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가스톤 후작가
긴 여정이 고단했던 탓일까. 준은 다음 날 늦잠을 잤다. 그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하녀가 조심히 다가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옆방에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식사는 곧 준비될 거예요. 식사 먼저 하시겠어요? 아니면…….”
“으음. 먼저 씻는 게 좋겠군. 고마워요.”
“고맙다니요. 그런 말씀 마셔요.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하녀는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옆방은 다용도실이었다. 욕조가 있어 목욕도 할 수 있고 원하면 마사지도 받을 수 있었다.
준은 옷을 훌훌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에 근육이 풀리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 위로 꽃잎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은은한 향이 피로를 싹 가시게 했다.
‘행정관이 제법 신경을 썼는데? 루치아가 아주 좋아하겠어.’
준은 욕조에 몸을 뉘인 채 눈을 감았다.
그가 한가롭게 목욕을 하는 사이 저택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영주가 저택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못했다.
폴링은 하녀들을 지휘하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집사를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동안엔 집사 노릇을 해야 했다.
“식사 준비는 어떻게 됐나?”
폴링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하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지금 마무리 중입니다. 바로 준비시킬까요?”
“잠깐. 영주님은?”
“목욕 중이십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해요.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아뢸까요?”
“아니다. 쉬시는 데 방해하는 건 결례지. 지금 식당에 가서 모두 대기하라고 해.”
“예. 행정관님.”
“루치아 님 모셔오는 거 잊지 말고. 영주님만큼 중요하게 모셔야 한다. 알았나?”
하녀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폴링은 불안한 마음에 결국 식당을 방문했다. 중요한 일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식당은 아주 깨끗했다.
이미 청소와 정리가 모두 끝나 있었고, 식기 세팅도 다 되어 있었다. 음식만 내오면 완벽했다.
하지만 폴링은 매의 눈으로 식기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눈에 걸렸다.
“이봐! 이 접시에 얼룩이 남아 있잖아!”
“아!”
하녀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폴링이 가리키는 곳엔 자그마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운이 없게도 준의 자리에 놓여 있던 접시였다.
그렇다 보니, 평소엔 자상하기로 유명했던 폴링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상벌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뒤끝도 없고.
당연한 지적이었기에 하녀는 접시를 든 채 허리를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주님이 쓰실 식기인데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긴장한 채 식탁 옆쪽에 늘어서 있던 하녀들이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혼을 내고 계십니까? 보기 드문 일이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준이었다. 어느새 그는 단정한 의복 차림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몸을 돌린 폴링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다른 게 아니라 식기에 좀 문제가 생겨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요?”
뚜벅뚜벅 다가온 준이 하녀가 들고 있던 식기를 낚아챘다. 표면을 살펴본 준이 싱긋 웃었다.
“이 정도 물때 가지고 호들갑은.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다들 긴장한 것 같아서 내가 편하지 않네요. 누아 마을 때처럼 편하게 했으면 합니다. 행정관.”
“면목이 없습니다.”
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때를 소매로 슥 닦고는 자리에 앉았다. 곱상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의외로 털털한 면이 있었다.
“저기, 영주님? 식기를 더 깨끗한 것으로 바꿔 드릴게요.”
“괜찮아요. 이 정도로 사람 안 죽습니다. 그나저나 배고픈데 음식은 언제 나옵니까? 새 저택에서 먹는 첫 끼라 그런지 기대되는군요.”
“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녀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꽤 실력 있는 요리사를 채용했는지 플레이팅도 아주 먹음직스럽게 되어 있었다.
때마침 루치아도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물론 준은 행정관 폴링도 자리에 앉혔다. 식사는 다 같이 해야 맛있는 거라는 지론을 펼치며.
그렇게 맛있는 식사가 계속되던 그때, 준이 잠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었다.
“가스톤 후작가에는 전령을 보냈습니까?”
“예. 어제 저녁에 바로 보냈습니다. 영주님만 기다리고 있다는 회신을 가져왔더군요. 듣자 하니 후작 각하께서 진료를 위해 오늘 일정을 모두 취소하셨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분입니까?”
“왕국의 대장군을 지낸 분이십니다. 지금은 은퇴하고 사교계에 몸담고 계시지요. 수많은 공적을 쌓은 분이기 때문에 신민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만족스러운 아침이 끝나고, 준은 왕진 가방을 들고 마차에 올랐다.
“영주님!”
그때, 중무장을 한 기사 하나가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준의 미소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오. 바이런 단장 아닙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야 인사드려 송구합니다. 어제는 사정상 외부에 있어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경도 나름 사정이 있었겠지요. 예전에 왕도에서 활동하셨다는 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바이런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게 있는 것 같았다. 준은 개의치 않고 화제를 돌렸다.
“지금 가스톤 후작가에 왕진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최대한 빨리 진료를 마치고 돌아올 테니 밀린 이야기나 같이 합시다.”
“제가 호위를 하겠습니다.”
“왕도인데 치안에 문제는 없겠지요.”
바이런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 가문의 주인이 길을 나서는데 기사단장이 저택에서 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손가락질을 당할 일이지요.”
“그렇군요.”
나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말이 준비되었고, 바이런은 절도 있게 말에 올라 마차 곁에 섰다.
호위라기보다는 길잡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출발하라!”
우렁찬 명령과 함께 준을 태운 마차는 가스톤 후작가의 저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호화로운 방.
아니, 그 이상의 단어가 필요했다. 이 넓은 공간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카펫이 안락함을, 그리고 벽에 걸린 미술품과 장식물이 기품을 더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는 그런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은 가스톤 후작가의 가주인 아인하르트의 개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인하르트 후작은 방의 기품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은 채 두 발을 내놓고 있었다.
발가락 사이의 피부가 징그럽게 벗겨져 있었고, 악취가 나는 진물이 흘렀다. 그뿐이 아니라 발톱까지 변성되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괜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얘야. 지금까지 수많은 치유사들도 두 손을 들지 않았더냐?”
“이번엔 다릅니다. 사우던 가의 바스티엔 대공자도 죽다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지난번에 왔던 그 뚱뚱한 치유사도 기적을 보였던 자였지, 아마?”
아인하르트 후작은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대장군 출신답게 그는 체구가 좋았다. 나이가 들어도 허리가 굽지 않았고, 풍채가 좋아 지금도 현역으로 뛰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발에 난 무좀에 이렇게 소심해진 것이다.
“나를 진료한 치유사들의 입을 막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이러다 소문이 퍼진다면 난 두 번 다시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준 남작은 입이 아주 무거운 분이었습니다. 절대 아버지의 병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않을 겁니다.”
“고작 잠깐 만난 걸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게야? 너답지 않구나. 끄응.”
가려움이 시작되었는지 후작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격렬하게. 그럴 때마다 하얀 가루 같은 것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걸 지켜보던 또 다른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께서 실수하신 것 같단 말이죠. 시골 마을에 사는 치유사가 기적을 일으켜 봐야 뭐가 있겠습니까? 늙은이들 병수발이나 들었겠지요. 알아보니 배경도 없는 평민 출신이더만.”
명백한 시비조였다.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선 그는 둘째 공자인 모라타였다. 오래도록 대공자 자리를 두고 빈센트와 암투를 벌여 온 주인공.
둘은 배다른 형제였고, 성장환경이 달라 형제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 누가 먼저 서로의 심장에 비수를 꽂느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빈센트가 차갑게 반박했다.
“많은 치유사들이 평민 출신이라는 걸 모르나?”
“하지만 그 많은 치유사들도 결국 시험을 치러 작위를 받지 않습니까?”
“평민이나 준남작이나 거기서 거기지.”
“형님은 속 편해서 좋겠수다.”
모라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빈센트 공자는 불쾌감을 표했지만, 아버지 앞이었기에 꾹 참았다.
“아무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설령 그런 소문이 퍼진다고 해도 완치를 한 다음 호탕하게 웃으며 당당히 나서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아버지의 방식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됐다. 됐으니 이 지긋지긋한 병이나 좀 어떻게든 해다오!”
그때,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엘누아르 가문의 강준 남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어서 이곳으로 모셔라.”
“예. 각하.”
잠시 후 강준이 별실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준은 악취를 느꼈다. 하지만 시선을 아인하르트 후작에게 맞춘 채 미소를 지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엘누아르 가문의 강준입니다.”
“반갑네. 왕도는 처음인가?”
“아닙니다. 먼 옛날에 한번 들러 본 적이 있지요. 그런데 많이 달라진 느낌입니다.”
“그렇지. 세상이 평화로우니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네. 덕분에 나 같은 전쟁영웅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말이야.”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깊은 고독이 느껴졌다. 준은 발가락에 퍼진 무좀을 관찰하면서도 그의 고독한 심리상태를 진단했다.
그때, 준은 한옆에 놓인 대야를 주목했다.
약재가 풀려 있는지 갈색을 띠는 액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뭡니까?”
“가려움을 억제시켜 주는 약물을 탄 거지. 잠시 담그고 있으면 가려움이 많이 없어진다오.”
“병세에 차도는 있습니까?”
“글쎄. 그저 가려움만 잠깐 해소시켜 준달까.”
준은 허리를 굽혀 대야에 차 있는 액체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잘 파악이 되지 않는지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혀에 가져다댔다.
“식초가 좀 과하게 들어간 거 같군요. 불필요한 약재도 들어가 있고. 처방을 받으신 겁니까?”
“아니. 민간요법일세.”
“위험한 방법입니다. 상처가 생길 수도 있고, 그곳이 곪게 되면 더욱 고통스러워질 겁니다.”
“으음…….”
준의 말엔 확신이 있었고, 사람을 설득시킬 만한 매력이 있었다. 완고하던 아인하르트도 혹시나 해서 한 수 접어 주었다.
“치료할 수 있겠나?”
“손이 좀 많이 가겠지만 한번 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나는 치료할 수 있냐고 물었네. 추측성 발언은 사양하지.”
아인하르트 후작이 강하게 나섰다. 준은 조용히 웃으며 후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주일 정도면 충분합니다.”
“고작 일주일?”
“대신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각하께서 제 모든 지시에 따라 주셔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다면 이 병은 고치기 어려울 겁니다.”
후작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시골 마을의 치유사가 이렇게 대담하게 나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리바리 떨다가 제 풀에 지쳐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호기심이 들었다.
대체 이 배경도 출신도 보잘것없는 치유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실력?
후작은 그것이길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 녀석이 고생한 것도 있으니 그대의 실력을 한번 믿어 보겠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도록. 하지만 실패했을 땐 그대를 단두대로 보내지.”
“하하하. 지금까지 각하의 무좀을 치료하지 못하면 모두 단두대로 갔습니까?”
“그만큼 중요하단 말일세.”
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치료에 성공하게 된다면, 단두대에 상응하는 대가를 청구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