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또 다른 안배 (4)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아그네스는 눈을 떴다. 꼬박 하루 동안 잠만 잔 것이다.
몸이 너무나도 상쾌했다.
그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어제 마신 세계수 잎의 차가 효험을 발휘했다. 몸에 축적되었던 안 좋은 물질들이 자연스레 해독되었다. 그래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서기관님.”
“예. 정말 상쾌하네요.”
기지개를 켠 아그네스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바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더 쉬어도 되지만, 몸 상태를 보니 당장이라도 나가서 환자들을 돌보고 싶었다.
옷을 모두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니 의외의 인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룬이었다.
“깜짝이야. 여긴 웬일이니?”
“어제 손님이 찾아왔었어.”
아그네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고작 그거 얘기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중요한 손님인 거 같아서.”
무심결에 하룬의 눈을 바라본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평소 쾌활한 성정이 묻어나는 그런 순박한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성한 느낌이었다.
마치 끝이 없는 우주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아그네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하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누가 찾아왔었는데?”
“킹스턴 가문의 그레이엄 공자. 기억나?”
그레이엄. 그 네 글자를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그네스가 손뼉을 쳤다.
“맞다. 예전에 켈세타에서 루치아 선생님이랑 결투했던 그 사람이지?”
“그래. 어젯밤에 늦게 찾아왔었어. 너 자고 있어서 오늘 다시 오라고 했는데, 오기 전에 기별이 올 거야.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했거든.”
하룬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평소라면 잔뜩 질투하며 뭐 그딴 놈이 다 있냐는 험담을 늘어놨을 텐데.
그가 필스너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날 이후로 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필스너를 언급하며 불만을 표했었다.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그런데 지금의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질투심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남자들이 접근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초탈한 모습이었으니까.
“혹시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니? 훈련 도중에 머리를 얻어맞았다거나.”
“아무 일도 없었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너희 부모님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니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군. 아쉽지만 죽어 줘야겠어.”
스릉!
무섭게 웃은 하룬이 검을 뽑아 들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장난이었다. 하룬은 평소의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실은 기연을 얻었어. 어제.”
“무슨?”
“잘 보라고.”
하룬의 검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가 느끼기에도 상당히 정순하면서도 강력한 마나였다. 그가 검기를 일으킨 것이다.
검에 검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보통 소드마스터라고 불린다.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룬이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에…… 너도 마나 유저가 됐구나. 선생님이 도와주신 거니?”
“당연히. 그 대단한 일을 또 누가 하겠어?”
“하긴. 그건 그렇지.”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준의 능력엔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나보다 훨씬 마나가 많아 보이는데? 뭔가 느낌도 많이 다른 거 같구.”
“치유술보다는 검술 쪽이 훨씬 마나 소모가 심하니까. 방식도 조금 달랐어. 뭔가 이상한 약초를 왕창 먹었지. 그 이후에 선생님이 도와주셨고.”
“그렇구나.”
하룬은 능숙하게 검을 회수했다. 강한 힘을 얻게 된 이후로 그는 훨씬 더 차분해졌고, 자신의 힘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아그네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왠지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은,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철이 든 것처럼 보였으니까.
“잘됐다. 이제 원하던 힘을 얻었으니 왕실기사단에 지원하면 되겠네?”
“아직은 아냐. 조금 더 경험을 쌓아야지.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 이제 마음껏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나도 작은 곳에 머물며 만족하는 게 아니라 좀 더 큰일을 해 보고 싶어.”
“그레이엄 공자처럼 대륙을 떠돌게?”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응원하고 있을게.”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아그네스는 그의 앞날을 응원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조금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룬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사에 합격한 이후로 정말 순식간에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됐다. 그것을 지켜보며 하룬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과 마찬가지였지 않을까?
* * *
그날 밤, 미리 연락을 취한 그레이엄이 아그네스를 찾아왔다.
아그네스는 왕립학술원 발표 전까지 야간 업무에서 모두 열외되었기에 일찍 저택에 도착했다. 병원장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선임들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발표하려는 표적치료법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실제로 발표가 된다고 해도 임상기술이기 때문에 연수를 받아야 한다. 만약 여기에서 아그네스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간 연수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모두 아그네스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물론 아그네스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잘 대해 주는 걸 마다하지는 않았다.
“바쁘신 와중에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그레이엄은 누추한 갑옷 대신 제대로 된 의복을 걸치고 왔다. 기왕 다시 오는 김에 제대로 갖춰 입자는 각오였다.
아그네스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은 괜찮아요. 그런데 내일 모레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오래 시간을 내드리긴 힘들 거 같아요.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논문의 초안을 모두 마무리하긴 했지만, 준이 완성본을 넘긴 탓에 다시 확인을 해야 했다. 발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다시 한번 살펴보며 철저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아그네스가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요. 모험은 어떠셨어요?”
“힘들긴 했지만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죠. 시간이 느긋하면 하나하나 다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오늘은 안 되겠군요.”
아그네스는 미안한 듯 미소로 화답했다. 이번엔 그레이엄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듣기로 왕립 병원의 치유사가 되셨다던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운이 좋아서 여러 기회가 있었고, 다행히 일이 잘 풀렸어요.”
“그렇게 되실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치유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손에 붕대를 감아 주시던 그날부터.”
그레이엄은 추억에 잠긴 듯 그날을 회상했다. 일방적으로 싸움을 거는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달려오던 아그네스의 모습이.
지금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그는 다시 오른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가문에는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셨나요?”
“예. 아버지께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제 그럼 본가로 돌아가시겠네요?”
“돌아가기 전에 선생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레이엄이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아그네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따 시간 날 때 한번 읽어 주십시오.”
그러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그네스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가 편지를 남기는 것도,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저는 이제 본가로 돌아갑니다. 또 뵐 날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예.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레이엄이 미소를 남기며 저택을 나섰다. 홀로 남은 아그네스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가 남긴 편지를 열었다. 잠시 후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왜 그러고 있냐?”
“응?”
잠시 멍하니 있던 아그네스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하룬이 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돼? 하긴. 왕립학술원 발표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왕도에서 유명한 사람은 모두 참석한다면서?”
“맞아.”
바로 오늘이 표적치료법을 왕립학술원에 발표하는 날이었다. 발표를 앞두고 몸단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이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그래서 떨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저번에 그레이엄 공자가 찾아와서 그런 거 아니야?”
“뭐가?”
“편지 하나 남기고 갔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하룬이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 천연덕스러운 웃음 덕에 아그네스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결국 그녀도 웃고 말았다.
“고백이라도 받은 거냐?”
“일단은 그래.”
“이야. 부럽네! 킹스턴 가문이라면 알아주는 백작가잖아. 가주님이 좀 밥맛이긴 하지만 일이 잘 풀린다면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겠지.”
남의 일 말하듯 하는 하룬이 왠지 미웠다. 아그네스는 말없이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화장을 대강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룬이 앞길을 막고 있자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밉상이라니까. 지금 그거 놀리려고 아침부터 이렇게 온 거니?”
“아니. 너 호위하려고 왔지. 아무래도 마지막 임무가 될 것 같아서.”
“마지막이라니?”
“내일 저택을 떠날 거야. 나도 대륙을 좀 떠돌아 보려고.”
아그네스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채 탄식을 흘렸다.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였다.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지 서로 알기도 전에 이렇게 헤어진다는 건, 역시나 아쉬웠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애매모호한 관계.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며 준을 향한 마음이 애정이 아니라 동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에 비해 하룬에 대한 마음은 어떤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다가 오려고?”
“잘 모르겠어. 반년이 될지 일 년이 될지.”
“그래.”
“고작 그래라는 말이 다야? 친구가 말이야, 어? 맨손으로 모험을 떠난다는데. 응급처치 키트 하나 정도는 챙겨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평생을 쫓아다녔는데 그레이엄 공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다니!”
“억울하면 가지 말든지!”
아그네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하룬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정상으로 돌아왔군. 발표할 때 더듬는 건 괜찮은데 울지는 마라. 하하하.”
평소처럼 티격태격한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폴링이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그런데 보여야 할 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폴링에게 물었다.
“선생님은요?”
“따로 가신다고 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고 해서.”
“그래요?”
뭔가 미심쩍었지만 아그네스는 마차에 올랐다. 미리 도착해서 인사도 하고 준비를 해야 할 게 많았다.
한편 하룬은 따로 말에 올라 기사단원을 이끌고 마차를 둘러쌌다.
그렇게 아그네스가 탄 마차는 왕립학술원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