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대마법사의 자질
각성 이후 그녀의 성장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훌쩍 넘었고, 키도 한 뼘은 컸으며, 풍기는 분위기도 한층 어른스러워졌다.
“아주 좋아요. 이제 다 나은 것 같아요.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에요.”
발음도 또박또박했다. 가녀리면서도 상냥한, 예쁜 음색으로 돌아왔다.
“재활 치료는 이제 필요 없겠구나. 아그네스가 서운해하겠어. 나름 준비를 많이 했을 텐데.”
“언니라면 오히려 기뻐해 줄 거예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아그네스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그녀였다.
“감사해요. 모두 선생님 덕분이에요.”
마리가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성숙한 몸짓이었다. 오히려 두 살 많은 아그네스보다 훨씬 차분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준은 그 이유를 파악했다.
풍부하고 정순한 마나가 마리의 육신은 물론 정신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외모와 목소리까지 아름답게 변한 것도 그 영향일 터.
“이제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신비한 기운이 제 몸을 휘감고 있어요. 간지러워요.”
마리가 손을 뻗었다.
우우웅!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마나가 쏟아져 나왔다. 곤란한 표정을 지은 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마나를 잠재웠다.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을 올려다보았다. 왜냐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이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아직은.”
“왜요? 간지러운데.”
“마법은 목적과 용도를 분명히 하고 사용해야 하거든. 의미 없이 흘리는 마나는 낭비일 뿐이야.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은 답답해 보였다. 빨리 뭔가를 하고 싶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마법을 배우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어?”
“나쁜 몬스터들을 혼내 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다치는 거, 싫어요.”
“좋은 생각이구나. 그거야말로 하나의 목적이 될 수 있지. 그럼 슬슬 마법 수업을 시작해 볼까?”
두 사람은 야생화를 눈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무슨 말로 수업의 첫머리를 장식할지 잠시 고민한 준이 적절한 답을 찾았다.
이건 누군가에게 마법을 가르칠 날이 온다면 꼭 해 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마법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 그걸 아는 자만이 마법의 극의에 도달할 수 있지.”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준의 말을 다시 읊조린 마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해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꼭 명심할게요. 스승님.”
준을 향한 마리의 호칭이 살짝 바뀌었다.
그녀의 의지를 확인한 준은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마나는 흐름이다. 그 흐름을 억지로 잡아당기려는 게 아니라, 그 흐름에 동화되는 것이 첫 번째 원리야.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마리는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의 설명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마탑이나 도서관에 파묻혀 산 마법사가 아니라, 서클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리에게 마나의 운용법과 마법의 원리를 설명한 준은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딱 한 번 가르쳤을 뿐인데 마리는 완벽하게 마나를 움직였다. 단 한 가닥의 손실도 없이.
‘천재다. 이 녀석은.’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수많은 존재들을 만나 본 그였다. 그럼에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마리가 가진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때, 문득 드는 한 가지 고민.
‘차라리 신성 계열로 가게 하는 게 좋을까?’
그렇다면 진료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성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마나의 운용법을 전수하던 준은 마리가 신성 계열 마법, 즉 치유 마법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의 마나는 폭발적인 성향이 있어 변형과 파괴에 어울리는 마법과 잘 맞았다.
“자, 다시 한번.”
준이 신호를 주자 마리는 심장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나를 온몸으로 보내고, 다시 심장으로 회수하는 것을 반복했다.
우우웅!
정순한 마나가 혈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마리는 통증을 꿋꿋이 견디며 단 한 줌의 마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몇 번 하고 나니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마나가 흐르는 길을 완전히 뚫은 것이다.
“어때? 할 만하니?”
“재미있어요.”
“좋아. 이번엔 마나를 밖으로 꺼내 움직여 보자. 몸에 퍼진 마나를 손으로 모아 보거라.”
준은 마나를 전개하는 법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은퇴한 절대자가 전수하는 비법이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고 해도, 마리는 단번에 알아듣고 그것을 시전해 보였다.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마나를 일으켰다.
우우웅!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하나의 물체를 만들어 냈다. 푸른 비늘을 가진 작고 날렵한 물고기였다.
준은 깜짝 놀랐다.
꺼낸 마나로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니까. 마리는 준이 다음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미리 깨닫고 행동했다.
“움직여 볼게요.”
마리가 오른손을 멀리 당겼다.
그 손길에 따라 물고기가 역동적으로 허공을 헤엄쳤다. 이번엔 손을 위로 퉁기듯 들자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몸을 떨었다.
파드득!
마나의 잔상이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대단한 현실감이었다.
“와! 신기해요!”
마리는 본인이 마법을 부리면서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완전히 물고기의 움직임에 빠져 있었다.
‘대단해.’
「그러게요.」
보통 사람은 몰라도 준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마리가 구현한 물고기의 눈과 비늘, 그리고 지느러미는 상당히 높은 마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완전 물건인데요? 마스터 햇병아리 시절 하고는 상대가 안 되네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네. 마스터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나만…… 아이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그래, 인심 썼다. 둘만 알았는데.」
한때 릴리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었지만 준은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튼 이 녀석을 마법사로 만드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어.’
「이 기세라면 십 년? 아니, 십 년이 뭐야. 오 년이면 대마법사 찍겠는데요? 촌장 할배가 왕국 수립 선포하고 전쟁 일으키면 아비루나 왕국쯤은 날름 먹을 수 있겠네요.」
‘네게 소설 쓰는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농담 아닌데?」
망상은 아니었다.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다면 왕국 정벌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잡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진료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그네스와 하룬이었다. 투명한 결계를 전개했기에 그들은 이쪽을 볼 수 없었다.
‘벌써 진료 시간이 된 건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준은 슬슬 수업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유영하는 물고기를 손으로 낚아챘다. 잠시 파닥거리다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오늘처럼 동물이나 여러 생명체를 만들어 연습을 하면 금방 감응력이 좋아질 거다. 틈나는 대로 연습을 하거라.”
“네. 열심히 할게요.”
“오늘은 여기까지.”
마지막으로 준은 마리에게 사람들이 있을 때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력을 숨기는 방법을 전수했다.
척하면 딱이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리는 자신의 힘을 적절히 숨겼다. 아마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은 마리의 마나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준은 투명막을 거뒀다.
아그네스와 하룬은 이미 화단을 지나치고 있었기에, 준과 마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들의 뒤를 따라 진료소로 들어갔다.
“엄마얏!”
잠시 후 아그네스의 비명 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 * *
책을 넘겨보던 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그네스는 턱을 괸 채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예? 아뇨, 아무것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마리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까.”
“죄송해요. 저도 아는데 자꾸 보게 돼서…….”
아그네스가 아까 비명을 지른 건 마리 때문이었다.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있고, 마리가 너무 많이 변해서 도저히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하, 옛날 그 키 작고 귀엽던 꼬맹이 시절이 그립네.”
하룬이 거들었다.
평소라면 무슨 변태 같은 소릴 하는 거냐며 그에게 핀잔을 줬겠지만, 아그네스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때, 시선을 느낀 마리가 약병을 손에 쥔 채 몸을 살짝 돌렸다.
“왜들 그렇게 보고 계세요? 제가 뭐 실수라도…….”
“아니~ 아니아니! 하하하. 실수는 무슨! 잘하고 있어. 일이 힘들지 않나 걱정돼서 그러지. 어제까진 환자였잖아.”
“하나도 안 힘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이제 다 나았어요.”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힘쓰는 일은 이 오라버니한테 맡기라고. 알았지?”
“고마워요.”
마리는 당분간 진료소에 머물며 허드렛일을 돕기로 했다. 각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준의 보호가 필요했다.
방도 따로 배정받았다. 출근하자마자 아그네스와 하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리가 쓸 방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약병 정리를 끝낸 마리가 다른 일을 찾아 진료실을 나갔다.
아그네스가 말했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한 게, 그래도 마리가 도와주니 조금 편해졌다는 거. 정리할 게 아직 많이 남았었거든요.”
“청소는 처음에 다 끝난 거 아니었나?”
“선생님…… 조금은 진료소에 관심을 두시는 건 어떨까요? 창고부터가 지금 엉망이라구요.”
“그럼 사람을 쓰자.”
하룬이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그건 더 어렵습니다. 만성 적자거든요 우리. 자체적으로 약초 수급이 되니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문 닫았을걸요? 그렇지?”
“맞아. 이제 환자 차트도 써야 하니 종이도 많이 필요할 텐데. 그건 또 어떻게 구한담.”
소꿉친구들의 묵직한 원투 펀치에 준이 턱을 괴고 카운트에 들어갔다.
확실히 누아의 진료소는 수익 모델이 없다.
약초를 캐다 파는 것도 아니고, 도시의 병원처럼 환자에게 진료비를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명문 귀족가의 지원이나 왕국의 보조를 받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때, 아그네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뭐지?”
“켈세타에 광고를 내는 거예요.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는 기적의 진료소! 초특급 의료진 항시 대기 중! 귀족 진료 시 특별할인! 이런 식으로?”
“오, 그거 기똥찬데?”
하룬이 감탄하자 아그네스가 가슴을 쭉 폈다. 준은 피식 웃을 뿐이다.
“치유사는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안 돼. 이 세상에 환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는 걸 목표로 해야지.”
“하지만 그것도 진료소가 운영되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돈을 많이 벌자는 게 아니고, 적당히 벌자는 거예요. 적당히.”
“적당히라. 그래. 참고하마.”
딸랑―
문이 열리고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환자가 들어왔다. 마리를 제외하곤 누아 진료소에 등록된 유일한 환자인 호프만이었다.
아그네스가 후다닥 달려갔다.
“어서 오세요!”
“뭐야. 너 왜 이렇게 격하게 반기냐? 나 너한테 빚진 거 없는데?”
“호호. 그냥요. 반가워서.”
아그네스는 들떠 있었다. 호프만이 온다는 것은, 준이 만든 의료 기구를 시험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가능하면 자신이 직접 조종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기구는 준의 차지였다. 미리 준비한 슬라임 정제액을 호프만의 배에 도포한 준이 뼈 막대기로 그의 배를 눌렀다.
곧 마나의 음영이 검은빛 유리판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뚫어져라 유리판을 쳐다봤지만 도저히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때, 구원의 손길이 뻗어졌다.
“이쪽을 봐. 아니. 그쪽 말고 여기. 달걀 모양으로 부푼 덩어리가 보이지?”
“아! 병소가 거기군요? 이제 좀 보이는 거 같아요.”
“그래. 이 이상 커지게 되면 혈관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거나 찢어진다.”
“세상에…… 아저씨. 정말 이래도 켈세타에 가서 치료를 받으실 거예요? 가다가 어떻게 되시면 어쩌려고요?”
호프만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대꾸했다.
“괜찮아. 상단에 제법 실력 있는 용병들이 많이 따라붙었다고 하더군. 치유사도 있는 모양이고.”
그의 고집은 마을에서도 유명했다. 아그네스는 걱정이 됐지만,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더 좋은 치유사에게 가겠다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할까.
진료가 끝나고 호프만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아그네스와 하룬은 배웅을 나갔다.
바로 그때.
「마스터!」
릴리가 돌아왔다.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가 보고 들은 걸 상세히 알렸다.
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움직일 시간인가?’
뒷산을 향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