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23화 (23/175)

23화 조금은 특별한 환자 (1)

「과연 불도마뱀 아저씨가 여기로 올까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릴리는 궁금해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준의 방을 휘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역소환을 하고 싶었지만, 준은 한숨을 내쉬며 참았다.

“그래도 명색이 용족의 로드다. 불도마뱀이라는 표현은 그만둬. 나름 목숨을 걸고 싸운 양반인데.”

「칫, 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아무튼 여기에 올까요? 말까요? 역시 오겠죠? 아니, 마스터가 무서워서 안 오려나? 은근히 겁이 많아서 막 약도 못 먹고 그런 드래곤은 아니겠죠?」

“하룬처럼?”

「헐. 어떻게 한마디로 이 상황을 딱 정리해요? 천재인 줄.」

“말 상대가 필요하면 프레어 불러줄까?”

「죄송.」

그제야 릴리가 잠잠해졌다. 준은 조금 나른한 몸을 일으키곤 기지개를 켰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슬쩍 걷고 밖을 내다보니 두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그네스와 마리였다.

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소녀를 눈에 담았다.

“녀석들. 아침부터 부지런들 하네.”

아그네스와 마리는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빗자루질을 하고 마리는 잡초를 뽑았다.

단 한 명이 늘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더욱 화사해졌다.

그만큼 마리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특유의 강력한 마력이 분위기를 신비롭게 만든 것도 한몫했다.

평소라면 바로 진료실로 내려가 책을 읽거나 상념에 잠겼겠지만, 오늘은 왠지 우두커니 서서 그녀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었다.

일상.

그 단어는 뜻만 대강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말이 언제 쓰이는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릴리가 아니었다.

「마스터. 있죠. 둘 중 고르라고 한다면 누굴 택하실 거예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고르다니?”

「신붓감으로? 아그네스는 확실히 마스터에게 마음이 있는 거 같고, 마리도 조만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마스터의 유니크한 매력에 푹 빠지겠지. 북해빙궁의 빙설화 궁주처럼.」

“관심 없다.”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만약 옆에 있던 게 하룬이었다면 계속 부추겼겠지만, 릴리는 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녀 하나뿐이리라.

루치아.

신의 전령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그녀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걸까?

릴리는 그 질문까지 하진 않았다. 이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루치아라는 이름이 언급된다면 준의 표정이 변할 것 같았다.

「흠흠. 아무튼 마스터도 좀 부지런히 움직여요. 나가서 청소도 돕고 그래야지. 안 그러면 순식간에 배에 튜브 생길지도 몰라요?」

“후덕하고 좋아 보이겠네.”

「진심?」

“하하하하.”

오랜만에 시원하게 준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니 1층에서 내부 청소를 하고 있는 하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준을 보고는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일어나신 거 같네요.”

“어젯밤에 어디 좀 다녀오느라.”

“급환이라도 있었습니까?”

“낮에도 없는 환자가 밤이라고 있을까?”

“하하하! 맞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오랜만에 푹 잤거든.”

실제로 그랬다.

볼카누스를 만나고 나서 준은 오랜만에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만약 상대가 이름도 모르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드래곤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놈의 목숨을 거두었을 테니까.

서로 이름만 아는 사이었지만 한때 같은 목표로 싸웠고, 우연히 이렇게 만났다. 반가운 마음도 있었고 묘한 감정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누아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

몬스터는 눈에 띄게 줄었고, 이제 더 이상 중급 정령들이 당번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 준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혹시 붉은 머리를 한 중년 남자가 찾아온다면 정중히 모셔라.”

“오, 그거 반가운 말씀이네요. 드디어 우리 진료소도 예약 환자가 생겼습니까?”

“아니. 그냥 좀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라는 말에 하룬의 눈이 빛났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는 준의 정체를 놓고 두 가지 가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왕도에서 잘 나가는 귀족가의 아들일 거라는 설, 그리고 왕실기사단 출신의 고강한 무력을 가진 기사라는 설.

전자의 제창자는 아그네스였고, 후자는 하룬이었다.

잘 아는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은 준의 정체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하룬의 눈이 빛난 것이다.

“알겠습니다. 붉은 머리의 중년 아저씨…… 잘 기억해 두죠. 아그네스에게도 말해 둘게요.”

“그래.”

준이 진료실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하룬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 엄청난 소식을 말하지 않고는 입이 간지러워 배기지 못할 것이다.

진료실로 들어온 준은 두꺼운 책을 펼쳤다. 약초학 서적이었다.

그리고 빈 종이를 꺼냈다.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 다음 일을 시작할 차례였다. 준은 약초학 서적의 내용을 인용하며 총 스무 문제를 만들었다.

자신의 시험이 눈앞에 다가온 것도 모르는 아그네스는 하룬과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 * *

“마리.”

찬장에서 약재를 정리하던 마리가 눈을 깜빡이며 돌아봤다. 준이 앞으로 앉으라 손짓했다. 그녀는 얌전한 걸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잠깐 진찰 좀 하마. 손 좀.”

마리가 팔을 뻗었고, 준이 새하얀 피부 위로 손가락을 올려 맥을 짚었다.

박동이 느껴지는 순간 마나를 흘렸다.

금제가 한창일 때는 방해하는 기운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마치 손님을 맞는 것처럼 준의 마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준은 어렵지 않게 마리의 내부를 탐색했고, 심장을 둘러싼 결계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머지 결계가 언제 깨질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도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됐으니 전처럼 뜻하지 않게 박살 나진 않을 거야.’

이미 한 번 시행착오를 겪은 뒤라 준은 다음 단계가 눈에 훤히 보였다. 아마도 마법적인 깨달음을 접하면 결계가 부서질 것이다.

그 정도는 이제 조율이 가능하다.

자신이 직접 그녀에게 마법을 전수하고 있었으니까. 필요하다 싶으면 직접 결계를 부숴도 된다. 마리가 잘 버티기만 한다면.

하지만 마리를 진찰하려는 목적은 이게 아니었다.

준은 심장에 펼쳐진 결계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어제 볼카누스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몰래 흡수한 마나를 일부 섞었다.

우우웅!

강렬한 공명이 느껴졌다. 동시에 마리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야. 볼카누스의 힘이 마리에게 전해진 거로군.’

「그런 일도 가능해요?」

‘초월적인 존재가 차원을 이동할 때 편린이 생긴다. 그게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경우도 간혹 있지. 몬스터에게 들어가면 영물이 되는 거고.’

「휴, 역시 운이 좋다고는 못하겠네요. 그간 고생한 걸 생각하면.」

혹자는 강력한 마나를 얻었으니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준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런 산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만약 자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모든 진찰이 끝나고 준이 마나를 거뒀다.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구나. 기분은 어떠니?”

“아주 좋아요. 아침에 언니랑 청소를 했는데, 그래서 더 좋았어요.”

“잘했다. 적당히 움직이는 것도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오늘은 오전에 마법 연습을 하고 오후엔 부모님을 뵙고 오거라. 많이 걱정하실 테니 틈틈이 다녀오도록 해.”

“그렇게 할게요.”

꾸벅 인사한 마리가 정리를 마저 끝내고 마법 연습을 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특별한 결계를 쳐 놨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마나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을 전용 연습실로 쓰고 있다.

준은 이번에 아그네스를 불렀다.

“선생님. 부르셨어요?”

“시험을 보자.”

아그네스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곧 시험을 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 시험을 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진료가 끝난 이후에나 볼 줄 알았는데.

“왜? 잘 칠 자신이 없나?”

“아, 아뇨. 좀 갑작스러운 느낌이 들어서요. 진료 중인데 괜찮을까요?”

“호프만 씨도 켈세타로 떠났고, 마리도 진찰을 받았으니 더 이상 찾아올 환자는 없겠지. 아침엔 늘 여유롭잖아. 시간은 충분해.”

누아 진료소의 현실을 조목조목 읊으며 준이 시험지를 건넸다.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

심장이 두근거려 글씨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공부를 정말 많이 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준이 한마디 거들었다.

“왜? 그때 머리 쓰는 건 자신 있다고, 닷새면 충분하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럼요! 할 수 있……죠.”

준이 모래시계를 뒤집는 걸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아그네스가 펜을 들었다.

모르거나 확실하지 않은 건 건너뛰고, 아는 것들 위주로 답안을 적어 나갔다.

아그네스는 전에 약초를 캐러 나갔을 때 익숙한 것들을 먼저 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아는 것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확실하지 않은 답들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걱서걱.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아래쪽으로 옮겨졌을 때, 준이 엄숙히 말했다.

“그만. 시간 다 됐다.”

아그네스가 펜을 멈췄다. 아쉬운 표정이 남은 걸 보니 완벽하게 채우진 못한 모양이었다.

준은 즉시 답안지를 확인했다.

잘 쓴 부분도,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을 채웠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 정도면 정말 훌륭했다.

“저…… 어떻게 됐어요?”

“탈락. 정확히 열 문제 맞췄군. 딱 절반이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말걸.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간 잠을 줄이며 해 왔던 노력들이 허사가 된 느낌.

“그래도 이 정도면 초급 치유사 시험에는 붙을 수 있겠어.”

“예?”

“왕립 학술원에서 매년 한 번씩 시험을 치르는 건 알고 있지? 나는 중급 수준의 문제를 냈다. 문제를 절반 정도 맞췄다면 초급 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할 거야.”

울먹이기 직전이던 아그네스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준이 이런 안배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왕립 학술원에서 열리는 시험은 아예 머릿속에 넣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의 밑에서 치유술을 배워 마을 사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럼 저…… 진짜 치유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내년에 열리는 시험에 합격한다면.”

“야호!”

아그네스가 만세를 불렀다.

그녀는 진료실을 뛰어나가더니 하룬을 붙잡고 총총 뛰었다. 하룬은 영문도 모르고 같이 장단을 맞춰 주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싱겁게 웃은 준은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그네스가 미처 쓰지 못한 답안을 마저 채우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훌륭한 교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낯선 남자가 누아 마을에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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