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왕도 진출을 위한 초석
“아이쿠, 영주님!”
호프만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준이 엘누아르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생명의 은인이기에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준은 사이먼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호프만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낮엔 조금 뜸한 편입니다. 대신 밤엔 아주 정신이 없지요. 겨울에는 건축 인부들 때문에 난리였는데 요즘은 광부들이 저를 아주 괴롭힙니다. 허허허!”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연이은 사업 덕에 매출이 많이 올랐으니까. 외부 자본이 유입되면서 상업도 많이 성장했다.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요즘 아플 일이 없다 보니 뵈러 가기도 어려워진 것 같아 아쉽네요.”
“오히려 좋은 일이지요. 참, 보내 주시는 간식은 잘 먹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특히 이 친구가 아주 좋아합니다.”
준은 손으로 릴리를 가리켰다. 릴리가 귀엽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호프만이 관심을 보였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혹시 따님……은 아닐 테고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이번에 우리 가문에 새로 온 시종입니다. 마리의 후임이지요.”
“아! 그렇군요. 예전에 하룬에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반갑다. 얘야.”
“안녕하세요? 릴리라고 해요. 매번 간식 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그게 다 영주님 덕분이란다. 영주님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었겠지. 배에 있는 큰 혈관이 터질 뻔했는데 깨끗이 고쳐 주셨거든.”
“와아~”
릴리는 처음 듣는 일인 양 놀라는 척을 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좀 귀찮았다. 준이 알고 있는 일은 대부분 릴리도 알고 있었으니까.
복부대동맥류 시술을 받아 목숨을 건진 이후로 호프만은 정기적으로 진료소에 빵과 쿠키 등 직접 만든 간식을 보내 주고 있었다.
사실 그런 비슷한 일은 종종 있었다.
준에게 크고 작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먹거리나 생필품을 진료소로 보내 주곤 했던 것. 이곳이 시골 마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주님과 진료소 사람들이 열심히 애써 주고 계신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도리가 아니지. 앞으로도 간식 많이 보내 줄 테니 걱정 말거라.”
“헤헷. 감사해요. 사양하지 않고 많이 먹을게요.”
“허허허! 당돌한 녀석이군. 근데 영주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때마침 준은 다시 사이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시선을 피한 채 술을 홀짝이기만 했다.
피식 웃은 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호프만을 주목했다.
“가볍게 산책 중이었습니다. 괜찮으면 점심 식사를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
“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좋은 고기가 들어왔는데 맛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지요.”
“고맙습니다.”
사실은 이질적인 마나가 느껴져서 한달음에 날아온 것이었다. 기린이 사이먼에게 살기를 품었던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준은 이미 그 두 사람의 정체를 간파한 상태였다.
사이먼이 쓴 인피면구는 준의 경지에 빗대어 보면 조잡한 수준이다. 그리고 기린은 자신의 마나를 완벽히 숨기고 있다고 착각했다.
‘백작이 생각보다 빨리 부하들을 보냈군. 적어도 서신 하나 정도는 보내고 나서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아무튼 마법사까지 동원할 정도라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야.’
그때, 릴리가 끼어들었다.
― 그냥 확 조지죠? 인피면구 뜯어 버리고 추궁하면 재미있겠는데.
‘그걸로 증거가 될 순 없다. 저놈들을 더 궁지에 몰아야 해. 그래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 가만 보면 마스터도 은근 가학적인 취미가 있다니까?
‘칭찬으로 들으마.’
피식 웃은 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이 거의 없어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좋은 자리가 많았지만 준은 굳이 사이먼과 기린이 앉은 테이블 옆을 선택했다.
“처음 보는 분들이신데,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준이 붙임성 좋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기린은 힐끔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궁벽한 곳의 영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만한 자존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그런 그녀의 무개념적 행동이 사이먼을 난처하게 했다.
‘망할 년. 방심은 필패의 지름길이라고 나불대더니!’
이번 임무의 핵심 인물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의심받을 짓을 하다니. 이곳을 나가는 대로 그 오만함을 한번 짓밟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이먼이 대신 답했다.
“저희는 동쪽 대륙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멋진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죠.”
“보물 사냥꾼이십니까?”
“예.”
“잘됐군요. 저는 보물 사냥꾼들의 무용담을 아주 좋아합니다. 진귀한 보물들에는 그만큼 진귀한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법 아닙니까?”
준이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사이먼은 그 관심이 부담이 되었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준이 재차 말을 걸어 온 탓에 실패했다.
“이름이 뭡니까?”
“쿤입니다. 이쪽은 에딘. 제 동료입니다.”
“반갑습니다.”
판이 제대로 깔렸다. 준의 눈이 반짝 빛나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분은 아까부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군요. 혹시 말을 못 하십니까?”
“뭐라고요?”
예상대로 기린이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격렬하게. 준은 일부러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다 벙어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불쾌하군요.”
“이봐! 엘누아르의 영주께 무슨 말버릇이야?”
사이먼이 크게 꾸짖자 준이 괜찮다며 그를 말렸다. 오히려 준은 기린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치유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딘 씨의 상태에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혹시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해서.”
“그러셨군요. 하지만 호의도 상황을 봐가면서 베푸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린은 여전히 고압적으로 행동했다.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자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맹신한 결과였다.
덕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준은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그런데 쿤 씨. 제가 엘누아르의 영주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여기 주인장이 영주님이라고 하기에.”
“그건 제 이름이 영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들 영주님이라고들 부르죠. 특이한 이름이죠?”
“예?”
사이먼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 켈세타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를 본 적이 있으니까.
대체 무슨 속셈일까?
자신이 알기로 준은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장난을 치고 있으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전 엘누아르의 영주가 맞습니다. 보물 사냥꾼분들을 만나 반가워서 들떴나 보네요.”
“특이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영주님답지 않게 소탈하신 면도 있는 것 같고 말이죠.”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언제 시간 괜찮으시면 진료소로 오십시오. 차 한잔하면서 여러분들의 무용담을 듣고 싶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사이먼이 먼저 일어났고 기린도 그의 뒤를 따라 주점을 나섰다.
이제 홀엔 준과 릴리만이 남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기사단장과 마법사. 꽤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그만큼 백작의 계획이 치밀하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뭔가 일을 저지를 게 분명해.”
“금광 때문이겠죠?”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군요. 먼저 조지는 건 어때요? 선빵필승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괜히 놔뒀다가 누가 피해라도 보면 우리만 손해인데. 저 여마법사는 5서클 정도 되어 보이던데요.”
“괜찮아. 이 마을에 들어온 이상 놈들은 이미 함정에 빠진 거나 다름이 없지. 잠자코 기다려 보자고.”
팔짱을 낀 준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켈세타에서 온 불청객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위성으로도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고 마리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
“선생님. 환자분들이 더 안 계셔서 오전 진료는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그래요.”
“고생하셨습니다.”
“잠깐만.”
준이 부르자 견습 치유사가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점심시간에 외출을 할 겁니다. 오후 진료 시간 전에 돌아올 테니 내가 없더라도 환자 접수는 받아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마차를 준비할까요?”
“괜찮아요.”
꾸벅 인사한 견습 치유사가 밖으로 나갔다.
준은 책상을 간단히 정리한 뒤 진료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채굴 작업이 한창인 금광이었다.
기사단장 바이런과 폴링이 현장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채광이 이제 막 시작된 터라 안전사고 등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았다. 특히 기사단의 전력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거래할 상단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 당분간은 창고에 금괴와 금광석을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엘누아르의 기사단원들은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당직을 서고 있었다.
“고생들 많으십니다.”
준이 한창 대화가 오가는 그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영주님!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왔습니다. 작업 현황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는 별문제는 없습니다. 아, 하나 문제가 있긴 하군요.”
일단 거기까지 말한 폴링이 들고 있던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정확한 수치를 확인한 뒤 다시 준에게 보고했다.
“채광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제련소에서 생산량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예상치보다 두 배 정도가 채굴되고 있지요.”
“곡괭이에 마법을 건 효과가 확실히 있는 것 같군요.”
“마리 사무장은 정말 천재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걸까요?”
마리는 공격 마법과 생활 마법을 적절히 응용해 채굴력을 높이는 마법을 곡괭이에 부여했다. 덕분에 광부들은 보다 가볍고 강력하게 곡괭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인부들에게 전에 나눠준 인식패를 꼭 지니고 다니라고 강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거래할 상단은 정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마이더스 상단의 지부장이 다녀갔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아직 마이더스 상단에서 온 소식은 없습니다. 계약은 천천히 해도 됩니다.”
“하긴. 이런 일은 급한 쪽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지요. 어지간히 급하긴 했나 보군요. 지부장이 직접 움직이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인데.”
“폴링 님!”
그때, 광부 하나가 폴링을 찾아왔다. 폴링은 양해의 말을 남기고 광부와 함께 임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바이런과 단둘이 남자 준이 본론을 꺼냈다.
“아무래도 켈세타에서 미꾸라지 몇 마리가 숨어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호프만 씨의 가게에서 만났었지요.”
“누굽니까?”
“제2기사단장 사이먼. 그리고 여마법사도 하나 있었습니다.”
“사이먼 경이요? 이상하군요. 그가 왔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었는데.”
“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물 사냥꾼 행세를 하고 있더군요.”
“거기에 마법사까지.”
바이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사우던 가의 기사단장이 움직였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마법사까지 껴 있다면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바이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 백작이 무슨 흉계를 꾸밀지 알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니. 경계 수준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너무 꽉 조이면 함정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생포할 생각이십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폴링 씨의 마음을 우리 쪽으로 돌릴 수 있을 겁니다. 백작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될 테니까.”
“확실히 그 친구라면 엘누아르 가문의 가신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요. 정말 대단하더군요. 경험도 풍부하고.”
“하하하. 저도 그렇게 처음부터 잘 봐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흠흠.”
멋쩍게 헛기침을 하는 바이런의 모습을 보며 준은 소리 없이 웃었다.
사실 이번 계획은 폴링을 빼 오기 위한 큰 그림이기도 했다.
왕도 진출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