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역습 (1)
왕도 진출을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얼마 전 루치아가 했던 말이 생각났을 뿐이다.
그녀는 왕도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바람을 쐬고 싶다면서.
멋대로긴 했지만 자신을 위해 신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계에 강림한 그녀였다. 그 정도 소원은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기왕 왕도에 갈 거면 제대로 가는 게 좋겠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준은 관광 차 한번 다녀오는 것보다 그곳에 거점을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상비약 판매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또 금광 개발 사업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왕도에 거점을 세워 두면 분명 필요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그럴듯한 저택 하나 정도는 구입해야겠어. 금괴를 당장 쓰기는 그러니, 다이아몬드를 몇 개 팔아야겠군.’
이곳엔 호화찬란한 저택이 필요 없다.
하지만 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여러 일과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보여 줘야 하는 패들이 있어야 한다. 저택의 규모가 바로 그런 것들 중 하나다.
‘그리고 내부에 포탈을 설치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한다면 재미있겠군.’
믿을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포탈을 이용하게 한다면 효율은 극대화될 것이다.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준의 부재였다. 만약 포탈을 이용할 수 있다면 부재로 인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순식간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 모든 일을 진행할 적임자가 바로 폴링이다.’
풍부한 교양과 학식, 그리고 예절까지 갖춘 그라면 왕도에서 엘누아르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준은 잠시 빠져 있던 생각에서 벗어났다. 곁에 있던 바이런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놈들의 생포 계획은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사이먼은 마나 유저라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거기에 마법사가 가세했다면 더더욱 어렵겠지요.”
“계속 방해를 하면서 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겁니다.”
“극단적인 선택이라 하시면?”
준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으로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 의미를 눈치챈 바이런이 깜짝 놀랐다.
“설마 영주님 스스로를 미끼로 삼으려는 겁니까?”
“쉿.”
준은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바이런이 침착하게 입을 다물었다.
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제가 죽는다면 엘누아르 영지가 다시 백작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들은 분명 저를 해치려 들 겁니다.”
“하지만 백작은 영주님을 아끼지 않습니까? 사우던 가문의 은인이라 생각할 텐데요?”
“부와 명성을 위해 혈육끼리도 칼을 겨누는 세상입니다. 아마 지금쯤 계산이 끝났을 겁니다. 제 치유술을 이용하는 것보다 금광을 차지해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게 더 이익이라고.”
“그럴 수가!”
바이런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하지만 준의 말은 옳았다. 으레 귀족들이란 이익이 되는 일에 물불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왕실의 검으로 활약할 때도 여러 번 봐 왔던 일이다.
무엇보다도 준에게 연고가 없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혼인으로 얽혀 있거나 어느 명문가의 자제라는 배경이 있다면 쉽게 건드리지 못할 텐데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미끼가 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어떡합니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단장님께서는 지금까지 해 왔던 걸 그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준의 눈빛은 확고했다. 완고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이런도 한발 물러서게 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을의 미래는, 아니. 우리 모두의 미래가 영주님께 달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전 이만 돌아갈 테니 수고하십시오. 아마 곧 놈들이 움직임을 시작할 겁니다.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준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날 밤, 누아 마을로 침투한 미꾸라지들이 드디어 움직임을 시작했다.
* * *
로브를 뒤집어쓴 두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저 멀리 떨어진 금괴 창고를 차분히 응시했다.
“여전히 두 놈뿐이네요.”
“이상한데? 금괴가 쌓이고 있을 텐데 방비가 너무 허술하다.”
창고의 입구를 지키는 건 기사단원 두 명뿐이었다. 오늘 채굴된 금광석과 제련된 금괴가 엄청나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인원이었다.
그때, 순찰조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도 두 명이었고, 인영들이 이미 확인한 전력이었다.
“순찰조도 두 명. 전력이 늘어난 것 같진 않네요. 이봐요. 근데 왜 그렇게 옆에서 자꾸 버둥거려요?”
“젠장. 답답해 죽겠군. 뭔 놈의 벌레들이 이렇게 많아?”
체구가 큰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그는 사우던 가문의 제2기사단장 사이먼이었다.
그는 여전히 인피면구를 쓰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근처 동굴에서 며칠 몸을 숨기고 나온 터라 온몸이 흙과 먼지로 엉망이었다. 당연히 씻지도 못해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기린이 눈매를 좁히며 사이먼을 노려보았다.
“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잖아요.”
“고작 네 명이 저 큰 창고를 지키고 있는데 더 살필 게 뭐가 있어? 어디 슬쩍 개구멍을 뚫어서 들어가면 그만이겠구만.”
“쯧.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더니.”
“뭐라고?”
사이먼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상급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린은 언제나 이렇게 무례하게 굴었다. 마법사들이 대개 그렇듯.
한숨을 내쉰 기린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분히 설명했다.
“잘 들어요. 네? 상대 진영에 마법사가 있기 때문에 창고에 어떤 장치를 해 뒀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확인하는 거고.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알았으니까 서둘러라. 오늘은 꼭 창고 내부로 들어가서 뭐라도 좀 확인을 해야 해. 영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
“그러죠.”
기린이 눈을 감고 다시 마나를 일으켰다.
그녀가 마나를 다루는 손길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얇은 마나를 사방으로 날려 위험 요소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때, 날아가던 마나의 조각이 무언가에 의해 튕겨 나갔다.
흠칫 놀란 기린이 눈을 부릅떴다.
“음? 뭔가 있나?”
“누군가의 마나가 있어요. 결계나 다른 마법이 있나 살펴봤는데……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하네요.”
“혹시 경보가 울린 거 아닌가?”
다급하게 속삭인 사이먼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그만두었다. 보초를 서는 기사단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닌 거 같군. 일단 뭐가 있는지 계속 확인해라.”
“알았어요.”
기린이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다시 얇은 마나 조각을 사방으로 뿌렸고, 어디에서 어떻게 부서져 없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사실 경보가 울려야 했지만, 기린은 수완을 발휘했다. 감시망에 마나가 닿자마자 눈 녹듯 사라지게 해서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마에 땀이 한가득 맺혔을 때, 기린이 손을 거뒀다.
“어떻게 됐나?”
“감시망이 있어요. 창고를 완전히 보호하고 있네요. 누군가 접근하면 경보가 울릴 거예요.”
“젠장! 뚫을 수 없나?”
기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그렇게 무력하게 포기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이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뭔가 차원이 다른 감시망이었어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어요. 대단한 마법사가 있는 게 분명해요.”
“누아 마을에 마법사는 딱 둘이다. 촌장과 여자 꼬맹이뿐이지. 둘 다 그리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야. 촌장은 늙었고, 꼬맹이는 병약해서 죽다 살아났다더군.”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죠.”
“무슨 소리냐?”
“원래 마법사는 은둔 생활을 좋아해요. 은거 고수가 있을지도 모르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이먼은 분노를 잠재우고, 침착하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감시망이 사라지는 때를 노려서 진입하는 방법은 없나? 인부들이나 외부 사람들이 들어갈 때는 감시망이 작동하지 않을 거 같은데.”
“한번 확인해 보죠.”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야간 근무를 마친 광부들이 수레에 금광석을 싣고 나타났다. 그들은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창고로 향했다.
“엄청난 양이군! 강준 이 자식, 금방 부자가 되겠어.”
“자, 이제 확인해 볼게요.”
광부들이 창고에 가까워지자 기린이 다시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마나가 쏟아졌다.
창고의 문이 열리고 광부들이 수레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분위기가 좋았다. 채광된 광석의 품질도 좋고 양도 많아 다들 축제 분위기였다.
“어이, 형씨. 오늘도 맥주 한잔해야지?”
“그걸 말이라고 해! 오늘은 내가 산다! 가자!”
“후딱 끝내죠!”
광부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들이 작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기린이 팔을 거두고 눈을 떴다.
“어때?”
“저들이 들어갔다 나와도 감시망이 꺼지질 않네요. 아무래도 상시 감시망인 것 같아요. 마법진일 수도 있고, 다른 장치일 수도 있죠.”
기린이 혀를 찼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감시가 철저했다. 창고에 기사단원이 왜 저렇게 적게 배치되었는지 이해가 갔다.
“흐음. 그럼 원인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건가.”
“그렇죠.”
“감시망이 튼튼해서 창고에 접근도 못 하고 있습니다, 주군. 이렇게 보고서를 올리면 어떻게 될 거 같나? 그냥 엿 되는 거야. 어?”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죠. 난 용병이니까. 책임자라는 말의 뜻을 잘 생각해 보시죠.”
어떻게 저렇게 재수가 없을 수 있을까. 사이먼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이먼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기린도 머리를 굴렸지만, 사이먼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는 뭔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뒤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이먼이 방법을 찾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엿될 수밖에 없는 건가. 일단 이곳에서 철수하는 게 좋겠군. 시간을 너무 끌었다.”
“그러시죠.”
그렇게 두 사람이 돌아선 바로 그 순간, 눈앞에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헉!”
사이먼은 반사적으로 검을 꺼냈다. 기린은 두 팔을 벌려 마나를 손에 모았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눈앞에 나타난 검은 인영은 지팡이를 쥔 채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누구신가요?”
“그러는 넌 누구냐?”
“전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약초를 캐러 다니고 있는 중이었어요. 누가 있는 것 같아서 한번 와 봤어요.”
순진하고 귀여운 마리의 말투에 사이먼의 경계심이 흩어졌다. 기린도 마찬가지였다. 순박한 마리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였다.
“휴우, 놀랐군.”
한숨을 내쉰 사이먼이 검집을 검으로 회수했다. 기린도 마나를 풀었다.
“우린 보물 사냥꾼이야. 이 근방에 동굴이 있는데, 조사를 하다가 잠시 나왔지.”
“그러셨군요. 보물을 찾으셨나요?”
“아니. 아직.”
사이먼이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주물렀다.
“혹시 팔을 다치셨나요? 다친 곳이 있다면 제가 봐 드릴게요. 응급처치 키트와 간단한 약을 가지고 있어요. 효과가 좋아요.”
“괜찮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해서. 또 보자. 꼬맹아.”
“조심히 가세요.”
두 사람이 마리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마리는 무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우우우웅!
마리의 지팡이 큐브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엄청난 양의 마나가 지팡이로 모여들었다.
“뭐야?”
눈을 부릅뜬 기린이 몸을 홱 돌리려 했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꽈르르릉!
그들의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