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또 다른 안배 (3)
“경비대장님. 손님이 찾아왔는데요?”
“이 시간에?”
하룬이 의외라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통상적으로 귀족 가문이라면 만찬 전에 용건을 마치는 게 관례. 그런데 그 시간을 넘겨 누군가 찾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왜 왔대?”
병사가 하룬의 눈치를 보며 보고했다.
“아그네스 님을 만나고 싶다는 전언입니다.”
“혹시 필스너라는 치유사인가?”
“아닙니다. 킹스턴 가문 사람이라는데요?”
“킹스턴?”
“예. 본인을 그레이엄 공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신분을 확인해 보니 킹스턴 가의 사람이 맞았습니다.”
굉장히 낯익은 가문의 이름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하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설마 그 자식인가?”
하룬은 확신했다. 그레이엄 공자는 킹스턴 가의 막내로 일전에 켈세타 성에서 열린 파티 때 루치아와 결투를 벌였던 그 귀족이었다.
그때 루치아에게 처절히 패배하곤 돌이킬 수 없는 망신을 당했지만, 아그네스의 배려로 다시 용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대륙을 떠돌며 수련을 했다. 카이엔이 큰 부상을 당했을 때 동굴에서 응급처치 키트로 치료를 해 준 적도 있었다.
그 뒤로 소식이 묘연했는데, 그가 이곳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대체 왜 네아를 만나려고 하는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찾아가려면 누아 마을에 있는 루치아 선생을 찾아가야 하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룬은 검을 손에 쥐고 망토를 두른 뒤 병사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그래. 수고들 많다.”
병사가 정문을 열었다. 하룬이 밖으로 나가자 그레이엄 공자가 자신을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모험자 차림이었는데, 그간의 여정이 험난했는지 갑옷은 너덜거렸고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하룬을 바라보는 그레이엄의 눈빛이 반짝였다. 예전에 몇 번 봤던 소년이 근사한 갑옷을 걸치고 나온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곳의 경비대장이십니까?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어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하지요. 켈세타에서 열린 파티에서 루치아 선생님과 결투를 했었죠? 그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하하. 역시 그분이 맞군요. 부끄럽습니다.”
의외였다.
사람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과 분노를 절제하지 못했던 막내 공자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한 눈빛은 물론, 능글능글하면서도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
더 이상 가문만 믿고 설쳐대던 그 철없는 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엄 공자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그네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서기관께선 휴식 중입니다. 요즘 과로를 하셔서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영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시죠.”
“언제쯤 찾아오면 좋겠습니까?”
“오후까진 병원에서 진료를 보니까, 저녁 무렵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근무를 하십니까?”
“왕립 아비루나 병원.”
“오!”
그레이엄 공자가 탄성을 질렀다.
그 작은 마을의 견습 치유사였던 소녀가 왕립 병원의 치유사가 되었다는 건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훌륭한 치유사가 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아그네스를 보고 싶었다.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아무튼 밤늦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먼저 기별을 하신 다음 찾아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지요.”
그레이엄 공자가 바로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하룬은 자신에게 처음 보고를 했던 병사에게 물었다.
“일단 내일 서기관께서 일어나시면 킹스턴 가문의 그레이엄 공자가 찾아왔었다고 말씀드려라.”
“옛. 대장.”
“그런데 저 사람, 왜 찾아온 거지? 결투에서 이긴 사람은 루치아 선생님인데. 누아 마을로 가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렇게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려던 하룬이 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하나의 그럴듯한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설마?’
결투 이후, 아그네스는 부상 당한 그레이엄 공자를 친절하게 돌봐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레이엄 공자는 다시 희망을 찾았다. 떠나기 직전에 방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네아가 선생님 소리를 들었었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동료인 필스너도 신경이 쓰이는데 왠지 또 다른 강적이 나타난 것 같은 느낌.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하룬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릴리가 다른 기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머, 하룬 경. 마침 잘 오셨네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결투에서 진 사람처럼.”
가끔 이 하녀장은 지나치게 예리할 때가 있다.
“하하하. 설마 제가 지겠습니까? 저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라고요.”
“그 자신감! 마음에 드네요. 다른 건 아니구, 주인님께서 하룬 경을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준의 명령이었다. 하룬은 즉시 저택으로 뛰었다. 도착해 보니 준은 집무실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읽는 거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전 다섯 페이지 이상 넘어가면 잠이 오더라고요.”
“뭐,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옙.”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부름에 하룬은 의아한 마음이었다. 평소 준이 자신을 부르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묘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업무에 대한 접점이 없어서였다.
반면 아그네스는 준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은 기껏해야 호위를 하거나 저택을 지키는 게 전부니 소외감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의 질투심과 함께.
아그네스는 준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하룬은 조금 달랐다. 그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더 많이 배워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고 싶었다.
“방금 그레이엄 공자가 찾아왔었습니다. 왜 있잖아요. 예전에 켈세타 성에서 루치아 선생님께 덤볐다가 개쪽 당한 그 공자요.”
“그래? 저택엔 무슨 일로?”
“네아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
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하룬은 걱정된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준이 그 얼굴을 놓칠 리가 없었다.
“걱정되냐?”
“옛? 뭐가요?”
“그레이엄 공자가 아그네스에게 마음이라도 표현할까 봐.”
“하하하하! 설마요. 제가 네아와 쌓아 온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사람에게 질 것 같습니까?”
“패배는 그런 방심에서 오는 법이지.”
준의 일침에 하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룬은 왠지 자리가 불편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근데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혹시 작전이라도 세워진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없다. 그냥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경계에서 열외되면 좋은 거잖아?”
“하긴, 그렇죠.”
준은 그의 장비를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제법 갑옷이 잘 어울리네.”
“방어력의 완성은 얼굴이죠. 하하하. 제가 한 얼굴 하잖아요. 기사가 갑옷이 안 어울린다면 정말 큰 수치겠죠.”
“얼굴 말고 체격이 잘 갖춰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실력은 제자리예요. 요즘 영 성취가 없어서요. 바이런 단장님께 배울 기회도 거의 없고.”
바이런은 누아 마을로 돌아갔기 때문에 배우기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준이 나서서 검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고립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답답하지?”
“많이요. 조바심도 들고요. 이래서 언제 왕실기사단원이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마음이 이래저래 심란하네요. 우울하기도 하고.”
“그게 바로 심마(心魔)다.”
“예?”
“잠시 걸을까?”
뭔가 일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준이 일어서자 멍하니 있던 하룬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준은 집무실에서 나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심마란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나쁜 상념을 뜻한다. 깨달음을 방해해서 성장을 막아버리고, 때로는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까지 하지. 무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기도 하다. 지금 너는 심마의 초입 단계에 들어서 있어.”
“그럼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강해지기 위해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좀 더 큰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네가 아그네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안다.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좀 더 큰일을 해도 좋을 시기다. 이제는 마음껏 세상을 향해 나아갔으면 해.”
하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어지는 준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네가 욕심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보다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어떻게요?”
“우선 결정부터 해. 방법은 그 이후에 알려 주지.”
어느새 준은 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저택의 별실이었다. 창고처럼 사용하는 곳이라 아무도 출입을 하지 않는, 아주 구석에 위치해 조용한 곳이었다.
하룬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준은 그의 옆에서 충분히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하룬은 언젠가 자신의 스승인 바이런이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복잡한 상황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해야 해. 그게 진리에 가까우니까.’
하룬은 눈을 감았다.
간단히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지금 필요한 것은 유명해지는 것도, 아그네스의 마음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유명해지고 아그네스와 이어진다고 해도 자신이 강하지 않으면 손에 쥔 모래처럼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더욱 괴로워지지 않을까? 늘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덤이고.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다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이다. 준의 말이 맞다. 이제는 마음껏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하룬이 눈을 떴다.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쇼. 멋진 사람이 되어 보이겠습니다!”
“좋아. 들어와라.”
준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깜짝 놀랐다.
바닥에 각종 약초들이 줄지어 깔려 있었다. 대부분은 처음 보는 약초들이었다. 단약으로 된 것도 있었는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대체 이건 뭡니까?”
“영약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얻기가 매우 힘든 아주 귀한 약초들이지.”
준이 준비한 것은 일전에 임무를 수행하다 수집한 영약들이었다. 천년하수오와 공청석유, 만년설삼, 북해빙령초, 대환단 등 당대 최고의 영약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준은 이 엄청난 영약들을 한 번에 복용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엄청난 기운을 감당할 만큼 하룬의 경지가 높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자신이 기운을 보태 도와준다면, 엄청난 내공으로 마나 서클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이걸 한꺼번에 다 먹어라.”
“절반도 못 먹고 배 터질 거 같은데요?”
준이 준비한 영약은 서른 뿌리가 넘었다. 액체로 된 것도 있었기에 양은 더욱 많았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거야. 포만감은 없으니 다 먹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워라. 엄청난 기운이 요동칠 거야. 그 기운을 심장 쪽으로 모아 마나 서클을 만든다.”
“마나 서클이요?”
“그래.”
“그럼 제가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꿈이 아닐까. 하룬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런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룬이 즉시 영약을 한 움큼 쥐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라.”
하룬이 영약을 입안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