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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65화 (165/175)

165화 행복을 찾아서 (2)

“어머, 잘생긴 분이네. 잠깐 이야기 좀 할래요?”

가는 도중에 몇몇 미녀들을 만났다. 그들은 잘생기고 젊은 준을 보며 호감의 눈빛을 보냈지만, 루치아만큼 매력적인 여인은 없었다.

“바빠서 이만 실례.”

“잠깐만요. 이대로 그냥 간다고요?”

준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자 여인들이 오히려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묘한 매력과 승부욕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여인들을 지나친 준이 파티장 안으로 입장했다.

목청을 가다듬은 집사가 큰 소리로 준을 소개했다. 그 덕에 모두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강준 남작님이 여기엔 무슨 일로?”

“아레스 공작님을 완치시킨 그분 아니야?”

“정말?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소란이 일어날 만도 했다. 최근 사교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준이었으니까.

한편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달콤한 말을 건네던 페르디낭 후작은 뜻하지 않은 방해를 받았다. 파트너가 준을 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군. 강준 남작.”

혀를 찬 페르디낭 후작이 돌아섰다. 준은 그의 아군이었다.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표정은 반가움 그 자체였다.

“아니! 이게 누군가? 시골 샌님이 제 발로 나의 파티장에 찾아오다니. 기적 같은 일이군.”

페르디낭 후작이 준을 향해 움직였다. 여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두 남자의 만남을 도왔다. 준이 후작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평안하셨습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하군요.”

“죄송할 게 뭐 있나? 이미 저질러 놓고선.”

“뭔가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흠흠. 아닐세. 아무튼 오늘 연회엔 나 외에 다른 남자는 출입 금지였지만 자네는 예외로 해 두지. 영광으로 알아 둬.”

준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페르디낭 후작과 자신을 제외한 다른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많은 숙녀분들을 커버하기는 어려우니까. 그저 우연의 일치랄까? 하하하. 아무튼 자네도 온 김에 함께 즐기지. 응?”

페르디낭 후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준은 그 마음을 헤아렸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실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자리를 좀 옮기시는 게 어떠실까요?”

“오래 걸리는 일인가?”

“아닙니다. 간단한 일이지요.”

“다행이군.”

두 사람은 비어 있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페르디낭 후작은 술을 권했지만, 준은 입궁해야 한다는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다.

“입궁이 오늘이었나?”

“예.”

“벌써 폐하를 알현한다니 자네도 많이 크긴 컸구만. 왕도에 입성한 이후로 이렇게 빨리 성공한 사례는 아마 없을 걸세.”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놈의 운 타령은 이제 그만해. 운도 실력이니까.”

페르디낭 후작은 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신뢰한다는 듯이.

“오늘같이 좋은 날에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한다니 정말 송구스럽군요.”

“뭐?”

순간 페르디낭 후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고라도 쳤나?”

“사고라면 사고일 수도 있겠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모두 정리하고 다시 누아 마을로 내려갈까 합니다.”

“……못들은 걸로 하지. 으음, 날씨가 아주 좋군. 야외에서 마시는 술도 제법 맛이 있어.”

페르디낭 후작이 여유롭게 술을 들이켰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한마디로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준이 재차 말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물론 누아 마을로 돌아간다고 해서 각하와 함께하려는 일을 완전히 내려놓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곳에서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대체 왜? 이 미련한 사람아! 폐하 알현이 코앞이고, 어? 아레스 공작의 목숨도 살렸는데 왜 지금 내려간다고 난리인가?”

페르디낭 후작이 결국 폭발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한쪽에서 일을 하고 있던 시녀들이 놀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퍼져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다.

“대체 뭘 하면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할 수 있는 겐가? 비법 좀 전수해 주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제 스스로를 위해서지요.”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라면 더욱 왕도에 남아 있어야지!”

또다시 언성이 높아졌다. 시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페르디낭 후작은 이제는 포기한 듯 들고 있던 잔을 한쪽으로 내려놓았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 알려질 일인데.

후작은 착잡한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는 어쩔 생각인데?”

“교수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물러난다고? 하, 세상 참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부럽군. 그 안하무인의 마스코트인 샤넬 왕녀도 자네만큼은 아니야. 알고 있나?”

당연히 준은 무책임하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학생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을 생각해 두었다.

“학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종종 왕도에 들러 특강을 하겠습니다. 훌륭한 치유사를 양성하고 의료계를 개혁하겠다는 목표엔 변함이 없으니까요.”

“고작 그걸로?”

“아그네스 선생도 지원을 할 겁니다. 저희 가문에서 직접 공개 진료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페르디낭 후작도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난다고 한다면 막을 명분은 없으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삶이다.

다행히 페르디낭 후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레스 각하와 군수 사업을 같이 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오늘 왕궁에 불려 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그 사업에서 발생하는 로열티를 각하께 투자하겠습니다. 그 자금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해 주십시오.”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돈이라면 자네 가문에도 꽤 비축되어 있는 걸로 아네. 사업도 잘되고 있다면서? 하긴, 그럼 다른 마음이 들 만하지.”

“오해하진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있든 각하를 지지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냥 싫은 소리 한번 해 봤어.”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많은 여인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어 보였다.

페르디낭 후작이 체념한 듯 말했다.

“좋아. 특강 건은 내가 필딘 학장에게 전달하지. 그런데 정말 아카데미 교수직을 내려놓을 생각인가? 그거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다시 생각을 해 봐.”

“생각은 충분히 했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도 훌륭한 선생들이 있겠지요.”

준은 아그네스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것만큼은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기를 바랐다.

“후우,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 천 년 묵은 능구렁이 같군.”

혀를 찬 후작이 잔을 들고 테라스를 나섰다. 그는 굳이 쏟아져 들어오는 여인들을 막지 않았다. 준을 향한 그의 소심한 복수였다.

* * *

하마터면 준은 입궁에 늦을 뻔했다.

여인들의 애정 공세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연회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부터 후작가에 들를 땐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준은 아레스 공작과 합류했다. 병을 완전히 떨쳐낸 그는 예전의 위엄을 되찾았다. 오히려 준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몸은 좀 괜찮나?”

“걱정해 주신 덕에 쾌차했습니다.”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병치레라니. 신의라는 호칭이 아깝군. 자기 몸은 잘 관리해야지?”

준은 멋쩍게 웃었다.

아레스 공작은 출발을 지시했다. 이번 행차의 호위는 미놀렌 경이 맡았고, 화려한 마차 주변으로 말을 탄 기사들이 엄중히 경호했다.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아레스 공작의 사회적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평소에는 차창이 굳게 닫혀 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공작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백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와중에 아레스 공작이 조용히 물었다.

“아카데미에 휴가계를 냈다며? 얼마 전에 필딘 학장을 만났는데 자네 이야기를 하더군.”

“사실 와병은 핑계입니다.”

“핑계?”

“찾아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몸을 피한 겁니다.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데, 병가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더군요.”

“가만 보면 자네도 참 욕심이 없는 사람이야. 나였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텐데 말이지.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말도 있지 않나?”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표는 성공이지만, 자신은 그 반대였으니까.

“조만간 다시 누아 마을로 돌아갈까 합니다.”

그 한마디에 아레스 공작이 깜짝 놀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차창을 닫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누아 마을로 돌아간다니. 아카데미 교수직은 어쩌고?”

“내려놓아야지요. 학장님께 양해를 얻어서 특강 형식으로 강의를 이어갈까 합니다. 아그네스 선생도 공개 진료를 열어 돕기로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페르디낭 후작은?”

“방금 양해를 구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있네.”

준이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떤 문제 말씀입니까?”

“자네가 누아 마을로 돌아간다면 왕실의 주치의가 될 수 없으니까. 국왕 폐하께 강력히 추천한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나?”

그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공연한 일을 하셨군요.”

“그러게 말이네. 왠지 이거 한 방 먹은 기분이군.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

아레스 공작은 농담조로 아쉬움을 표했다.

준이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돌리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면에선 자신보다 고집이 센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아직 기회가 사라진 건 아니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마차가 왕궁에 도착했다.

아비루나 왕국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규모가 상당했다. 외관은 고풍스러웠고,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왕실의 기품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변하진 않았군.’

주변을 둘러보니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성이 조금 증축된 걸 제외하고는 예전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아레스 공작을 따라 준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곳이 아비루나 왕국의 심장일세. 어떤가? 와 본 소감은.”

“굉장하군요.”

“고작 그게 끝인가? 하긴, 출셋길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친구니 할 말은 없군. 자, 어서 가세.”

수많은 근위병과 시녀들이 궁전을 오갔다. 준과 아레스 공작은 담소를 주고받으며 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들이 멈춰 서자, 거처 앞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레스 각하.”

“폐하께선 안에 계시는가?”

“각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거대한 황금빛 문이 천천히 열렸다.

굉장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붉은 카펫이 끝나는 지점에 옥좌가 있었고, 좌우엔 중무장을 한 근위기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동상인 줄 착각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옥좌엔 백발의 사내가 왕관을 쓰고 앉아 있었다. 서슬 퍼런 눈으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남자. 그가 바로 아비루나 왕국의 국왕인 켈레브리얼 2세였다.

“어서들 오시게.”

“그간 평온하셨습니까. 폐하.”

아레스 공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최고의 예를 올렸다. 준도 그 뒤에서 똑같이 격식을 차렸다.

국왕이 손을 들어 일어나라 명했다.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쁘군. 아레스 경. 이제 다 나은 겐가?”

“그렇습니다. 모두 폐하의 은공 덕분이지요.”

“거추장스러운 인사치레는 그만두지.”

국왕이 손을 까딱했다. 그 손은 아레스 공작이 아니라 준을 향했다. 뒤에 서 있던 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가 내 딸을 유급시킨 주인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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