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권) (1/28)

Chapter 1.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햇빛이 비쳐 드는 커다란 창문이었다.

“아오……. 골이야.”

정신이 들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한껏 미간을 구긴 채 관자놀이를 눌러 대던 서규하는 뒤늦게 낯선 무게감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야 이건?”

근육질의 긴 팔이 허리를 결박하듯 감고 있었다. 술이 덜 깨긴 했어도 제 팔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고개만 살짝 틀어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잘도 자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시원하게 뻗은 눈매, 앞에서 봐도 우뚝하게 솟은 날렵한 콧날. 잘생긴 놈은 잠자는 모습조차도 화보처럼 근사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배알이 절로 꼴릴 지경이었다.

묵직한 팔을 밀어낸 뒤에 서규하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윽, 하는 신음과 함께 굳어 버렸다. 움직이자마자 저릿한 통증이 하반신에서 느껴졌다.

“취해서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나…….”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불금을 맞아서 단골 클럽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흥청망청 퍼마시는데 이차영이 나타났다. 시답잖은 대화를 잠깐 나누다가 직원이 추천해 준 바텀 하나를 끼고 셋이 나란히 룸을 나섰다. 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간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상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오, 썅…….”

가시지 않는 두통에 욕설을 뇌까리며 서규하는 주변을 둘러봤다. 나름 친숙하다면 친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클럽의 콜보이들과 원나잇을 할 때면 종종 같은 건물 위층에 있는 룸을 이용하곤 했다. 이차영과 함께 쓰리썸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도 분명 셋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째 눈 떠 보니 침대엔 이차영과 자신 둘뿐이었다.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건장한 남자들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꽤나 버거웠을 텐데, 벌써 가 버리고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 부지런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보기보다 체력이 좋거나.

‘어제 꽤나 좋았던 거 같은데…….’

머릿속은 여전히 캄캄하지만 상당히 만족스러운 섹스를 했다는 느낌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는데 문득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옆을 돌아보자 언제 잠에서 깼는지 이차영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싱긋이 웃고 있는 게 아침부터 여유가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이차영이 몸을 일으키자 시트가 흘러내리며 벌거벗은 육체가 드러났다. 서규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나태해도 운동은 꽤나 열심히 하는 편인데, 저놈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찌푸린 눈가에 짜증이 묻어났다. 타고난 체격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서 서류만 들여다보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몸을 유지하는지 의문이었다.

“몸은 괜찮아?”

“……머리 깨질 거 같아.”

인정하기 싫지만 이럴 때 보면 자신은 새대가리가 맞았다. 섞어 마시면 끔찍한 숙취에 시달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째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나가자마자 해장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차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구멍은, 안 아파?”

“뭐?”

예사롭지 않은 단어에 서규하의 시선이 거듭 옆을 향했다.

“뭔 말이야?”

“구멍 말이야. 괜찮냐고.”

“실컷 잘 처자고 일어나서 갑자기 웬 구멍 타령이야.”

미간이 한층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와 달리 이차영은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기억 안 나나 보네.”

“씨발,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말해.”

가뜩이나 골이 아파 죽겠는데, 한 번에 못 알아듣는 말을 계속 지껄여 대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서규하가 욕설을 내뱉자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이 이어졌다.

“어제 너, 나랑 잤어.”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길 가다 마주치면 알아서 피할 정도로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차영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빙긋이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서규하는 뒤늦게 ‘낚였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욕설을 내뱉었다.

“잤겠지. 바텀 하나 사이에 끼고.”

그럴 목적으로 셋이서 올라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발랑 까진 웬 바텀 때문에 원홀 투스틱이라는 신세계를 접한 이후로 서규하는 이차영과 함께 종종 쓰리썸을 즐겼다. 사전 약속 따윈 필요 없었다. 주말 저녁에 느지막이 클럽에 오면 그보다 더 늦은 시간에 이차영이 나타났다. 발기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마시다가, 마음에 드는 콜보이 또는 숙련된 바텀을 끼고 위층 룸으로 장소를 옮기곤 했다.

물론 항상 이차영과 마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땐 제 구미에 맞는 예쁘장한 놈을 데리고…….

“아니. 내가 너한테 박았어.”

딴생각을 하던 서규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이차영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방금 들은 말을 멍하니 반추하다가 서규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박았다고?”

“어.”

“네가?”

“어.”

“……바텀 없이, 우리 둘이 붙어먹었다고?”

“맞아. 네가 이거, 내가 이거.”

손끝을 붙여 만든 동그라미 안으로 반대편 검지가 들락날락했다. 순간 서규하는 지금 상황을 잊고 뭔가 재미있는 걸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외국물 오래 먹은 새끼가 그런 것도 알아?”

“알지. 쑤컹쑤컹.”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귀공자는 개뿔. 다들 저놈의 겉모습만 보고 조오오온나 오글거리게 귀공자니 존잘 금수저니, 급이 다른 다이아수저니 하는 칭송을 보내지만, 실상은 하드 섹스에 쓰리썸도 거리낌 없이 하는 놈이 바로 이차영이었다.

그나마 난 솔직하기라도 하지.

상대의 이중성을 속으로 비웃은 것도 잠시, 서규하의 입에서 또다시 욕이 튀어나왔다. 이차영이 만든 동그라미가 자신을 지칭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씨발…….”

참으로 씨발스러운 일이었다. 어쩐지 허리며 그 아래가 묘하게 아프더라니.

서규하는 애꿎은 입술을 잘근대다가 ‘어쩌면 존나 질 나쁜 농담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뒤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구멍에 손끝이 닿자마자 미끄럽고 끈적한 무언가가 묻었다. 이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새끼야, 고무도 안 끼고 박았어?”

“꼈어. 젤이겠지.”

태연하게 답하는 목소리에 핏대가 솟았다. 능글거리는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지만 빌어먹게도 승산이 없었다. 되레 제압당해서 처박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억지로 눈을 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테이블 밑에 떨어져 있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발견하고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켰다.

불붙인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마음이 좀 안정되는 듯했다.

“나도 하나 줘.”

“네 거 피워 새끼야.”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하지.”

투덜대면서도 침대 쪽으로 담뱃갑을 던지자 잘도 낚아챈다. 라이터는 일부러 얼굴 쪽으로 던졌지만 그것도 빨려 들어가듯 이차영의 손아귀에 골인했다.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네.’

필터를 잘근잘근 깨물며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그러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규하는 곧 고개를 돌리고 한껏 낮은 목소리를 냈다.

“한 대만 맞자.”

“갑자기?”

“경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했는데, 너 같으면 그냥 참겠어?”

하지만 돌아온 것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남의 속을 뒤집는 말뿐이었다.

“경고가 아니라 예고겠지.”

“……지금 그게 중요해?”

“정확한 단어를 구사해야 불필요한 오해가 안 생기지. 그리고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네가 먼저 나한테 박아 달라고 했어.”

하, 실소가 절로 나왔다. 아직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누구라도 되는 것처럼 재떨이에 짓이겨 끈 뒤에 서규하는 날 선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만, 사람을 파렴치한 강간범으로 모는 건 아니지.”

일순 달라진 눈빛에 서규하는 흠칫했다. 직접 체감할 수는 없지만, 피부 위로 찌릿찌릿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알파 페로몬이라도 방출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따로 박고 싶다길래 그러자 했고, 네가 먼저 할 거라고 난리 쳐서 기다려 줬어. 싸고 빼길래 그다음에 넣었는데……. 네가 대뜸 바텀 애 머리채 잡고 물어보더라. 박히니까 기분 좋냐고.”

“……!”

“좋다고 하니까 다짜고짜 내쫓고는 나한테 명령했어. 한번 박아 보라고.”

말문이 턱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라이터가 없었다. 방금 이차영에게 던져 준 걸 기억해 내고는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다리를 덜덜 떨었다.

여느 놈 같았으면 개소리 그만 씨불이라며 멱살이라도 잡았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대가 이차영인 게 문제였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상은 저 못지않은 개새끼지만, 이따위 거짓말을 할 법한 녀석은 아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뚫고 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내가 피해자야.”

“뭐?”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갤 돌리자 불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알잖아. 몸 선 예쁘고 날씬한 애들이 내 타입인 거. 근데 안 박아 주면 내 좆 부러뜨린다고 난리를 쳐서, 할 수 없이 한 거야.”

흡사 적선이라도 베풀어 준 듯한 태도였다. 한층 더 열불이 오른 서규하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그럼 목이라도 졸라서 기절시키지, 그렇다고 진짜 뒤를 따먹어?”

“그랬으면. 넌 가만히 있었을 것 같고?”

“…….”

반박할 말이 없었다. 목을 누르는 걸 느끼자마자 개 난동을 부렸을 거다.

“하아.”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아도 원상복구가 안 된다는 것쯤은 서규하도 알고 있었다.

손안에서 엉망으로 짜부라진 담배를 내던진 뒤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우려는 찰나, 허벅지를 타고 뭔가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시발. 앞으로 또 섞어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 개다, 개.’

속으로 한탄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근래 들어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아침 기상이었다.

30분쯤 뒤에 서규하는 룸을 나섰다. 걸을 때마다 뒤에서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렸다. 먼저 꺼지라 해도 굳이 ‘같이 나가자’며 이차영이 기다린 탓이었다.

기분이 바닥을 치니 구두 굽 소리마저 신경을 긁어 댔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하강했다. 불 꺼진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한껏 인상을 구기는 서규하를 돌아보면서 이차영이 물었다.

“해장하러 갈 거지?”

“당연하지.”

이제 서로의 패턴쯤은 훤했다. 해장국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따라오지 말고 꺼져.”

“나도 해장하러 가는 길이야.”

“씨발, 언제부터 했다고.”

“몇 번 같이 갔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하여튼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채로 서규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곳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때문에 어기적거리며 걷는 게 고작이었다.

***

시끄러운 벨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냅두면 끊기겠지. 소음을 피해서 서규하는 반대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겨우 끊기나 싶었더니, 몇 초 만에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댈 사람은 곰 새끼뿐이었다. 서규하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발신자 확인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왜.”

- 여보세요? 잤어?

짐작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 팔자 늘어졌네. 나 지금 클럽이니까 나와.

평소였으면 눈이 번쩍 뜨였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눈가를 꾹 누른 뒤에 그제야 눈을 떴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창 너머에 해가 아직 있는 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안 가. 어제 달렸어.”

-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내가 쏠 테니까 몸만 나와.

혹하는 제안이었지만 이번에도 서규하는 거절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멍하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가 봤자 제대로 마시고 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안 간다니까. 끊어.”

끈질기게 들러붙을 놈을 알기에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서규하는 거듭 눈을 감았지만 빌어먹게도 한 번 깨 버린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누워 있다가 뒤늦게 쓰린 속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

이내 멈칫하며 동작 그만 상태가 됐다. 상체를 세우자마자 또다시 낯선 통증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서규하는 일단 주방으로 가서 시원한 물을 원샷했다. 그러곤 소파로 돌아와 앉아서 어제 일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매달리는 바텀에게 짧은 키스를 한 뒤에 그대로 돌려세우고 좆을 밀어 넣었다. 뒤를 풀어 줄 필요는 없었다. 쓰리썸 경험이 있다 말했고, 그게 아니라도 전문 콜보이들은 곧바로 손님을 받을 수 있도록 알아서 미리 준비하는 편이었다.

다음 기억은 침대였다. 닳고 닳은 바텀은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입으로는 제 좆을 쭉쭉 빨고 손으로는 이차영의 것을 쥐고 열심히 흔들어 댔다. 환상적인 오럴에 흥분이 빠르게 차올랐다. 그대로 싸면서 쾌감을 느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이후의 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 플래시백처럼 드문드문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엎드린 채 흔들리던 몸이나, 구멍 안을 빠르게 드나들던 무언가라거나. 마지막엔 뒤집힌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박히면서 더 세게 찔러 달란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씨발…….”

진짜 돌겠네.

생각하면 할수록 환장할 노릇이었다.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입술이 탔다. 미간에 주름이 움푹 팰 정도로 인상을 쓴 채 서규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이차영의 말대로 놈에게 깔린 것은 기정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박히면서 꽤나 즐겼던 것 같기도 했다. 개한테 물린 셈 치고 이제 그만 떨쳐 내고 싶은데 조금 더 생각나는 게 있었다.

‘거, 거기, 하앙… 좋아…!’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크흡, 진작 박아 줄 걸 그랬어. 진짜 내가 처음 맞아?’

‘흐응, 그럼, 시발아, 이런 걸 내가 해 봤을 거 같아? 아앗…!’

‘하긴. 완전 안쪽에 있어서 웬만한 놈들은 건드리지도 못하겠네.’

하나같이 머릿속에서 없애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그러다 서규하는 문득 이상함을 깨닫고 고갤 숙였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반바지 앞섶이 어느새 불룩하게 일어서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몸 안쪽이 저릿하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두 손으로 뺨을 쳐 보고,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냉수도 원샷해 봤다. 하지만 몸을 감싼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쩍벌 자세로 소파에 앉아서 입술을 짓씹어 대던 서규하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마 있을 텐데.”

그가 향한 곳은 잡동사니를 쌓아 둔 창고 방이었다.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며 온갖 잡동사니들을 파헤치다시피 뒤진 끝에 마침내 목표물을 찾아냈다.

서규하가 찾은 것은 하트 무늬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흉측한 모조 성기와 수갑, 채찍, 엄지손가락만 한 로터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생일 때 친구 놈들 중 하나인 김강산이 새로운 세계에 눈 떠 보라는 망발과 함께 선물이랍시고 준 것이었다.

안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집어 던졌었는데, 다른 선물들과 뒤섞여 같이 들고 와 버린 모양이었다. 다음 날 박스를 발견하고는 쌍욕을 퍼부으며 창고 방에 던져 넣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찾게 될 줄이야.

쭈그려 앉아 박스 안을 뒤적이던 서규하는 적당한 크기의 모조 성기 하나를 꺼냈다. 실물 사이즈만 한 건 엄두가 안 나고, 그렇다고 너무 작은 건 넣어 봤자 기별도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중간 사이즈를 골라 든 뒤에 창고 방을 나섰다.

침대에 앉은 서규하는 우선 탐색의 시간을 먼저 가졌다. 중딩 때 첫 딱지를 뗐을 정도로 발랑 까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기구는 써 본 적이 없었다. 손에 쥐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작은 스위치를 발견했다. 꼴에 진동 성능도 탑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래쪽에는 건전지를 넣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서규하는 건전지를 찾아보려다가 금세 포기했다. 집구석에 잘 붙어 있지도 않은데 그런 걸 예비로 사 뒀을 리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어디에 뒀는지 못 찾을 게 뻔했다.

하지만 잔머리는 그나마 좀 있는 편이었기에 TV 리모컨에서 꺼낸 건전지를 기구 안에 밀어 넣었다. 자화자찬하며 스위치를 켠 것도 잠시, 위잉 하며 격하게 꿈틀대는 움직임에 놀란 서규하는 냅다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쥔 것을 놓쳤다.

“와 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침대로 내동댕이쳐진 모조 성기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꿈틀댔다. 퍼뜩 손을 뻗어서 전원을 껐다. 놀란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킨 뒤에, 이번에는 제일 약한 강도로 스위치를 다시 켰다. 윙윙대는 진동은 여전하지만 시각적으로는 훨씬 나았다.

바나나처럼 밑 부분을 손에 쥔 채 바라보다가 일단 다시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대 위를 배회하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이내 로션이 담긴 병을 집어 들었다. 원나잇은 밖에서만 즐기다 보니 집에는 콘돔이나 젤 같은 게 없었다.

침대로 되돌아간 서규하는 바지와 속옷을 무릎께까지 내린 다음 편하게 누웠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다음 아래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금세 인상이 찌푸려졌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살짝 벌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모조 성기에 대고 치덕치덕 로션을 발랐다. 딱딱하면서도 매끈한 감촉이 몹시도 생소했다. 불현듯 현타가 찾아왔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하고. 어릴 때부터 본능에 몹시 충실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설마 스스로 뒷구멍까지 벌려 볼 줄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추면 더 찝찝할 것 같았다. 아래쪽 부분까지 로션을 듬뿍 바른 뒤에 서규하는 모조 성기를 자신의 아래에 갖다 댔다.

구멍에 맞추고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 쑥 하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제풀에 제가 놀라 퍼뜩 손을 뗐다가, 다시금 끝 부분을 누르며 천천히 힘을 가했다.

“……기분 더럽게 이상하네.”

정말로 이상했다. 속이 꽉 찬 것처럼 더부룩하고, 괄약근에 힘을 줘도 조여지지가 않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나쁘지만은 않았다. 잠깐 숨을 고른 뒤에 서규하는 손잡이를 붙잡고 천천히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하아… 으응….”

이거다. 이 느낌. 내벽이 화끈거리며 열기가 몰려왔다. 왕복 운동을 거듭할수록 발가락이 오므라들며 온몸이 비비 꼬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다. 스위치가 있단 걸 상기해 내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올리기 직전에 멈췄다. 이걸 켜면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어 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막연하게 밀려왔다.

그렇긴 한데…….

여전히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근육이 잡힌 아랫배가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아래, 무성한 음모와 힘차게 발기한 성기를 내려다보던 서규하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는 거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게 그의 오래된 생활신조였다. 결과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제 와서 바꿀 마음도 없고 바꿀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힘주어 위로 밀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탄탄한 몸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요동쳤다.

“아흣…!”

예상대로였다. 내벽을 때리듯 자극하는 진동이 미치게 좋았다. 어느덧 손잡이에서 손을 뗀 서규하는 시트를 부여잡은 채 허리를 꿈틀대며 쾌락에 몸을 맡겼다.

그래, 어제도 이랬던 것 같다. 이차영이 박아 댈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울부짖었던 기억이 났다. 안쪽 스폿까지 닿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아… 아응, 아앗!”

어느새 서규하는 엎드린 자세로 신음하고 있었다. 빠지려는 모형을 다시금 몸속으로 꾹 밀어 넣은 뒤에 한 손을 내려 자신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뚝, 뚝, 흘러내린 선액이 시트 위에 젖은 흔적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자잘한 근육이 예쁘게 잡힌 등은 어느덧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후, 서규하는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강한 쾌감 속에서 정액을 쏟아 냈다.

“하아, 하아…….”

사정이 끝남과 동시에 침대 위로 널브러졌다. 그러든 말든 뒷구멍에 꽂혀 있는 모형 성기는 계속해서 윙윙대며 내벽을 들쑤시고 있었다. 서규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전원을 껐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한 번씩 아래가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됐을 무렵, 천장을 보고 누운 서규하는 한 팔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돌겠네.”

하트 상자를 던져 주며 처웃던 김강산의 면상이 떠올랐다. 놈의 말마따나 정말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 버린 것 같았다.

***

-눌러주세요-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르자 스르륵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매니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점장님.”

“오냐.”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러게.”

서규하는 턱을 문지르며 짧게 대답했다. 제가 생각해도 꽤나 오랜만에 들른 듯한 기분이었다.

“사무실로 라떼 한 잔만 갖다 줘. 시럽 팍팍 넣어서.”

곧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 난 검은색 철문을 열자 계단이 나타났고, 층계참에서 방향을 꺾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사무실을 빙자한 프라이빗 룸이었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선 서규하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맞은편 유리창에는 ‘cafe HARU’라는 글자가 크게 붙어 있었다.

브랜드 출시 2년 만에 200개가 넘는 가맹점이 생길 만큼 잘나가는 카페인데, 서규하는 그중 한 곳의 점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매장 일은 직원들이 하고, 그 외의 업무는 유능한 비서와 세무사가 알아서 처리했다. 그런데도 가끔 카페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원래도 별생각 없이 살지만, 더 생각 없이 멍하게 있고 싶을 때 카페로 나와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쿠션으로 머리를 받친 뒤에 서규하는 다리를 꼬며 핸드폰 액정을 켰다.

“오늘은 너다.”

여러 개 깔려 있는 게임 앱 중 하나를 골라서 누르자 금세 익숙한 화면이 나타났다. 서버에 접속한 서규하는 번쩍이는 우편함을 대충 확인한 다음 맵을 클릭했다. 볼륨을 크게 올리자 콰쾅 하고 난무하는 총성이 시끄럽게 울렸다.

“커피 배달 왔어요.”

“땡큐. 나갈 때 문 좀 닫아 줘.”

향긋한 커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핸드폰을 손에서 떼지 않은 채로 서규하는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현란하게 스킬을 발사하며 적들을 죽여 대는데 갑자기 팝업 창이 뜨며 문자 내용이 보였다. ‘xx병원 정기검진 안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흥이 팍 식었다.

“귀찮게…….”

달에 한 번씩, 벌써 10년 넘게 계속되는 일이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그래도 서규하는 병원 정기검진만큼은 빼먹지 않고 받았다. 망할 형질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고 툴툴대면서도 말이다.

남녀뿐만 아니라 오메가와 베타, 알파로도 인간을 분류할 수 있는 세상. 전체 인구에서 오메가와 알파가 차지하는 비율은 30퍼센트 남짓이고, 여자는 오메가로, 남자는 알파로 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서규하는 매우 드문 확률로 남성이면서도 오메가 형질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남성체 오메가가 태어날 확률은 10만분의 1. 그 확률을 안고 태어난 막내아들을, 서규하의 부친은 고심 끝에 오메가가 아닌 일반 베타 남성처럼 키웠다. 하필이면 그 무렵에 친구들의 놀림을 견디지 못한 남성체 오메가 중학생이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까닭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들의 2차 성징이 시작되자마자, 분비선을 건드려서 페로몬 분비를 인위적으로 막는 시술을 받게 했다. 혹시라도 질 나쁜 남성체 알파에게 걸리거나 호기심에 사고라도 덜컥 쳤다간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피는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인지, 철이 들 무렵부터 서규하는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꼈다. 물론 그의 포지션은 탑이었다. 베타처럼 자라서인지, 아니면 일찌감치 페로몬 분비를 막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규하는 오메가치고 체격이 꽤나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베타라고 말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오메가라는 자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여성체 알파를 비밀스럽게 찾아보고 있지만, 서규하가 보기엔 괜한 헛수고일 뿐이었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를 보면 눈은 즐거워도 그냥 그뿐이었다. 만지고 싶다거나 몸을 섞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운 좋게 여성체 알파를 만나서 결혼한다 해도 문제였다. 2세를 보려면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임신을 해야 되는데, 배가 점점 불러 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다 보니 인생 목표는 명확했다. 지금처럼 베타인 척하면서 화려한 솔로 라이프를 즐기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것.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었다.

***

예약 시간을 10분 정도 남겨 두고 서규하는 병원에 도착했다. 올 때마다 들르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피검사에 이어 내분비과 검사를 마친 뒤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주치의이자 큰형의 친구이기도 한 오태석이 웃는 얼굴로 환자를 맞이했다.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어?”

“당연하지.”

귀찮아 뒤질 거 같아도 페로몬을 억제하는 약은 10년 넘게 꾸준히 복용하는 중이었다. 페로몬 분비를 막는 시술을 받긴 했지만, 영구가 아닌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물론 처음부터 착실하지는 않았다. 중딩 때 처음 약을 타 와서 억지로 챙겨 먹다가, 귀차니즘에 결국 냅다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 대형 사고가 터졌다. 학교에 있을 때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온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담임과 보건의의 빠른 조치로 다행히 빠르게 가라앉긴 했지만, 힛싸가 왔을 때 느꼈던 감각은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작은 벌레가 온몸을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고, 숨이 턱턱 막히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롭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밥은 걸러도 약만큼은 꾸준히 챙겨 먹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오태석은 웃는 낯으로 사람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 것치고 이번 달에는 수치가 높게 나왔는데.”

세상 인자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남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서규하가 보기엔 오태석이 딱 그런 타입이었다. 실실 웃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수치가 높다니. 친절하게 환자 쪽으로 모니터를 돌린 뒤에 오태석은 볼펜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보이지? 지난달보다 30퍼센트나 더 높게 나왔어. 이 정도면 약을 몇 번은 안 먹었단 뜻인데.”

“먹었다니까.”

“검사 결과는 거짓말 안 한다.”

“기계가 미쳤나 보지.”

하늘에 맹세컨대 정말로 꾸준히 약을 복용했다. ……아니, 술 처먹고 늦게 일어나서 아침에 두어 번 못 먹었던 때가 있긴 하지만, 아침 약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말해 준 사람이 바로 눈앞의 의사였다. 그러니 서규하의 입장에서는 기계가 미쳤다는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었다.

이윽고 오태석은 팔짱을 끼면서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30일마다 힛싸인 거 알고 있지?”

알 게 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귀를 후비적대는 환자를 앞에 두고도 오태석은 흔들리지 않고 의사로서의 본분을 이어 갔다.

“이번엔 좀 더 센 걸로 지어 줄 테니까 잘 챙겨 먹어. 길 가다가 갑자기 페로몬 폴폴 풍기면서 주저앉을 생각 아니면.”

“……차라리 저주를 하지 그래?”

“그래 줄까?”

젠장.

“이제 가도 되지?”

“그래. 다음 검진일 때도 꼭 들러.”

“봐서.”

대답과 동시에 서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며 오태석은 빙긋이 웃었다. 저렇게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니 찌르는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쁜 척 움직이던 걸음이 멈췄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긴 했는데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클럽에 가기에는 시간이 이르고, 카페에는 가기 싫고, 집에는 더더욱 가기 싫고.

일단 주차장으로 가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큰형’이라는 글자가 뜬 것을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야. 뭐 하고 있어?

“병원 갔다 집에 가는 중이야.”

- 병원? 어디 안 좋아?

“정기검진 때문에.”

아, 하는 짤막한 신음에 이어 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곧 아버지 생신인 거 알고 있어?

“…….”

대답을 아꼈더니 길게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는 없었다. 형의 성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해탈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집에서 다 같이 보기로 했으니까 약속 잡지 마. 빈손으로 올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말에 서규하는 동그란 제 뒤통수를 벅벅 문질렀다.

“그냥 가면 안 돼? 아버지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불경기 때도 잘나가는 신소재 섬유 업체 회사 사장인 데다, 아버지 명의로 된 부동산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잠시 후에 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백퍼 진심이지.”

-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골프채에 맞아서 다리몽둥이라도 부러지면 볼 만하겠네.

“좋은 날에 골프채는 왜 휘둘러?”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버지가 휘두른 골프채에 맞아서 다리몽둥이가 부러진 적은 없어도, 막는다고 깝치다가 팔에 금이 간 적은 있었다. 물론 오래전 일이다 보니 이유는 기억나질 않았다.

- 시간 될 때 백화점에라도 가 봐. 건강보조제랑 양주는 내가 샀으니까 사지 말고.

“그건 대체 무슨 조합이야?”

- 둘 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거지, 뭐긴 뭐야.

“효자 납셨네.”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은 뒤에 서규하는 전화를 끊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버릇처럼 담배 한 개비를 빼서 입에 문 다음 내비게이션에 백화점 이름을 입력했다. 느닷없는 쇼핑이 귀찮긴 하지만, 마침 할 일도 없었기에 겸사겸사 가 볼 생각이었다.

***

백화점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어머니도 아니고, 1년에 다섯 번이면 많이 보는 아버지의 취향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작년이랑 똑같은 걸로 살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금세 포기했다. 작년에 뭘 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탓이었다.

그때였다. 저만치서 볼록 튀어나온 배를 자랑하며 지나가는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덕분에 서규하는 뭘 살지 결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규하?”

뒤를 돌아보자 뜻밖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인데도 깔끔한 올 블랙 슈트를 빼입은 이차영이 웬 여자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상대와 눈까지 마주친 마당에 생까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엘리베이터 탑승을 포기한 서규하는 띠꺼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긴 웬일이냐?”

“동생이랑 쇼핑하러 왔어.”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생긋이 웃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내 서규하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이야, 아가씨가 다 됐네. 길에서 마주치면 못 알아보겠다.”

거의 10년 만에 보는 거니 그럴 만도 했다. 어릴 때도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행히 역변 없이 그대로 잘 자란 듯했다. 나란히 서 있는 모습만 보면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유학 갔다더니, 돌아온 거야?”

“네. 아버지 회사에 사원으로 입사했어요.”

그 말에 서규하는 픽 웃음을 흘렸다.

“웬 존댓말이야. 어릴 땐 오빠, 오빠 하면서 편하게 대하더니.”

“오랜만에 보니까 어색해서요.”

“그러지 말고 말 편하게 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나름 살갑게 대화를 주고받는데, 가만히 서서 보고 있던 이차영이 끼어들었다.

“넌 어쩐 일이야?”

“아버지 생신 선물 사러.”

“그래? 효자네.”

의외라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묻는 말이 이어졌다.

“뭐 살 건데?”

“벨트.”

“벨트? 허리띠?”

“그럼, 뭐 목에 두르는 거겠어?”

좀 전에 봤던 배불뚝이 아저씨 덕분에 생각해 낸 아이템이었다. 땡,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럼 이만,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팔을 붙잡는 느낌이 났다.

“잘됐네. 같이 가자.”

“뭐?”

“같이 가자고. 봐 줄 테니까.”

그 말에 서규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우리 아버지 생일 선물을 봐 줘?”

시비조로 하는 말에도 이차영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너 옷 입는 거 보니까 내가 봐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지…….”

랄, 하고 내뱉으려다가 옆에 선 이예영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됐으니까 네 갈 길 가. 다음에 또 보자, 예영아.”

제 할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마침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익숙한 등짝이 보였다. 언제 탔는지 이차영이 같이 타고 있었다.

“가라니까 왜 따라와?”

“방금 한 말은 농담이고, 겸사겸사 가는 거야. 오늘은 예영이 때문에 나온 거라서 내 건 하나도 안 샀거든.”

안을 둘러봤지만 이예영은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만 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애를 혼자 냅두고 와?”

“어차피 곧 헤어질 거였어. 남친이랑 데이트할 거라더라.”

수직 상승한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췄다. 어느 매장으로 들어갈지 고민하는데 옆에서 묻는 말이 들렸다.

“어디에서 살 거야?”

“몰라.”

“벨트는 M&C가 괜찮아.”

엠앤씨인지 나발인지 제 알 바 아니었다. 서규하는 곧장 제일 가까이 있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벨트를 사러 왔다고 말하니 직원은 세상 다시없을 친절함을 베풀며 길을 안내했다.

이어서 상품 설명이 시작됐다. 심드렁한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웃음 띤 얼굴로 직원의 말을 경청했고, 잠시 후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건 어때?”

“괜찮네.”

고민이나 망설임이라곤 없는 대답에 이차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너무 무성의한 거 아냐?”

“벨트가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 존나 꼰대야. 자기 취향 아니면 손도 안 댈걸?”

“그러니까 더 심사숙고해서 골라야지. 전에 보니까 의외로 화려한 걸 좋아하시던 거 같던데.”

“……막 지르는 거야, 아님 진짜 알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알고 하는 말이지.”

서규하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머리가 좋은 놈들은 별 시답잖은 것도 다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뭐가 괜찮다고?”

“이거.”

“같은 걸로 포장해 주세요.”

짧게 말하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계산대 앞에 이른 서규하는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어?”

언제 느긋했냐는 듯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뒷주머니가 허전했다. 분명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에 넣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반대편 주머니를 더듬어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래?”

“……지갑이 없어진 거 같아.”

이차영의 표정도 금세 심각하게 변했다.

“거기 넣어 둔 거 맞아?”

“맞아. 차에서 내리자마자 넣었어.”

주변 바닥까지 훑어봤지만 지갑 비슷한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이내 구겨진 얼굴로 혀를 차고 말았다.

“재수가 없으려니 진짜.”

머리를 헤집는 손길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꽐라가 돼서 차 키나 라이터를 흘린 적은 몇 번 있어도 지갑을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맨정신에, 그것도 대낮에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짜증이 날 법도 했다.

“직원분 기다리니까 일단 계산부터 해. 폰으로 결제 가능하지?”

“안 돼.”

이차영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안 된다고? 폰으로 가능한 결제 수단 없어?”

“그런 거 안 써.”

“안 쓰는 거야, 못 쓰는 거야?”

“닥쳐, 좀.”

돈이 없는데 물건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오려니 번거롭고, 빈손으로 집에 갔다간 시끄러울 게 뻔하고.

“…….”

힐끗,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돈 있으면 좀 빌려 달라는 말을 꺼내려는데 이차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카드 빌려줄 테니까 다음에 갚을래?”

듣던 중 반가운 말에 서규하는 냉큼 대답했다.

“그럼 고맙지.”

“이율 높은데 괜찮겠어?”

농담조로 말한 이차영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잠시 후, 직원이 내미는 쇼핑백과 영수증이 서규하의 손으로 옮겨 갔다.

“내일 클럽에 와. 바로 갚을 테니까.”

“시간 되면. 그건 그렇고, 감사 인사는?”

“……받고 싶냐?”

“당연하지.”

“겁나 고맙다.”

영혼이라곤 없는 투로 말한 뒤에 서규하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유롭게 따라붙은 이차영이 뒤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제 뭐 할 거야?”

“집에 가서 발 닦고 잘 거야.”

할 일도 없겠다, 오랜만에 클럽에서 하는 쇼나 볼 생각이었지만 지갑 때문에 산통 다 깨졌다.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게 뻔하니 그대로 처박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간다.”

지하층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차영이 그 앞을 막아서다시피 했다.

“CCTV 확인 안 해?”

“뭐?”

“지갑 찾아야지. 아무래도 누가 훔쳐 간 거 같은데.”

서규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됐어.”

번거로운 일은 질색이었다. 다행히 현금은 별로 없고, 신용 카드도 세 장뿐이니 분실 신고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귀찮아 죽겠네.’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대뜸 이어지는 말에 서규하는 옆을 돌아봤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

“이제 곧 저녁 시간이야.”

그 말에 핸드폰을 켜 보니 어느새 6시가 넘어 있었다. 서규하는 고민 없이 오케이했다. 나온 김에 먹고 들어가면 편할 것 같았다.

“뭐 먹을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랑 냉면.”

기다린 듯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자고로 저녁엔 고기를 먹어 줘야 하는 법이었다. 얻어먹는 거라면 더더욱.

“잠깐 있어 봐.”

핸드폰을 꺼낸 이차영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모님, 저예요. 네. 지금 밥 먹으러 갈 건데 자리 있나 싶어서요.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가만히 서 있던 서규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 데나 가면 되지 뭘 또 전화까지 해.”

“진짜 맛있는 집이거든.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으면 좋잖아.”

누가 다이아수저 아니랄까 봐 한 끼도 대충 먹는 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 좋다는 말에는 이견이 없었기에, 서규하는 순순히 차를 몰고 이차영의 차를 뒤따라갔다.

***

고풍스러운 생활 한복을 입은 직원이 개인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서규하는 제일 비싼 부위로 5인분을 시켰다. 안 그래도 슬슬 배가 고프던 참이었기에 사양 않고 열심히 먹어 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딱 봐도 최상급인 붉은 생고기가 불판 위에 놓였다. 겉면이 살짝 익기 무섭게 서규하는 먹이를 사냥하는 매처럼 잽싸게 고기를 낚아채 갔다. 덕분에 연거푸 헛손질을 하게 된 이차영이 헛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평소에 고기 안 먹어?”

“먹지.”

“그런데 왜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느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대번에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난리 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많이 먹어라.”

“당연히 그래야지.”

곧 다가올 자신의 운명은 알지도 못한 채 서규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부지런히 배를 채웠다. 불판 위의 고기는 금세 동이 났다. 좀 더 시킬 생각으로 식탁 벨을 누르려는데, 근처에 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서규하는 전화를 받았다.

“어.”

몇 안 되는 여사친인 김모란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김모란은 대뜸 위치를 물었다.

- 너 지금 어디야?

“밥 먹는 중이야.”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 지갑 잃어버리고 밥이 목에 넘어가?

멈칫, 젓가락질을 멈추고는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어떻게 알았어?”

- 어떻게 알긴. 내가 주웠으니까 알지, 병신아. 지갑 흘린 줄도 모르고 키링 돌리면서 룰루랄라 잘도 가더라?

김모란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의 미모에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지만 입이 험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서규하도 버릇처럼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래도 여자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넌 지금 어딘데?”

- 매장 나서는 중이야. 어디서 볼래?

“네가 정해. 대신 한 시간 뒤에.”

- 당장 튀어와야지 뭔 한 시간 뒤야.

“밥 먹는 중이라고 했잖아.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거 몰라?”

- 작작 좀 처먹어. 암튼 그럼 백화점 8층에 있는 카페로 와. 1분이라도 늦으면 개까일 줄 알아.

“말하는 본새하고는.”

- 뭐라 그랬어?

“존나 예쁘다고. 끊는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차영이 물었다.

“누구야?”

“김모란.”

“걔가 지갑 주웠대?”

“어.”

“별 우연도 다 있네.”

픽 웃는 놈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서규하는 식탁 벨을 눌렀다. 가는 데 30분은 걸릴 테니 남은 시간 동안 얼른 배를 채워야 했다.

“참, 몸은 괜찮아?”

“? 뭔 말이야 갑자기.”

“아래쪽 구멍 말이야.”

불판으로 향하던 젓가락이 멈칫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일별한 뒤에 서규하는 다시금 식사를 이어 갔다.

“아무렇지도 않아.”

“안 다물어진다고 꽤나 걱정했던 거 같은데.”

“닥쳐.”

웃는 낯짝으로 사람 혈압 올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더욱 짜증 나는 사실은 이차영이 상대를 가려서 저 지랄을 한다는 거였다. 실상은 속이 먼지처럼 시커멓고 변태 기질도 다분하건만, 부모님이나 형들은 마냥 유능하고 젠틀한 엘리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날 꽤 좋지 않았어?”

“좋기는 개뿔.”

꿀꺽, 입 안에 든 것을 삼킨 뒤에 서규하는 쌈을 또 하나 만들면서 빠르게 내뱉었다.

“취중실수라고 들어 봤어? 그날 필름 끊겨서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어. 그러니까 괜히 떠보거나 들먹일 생각 하지 마, 새끼야.”

“왜. 소질 있는 거 같던데.”

“……뭐?”

“처음이라면서 내 거 끝까지 다 받아서 놀랐어. 엉덩이도 완전 잘 돌리던데.”

이번에야말로 입맛이 싹 달아났다. 결국 서규하는 젓가락을 부러트릴 듯이 거칠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차영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넌 왜 일어나?”

“진작 다 먹었는데, 너 기다려 준 거야.”

“……눈물 나게 고맙다.”

이를 으득 갈며 대답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나갔다. 계산대 앞에 이르렀을 무렵,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이차영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물론 서규하는 그 말을 생까고 직원이 꺼내 준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고 먼저 나가려는데 뒤에서 팔을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뭐야?”

“받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른 손으로 내미는 영수증이 보였다. 서규하의 시선이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어쩌라고.”

“다음에 벨트값이랑 같이 갚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말이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네가 사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씩 웃으며 하는 대답이 들렸다.

“그럴 리가. 카드값 이자라고 생각해.”

참으로 개새끼 같은 놈이었다.

***

카페 의자에 앉자마자 힐책이 날아들었다.

“진짜 한 시간 꽉 채워서 나타나?”

“안 늦었으니까 됐잖아.”

식당에서는 빨리 나왔지만, 오는 길에 다른 차량끼리 사고가 나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이래저래 마가 낀 날이 분명했다.

“받아.”

가방을 연 김모란이 반지갑을 건넸다. 땡큐, 하고 받아 든 서규하는 그대로 뒷주머니로 가져갔다. 단, 이번에는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확인 안 해 봐?”

“뭐 하러.”

“내가 뭐 빼돌렸으면 어쩌려고.”

“빼돌릴 것도 없을걸?”

김모란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긴, 하고 곧바로 수긍했다.

“……근데 너 말이야.”

“응?”

계속 생각하고 있던 말이 있었지만, 김모란은 입 밖으로 내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지갑에 왜 그렇게 든 게 없어? 흘린 게 아니라 버린 지갑 주운 줄 알았어.”

“원래 돈은 많이 안 갖고 다녀.”

“그래도 콘돔은 넣어 다니고?”

“야!”

“딸기향이 취향인가 봐.”

“……닥쳐, 좀.”

다시 생각해도 마가 낀 게 분명했다. 굿이라도 해야 되나. 속으로 한탄하며 몸을 일으키자 김모란이 냉큼 물었다.

“어디 가?”

“커피 시키러.”

“가는 김에 카카오 스콘 하나만 사다 줘.”

“살찐다.”

“죽고 싶지?”

잠시 후, 직원이 가져온 트레이에는 머그컵 하나와 스콘이 담긴 접시도 놓여 있었다. 김모란은 반색하며 포크를 들었다. 아메리카노도 한 모금 마신 뒤에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이차개랑 같이 다녀?”

이차개는 ‘이차영 개새끼’의 줄임말로, 둘이서 부르는 이차영의 별명이었다.

“아니. 클럽에서 한 번씩 마주치는 것뿐이야.”

죽돌이처럼 자주 드나드는 서규하와 달리 이차영은 달에 두어 번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종종 바텀 하나를 끼고 같이 룸으로 올라가는데, 이 말은 차마 김모란 앞에서 할 수가 없었다.

김모란과 이차영은 사촌지간이자 앙숙인 사이였다. 동족거부? 동족혐오? 하여튼 뭐 그런 관계인데, 성별은 달라도 같은 대에 둘 다 우성 알파로 태어나서 은연중에 서로 비교당하며 자라 온 모양이었다.

서규하가 보기엔 김모란 혼자 열을 올리고 이차영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물론 이 또한 김모란 앞에서는 입도 벙긋해선 안 될 말이었다.

“마주쳐도 아는 척도 하지 마. 물들어.”

서규하는 커피를 마시는 걸로 대답을 회피했다. 역시,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달에 두어 번씩 같이 쓰리썸을 즐긴다고 했으면 당장 등짝을 얻어맞았을 게 뻔했다.

그러다 기분이 급 다운됐다. 가장 근래에 한 섹스는 둘이서만 떡을 쳤단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계속 카페만 맡아서 하는 중이야?”

이어지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얼굴을 들었다. 뒤늦게 “그렇지 뭐.” 하고 대답하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집이 꽤 잘살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형들처럼 조기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서규하는 어릴 때부터 치 떨리게 공부가 싫었다. 타고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학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들은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일었다.

그렇다 보니 학창 시절 내내 뒤에서 1, 2등을 다투었지만, 위대하신 돈의 힘으로 어찌어찌 대학 졸업장까지 따긴 했다. 그리고 한 차례 삶의 고비가 찾아왔다. 아버지 등쌀에 못 이겨, 졸업 직후에 산하 기업 격인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된 거였다.

결과는 초라했다. 출근한 지 3일째 되던 날, 첫인상부터 좆같았던 팀장이 서류철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욱한 서규하는 주먹을 내질렀고, 그렇게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 회사 생활은 초라한 막을 내렸다.

카페 점장도 자신이 원한 타이틀이 아니었다. 빈둥빈둥 허송세월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차려 준 거였다.

“너는. 잘 살고 있어?”

“나야 늘 바쁘지. 이번에도 프로젝트 하나 맡아서, 두 달 동안 똥 쌀 틈도 없이 바빴어.”

“아 씨, 비유를 해도 꼭…….”

“그만큼 바빴다고. 어제 겨우 일단락돼서 실컷 자고, 오늘 스트레스 풀 겸 쇼핑하러 갔다가 네 지갑 득템한 거야.”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김모란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어?”

“지갑 찾아 준 보답은 언제 할 건데?”

상큼하게 웃는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들 또는 오메가들이라면 다들 홀린 듯이 쳐다볼 법한 미소였지만, 남자면서 오메가인 서규하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겉모습에 홀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가 사촌 사이 아니랄까 봐 사람 벗겨 먹는 것도 똑같았다.

“귀먹었어? 보답은 언제 해 줄 거냐고 묻잖아.”

독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의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뒤에 서규하는 뒤늦게 대답했다.

“내일 점심 같이 먹을까?”

그러자 신랄한 대꾸가 돌아왔다.

“구질구질하게 밥은 무슨. 샤넬 신상 백 나왔으니까 그거나 사 줘.”

“……지갑 그냥 가져가. 버린 셈 칠게.”

“네 카드로 긁으라는 뜻이지?”

빙긋이 웃으면서 한마디도 안 지는 것도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차라리 소매치기가 가져갔으면 좋았을걸. 씁쓸한 마음을 숨기며 서규하는 커피를 마저 홀짝였다.

***

다음 날, 늦은 저녁에 서규하는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단골 클럽이었다. 사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여서 집에 처박혀 있고 싶었지만, 어제 이차영한테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어슬렁어슬렁 차에 올랐다.

떡대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통과하자마자 빠른 비트의 음악이 크게도 울렸다. 이차영 오면 내 쪽으로 보내. 전담 직원에게 부탁한 뒤에 서규하는 개인 룸이 아닌 2층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몸이 안 좋으니 술도 당기질 않았다. 목적만 달성하면 일찍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이차영이 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갈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망인데, 고막을 때리는 음악 소리까지 더해지니 두통마저 일 지경이었다. 한껏 인상을 구긴 채 앉아 있던 서규하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소음이 워낙 커서 뭐 하나 들리는 게 없었다. 마지못해 일어나서 흡연실로 들어갔다. 냄새는 역겨워도 일단 귀가 편해지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온 김에 담배나 가져올걸. 뒤늦은 후회 속에서 한 번 더 이차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어디야?”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전화를 늦게 받았을 때보다 더 짜증 나는 질문이 들렸다.

- 누구시죠?

저놈은 이쪽 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 폰에는 왜 이차영 번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뒤늦게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나다, 새끼야.”

퉁명스레 대꾸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 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웬일이야?

“왜 안 와? 토요일인데.”

- 갑자기 급한 일이 터져서 지금 정신없어.

“바쁜 척하기는.”

- 바쁜 척이 아니라 진짜 바빠. 나 기다렸어?

“돈 갚으려고.”

그러자 유쾌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거 같아. 적당히 놀다 들어가.

“신경 꺼.”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전화부터 해볼걸. 한껏 인상을 구긴 채 서규하는 흡연실 밖으로 나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마주 오던 누군가가 갑자기 한껏 반가운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띠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쓰리썸이라는 신세계를 열어 준 바텀이었다.

서너 달 전이었나. 클럽에 왔더니 웬일로 이차영이 먼저 와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놈을 본 순간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놈 때문이 아니었다. 근래 꽤나 마음에 들어 하던 꽃돌이 바텀이 이차영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실컷 풀 생각으로 왔는데, 다른 놈이 낚아채 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서규하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아니꼬운 마음에 시선이 계속 그쪽으로 갔던 것도 같았다. 아쉬운 대로 다른 바텀이라도 부르려는데, 꽃돌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셋이서 같이 해 보는 건 어떠냐고.

그때와 꼭 같은 미소를 띤 채로 꽃돌이가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은 혼자 오셨어요?”

“어.”

“파트너도 없으시고요?”

유혹이 담긴 물음이었다. 서규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정말 돈만 갚고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망할 이차영 때문에 계획이 꼬여 버렸다.

생각해 보니 떡을 친 지도 꽤 오래됐다. 서규하는 금세 결론을 내리고 상대의 눈을 마주 봤다.

“올라가자.”

***

춥, 추웁- 입으로 성기를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머리통이 앞뒤로 움직이며 거근을 열심히 애무했다.

하지만 서규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작은 자극에도 벌떡벌떡 서는 편인데, 오늘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딱딱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잘 좀 해 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사실 상대의 잘못은 없었다. 입으로 먼저 해 주겠다면서 자신 있게 바지를 벗겼고, 늘 그렇듯 끝내주는 혀 놀림을 선보였다.

꽃돌이는 입 안 가득 물고 빨면서 손으로도 포인트를 자극할 줄 아는 베테랑이었다. 그러니 여느 때였으면 대번에 발기해서 입 안 곳곳을 꾹꾹 눌러 댔겠지만, 오늘은 도통 흥분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하아…….”

가득 물고 있던 성기를 내뱉자 타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손으로 대충 훔쳐 낸 꽃돌이가 난감하단 표정으로 서규하를 올려다봤다. 얼마나 열심히 빨아 댔으면 입술 주변까지 붉게 물든 채였다.

“혹시 술 많이 마셨어요?”

술은커녕 물 한 모금도 안 마셨다. 대답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상대가 다시금 서규하의 중심을 손으로 감싸 쥐며 자세를 잡았다.

“한 번 더 해 볼게요.”

또 한 번 열과 성을 다한 오럴이 이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오기가 생겼는지, 이건 절대 아무한테나 안 해 주는 거라면서 목구멍을 완전히 벌리고 딥 쓰롯까지 해 줬다. 그런데도 결과는 시원찮았다.

‘돌겠네.’

이제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본능에 충실하고 쾌락에 약한 동물이었다. 바텀들이 야릇한 손동작으로 슬쩍 한 번 쓸기만 해도 벌떡 일어서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러다 발기 부전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개 쪽팔릴 일이었다. 그 전에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세워야 했다. 서규하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눈을 감고 야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상상은 당연히 남자들끼리 붙어먹는 그룹 섹스였다. 얽히고설키고, 물고 빨고,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힘껏 박아 대고.

상상 속 인물들 중 하나는 어느새 서규하 본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와, 드디어 섰네요!”

불현듯 들리는 목소리에 서규하는 눈을 떴다. 드디어 성공했다는 생각에 꽃돌이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와 달리 서규하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니, 이내 점점 더 험악하게 변했다. 머리를 벅벅 헝클고는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다음에 하자.”

“……네?”

룰루랄라 바지를 벗던 놈이 멈칫했다. 서규하는 한 번 더 친절하게 말해 줬다. 평소였으면 귓구멍이 썩었냐며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비매너라는 자각이 있었다.

“다음에 하자고. 좆질 못 할 거 같아.”

“섰는데 왜…….”

“그냥 그럴 기분이 아니야. 다음에 밤새도록 박아 줄게.”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꽃돌이가 매달리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서규하는 단호했다. 시발, 꽃돌이는 속으로 육두문자를 날리며 오자마자 신나게 털어 댔던 장난감을 가방에 다시 쑤셔 넣었다. 여느 놈 같았으면 웬 개소리냐며 제가 올라타서 넣었겠지만, 짜증 나게도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올라타기도 전에 밀쳐지거나 얻어맞고 쫓겨날 게 뻔했다.

가방을 챙긴 뒤에 인사도 없이 룸을 나섰다. 그러든 말든 서규하는 바지춤을 여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뭐야?”

눕자마자 등에 딱딱한 뭔가가 닿았다. 손을 넣어 꺼내니 뜻밖의 물건이 나타났다. 산뜻한 핫 핑크 로터였다.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뒤에 서규하는 눈을 감았다.

‘미치겠네.’

발기하려고 야한 생각을 했을 때, 윗입과 아랫입으로 남자들에게 쑤셔지며 신음을 흘리던 사람의 얼굴은 서규하 본인이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힘차게 박아 대던 사람은 이차영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좆이 꿈틀하며 힘이 들어갔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아악!”

미친놈처럼 소릴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열려 있는 지퍼를 급하게 채운 다음 의자에 걸린 외투를 낚아채듯 들고 룸을 나섰다.

“씨발, 미쳤어. 미쳤다고.”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아 댔다. 계속 있었으면 방금 냅다 던진 딜도로 뒤를 쑤셨을 제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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