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166화 (166/175)

166화 행복을 찾아서 (3)

유급이라는 한마디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국왕은 물론이고, 무표정으로 시립하고 있는 기사들도 마치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준이 누구인가. 그는 평소대로 예를 올렸다.

“엘누아르 가문의 강준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듣던 대로 뻔뻔하군. 자네 때문에 내 딸이 우울증에 빠졌네.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뒤에 물러나 있던 아레스 공작은 아차 싶었다. 국왕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떠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함께 오는 길에 귀띔을 해 줘야 했다. 준의 성격이라면 분명 입바른 소리를 할 테니까.

예상대로 준은 오히려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였다.

“수준이 맞지 않다면 한 단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배움에 있어서 차근차근 기초를 쌓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딸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게 된다면?”

“폐하. 왕립 아카데미는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학문의 경연장이지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면 갈아입는 게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모든 일은 교칙에 의거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조금의 잘못도 없습니다.”

준을 빤히 바라보던 국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하하하하! 배포가 대단하군. 과연 아레스 공작이 눈독을 들일 만한 사람이야.”

국왕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시립해 있던 근위기사들이 따라붙었지만, 국왕은 손을 뻗어 그들을 물렸다. 그리고 준에게 다가갔다.

국왕이 외지인과 이렇게 가까이 서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 대단한 배짱과 실력. 우리 왕실을 위해 써 보지 않겠나? 우리 왕실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지.”

왕실의 주치의가 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준은 정중히 사양했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곧 고향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아예 돌아간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국왕은 아레스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군무대신인 그라고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국왕이 다시 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왕도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이해할 수 없군. 대체 왜?”

모든 시선이 준에게 향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준이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을 남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겠지요.”

“자네는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던 시간이 길었지요. 그 와중에 누아 마을은 제게 큰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그런가.”

왕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굴복해 본 적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니까.

준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왕실을 위해 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요. 응급처치 키트나 외상용 연고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제가 왕도에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자네가 도움을 주겠다는 겐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레스 공작 각하와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줄로 압니다.”

때마침 아레스 공작이 나서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국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불행 중 다행이군.”

국왕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시종이 고급스러운 받침대를 들고 나타났다. 그 위에 교지와 황금빛 훈장이 놓여 있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마땅한 대가가 있어야 하겠지. 켈세타의 영주가 자네에게 남작위를 줬다고 들었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대에게 자작위를 하사하겠네.”

“괜찮습니다.”

훈장을 집으려던 국왕의 손이 멈칫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 경악했다. 중앙 귀족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작위가 올라간다고 약효가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약품 생산에 따른 로열티로도 충분합니다. 작위는 아껴 두십시오.”

“진심인가?”

“저는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런 괴짜는 오랜만이야. 소문 그 이상이군.”

국왕이 훈장을 다시 내려놓았다. 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어느새 국왕도 준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그가 제안했다.

“체스 한판 어떤가? 자네의 숨겨 둔 수가 궁금하네.”

“좋습니다. 한 수 부탁드리지요.”

국왕이 체스판이 준비된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때, 아레스 공작이 슬쩍 준의 뒤에 붙었다.

“자네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져 드리는 거 잊지 마. 폐하께선 체스 애호가로 유명해. 지는 걸 무척 싫어하시지.”

“일부러 지는 건 도리가 아닌 줄로 압니다. 지켜보시죠.”

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준이 먼저 말을 쥐고 선공을 시작했다.

* * *

결국 국왕은 단 한 번도 준을 이기지 못했다. 총 일곱 판을 겨뤘는데, 준은 손쉽게 국왕을 물리쳤다.

체스 애호가로 유명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국왕이었다. 한동안 그는 나라 잃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체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치유사입니다.”

“……체스는 누구에게 배웠지?”

“간단히 룰만 익혔을 뿐입니다. 누구에게 배우진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전을 지켜보던 아레스 공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한편 국왕은 두통이 찾아왔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프군. 좀 쉬어야겠어. 이만들 물러가지.”

“제가 진찰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됐네. 병 주고 약 주려는 겐가?”

국왕이 손을 내젓자 준과 아레스 공작은 예를 취하고 왕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레스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와 함께 있으면 심장병이 생길지도 모르겠네. 조만간 검진을 받아야겠어.”

“정기적인 검사는 건강에 유익한 법이지요.”

“왜 한 번도 봐 드리지 않았나?”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고지식한 건지 영악한 건지.”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 또다시 그를 부를 것이다. 아레스 공작은 준의 계책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그때, 준은 한옆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곤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기둥 뒤에서 샤넬 왕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깜짝 놀란 왕녀가 자리를 피하려 했다.

“왕녀님.”

도망치려던 샤넬 왕녀가 우뚝 멈췄다. 준의 부드러운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높여 부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이 궁전이기 때문일까? 샤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리원칙을 철저히 따지는 그였다. 이곳이 국왕의 거처라고 해도 그는 하대했을 것이다.

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상대해 드릴 시간은 충분합니다만.”

샤넬은 잠시 고민했다. 결국 그녀는 돌아서 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준은 아레스 공작에게 양해를 구해 그를 먼저 마차로 돌려보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끼어드는 건 불편했으니까.

샤넬 왕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실의 주치의 자리…… 수락했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실의 주치의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사실 샤넬 왕녀는 준이 주치의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니까.

준이 펼친 참교육이 아직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이 자신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준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언젠가 저 부족한 샤넬 왕녀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지하고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자신에게 큰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제자라는 사실이,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끔 만들었다.

“요즘 아카데미에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꼴 보기 싫은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카데미 교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니까요. 국왕 폐하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라고요?”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가서 낚시도 하고 나무에서 열매도 따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겁니다. 즐겁고 행복하게.”

마지막 말은 왠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샤넬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준이 가볍게 예를 올리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몸을 돌렸다.

예상대로 샤넬 왕녀는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준이 웃으며 말했다.

“교수직에서는 물러나지만 아카데미에서 특강은 종종 할 겁니다. 인원에 제한 없이 누구든 들을 수 있는 의학 강의를 만들 계획이니 왕녀님께서도 시간이 되시면 한번 오십시오.”

샤넬 왕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냐는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은 제가 밉지 않나요?”

“왜 왕녀님을 미워해야 합니까?”

“학생들을 부추겨 청원서에 서명을 하게 했으니까요. 당신을 교수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했으니까요.”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덕분에 아카데미 생활이 무척 즐거웠으니까요. 오히려 고맙지요.”

“비꼬는 거라면…….”

“왕녀님.”

무게가 실린 한마디에 샤넬 왕녀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준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켈빈 군이 그랬지요. 본인들은 치유사가 되려고 의학부에 들어온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의학에 흥미가 없다면 하루빨리 그만두길 권한다고.”

“그 말은 철회하겠습니다.”

“왜죠?”

준이 뒷짐을 지며 복도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때마침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마주했고, 그것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엔 여러 학부가 있습니다. 그중 왕녀님께서 의학부를 선택한 것이 단순히 좋은 학부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준은 언젠가 캠퍼스에서 우연히 봤던 샤넬 왕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원에서 개와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그 모습을.

그때 준은 생각을 바꿨다.

잠깐 삐뚤어졌을 뿐이지, 근본까지는 악하지 않다고. 진짜 악한 사람이었다면 자신보다 훨씬 약한 동물들을 그렇게 품을 순 없었을 것이다.

준이 말을 이었다.

“의학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조금 방향을 바꾸면 다른 생명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개와 고양이 같은. 확실히 동물을 다룬 의학 분야가 아직 전문화되진 않았지요.”

“아…….”

“귀여운 동물을 사랑하는 왕녀.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러니 편견에 힘들어하지도 말고, 더 이상 결석도 하지 마십시오. 이 이상 결석을 하게 되면 유급으로 끝나지 않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왠지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샤넬 왕녀가 의학부에 입학한 것은 의학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특히 그녀는 동물을 치료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애완동물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의학부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체면 때문이었다. 보통 귀족이 아니라 왕녀였으니까.

그런데 그 핵심을 준이 꿰뚫어 본 것이다.

찰나의 사이 온몸이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웠다. 비밀이 들킨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답답하게 막혀 있던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음을.

“강준 교수.”

하지만 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복도 끝을 향해 한참이나 걸어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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