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동굴 속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 준 일행은 아침 일찍 성을 나섰다. 이번에도 사우던 가의 두 공자가 배웅을 나왔다. 거기에 루드밀라 공녀까지.
“며칠 더 머물다 가면 좋으련만. 사람 붙잡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소.”
바스티엔 공자는 정말 섭섭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 함께 있으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법도 한데, 준과 나누는 대화는 한도 끝도 없었다. 준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그만큼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진료소를 오래 비울 수는 없어서요. 어서 돌아가서 환자를 봐야 합니다.”
“파견된 자들이 잘하고 있을 터인데.”
“염려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 도움을 필요로 할 겁니다.”
볼카누스는 사실 크게 걱정이 안 됐지만, 카이엔 대공이 걱정되었다. 그가 먼저 오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내가 물러서야지. 그간 즐거웠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또 뵐 일이 있기를.”
“자주 놀러 오시오. 이제 선생은 우리 가문의 가신이기도 하니까.”
바스티엔은 아쉬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은 만큼, 다음 만남이 더욱 기다려질 것이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몸이 불편하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그땐 참지 마시고 연락 주십시오.”
“하하하! 든든하군. 선생이 내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꾀병을 부려봐야겠소.”
대공자의 너스레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일행이 하나둘 마차에 올랐다. 준은 오르기 전, 왕진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얼마 전에 완성한 소논문이 들어 있는 바로 그 봉투였다.
“공자님. 괜찮으시다면 이걸 파비안 남작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그런데 이건 무엇이오?”
“처방전입니다.”
“음? 파비안 남작의 치료는 손 놓은 게 아니었소?”
“환자가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병이든지요.”
준의 진심을 느낀 바스티엔 공자는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준은 일부러 파비안 남작에게 미리 소논문을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에게 붙잡혀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만약 파비안이 진짜 학자라면, 자신이 저술한 ‘로가리듬의 법칙’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든 그의 몫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로그 계산법이 이 문명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조심히 가시오.”
준이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이번에도 호위엔 사우던 가의 제1기사단이 책임졌다. 브로그뉴 경이 신호를 보내자 기사단원들이 대오를 갖췄다. 곧 마차가 외성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우던 가의 세 남매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건 두 발로 온전히 서 있던 곰 인형 해피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갸웃한 해피는, 루드밀라 공녀가 아무런 동작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 * *
준 일행이 켈세타에 머무는 사이, 철혈의 대공 카이엔은 마르다 마을을 벗어나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준과 루치아에게 치료를 받은 덕에 마나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각혈은 물론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까 도적놈들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카이엔은 복부에 난 상처를 움켜쥐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는 멎었지만 인간에게 일격을 허용했다는 수치감이 더욱 쓰라렸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몰골을 봤다면 도적들도 못 본 척 넘겼겠지만, 문제는 그가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였다. 인계에 없는 화려한 보석들이었다. 도적들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싸움이 벌어졌다.
몸이 성했다면 손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모조리 없애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의 후유증 때문에 힘겹게 싸워야 했다.
결국 모든 마나를 쥐어짜 내서 도적들을 모조리 해치웠지만, 상처를 입고야 말았다. 급소를 피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건 전부 버려야겠어.’
카이엔은 착용하고 있던 모든 장신구를 뜯었다. 그러곤 하나도 남김없이 호수에 던져 버렸다.
이제 자신을 마계의 대공이라는 걸 증명할 만한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파문을 일으키며 수면으로 가라앉는 장신구를 보니 왠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쿠르르릉!
그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다. 카이엔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다. 비, 혹은 눈이 내릴 징조였다.
‘잠시 피할 곳을 찾아야겠군.’
카이엔은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히 쉴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보다 먼저 겨울비가 쏟아졌고, 미끄러진 바닥을 헛디뎌 흙탕물에 뒹굴고 말았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본다면 거지라고 생각할지도.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카이엔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피신처를 찾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한참을 방황하던 그는 적당한 동굴을 찾았다.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비를 피해 동굴로 들어갔다.
‘춥군. 남은 마나가 거의 없다. 불을 피울 만한 게 필요해.’
카이엔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야영을 한 흔적이 있었다. 좀 더 살펴보니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들이 널려 있었다. 카이엔의 표정에 처음으로 희망이 깃들었다.
그것을 한곳에 모았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몸을 녹일 순 있을 것이다.
카이엔이 손가락을 퉁겼고, 미약한 불꽃이 바닥에 튀었다. 불이 장작으로 점점 번지며 온기를 풍겼다.
‘마계에서 대공으로 군림했던 이 내가…….’
카이엔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거울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의 모습이 대충 어떨지 상상이 되었다.
불이 약해질 때마다 카이엔은 장작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 보니 옷이 모두 말랐고, 몸도 온기를 되찾았다.
쏴아아아―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이엔은 동굴 벽에 기댄 채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오늘은 날이 따뜻해 비가 내렸다.
‘정녕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인가? 아아.’
카이엔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던전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준의 말을 들어야 했다. 조사대가 파견된다면 자신의 힘으론 막을 수 없다.
그때는 내상이 심한 상태였고, 만약 기사나 마법사들이 달려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준과 루치아가 자신에게 치유 마법을 전개한 덕에 마나를 조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내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허무하군.’
그렇게 카이엔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작은 동굴에 숨어 지금까지의 생을 돌아보았다.
마계의 대공이라 칭하며 권세를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전쟁 이후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고향도 잃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 봤지만, 마계로 이어진 게이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부상을 당해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어 찾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분명 마계는 소멸한 거야. 깨끗하게. 모든 게이트들이 파괴되었겠지.’
신마전쟁이 끝났다는 준의 한마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을 살려두면서까지, 스스로가 은퇴했다는 사실까지 밝히며 상처를 치료해 준 그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 눈빛은 분명 진짜였다.’
툭, 툭.
멍하니 있던 카이엔이 흠칫 놀랐다. 동굴 입구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어느새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밖은 구름이 끼어 어둑했다.
장작 몇 개를 더 찔러 넣은 카이엔은 동굴 벽에 기댔다. 상념에서 벗어나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마족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도 몸이 성할 때 이야기였다. 내상에 외상까지 겹친 지금은 충분히 먹고 쉬어 주는 것이 회복에 좋다.
바로 그때.
카이엔의 귀가 쫑긋했다. 멀리서 인위적인 기척을 느낀 것이다.
‘누구지?’
대처하기엔 이미 늦었다. 동굴 안은 타오르는 모닥불로 환해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동굴 밖은 어두웠다. 상대적으로 시야가 공평하지 않은 상황.
카이엔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그 기척이 점점 커지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척의 주인공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카이엔은 다소 안도할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야영 중이십니까? 갑자기 비가 내려서 피할 곳을 찾고 있는데 여기만 한 곳이 없군요. 잠시 쉬어 갈 수 있겠습니까?”
젊은 남자였는데, 그는 놀랍게도 킹스턴의 그레이엄 공자였다. 가문에서 쫓겨난 그는 방랑자 차림으로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요. 마침 불도 있고…… 음?”
그레이엄이 뭔가를 발견하고 카이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카이엔은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부상을 당하셨습니까?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소. 오다가 도적 떼를 만나서…….”
“다행히 몸을 피하신 것 같군요. 아! 저에게 좋은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걸로 일단 치료를 해야겠군요. 이대로라면 상처가 덧날 게 분명합니다.”
그레이엄이 배낭에서 응급처치 키트를 꺼냈다.
그것은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만든 키트였다.
아그네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던 그때, 뒤늦게 따라온 아그네스가 선물로 하나 준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라고 했지만 부상당한 노년의 사내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녀도 그런 마음으로 이 키트를 만들었을 테니까. 그레이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이건 응급처치 키트입니다. 떠날 때 누아 마을 견습치유사분께 선물로 받은 건데 효과가 좋다고 하더군요.”
누아 마을?
카이엔의 기억 속에서 준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 일주일 뒤에 누아 마을 진료소로 와. 낫게 해 줄 테니까.
누아 마을 진료소.
상념을 거둔 카이엔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보답을 할 수 없소. 보다시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괜찮습니다. 상처를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카이엔은 상의를 걷어 상처를 드러냈다. 그레이엄은 키트를 열고 아그네스가 가르쳐 준 대로 약재를 뿌린 뒤에 붕대를 감았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군.”
중급 키트답게 효과가 금방 발휘되었다.
카이엔은 상처의 통증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거두었던 상념이 다시 떠올랐다.
“누아 마을 치유사를 만났소?”
“예. 켈세타 성에서 만났죠. 아주 인상적인 분들이었습니다. 어쩌다 결투를 하다 부상을 입었는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지요.”
그레이엄은 상처가 났던 오른손바닥을 펼쳤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이 아물어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카이엔이 나직이 말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군.”
“역시 연륜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실은 가문에서 쫓겨났습니다. 하하하. 이것도 누아 진료소 분들과 얽혀 있는 일이죠.”
“무슨 사연인지 들을 수 있소?”
“안 될 것도 없죠.”
그런데 그때, 카이엔의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소리에 카이엔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혹시 식사를 못 하신 겁니까?”
“가지고 있던 걸 다 뺏겨 버려서.”
“저런. 그럼 일단 먹을 걸 좀 준비하겠습니다. 이야기는 같이 드시면서 하시죠.”
“아무 대가도 없이 날 왜 도와주는 거요? 이름도 모르는 나를.”
그레이엄은 결투에서 패배한 자신에게 달려오던 아그네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을.
“남을 위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육포 괜찮으시죠?”
“좋소.”
그렇게 두 남자는 모닥불에 앉아 육포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