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완치 판정
켈세타에서 떠난 마차가 밤늦게 누아 마을에 도착했다. 마차 안에는 파비안 남작이 타고 있었다. 밤새 달려왔지만 그의 두 눈은 별처럼 빛났다.
마부가 잠시 마차를 세웠다.
“나리. 일단 여관으로 뫼실까요? 밤이 늦었습니다만.”
“바로 진료소로 가자.”
“알겠습니다.”
마부는 마차에 달린 랜턴을 다시 조정하고는 마차를 움직였다.
본래라면 다음 날 찾아가는 게 예의였지만, 지금은 결례를 해서라도 준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이 어마어마한 발명의 실체를 확인해야 한다.
과연 로그 계산법이 그의 손에서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는 일반화된 계산법인지를.
파비안 남작은 준이 놓고 간 소논문의 표지를 쓸어 만졌다.
‘만약 로그 계산법이 강준 경의 작품이라면?’
파비안 남작의 머릿속에서 흥미로운 전개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이대로 이 위대한 발견이 묻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지식의 전파와 공유, 그리고 민중 계몽에 관심이 있는 그였다.
아직 사업을 펼칠 만한 단계까진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런 입장에서 이런 새로운 발견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틀림없이 강준 경의 작품일 거야. 이런 계산법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지금쯤 편지가 왕립학술원에 도착했겠지?’
파비안은 저택을 떠나기 전 짧은 편지를 하나 썼다. 수학사에 길이 남을 발견이 있다고. 내용을 대충 요약해 왕립학술원장인 페르디낭 후작에게 보낸 상태였다.
페르디낭 후작은 왕국에서 명망 넘치는 귀족으로, 다양한 학술 행사와 교육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사교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기도 했다.
‘아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켈세타 영지로 오겠지.’
평소 그와 친분이 깊은 파비안 남작은, 조만간 켈세타 영지에 페르디낭 후작이 달려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저택에 기약 없이 머물며 기다리겠지.
‘어쩌면 누아 마을로 올지도 모르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편지에 강준이라는 두 글자 이름을 언급했으니까.
또한 편지를 보내며 그는 강준이라는 치유사의 진면목을 상세히 기술했다. 지금까지 일으킨 업적도 모두 적었고.
드르륵―
파비안 남작은 차창을 열고 주변 풍경을 살폈다.
늦은 밤이라 누아 마을 특유의 정경이 보이진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미약하게 빛을 내고 있는 집들이 하나둘 보였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썩긴 아까운 인재다.’
파비안 남작은 굳은 결심을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탄 마차가 진료소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파비안 남작은 마부에게 대기를 지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밀자 딸랑거리며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이미 진료가 끝난 시간이었다.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아무도 없소?”
파비안이 나직이 불렀다. 그때 진료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편한 수면복을 입은 아그네스가 나왔다.
아그네스는 회색 예복과 모자를 갖춰 입은 파비안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얼마 전 켈세타에 다녀온 터라 감이 살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진료가 끝났는데, 어떻게 오셨나요?”
“밤늦게 실례가 많소. 나는 파비안이오. 켈세타의 남작이지. 강준 경을 만나러 왔소만.”
“아! 파비안 남작님. 안녕하세요?”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파비안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 들었던 아그네스였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그네스는 그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작은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밑에 초급 치유술 개론서가 펼쳐져 있었다. 공부 중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선생님을 모셔 올게요.”
“혹시 잠자리에 든 건 아니오?”
“아뇨. 올라가신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깨어 계실 거예요.”
“그럼 부탁하오.”
꾸벅 인사한 아그네스가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은 파비안은 진료실을 거닐며 내부를 살폈다.
오래된 진료소 같은 느낌이었지만, 스캐너나 전기 충격기 같은 새로운 물품들도 보였다. 학자답게, 그는 준이 발명한 마법공학 기계에 관심을 보였다.
잠시 후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게 모두 강준 경 때문이라는 건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발뺌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파비안이 품에서 소논문을 꺼내 보였다. 그제야 준이 미소를 지었다. 준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아그네스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네스가 뜨거운 물로 찻잎을 우리는 사이, 두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떠나는 길에 이런 엄청난 물건을 전해 주다니. 많이 서운했습니다. 적힌 내용에 대해 토론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남작님이라면 분명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일정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준은 파비안 남작의 용태를 살폈다. 다소 지치고 창백해 보이던 안색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나저나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예전에 남작님 연구실에 방문했을 때 우연히 초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생각이 납니다.”
“아, 그거. 20년도 전에 그린 초상화지요.”
“그때와 많이 닮아진 것 같군요. 분위기도 그렇고.”
“그렇습니까?”
듣기 좋은 말이었다.
파비안은 그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때마침 아그네스가 준비해 준 따뜻한 차가 나와, 차향을 즐기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는 열의에 차 있던 시기였다. 젊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무엇이든 파헤치고 밝혀 내길 좋아했으니까.
“확실히 그땐 그랬지요. 자연 현상이나 철학적 상념들을 정리해서 풀어내는 걸 좋아하던 시기였으니까. 남들은 그런 거 해서 뭐 하냐, 그런 말들을 했었는데. 제겐 하루하루가 눈부실 정도로 즐거웠지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굉장히 오래된 일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파비안은 그 생생한 감정이 되살아났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준이 남기고 간 이 소논문 때문에.
“이 로그 계산법은 강준 선생이 직접 창안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오, 역시 대단하군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접근입니다. 혁신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요. 대단해요!”
준은 그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법공학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마법공학의 정수를 담은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복잡한 수학적 연산도 금방 해결할 수 있다.
수많은 차원과 세계를 여행했던 준은 지금 당장에라도 그것을 만들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직은 필요하지 않아 머릿속에만 담아 두고 있다.
“남작님의 연구에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혁신이라는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아요.”
“도움 그 이상이지요! 솔직히 말해 이 논문을 봤을 때 충격이었습니다. 뭔가 잔뜩 굳어 있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지요. 그때 깨달았지요. 내가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틀에 박힌 연구만 하고 있었구나, 하는.”
파비안 남작은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것에 전혀 머뭇거림이 없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이 논문을 보면서 생각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내 연구가, 앞으로 발견해야 할 모든 것들이 미지의 영역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요. 그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 바로 학자의 사명이고. 요컨대, 강준 경의 논문이 나에게 새로운 목표를 선물해 준 것이지요.”
“단지 그것뿐일까요?”
찻잔을 내려놓은 준이 상체를 앞으로 가까이 밀었다. 그리고 파비안 남작을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으음, 사흘 정도?”
“사흘 정도라면 충분한 기간이군요. 그 사이에 두통 발작은 있었습니까?”
“예?”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갑작스레 두통 발작 이야기가 나오자 파비안 남작은 다소 당황했다. 들뜨고 설레는 마음에 전혀 그쪽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준이 괜히 그런 질문을 할 이유는 없었다.
턱을 괴고 가만 생각하던 파비안 남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축하드립니다. 남작님을 괴롭혔던 그 만성 두통은 이제 깨끗이 나은 것 같군요.”
“뭐라고요?”
“두통이나 현기증은 특히 심리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증세입니다. 본인의 한계를 가뿐히 넘으셨으니, 이제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연구를 계속하시면 되겠군요.”
“설마…….”
그렇게 운을 뗀 파비안 남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혹시나 몰라 입을 열었다.
“설마 내 병을 고치기 위해 이 대단한 발견을 담은 논문을 나에게 준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누아 마을의 치유사지요.”
엉뚱한 대답에 파비안 남작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이런 치유사가 또 어디에 있을까.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군요. 오후까지는 진료를 보실 테니, 저녁에 환담을 청하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멀리서 오셨는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요. 아그네스. 남작님께서 머물 만한 빈방이 있나?”
“입원 환자가 없어서 방은 많아요.”
“그럼 좀 부탁하마.”
아그네스가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단둘이 남자 파비안 남작은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경께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왠지 긴장되는군요. 남작님께서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니.”
“실은 경께서 저술한 소논문을 간단히 요약해서 왕립학술원장인 페르디낭 후작께 보냈습니다. 물론, 강준이라는 치유사의 업적에 대해서도 정리해서 넣었지요.”
“일이 꽤 커지겠군요.”
페르디낭 후작은 이름만 들었고 누군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비루나 왕국의 왕립학술원이 얼마나 거대하고 영향력이 있는 단체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일례로 아그네스가 준비하고 있는 초급 치유사 시험도 왕립학술원에서 주관하는 시험이고, 왕도에서 고위 관료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의 수장에게 자신의 업적을 알렸다고?
조만간 왕립학술원에서 공식으로 초청장이 날아올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왕도엔 가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몇 번 가 봤습니다. 왠지 조만간 다시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때는 저와 함께 가시지요. 왕립학술원에 제가 아는 동료들이 많습니다. 물론 페르디낭 각하와도 사이가 매우 가깝지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 선생도 이런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더 큰 곳에서 큰 뜻을 펼쳐 보셔야지요.”
“저는 이곳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비안 남작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부와 명예를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은 환자, 그리고 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서 주셔야지요. 선생의 연구는 분명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고민해 보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왕도 진출은 나중 일로 미뤄 두고 있었다. 이대로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왕실에서도 뭔가 제안이 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 준의 관심사는 신축 진료소였고, 또 카이엔의 치료였다.
몇 가지를 더한다면 아그네스가 초급 치유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 그리고 하룬이 사우던 가의 기사가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한 이후에 왕도로 간다고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그네스가 내려와 방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말했다.
“일단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시죠. 여독은 잘 풀어야 합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 마음이 좋지 못했는데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함께 진료실을 나갔는데, 파비안 남작이 잠시 멈춰서 준을 돌아보았다.
“경은 내 생명의 은인이자 학문적 은인입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든든하군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남작은 준남작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준도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때 아그네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존경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남작님의 차트를 따로 만들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네요. 저도 선생님처럼 모든 환자들에게 존경받는 치유사가 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노력은 때때로 자신을 배신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희망은 다르지. 꿈을 꾼다는 건 즐겁고 행복한 일이야. 그 마음, 잊지 마라.”
아그네스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준이 남긴 말들을 곱씹어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그날 밤, 진료실에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