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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11화 (111/175)

111화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래도 빈센트 공자는 준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내리친 팔걸이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룬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시종을 불러 주십시오.”

일단 하룬도 준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속으로는 통쾌했지만, 조금씩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후작 가문의 대공자인데.

준의 진료실로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주군. 그렇게 지르고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때려 부술 기세로 팔걸이 내려치던데요? 가스톤 후작가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어쩌죠?”

“그런 시원한 대응을 원한 게 아니었나? 표정을 보니 고구마 한 자루는 먹은 것 같더만.”

“그건 그렇지만요. 정도란 게 있잖습니까?”

“정도? 하하하.”

준은 아그네스가 기록한 대진 차트를 훑어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태도엔 여유가 있었다. 하룬은 분명 그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준이 차트 검토를 끝내고 하룬을 바라보았다.

“그가 진짜 가스톤 후작가의 대공자라면 멋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왜죠?”

“가스톤 후작가는 왕도의 명문이야. 조금이라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짓은 할 수 없겠지. 대공자가 무조건 가문을 계승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준의 말에 하룬이 턱을 쓸어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개념 없이 설치는 것도 빈센트 대공자가 아니라 시종인 얀이었으니까. 오히려 빈센트 대공자는 그런 얀을 혼내곤 했었다.

“으음…… 그럼 뭔가 점수를 따기 위해 대공자가 이런 시골 마을까지 왔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지 않고서 그 먼 길을 왜 왔겠어? 아랫사람을 시켰겠지. 직접 움직였다면 그만큼 중요한 일일 거야. 대강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

“가문의 주요 인물이 병환에 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하룬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준의 명성이 알려지고 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중 하나를 명문가로 바꿔 치니 이해가 쉬웠다.

“역시 주군이심다! 명성이 벌써 왕도를 장악한 모양이군요. 예전부터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긴 했는데 좀 빠른 거 아닙니까?”

“글쎄. 그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는 이따 대공자를 다시 만나 봐야 알겠지. 나가서 릴리에게 전해라. 빈틈없이 모시라고.”

“알겠습니다.”

하룬이 진료실을 나가려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시 후다닥 들어왔다.

“주군. 들리는 소문으론 곧 왕도에 가신다고 하던데요.”

“어디서 들었어?”

“폴링 행정관께서 저택 구입 준비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으신 것 같더라고요. 척하면 딱이죠.”

“그런데?”

“역시 호위로는 제가 제격이겠죠?”

준은 피식 웃었다. 하룬은 자신이 호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을 한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왕도에 가 본 적이 없다고 했었나?”

“그렇죠. 하지만 왕도의 화려한 밤거리가 아주 뜨겁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죠.”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지. 루치아 선생과 둘이 다녀올 계획이다. 그럼 진료소에 아그네스만 혼자 남을 텐데, 그래도 왕도로 가고 싶나?”

“어…….”

하룬이 고민에 빠졌다. 준은 충고를 계속했다.

“나와 루치아가 없기 때문에 아그네스에겐 정말 힘든 나날이 될 거다. 그때 곁을 지켜 준다면 점수를 쉽게 딸 수 있겠지.”

“오! 확실히 그렇겠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전 그럼 마을에 남는 걸로.”

“하는 거 봐서.”

“헐?”

피식 웃은 준은 그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하룬은 나름 억울했지만 재빨리 진료실을 나갔다. 그를 찾아온 환자들을 위해서.

* * *

빈센트 공자가 머물고 있는 응접실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공자는 릴리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준이 진료실로 돌아간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보다 못한 얀이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공자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놈은 아주 무례한 자입니다. 따끔하게 훈계하셔서 가문의 위상을 바로 세우셔야!”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어째서요?”

피식 웃은 빈센트 공자가 손가락으로 얀을 한 번 가리킨 후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데 언제 시종장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겠나?”

“흐흐흐. 그야 공자님께서 가업을 승계하신다면 바로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알지 않아? 나는 무능한 부하를 혐오하는 거.”

“잘하겠습니다!”

“쯧, 쓸모없는 것.”

빈센트 공자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서 내려오는 게 속 편했을 것이다.

“남작은 명분을 내세울 줄 아는 자다. 성인으로 칭송받는 치유사들이 잘 써먹는 방법이기도 하지. 부와 명예보다도 환자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야.”

“이해는 안 되지만 그런 놈들이 분명 있지요. 흐흐흐.”

“명분이란 그런 것이다. 정면으로 깨부수려고 하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 그러니 지금은 남작의 장단에 맞춰 줄 필요가 있어. 괜히 진료소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까.”

빈센트 공자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명망 있는 가문의 대공자답게 문무를 겸비한 청년이었다. 지금껏 둘째와 셋째 공자의 견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냉정한 판단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찻잔이 비워질 무렵, 진료소의 종이 울렸다. 오후 진료가 끝난 것이다.

준은 약속대로 진료가 끝난 직후 바로 응접실을 찾았다.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의외로. 그런데 뒤에 계신 레이디들은?”

준은 혼자가 아니었다. 진료를 마친 루치아와 아그네스를 데리고 함께 온 것이다.

준은 그녀들을 소개했다.

“우리 진료소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치유사입니다. 이쪽은 루치아 선생. 이쪽은 아그네스 선생. 루치아 선생은 중급 치유사이고, 아그네스 선생은 초급 치유사입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여선생을 바라보는 빈센트의 눈이 번뜩였다. 루치아의 미모에 한 번 놀랐고, 아그네스의 어린 나이에 두 번 놀랐다.

“누아 마을 진료소는 치유사를 외모로 뽑는 모양이군요.”

“어머, 안목이 좋으신데요? 어떻게 아셨지?”

루치아가 능숙하게 받아넘긴 덕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빈센트 공자는 씨익 웃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킹스턴 가문의 막내를 혼내셨다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은 딱 질색이라서. 연회에서 준 선생님과 춤까지 췄는데도 그러더라구요?”

루치아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것은 경고였다. 너도 나에게 찝쩍대지 말라는. 그러나 빈센트 공자는 다른 쪽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결국 그레이엄 공자는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결투에서 레이피어로 검기를 막았다고 하던데. 어떤 수를 쓰신 겁니까?”

“그건 잉그바르 가문의 비전이에요. 남에게 쉽게 알려 줄 수는 없죠.”

“아쉽군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대련을 해보고 싶습니다만.”

“일단 멀리 오셨으니 용건부터 끝내는 게 좋지 않으시겠어요?”

빈센트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변을 물리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단순히 인사를 하려고 선생들을 데려온 게 아닙니다.”

“하면?”

“가문에 환자분이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빈센트 공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것을 목격한 준은 자신의 추론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저를 찾아오셨다면 용태가 위중하다는 것일 텐데.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지요. 특히 루치아 선생은 저와 비슷한 수준의 치유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건 사실이나 그건 남작님만 들어주셨으면 하는군요.”

물러섬이 없었다.

준은 루치아와 아그네스를 물렸다. 빈센트 공자도 시종 얀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두 남자의 접견이 시작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남작께서 우리 가문의 저택에 왕진을 와 주셨으면 합니다.”

“왕도까지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제가 치료해야 하는 환자들도 있어서 쉽게 결정할 수가 없지요.”

의외로 빈센트 공자는 쉽게 인정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온 겁니다. 실은 페르디낭 각하께 추천을 받았습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자기도 남작님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죠. 환자는 누구입니까?”

“제 아버지입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가문의 대공자가 움직일 정도의 환자라면 가문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테니까.

그가 가스톤 후작가의 가주라면 납득이 간다.

“어떤 질환입니까? 왕도에 있는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라면 꽤 심각할 거 같습니다만.”

“그게…….”

빈센트 공자가 고개를 숙였다.

깍지 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말하기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 준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아마 들으면 놀라실지도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치유사 일을 하고는 있지만 여러 난치병들을 상대해 왔으니까요.”

“으음. 그것이…….”

신음을 흘린 빈센트 공자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무좀입니다.”

“예?”

“저희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무좀으로 고생을 하고 계시지요. 왕도에서 이름 있는 치유사들도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작님의 도움을 청하러 온 겁니다.”

심각한 병인 줄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 빗나갔다. 준은 잠시 멍해진 표정을 바로잡았다.

“무좀이라. 흔한 질환은 아니군요.”

“먼 옛날 전쟁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고생하다 걸리신 거라고 합니다. 최근 재발했는데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고 계시지요.”

예상치 못한 병명에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찾아온 마이더스 상단의 알파가 탈모와 무좀을 거론한 장면이 떠올랐다.

‘혹시 가스톤 후작가가 접촉해 올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려 준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때는 본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분명 왕도에 있는 고위 귀족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으니까.

빈센트 공자의 어조가 조금 더 절실해졌다. 준이 고민하고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무좀이라고 해서 가볍게 보실 수도 있겠지만 모쪼록 남작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심한 무좀은 삶의 질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지요. 사교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지 않습니까? 심하면 춤을 추기 어려우니까.”

“제대로 보셨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지요. 춤을 좋아하시는데 자꾸 가려움과 통증이 있어서 생각대로 안 되시는 모양입니다. 악취도 심하고.”

“잘 알겠습니다.”

오히려 무좀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을 다투는 심각한 질환이었다면 당장 누아 마을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조만간 왕도로 갈 일이 있을 겁니다. 그때 각하를 뵙고 진료를 하도록 하지요.”

“그 시기가 언제가 될까요?”

“글쎄요.”

준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듯이 정보를 하나 흘렸다.

“마침 왕도에 저택을 하나 구하고 있습니다. 행정관이 조금 고생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일이 처리되는 대로 한번 가 보려고 합니다.”

“저택을요? 알겠습니다.”

빈센트 공자가 제대로 정보를 잡은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말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왔는데 이렇게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완고한 분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걱정했습니다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요.”

“진료비는 섭섭잖게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이신 일도 도움을 드리도록 하지요.”

“든든하군요.”

가스톤 후작가에서 보증을 서 준다면 폴링이 그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를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경매를 열어도 좋고 말이다.

“그런데 진료비 말입니다만. 조금 다른 걸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거라 하시면?”

빈센트 공자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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