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22화 (22/175)

22화 뒷산의 주인 (2)

주변이 어둑해지며 시야가 돌아왔다. 고개를 든 준은 레어의 내부를 살폈다.

“엄청난 규모로군.”

「그러게요. 보통 도마뱀이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정도면 로드급이려나.」

동굴 입구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거대한 레어. 그러나 이곳에 방문한 준은 감상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여기 주인이 불도마뱀인가 봐요. 어휴, 완전 찜통이네.」

바닥 아래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만약 이곳에 누군가 발을 내디뎠다면 그 자리에서 타올랐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적당히 강한 자의 기준이었다.

준으로선 해당 사항이 전혀 없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가는 곳곳에 용암이 치솟아 오르며 준을 위협했다.

분수처럼 치솟는 용암의 향연.

그러나 용암은커녕, 그 증기도 준의 옷깃조차 건들지는 못했다. 옆을 따르던 릴리가 흠칫 놀라며 아예 준의 어깨에 내려앉은 게 전부였다.

“다 왔다.”

준이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 거대한 산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자 그 산에 숨어 있던 주름과 비늘, 그리고 뾰족한 뿔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수십 미터나 되는 체구를 자랑하는 레드 드래곤.

「히익!」

“로드급이군.”

「어떻게 로드급이 이런 궁벽한 마을의 뒷산에 잠들어 있는 거예요? 이거 신이 마스터 소원 들어준다고 하면서 밑장 뺀 거 아녜요?」

“뭔가 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사연이요?」

“저기, 상처를 봐.”

릴리가 무심결에 드래곤을 향해 날아가려다 움찔 몸을 돌렸다. 준에게 최대한 가까이 붙어 안력을 끌어올렸다.

곧 레드 드래곤의 허리와 다리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잘 아물지 않은 상처인지 진보랏빛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상처였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릴리가 눈을 번쩍 뜨며 손뼉을 쳤다.

「앗! 맞아! 저런 상처 본 적 있어요. 마족들의 검기에 닿으면 저렇게 되지 않아요?」

“그래. 아무래도 싸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대체 누구랑 싸웠던 걸까요.」

드래곤은 중립적인 종족이다.

에이션트 드래곤 같은 규격 외의 존재들은 얘기가 좀 다르지만, 그들은 종족의 안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족에게 저렇게 당했다?

상처를 보건대 결코 보통의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준은 근래에 있었던 큰 규모의 전쟁을 떠올려 보았다. 싸움의 주체를 드래곤과 마족으로 한정한다면 답을 찾기가 훨씬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하면서.

곧 하나의 모범답안이 나왔다.

“신마전쟁.”

「맞아요. 신마전쟁이라면…… 그럼 그때 마족들이랑 싸우다가 저렇게 됐다는 말씀이에요?」

“추측일 뿐이야. 본인한테 듣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

이렇게 이야기가 한창인데도 드래곤은 눈을 뜨지 않았다. 굉장히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좀 이상했다.

문지기 하수인이 일검에 목숨을 잃었는데 거기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그랬다. 보통이라면 준이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눈치를 챘어야 한다.

“한번 깨워 봐야겠어.”

「그냥 깨우지 말고 조지는 게 낫지 않아요? 절호의 찬스인데. 그편이 저놈한테도 좋을 거고.」

“신마전쟁에 참전했던 드래곤이라면 우리의 적이 아니잖아?”

「그래도 누아 마을을 집어삼키려고 한 놈인데?」

“몬스터들을 조종한 건 아까 그 문지기 하수인의 짓일 거다. 이렇게 깊게 잠들어 있으면 몬스터들을 조종할 수가 없겠지.”

「하긴. 그것두 그렇네요.」

준은 손을 뻗어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언젠가 꺼낸 적이 있었던 카이젤 드라케의 날개뼈를 꺼내 드래곤에게 겨냥했다.

마나를 주입하자 공명이 시작됐다.

카이젤 드라케의 성물이 푸른빛을 토해냈다. 그 빛이 잠들어 있는 레드 드래곤을 직격했고, 머지않아 드래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며 열리기 시작했다.

― 크으으으…….

드래곤의 거대한 입에서 뜨거운 김이 취익, 뿜어져 나왔다.

카이젤 드라케의 날개뼈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 거대한 존재는 남은 힘을 끌어내 몸을 비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어 번 비틀거렸지만 곧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입증했다.

쿠릉! 쿵! 쿵!

정신을 차린 레드 드래곤이 발을 땅에 딛고 높은 곳에서 눈을 번뜩였다.

― 필멸자여……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냐?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준에게 다가왔다. 붉은 안광이 뚫어져라 준의 온몸을 훑었지만, 도저히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준은 자신의 힘을 완벽히 숨기고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상위 존재라곤 하더라도, 준이 마음먹은 일에 훼방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서.”

― 헛소리! 알 수 없는 일이군. 마지막으로 묻겠다. 누구냐? 넌.

“나는 누아 마을의 치유사다.”

치유사?

드래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장에서 준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고불고 목숨을 구걸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그런데 미개한 인간 따위가 고개를 들고 당당히 대꾸하다니. 그것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닌 치유사라고?

이런 신선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 흥!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인간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였으니까.

눈을 번뜩인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공기의 대류가 순간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강력한 기파가 드래곤의 입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곧 빛의 입자로 모습을 바꿨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용암보다 뜨거운 브레스가 일직선으로 뿜어졌다.

준이 있던 자리는 물론, 드래곤 레어 입구까지의 길이 모조리 시뻘겋게 녹았다.

하지만 브레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 쿠윽!

브레스가 끊기고, 드래곤이 시뻘건 용암을 입에서 쏟아냈다. 깨어나자마자 갑자기 힘을 사용한 탓에 내상이 심해진 것이다.

쿵!

쓰러지려던 드래곤은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버텼다.

― 망할 필멸자 같으니라고. 쓸데없이 힘 낭비를 하게 하다니.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음?

드래곤의 커다란 눈이 더욱 크게 부릅떠졌다.

모락모락 나는 연기를 헤치며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자신의 문지기인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침입자가 있었던 것인가?

“드래곤 로드의 브레스치고는 너무 약해. 역시 부상을 크게 입은 건가?”

드래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준이 멀쩡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분명 브레스에 휘말렸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브레스를 피하거나 막지 못했다.

그런데 준은 무사했다. 거기에 여유까지. 그는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 냈다.

쿵쿵쿵!

드래곤이 움직였다.

앞으로 돌진한 게 아니라, 본능이 위기를 직감하고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 어떻게 내 브레스를 피했지?

“피할 필요가 있나? 워낙 약해서 여름 바람처럼 느껴지더군. 그런 건 그냥 흘려보내야지.”

― 빌어먹을. 운이 좋은 놈이야. 죽어라!

드래곤이 다시 입을 벌렸다. 붉은 입자가 빠르게 모이기 시작했다.

준이 팔을 뻗으며 말렸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러다 상처가 터지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그건 스스로가 더 잘 알 텐데?”

― 크윽!

격한 고통을 느낀 드래곤이 입을 다물었다. 브레스가 모이다 말고 사라졌다.

상처 부위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준은 말없이 드래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상처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깜짝 놀란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러 그를 내치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의 한마디에 움찔 멈췄다.

“신마전쟁에 참전했었나?”

신마전쟁.

보통 인간이라면 꺼낼 수 없는 한마디였다.

― 넌…… 보통 존재가 아니로군. 신마전쟁을 알고 있다니…… 대체 정체가 뭐냐?

“내가 먼저 물었잖아. 대답해라.”

― 이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서 자꾸 반말을!

“어려? 하하하. 뭘 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내가 너보다 만 년은 더 살았어.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니까 빨리 대답해라.”

곁에 있던 릴리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가끔 준의 젊은 외모에 현혹돼 으름장을 놓는 늙은이들이 있었는데, 이 드래곤이 딱 그랬다.

릴리는 오랜만에 준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그는 강한 존재에게는 한없이 강했으니까.

드래곤도 그것을 느꼈는지 입김을 뿜으며 다시 준을 내려다보았다.

준는 자신의 상처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조금의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이 인간은 뭘 하려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의 일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는 강자라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드래곤이 말했다.

― 나는 레드 드래곤 로드 볼카누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신마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이 세계로 추락했지.

“아, 볼카누스였군. 어쩐지 익숙하다 했어.”

― 네놈은?

“강준이다.”

볼카누스는 흠칫 놀랐다.

얼마나 놀랐냐면, 또다시 뒷걸음질을 쳐야 했을 정도였다.

그 이름 하난 익히 들었다. 신의 대리인이자 신족의 유일한 희망.

신마전쟁은 신족의 열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용족이 가세해 전황을 돌리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전쟁 초반에 큰 상처를 입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 차원에 추락했다.

그 이후로는 전쟁에 관한 소식은 물론, 동족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지 못했다. 16년 만에 처음으로 깨어난 것이었으니까.

― 왜 신의 대리인이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나를 제거하러 온 것이냐? 네놈, 절대악에게 붙어먹은 거냐?

“그건 아냐. 난 이제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니거든.”

― 무슨 말이냐?

“은퇴했어. 뭔가 아까 이야기로 돌아간 거 같은데, 아무튼 이제는 누아 마을의 치유사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볼카누스는 그저 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준이 마나를 일으켰다.

때론 말보다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었으니까.

순수한 마나가 볼카누스의 상처를 휘감기 시작했다. 볼카누스는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세계수 밑에 몸을 뉘인 기분이었다.

준이 그 편안함에 방점을 찍었다.

“신마전쟁은 끝났다.”

― 뭣……? 그럼 절대악은?

“걱정하지 마. 좋은 곳으로 보내 줬으니까. 너희 동족도 멸종은 피했다. 다들 지금쯤 고향으로 돌아가 몸 추스르고 잘살고 있을 거야.”

준은 아공간에서 검은 구슬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을 본 볼카누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분명 절대악 케이아스가 남긴 정수였다. 그것은 곧 케이아스가 소멸되었음을 의미했다.

뽀얀 입김이 볼카누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뭔가 허무하군.

“그래. 허무하지. 전쟁이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승자에겐 상처가, 패자에겐 죽음만이 남는 것.”

― 근데 넌 왜 여기에 온 거냐?

“너 때문에 마을이 쑥대밭이 되게 생겼다. 온갖 몬스터들이 판을 치고 다니더군.”

― 혹시 네가 나에게 신호를 보냈었나? 꿈에서 얼핏 들은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렇게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유희를 즐긴다는 건 말도 안 돼!

“모른다고 하면 다야? 네 하수인이 한 짓이면 네가 책임을 져야지. 주인이니까.”

― 책임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준은 손을 떼고 치료를 끝냈다.

하지만 여전히 오염 부위가 남아 있었다. 마족이 입힌 상처는 아무리 준이라고 해도 단시간에 치료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볼카누스는 한결 편해졌다. 계속 곪아가던 상처에서 고름을 싹 빼낸 것 같은 시원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인간 모습으로 바꿔 봐. 올려다보기 힘들어.”

― 무례한 놈! 감히 인간 주제에 나에게 명령을 하는 거냐? 은퇴했다며?

“성질 좀 죽이고. 마음을 곱게 써야 병도 빨리 낫는다.”

― 큭!

번쩍!

볼카누스가 폴리모프를 시전했다.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즉 좀 그렇게 하지. 이제야 좀 편하네.”

준이 볼카누스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밤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마을 진료소로 와라.”

“내가 왜!”

“마을 사람들한테 피해를 줬으니 사과해야지. 잘못을 했으면 반성을 해야 진정한 어른인 법이다.”

“뭣?”

“그리고 거기.”

준이 볼카누스의 상처를 가리켰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족에게 당한 상처는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치료해야지. 전쟁이 끝났으니까. 슬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남기곤 준이 몸을 돌렸다. 그가 레어를 빠져나갈 때까지, 볼카누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툭.

뺨을 한 번 쳐 보니 얼얼했다. 아무래도 꿈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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