뿜어졌다.

“후우….”

사정을 마친 이차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섹스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절정에 달하고도 좀처럼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데 서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앙앙댔냐는 듯 온도가 뚝 떨어진 냉랭한 음성이었다.

“다 쌌으면 떨어져.”

“무드 없기는.”

픽 웃으며 건네는 말에 서규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드 같은 소리 하네.”

“왜. 몸 섞는 사이인데 무드 좀 찾으면 어때서.”

“미친 소리 하지 마.”

이차영은 유감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페니스를 빼냈다. 벗겨 낸 콘돔 끝을 묶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다음, 티슈로 대충 닦고 새 콘돔을 씌웠다. 몸을 일으키다가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서규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하게?”

“내가 언제 한 번으로 끝내는 거 봤어? 너도 그렇잖아.”

맞는 지적이었다. 서규하도 탑을 할 때는 기본 두세 번은 박은 채로 싸는 편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이번에는 정상위로 삽입했다. 워밍업을 하듯 느긋하게 움직이다가 문득 이차영이 말을 꺼냈다.

“계속 나랑 할 마음은 없어?”

“뭔 말이야?”

“우리, 생각보다 궁합이 잘 맞는 거 같아서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근래 한 섹스 중에서 제일 만족스러워.”

오물대며 타이트하게 조이는 감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다시 생각해도 자신을 위해서 준비된 구멍 같았다. 아니면 녀석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뻔히 알고 있는데, 섹스하자고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서규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이차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싫으면 당장 싫다고 하거나 욕을 했을 녀석인데, 대답을 보류한다는 것은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뭉근하게 허리를 돌려 대면서 이차영은 어린애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좋은 제안이지 않아? 나 정도 되는 탑은 흔치 않을 텐데.”

“……네 입으로 그런 말 하고 싶냐?”

“뭐 어때. 사실이잖아.”

짜증 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다시 봐도 얼굴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취향에 부합하는 놈이었다. 실컷 싸지르고도 곧바로 아래를 들락거리는 물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차영이라면 귀찮게 구는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괜한 자존심에 머리를 굴리는 척하고 있으니 좀 더 혹하는 제안이 이어졌다.

“원할 때마다 박아 줄게. 파트너 찾으면서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서로 빼지 않고 즐길 수 있으니까 딱 좋잖아. 너도, 나도.”

“……생각 좀 해 보고. 근데 너 말이야.”

“응?”

“……아냐.”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고. 닥치고 박기나 해.”

“변덕하고는.”

안을 드나드는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잠깐 가라앉았던 공기도 또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오롯이 침대 위에서만 나는 여러 가지 소리가 늦은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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