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64화 (64/175)

64화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사

무슬 대회를 마지막으로 누아 마을의 의료진은 굵직한 일정을 모두 끝냈다.

그러나 아직 남은 일이 좀 있었다. 준은 파비안 남작의 치료를 마무리해야 했으며, 아그네스와 하룬은 각각 연수를 받아야 했다.

준은 바스티엔 공자에게 특별히 청해 아그네스를 성의 진료실에서, 그리고 하룬은 기사단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 정도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바스티엔 공자는 흔쾌히 허락했고, 두 제자는 남은 일정 동안 성에서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에 들어가기 전 아그네스와 하룬은 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의 숙소를 찾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보통은 시녀 한 명이 문 앞에 대기하며 심부름을 보는데, 오늘은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기, 준남작님 안에 계신가요?”

“계십니다만, 지금은 뵐 수 없습니다. 양해를.”

기사의 대답에 두 사람은 살짝 놀랐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지만 마땅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뵐 수 없다뇨?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어요. 아까 대공자께서도 오셨는데 헛걸음을 하셨지요.”

이번엔 시녀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룬은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공자까지 물리치다니?

그래서일까. 아그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키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처음엔 시녀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다녀간 바스티엔 공자가 대공자의 권한으로 기사와 병사를 배치했다. 그를 위해서.

시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다른 일은 아니고, 파비안 남작님을 위한 처방전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처방전을요? 그걸 쓰는데 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선생님 정도면 몇 분이면 끝날 텐데.”

“몇 분이 뭐야. 그냥 그런 거 필요 없이 한번에 낫게 하실 분이지.”

“그건 저도 잘…… 어제 종이를 많이 달라고 하시긴 했어요. 그래서 필기도구와 함께 가져다드렸답니다.”

시녀의 설명에 아그네스와 하룬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많은 종이와 필기도구.

진료소에서 일을 하던 두 사람이었다. 처방전을 가끔 쓸 일이 있긴 하지만, 하루나 걸리고 종이가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하룬이 나섰다.

“일단 알겠습니다. 혹시 준남작님이 나오시면, 저희가 들렀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제 연수를 받으러 가야 했다. 진료실이 더 가까우니 먼저 그곳에 들렀다 기사단에 가기로 했다.

아그네스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치료 방법을 찾으신 모양이야. 그치?”

“켈세타의 명의들도 두 손 들었다던데. 대체 어떻게 진단을 내리신 거지?”

“내일 꼭 물어봐야겠어. 혹시 루치아 선생님도 아실까?”

“모른다에 한 표. 아마 지금쯤 주무시고 계실 거야.”

루치아는 잠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켈세타 성 침대의 안락함을 알게 된 이후로 더욱 늦잠을 잤다.

하룬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거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휴, 긴장돼 죽겠네. 기사단 갔다가 시골 촌뜨기라고 놀림 받으면 어쩌지?”

하룬은 확실히 긴장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검집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까.

전에 켈세타 성에 왔을 때 기사단 견학을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이번은 좀 다르다. 연수니까 실제 훈련에 참가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아그네스는 여유가 있었다.

“실력을 보여 주면 되잖아. 그것 말고 더 확실한 방법이 있나?”

“없지.”

“그럼 잘할 거야.”

“어? 지금 나 실력 좋다고 칭찬해 주는 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행히 눈앞에 성 진료실의 입구가 보였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 먼저 갈게!”

“도망가기냐?”

“이따 봐!”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아그네스가 멈춰 섰다. 늘 그렇듯, 그녀가 들어간 걸 확인하고 자리를 뜨던 하룬이 뭔가 싶어 팔짱을 꼈다.

아그네스가 돌아섰다.

“하룬.”

“왜.”

“그게…… 고마워. 전에 밤새 간호해 줘서.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얘기를 못 한 거 같아서.”

“아. 그거?”

연회가 있던 날, 고열로 쓰러진 그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하룬은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코를 비볐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친구끼리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고맙다는 표현은 돈으로 해야지. 어? 말로만 하지 말고 좀 성의를 보이라고!”

왠지 이런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싫어 하룬이 장난을 쳤다. 아그네스는 정색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먼 옛날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그런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함께 쌓은 추억이 많았다.

하룬이 손을 들었다.

“이따 점심 때 봅시다. 루치아 선생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셨어. 늦지 않게 와. 늦으면 버리고 간다.”

“알았어. 다치지 마.”

“다치면 일 늘어날까 봐 그러냐?”

피식 웃은 아그네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하룬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왜 거기서 돈 이야기를 하고 난리야? 좀 더 멋있는 말을 해도 되는데.”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기사단 건물로 향하는 하룬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욱 경쾌해 보였다.

* * *

다음 날, 준은 소논문 탈고를 마쳤다. 마지막 페이지에 오늘의 날짜와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는 것으로.

「다 됐어요?」

“아직. 제목을 적어야지.”

준은 맨 앞장으로 돌아와 근사한 필기체로 ‘로가리듬(logarithm)의 법칙’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것으로 작업은 완전히 끝났다.

준이 하루 동안 매달린 소논문은 쉽고 빠른 계산을 목적으로 만든 로그표였다.

천문학의 계산 단위는 상당히 크다. 별의 위치나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수십 자리나 되는 숫자를 이용해야 했는데, 로그표를 이용한다면 쉽게 해낼 수 있다.

이 세계에는 아직 상용로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꺼낸 계획이었다.

「연구실에 갔을 때 확실히 숫자 때문에 고생을 한 흔적이 많긴 했는데…… 고작 계산이 쉬워진다고 남작의 편두통이 나아질까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천문학자들의 수명을 두 배나 늘려 줬다는 찬사를 듣는 대단한 발견이었어.”

「그래요? 수알못이라 죄송.」

“이건 일종의 촉매야. 남작은 반복되는 계산과 뻔한 발견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어. 만약 이 논문의 가치를 알아챈다면 다시 열의에 불타오르겠지. 진짜 목적은 바로 그거다.”

「그래서 전에 대공자가 물었을 때 남작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한 거군요!」

“그래. 만약 그가 근사한 학자라면, 분명 두통은 깨끗이 나을 거다. 오히려 젊어졌다는 소리를 듣겠지.”

준은 소논문을 큰 봉투에 넣고 왕진 가방에 넣었다. 이곳에서 돌아갈 때쯤 파비안 남작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은 기지개를 켰다. 배도 고프긴 했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노곤하게 쉬고 싶었다.

준이 시녀를 불렀다.

“목욕물을 좀 준비해 주세요. 차도 한 잔 부탁하고.”

“알겠습니다. 저…… 안에 계신 동안 손님들이 많이 왔다 가셨는데 이제 모셔도 괜찮은 걸까요?”

“얼마든지요. 일은 다 끝났으니까.”

시녀는 이제 살았다,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작을 막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그땐 정말 목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준비에 좀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준은 숙소를 나서 제자들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때마침 모두 모여 있었다.

“선생님!”

다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루치아는 예외였다. ‘믿을 만한 정보통’을 통해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연수는 잘 받고 있나?”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루치아가 대신 답했다. 안 그래도 모여서 연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성 진료실에서 정식으로 영입 제안을 받았고, 하룬은 기사단장 브로그뉴에게 머지않은 미래에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준은 마리가 소외된 것 같아 그녀에게 물었다.

“마리는?”

“공녀님과 인사했어요. 다음엔 같이 재미있는 걸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마리의 신분은 평민이다. 하지만 준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법적 재능을 보여 준다면, 남작위 정도야 무난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잘했다.”

준은 흡족한 표정으로 제자들을 바라봤다. 아직 각자의 영역에서 시작 단계에 있지만, 세 사람은 그 안에 무궁무진한 미래를 담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처방전을 그렇게 오래 쓰셨어요? 병명이 나온 건가요?”

“얘기 안 했어?”

“안 했어요.”

루치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준은 적어도 진료소 직원들에게는 설명을 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파비안 남작을 진찰했을 때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 실제로 뭔가 문제가 있었더라면 남작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을 테니.”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심증은 있었다. 그가 무엇에 어려움을 겪는지 알게 됐으니까. 그리고 연구실에 갔을 때 그가 처한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지. 그래서 그의 연구를 쉽게 만들어 주는 방법을 논문으로 묶었다. 약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효과를 낼 거라고 믿었거든.”

“마르다 마을에서 알렌 선생님께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거네요. 그때 그러셨잖아요. 치료의 단서는 환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환자가 처한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고요.”

“그래. 바로 그거다.”

다른 건 몰라도 치유술에 관한 건 모두 기억하는 아그네스였다. 준은 대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찬가지로 치료의 방법도 약과 마나를 이용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 이렇게 전혀 다른 방법으로도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 병을 약과 마나로만 치료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해.”

“정말…… 선생님은 대단하신 거 같아요.”

“이 정도면 대단한 걸 넘어선 게 아닐까? 상대가 천문학자인데 그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논문을 쓴다는 게 말이 돼?”

하룬의 예리한 추리에 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루치아는 잘했다며 손뼉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그네스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만.”

“저한테요?”

준도 루치아도 아닌 자신에게 손님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켈세타까지 따라온 걸까?

그런데 들어온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무술 대회 직전 소란을 일으킨 킹스턴의 막내 공자 그레이엄이었다.

“다들 모여 계셨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공개적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이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먼저 루치아와 준에게 사과했다.

“그땐 생각이 짧았습니다. 불쾌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일이 커져서 저희도 미안하던 차였습니다.”

“괜찮아요?”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지만, 전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그레이엄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던 날들이 후회됩니다. 이제라도 원점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킹스턴의 공자가 아닌 그레이엄이라는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끊은 그레이엄 공자가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아, 저는 그냥…….”

“마나를 쓰지 못해도, 견습이라고 해도 당신은 훌륭한 치유사입니다. 누아에 계신다고 했지요?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아그네스 선생님.”

꾸벅 인사한 그레이엄 공자가 방을 나섰다.

아그네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아직 치유사 시험에 합격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손에 입은 가벼운 부상을 치료해 줬을 뿐인데.

“가벼운 부상이 아니지.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한 거니까. 잘했다. 아그네스.”

“과연. 하늘이 내린 신의의 제자는 다르네?”

“왠지 결투할 때부터 기분 나쁜 놈이었어요. 마을에 오기만 해 봐라. 콱!”

“언니. 최고.”

아그네스는 환하게 웃었다. 지금처럼, 켈세타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 적이 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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