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반짝반짝 빛나는
대가를 청구한다.
그 한마디에 아인하르트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는 준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준이 귀족이라고 해도 귀족 내에서도 분명 서열이 존재하는 법이다. 게다가 왕도에서 오래도록 뿌리를 내린 가스톤 가문이라면 더더욱.
그런 입장에서 대가를 청구한다는 한마디는 상당한 결례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애초에 이 싸움의 칼자루는 준이 쥐고 있었다. 그를 치료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후작의 입장에서 만약 준을 놓치게 되면 또 언제 치료를 자원하는 사람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중간에 낀 빈센트 공자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대로 아버지가 준을 내치게 되면 자신의 계획이 상당히 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흐흥! 물러터진 애송이는 아니군.”
아인하르트 후작이 콧방귀를 뀌며 표정을 풀었다. 전쟁터에서 오래 생활했던 터인지 기품보다는 호방한 기질이 강했다.
“좋소. 그대가 원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 설마 왕실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달라는 뻔한 청탁은 아니겠지?”
“관직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래? 그건 또 나름대로 시시한데.”
너무 딱 잘라 말하니, 아무리 후작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졌다. 어설픈 거절이 아니었다.
“꼭 들어주겠다고 약조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자제분들이 계시니 증인으로 서 주시면 좋겠군요.”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네. 걱정 말고 얘기해 보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후작 각하의 서명이 들어간 추천서 하나면 충분합니다. 아비루나 왕립 병원 치유사로 부임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정말 쉬운 일이었다. 관직도 아니고 병원의 치유사 자리라면 굳이 추천서가 아니라고 해도 바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약간 김빠진 느낌에 아인하르트 후작이 피식 웃었다.
“관직에 관심은 없어도 왕도 생활은 하고 싶었나 보군. 하긴, 아비루나 왕립 병원이 어딘가? 대륙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보유한 병원이지. 촌구석 진료소에 있다 보면 그런 곳에서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겐가?”
“아뇨. 제가 필요한 추천서가 아닙니다.”
“그럼?”
“아끼는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연수 겸 아비루나 왕립 병원에서 경험을 쌓게 하고 싶군요.”
“제자라. 흐음…….”
아인하르트 후작이 수염을 쓸어 만졌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준을 바라보던 그가 한마디 던졌다.
“이상하군. 그대는 시골 진료소에 남고 제자를 왕도로 보내려는 이유가 궁금한데? 아비루나 왕립 병원이라면 모든 치유사들의 꿈 아닌가?”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건 동의할 수 없군.”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꿈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준이 계속 강하게 나오자 아인하르트 후작은 궁금했다. 대체 이 젊은 치유사가 그토록 아끼는 제자의 정체가.
“천재인가?”
“평범합니다.”
“그대의 제자라면 그대보다 어릴 터인데…… 의미가 있나?”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빛나는 게 있는 법이지요. 전쟁터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작 각하라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날 선 공방이 오가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지켜보던 빈센트 공자는 이마에서 땀까지 흘리고 있었고, 무관심하게 쳐다보던 둘째 모라타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곧 변화가 일어났다.
낮은 신음을 흘린 후작의 표정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병원장, 아니 필요하다면 국왕 폐하께 들어가는 추천서를 써 주지. 내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들으셨지요?”
준이 두 공자에게 확인 차 물었다. 두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치료를 시작하지요. 우선 깨끗한 물을 준비해 주십시오.”
“어서 물을 준비하라.”
“예. 주인님.”
잠시 후 하녀가 큰 대야에 물을 받아왔다. 발을 담그기 적당한 온도였다.
준은 가방에서 약초꾸러미를 꺼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갖 약초는 다 써봤던 아인하르트 후작은 금세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쓰려는 약초는 모두 써 본 것 같은데? 안 그러냐? 빈센트.”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의혹이 계속되었지만 준은 약초 배합을 멈추지 않았다. 약초를 툭툭 뜯어 핸드밀에 넣고 갈았다.
“약초는 배합에 따라 전혀 다른 성질을 보이곤 합니다. 잘못된 민간요법으로 염증이 심해졌으니, 우선 그 염증을 다스릴 겁니다.”
“크흠.”
준은 잘못된 민간요법을 강조해 말했다. 왠지 혼이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체면을 지켰다.
그때 준을 고깝게 보던 모라타 공자가 불쑥 나섰다.
이럴 때 콧대를 눌러 두면 아버지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우리 아버지의 안목을 무시하는 거요? 아버지께서는 오랜 세월 광야를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인데. 그깟 약초쯤이야…….”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우리 가문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거요.”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준은 잠시 핸드밀을 멈췄다. 모라타 공자는 불쾌감을 넘어 표정에 노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가문엔 치유사도 없답니까? 어설픈 민간요법으로 이렇게 발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내버려 두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잘못된 지식과 정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아주 모범적인 예입니다. 견습 치유사들을 불러 실습을 시키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가능하면 의학서에도 수록하고.”
“큭…….”
준의 논리적인 반박에 모라타는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내쉰 아인하르트 후작이 나섰다.
“그만. 그만들 하게. 우리 가문의 치유사도 말렸지만 내 고집대로 했네. 치료가 안 되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 내 탓이니 그만하게.”
“치료 방침은 치유사인 제가 결정합니다. 이 점 헤아려 주시길.”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거라.”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모라타 공자였다. 빈센트 공자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이제 준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걱거리는 핸드밀 소리가 그치고, 준은 곱게 갈린 약초를 물에 풀었다.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저으며 약재가 충분히 녹기를 기다렸다.
곧 물이 진한 녹색으로 변했다.
준은 손가락으로 약물을 찍어 맛을 확인했다. 배합이 딱 맞았다.
“발을 한번 담가 보십시오. 좀 쓰라릴 텐데 곧 편해질 겁니다.”
“알겠네.”
아인하르트 후작은 거침없이 발을 물에 담갔다. 대장군 출신이라 그런지 두려움이 없었다. 통증에 눈매가 파르르 떨렸지만, 곧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
“흐으음. 아주 편하군. 확실히 저 구정물과는 비교가 안 돼.”
후작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름 위트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준은 가방에서 모래시계를 꺼내 반대로 돌렸다. 가는 모래가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약 1시간을 나타내 주는 시계였다.
“이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담그고 계십시오. 그 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지요.”
후작은 다소 긴장한 눈으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진한 녹색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꺼냈을 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길 바랐다.
* * *
준이 탄 마차가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으로 다시 돌아온 건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현관이 열리고 폴링과 루치아가 나왔다.
준은 빙긋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웃는 걸 보니 성공한 모양이네.”
“아니. 실패했어.”
“정말요? 당신이?”
믿을 수 없었다. 그라면 완치시키고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얼마나 심하길래 그래요?”
“자세한 건 올라가서 하지.”
듣는 귀가 많았다. 준과 루치아는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준은 여유롭게 하녀에게 다과를 준비하라 명했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언제까지 뜸만 들이고 있을 거예요?”
“하루 종일 치료만 하다 왔는데 차 한잔 마실 시간은 줘야지?”
“흥. 그럼 처음부터 궁금하게 하질 말든가.”
“하하하하.”
토라지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준은 웃으며 찻잔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치료에 실패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오늘은 가볍게 시험만 할 생각이었어. 그래서 약초도 기본적인 것들만 준비해 갔지. 일단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확인해야 하니까.”
“막상 보니 많이 심했나 보네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마나 요법은 잘 안 들어. 게다가 일반적인 약초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울 거 같더군.”
“대체 어느 정도길래?”
“끔찍했어. 그렇게 심한 무좀은 처음이었지. 합병증도 깊었고. 조금만 늦었다면 발을 절단해야 했을지도 몰라. 이상한 치료를 하고 있어서.”
“설마 민간요법?”
“궁지에 몰린 환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지.”
준은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루치아는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저렇게 생각에 잠길 정도면 확실히 심각한 상황이니까.
곧 준이 답을 찾았다.
사실 준이 가진 답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잠깐 누아에 다녀와야겠군. 좀 더 강한 약초를 써야겠어.”
“천천히 해요. 시간은 많잖아요.”
어느새 뒤로 돌아온 루치아가 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가끔 가슴을 쓸어 만지는 대범함도 보였다. 하지만 준은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할 뿐이다.
“시간이 얼마 없어.”
“응? 왜요?”
“완치까지 일주일 불렀거든. 오늘이 지나면 육 일. 그 안에 치료하지 못하면 단두대로 끌려갈 거야.”
“세상에! 단두대? 진짜 그랬단 말이에요? 냄새 나는 발 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이상한 노친네네.”
“말조심해. 환자야.”
준은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루치아가 홧김에 그의 어깨를 꽉 눌러 버린 것이다.
“아프군.”
“아프라고 한 거예요. 좀 더 세게 할 걸 그랬나? 소리 하나 안 지르네.”
“왜?”
“정말 몰라서 물어요? 내가 환자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면 강림하지도 않았을 거라구요. 아아. 회귀하고 싶다.”
“큰일이군. 애정 결핍엔 약도 없는데. 좀 기다려 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준은 루치아를 잘 다독인 뒤 침실로 이동했다. 그곳엔 그가 만들어 둔 마법진이 있었다.
마법진 위에 올라 마나를 주입했다. 순간 푸른빛이 번쩍이며 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눈을 뜨니 낯익은 공간이 보였다. 이곳은 누아 마을 진료소, 정확히는 준의 방이었다.
그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진료 시간이군. 아그네스는 잘하고 있겠지?’
조금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진료는 지식으로만 해낼 수 없는 거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살펴봐야겠다.’
그렇다고 문을 열고 나갈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은 왕도에 있어야 했으니까.
답은 하나뿐이었다.
준은 은신한 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기척이 완벽히 지워졌기에 경비를 서던 기사단원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잠시 건물을 빙 둘러가 아그네스의 진료실 창가에 섰다. 고개를 살짝 내밀며 안을 살폈다.
마침 진료 중이었다.
“처방해 드린 약 잘 드시면 금방 나으실 거예요. 혹시 더 불편한 곳 있으면 다시 오시고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그네스는 웃음을 잃지 않고 환자를 상대했다. 환자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나갔다.
책상으로 돌아앉은 아그네스가 차트에 진료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신중했다.
‘잘하고 있구나.’
차트 기록을 마친 아그네스는 다음 환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시 쉬었다. 눈을 찡끗하며 하품을 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하아. 선생님은 대체 언제 오시는 걸까? 힘들어 죽겠는데. 아무튼 오시기만 해 봐. 사탕 한 주머니를 달라고 해야지!”
“그래. 그러마.”
“응?”
어디선가 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아그네스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피곤하긴 한가 봐. 환청이 다 들리고. 이럴 땐 어떤 약을 먹어야 하지?”
“아그네스 선생님! 다음 환자분 모실까요?”
“아, 예! 부탁해요.”
아그네스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환자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