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눈 내리던 어느 날
파비안 남작은 누아 마을 진료소에 머물며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아그네스는 전보다 깔끔한 문장으로 차트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파비안 남작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치유술이 아니었다. 바로 작법. 그는 속성으로 실용 작법을 아그네스에게 전수해 주었다.
“문장은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의미 없이 떠드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짜증 나지?”
“맞아요. 우리 진료소에도 그런 애가 한 명 있죠.”
“왠지 이름을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군. 아무튼 문장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은 상대방에게 큰 실례가 되기도 하지.”
“내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특히 차트를 쓸 때는 병명이나 증세가 정확해야 하니까요.”
먼저 배움을 청한 건 아그네스 쪽이었다.
켈세타 성의 진료실에서 연수를 받을 때 차트를 둘러보고 많이 놀랐던 탓이다.
지금까지는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간단하고 핵심을 찌르는 문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진료소 직원에게 들었다. 파비안 남작이 꽤 근사한 문필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떤 책을 읽었느냐도 중요하지. 분야를 가리지 말고 기회가 되는 대로 읽도록 해라.”
파비안 남작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 주었다.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교양서를 선물한 것이다. 책이 귀한 곳이라 아그네스는 감사히 받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강준 선생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좀 더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환자에게 약을 과하게 쓰면 어떻게 되지?”
“독이 되니까 환자가 위험해지죠.”
“배움도 마찬가지다. 사실 세상 모든 일도 그렇지.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파비안 남작은 문장론 강의를 마치면 늘 준과 철학이나 자연과학, 혹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비안 남작이 대화를 주도했고, 준은 짤막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정도였다.
대신 마법과 마법공학을 주제로 한 대화에서는 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학자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궁금한 것은 즉시 물었다.
“마법공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니? 믿을 수 없군요.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사와 마법사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의 마법공학 수준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마법공학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요. 천재 한 사람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리도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 사람은 학문적 유대감을 나누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종국에는 정기적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로 합의했다. 나중에는 동료를 더 모아 ‘살롱’을 개최하기로 정했다.
한편 상대적으로 소외된 하룬을 보듬은 것은 다름 아닌 루치아였다.
그녀는 ‘잉그바르식 쾌검술’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붙인 검술을 하룬에게 전수해 주었다. 준에게 검술을 배우지 못해 좀 아쉬웠지만, 하룬은 그녀의 가르침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른 아침.
처음 이곳에 찾아왔던 그때와 똑같은 의복을 걸친 파비안 남작은 짐을 챙겨 진료소를 나섰다. 날씨를 확인한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 눈이 오는군요. 첫눈인가요?”
파비안 남작이 모자를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솜털 같은 작은 눈발이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는 손님의 배웅을 나온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하얀 눈송이가 투명한 물로 변하며 전하는 차가운 감촉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동시에 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이후로 처음 맞는 눈이었다. 전쟁터에서, 혹은 지옥 같은 곳에서 맞는 눈과는 그 느낌 자체가 달랐다.
“아마 첫눈일 겁니다. 그렇지?”
준이 묻자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저도 새롭군요.”
“하하하.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라…… 내가 보기에 경은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친화력이 보통이 아니던데요?”
“치유사가 지녀야 할 미덕 중 하나일 뿐이지요. 환자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면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니까요.”
준은 겸양을 표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남작님. 이곳은 산골이니 눈이 쌓이기 전에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아쉽습니다. 정말로. 일주일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일주일은 드뇌르 백작이 정해 준 기한이었다.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기한 내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처음엔 그 명을 어기려 했지만, 준이 잘 타일렀다. 앞으로도 만날 일은 많을 거라고 하면서.
“왠지 끈끈해진 것 같은데요. 저 두 분.”
“그러게. 동료가 아니라 친구가 된 느낌.”
“부러워요. 나도 저런 친구 하나 만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도요.”
두 귀족의 대화를 지켜보던 루치아와 제자들이 각각 소감을 밝혔다. 그들은 둘의 관계가 보다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루치아의 말대로 나이 차가 있음에도 마치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진정한 고수끼리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한 관계이기도 하니까.
그때, 마부가 파비안 남작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고했다.
“나리. 눈발이 굵어집니다. 어서 출발하시는 것이…….”
“알겠네. 준비하게. 그럼 강준 경. 또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파비안 남작은 두 손으로 준과 악수를 하곤 마차에 올랐다. 그때 아그네스가 달려와 작은 목제 상자를 그에게 건넸다.
“제가 어제 만든 종합감기약이에요. 날씨가 추우니까 기침을 하시거나 몸이 안 좋아지시면 한 알씩 드세요.”
“고맙구나. 틈틈이 편지를 보내라. 문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마.”
“답장은 꼭 해 주셔야 해요?”
“하하하! 녀석, 많이 늘었구나.”
파비안 남작은 아그네스의 손을 꼭 잡아 주고 마차의 문을 닫았다.
차창 너머로 그가 손을 흔들자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아의 의료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비안 남작을 전송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 같아요.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에요. 아, 좋다. 때마침 눈도 오고.”
아그네스는 팔을 벌리며 마당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마리가 따라다녔다. 아직은 소녀티를 벗지 못한 두 사람을 보며, 준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하룬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하룬. 넌 저기에 끼지 않는 거냐?”
“제가 애들도 아니고 저러고 유치하게 놀겠습니까? 어휴, 부끄러워.”
“너도 애들 중 하나야, 인마.”
준이 안으로 들어갔다. 루치아도 함께. 직원들이 첫눈의 기쁨을 즐길 수 있도록 두 사람은 조용히 진료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예상대로 눈발이 더욱 굵어졌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수북이 쌓였다.
준비를 모두 끝낸 준이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만! 그만하라고!”
하룬이 도망 다니고 있다.
어느새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그네스와 마리가 눈뭉치를 하룬에게 신나게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에라! 나도 몰라! 다들 각오해!”
하룬이 큼지막한 눈덩이를 날렸다. 아그네스의 얼굴에 맞으려는 찰나, 눈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자연 현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마리, 너! 치사하게 마법을 쓰는 게 어디에 있냐?”
“억울하면 오빠도 마법 쓰세요.”
“쳇!”
그렇게 하룬은 한참이나 두 소녀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준이었다. 그가 창문을 열었다.
“얘들아. 곧 진료 시간이다. 슬슬 준비해야지.”
“앗, 정말요?”
너무 신나게 놀았는지,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재빨리 진료소로 들어왔다.
그런데 마리는 들어오지 않고 눈밭에 섰다.
그녀가 손에 마나를 일으켰다.
우우웅!
순식간에 둥그런 눈뭉치를 두 개 만들었고, 큰 것을 아래로, 작은 것을 위로 세웠다. 나뭇가지 두 개로 팔을 만들고, 단추로 눈을, 당근으로 코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쓰고 있던 털모자를 머리에 씌워 주었다.
멋지게 완성된 눈사람을 한번 살펴본 마리는 해맑게 웃고는 진료실로 뛰어 들어갔다.
「완전 애기네. 어쩜 저렇게 만들 생각을 다 할까?」
“성장이 빨랐던 만큼 성격에도 간극이 생겼을 거야. 때론 저런 모습도 나쁘지 않지.”
「그건 그렇죠. 왠지 좋네요. 눈 내리는 진료소도…….」
어느새 나타난 릴리도 날개를 파득거리며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눈 내리는 진료소도 썩 나쁘진 않지.
싱긋 웃은 준은 아무도 모르게 눈사람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오잉? 저 눈사람 방금 웃은 거 같지 않아요?」
하지만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온 환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 * *
한없이 내리던 눈도 저녁 무렵 눈발이 약해졌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그 무렵 왕도에선 연회가 한창이었다.
페르디낭 후작이 주최한 정기 연회였다. 그의 명성을 증명하듯, 연회장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왕도와 왕국에서 한가락 하는 자들이었다.
오늘의 주인공 페르디낭 후작은 초로의 남자였는데, 키가 크고 정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여인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사교계의 황제답게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후작의 시종이 재빨리 연회장을 가로질러 안으로 뛰어왔다.
“각하.”
감미로운 말로 상대를 공략하던 페르디낭 후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방해하지 말라고 했거늘.”
“그 웬만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음?”
시종이 편지를 건넸다.
편지지 구석에서 반가운 이름을 확인한 페르디낭 후작은 젊은 여인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잠시 실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너무해요! 절 혼자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가셔도 되는 거예요?”
“침실에서는 그러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길.”
돌아선 페르디낭 후작이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쯧,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란.”
그는 잠시 무대를 이탈했다. 그리고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 친구, 뭔가 대단한 발견을 했나 보군.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다니. 하하하. 이게 얼마만의 일인지.”
페르디낭 후작이 내용에 집중했다.
그렇게 잠시 후.
“로가리듬의 법칙?”
실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왕립학술원 총회를 열고 수많은 학자들을 초빙해 토론할 가치가 있었다.
“강준 준남작이라. 누아 마을의 치유사가 바스티엔 공자의 그 불치병을 치료했다고? 믿기지 않는데.”
그러나 자신의 오랜 친구는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페르디낭 후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아 마을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그런 시골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치유사가 활약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흥미로운 법이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뭔가 냄새가 났다. 바로-
“대박의 냄새가 나는군.”
곱게 편지를 접은 페르디낭 후작은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젊은 여인은 무대에 서서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칼렌. 오랜만에 외출을 좀 해야겠는데.”
“하명하시지요.”
“켈세타로. 지금 당장.”
꾸벅 고개를 숙인 시종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페르디낭 후작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윙크를 한 다음, 조용히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