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생명의 빛 (2)
“어? 저게 뭐야?”
“무슨 빛 같은 게 번쩍인 것 같은데. 뭔 일이지?”
마리가 뿜어낸 빛은 자경단 본부에서도 관측되었다. 그 정도로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자경단원들을 위협했던 것은 빛이 지닌 신비로운 힘이었다. 마법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괴이한 몬스터가 나타났거나.
위치를 가늠한 자경단원 하나가 눈을 부릅떴다.
“진료소 쪽이다!”
준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했다. 게다가 거기엔 중요인물인 아그네스와 하룬이 상주하고 있다. 그만큼 민감한 지역이라는 것.
“하룬은?”
“진료소에 있을 시간이지.”
“수호 정령들이 날뛰기라도 한 걸까?”
“일단 단장님께 알리자!”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보초를 서던 그들은 본 것을 소상히 보고했다. 바이런은 신비로운 빛이 진료소 쪽에서 뿜어져 나왔다는 것을 쉬이 믿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냐?”
“네! 분명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기이한 빛이라니…… 툴리앙과 알렉스, 배런은 아직 여기에 있나?”
“예. 약초 캘 시간이 아닙니다.”
“으음.”
생각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분명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자경단장 바이런이 벽에 걸어둔 검을 움켜쥐었다.
“지금 바로 종을 울려라! 험멜 넌 신호가 올라오면 바로 마을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알았나? 긴장을 놓지 마라!”
“옛!”
명령이 떨어지자 단원들이 부산히 움직였다.
평소에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자경단원 하나가 종을 바로 울렸고, 근처에 있던 자경단원들이 속속 무장한 채 집합했다.
동시에 마을에 전운이 감돌았다.
“수상한 빛이 진료소 근방에서 목격됐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른다. 마법을 쓰는 몬스터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니 모두 대비하도록. 자, 가자!”
바이런이 앞장섰다.
부하를 자신의 앞에 두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지금까지 지켜 온 하나의 원칙이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한참을 달렸지만 단원들은 지치지 않았다. 이런 훈련은 수도 없이 해 왔으니까.
저 멀리 진료소의 모습이 보이자 바이런이 손을 까딱하며 외쳤다.
“산개!”
따라오던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거리를 벌렸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마법이 개입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뭉쳐 있다가 장거리 타격을 받으면 돌이킬 수 없을 터.
스릉!
바이런이 검을 꺼내자 나머지 단원들도 모두 검을 꺼냈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격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언덕을 넘었다.
진료소의 전경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바이런은 뜀박질을 멈췄다. 그는 방어태세를 취하며 신중하게 진료소와 그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지?”
의문을 표한 건 바이런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피던 부하들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평온했다.
언제 강력한 빛이 터져 나왔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저기, 단장님. 아무리 봐도 별일 없는 거 같은데요?”
“어떻게 된 거냐! 분명 빛이 터졌다고 하지 않았나?”
“마, 맞습니다. 분명히 봤는데 이상하네요.”
“저놈 잘못 본 거 아냐?”
“개소리! 험멜도 같이 봤다고!”
부하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바이런이 소리를 치며 주의를 주었다. 상대가 강자라면, 충분히 의도된 연출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다시금 눈에 힘을 주었다.
오랜 경험과 실력이 빚어낸 날카로운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그래도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가로이 불어오는 바람에 수풀이 흩날리고 있었고, 흰 앞치마를 두른 아그네스가 열심히 빨래를 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그네스가 빨래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버지!”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딸의 모습을 본 바이런은 그제야 마음이 탁 놓였다.
내색은 못 했지만, 진료소에서 빛이 터졌다는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단원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그네스가 총총 뛰어왔다.
바이런이 손을 들어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2인 1조로 주변을 탐색하라는 지시였다. 단원들이 조 단위로 뭉쳐 흩어졌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훈련인가요?”
가까이 다가온 아그네스는 손수건을 꺼내 바이런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땀으로 가득했다.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래서…….”
“아~ 그거 말이죠. 선생님이 새로운 진료 기구를 만드셨는데, 그걸 시험하다가 사고가 났지 뭐예요. 선을 하나 잘못 연결하셨다나?”
“사고가 났다고?”
“네. 작은 사고였어요.”
왠지 미심쩍은 느낌이 든 바이런은 인상을 쓰며 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다. 다친 곳도 없어 보였고.
왠지 허무했지만, 그래도 딸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아무도 없어요. 그냥 뭉쳐 있던 마나가 뿜어져 나간 거라 빛만 반짝였을 거예요. 소리 같은 것도 안 났는데. 본부에서 누가 봤나 봐요?”
“그래. 험멜하고 자크가 보고했다. 빛이 터져 나왔다고 하더군.”
“와. 눈썰미들 좋으시네. 어떻게 그걸 보셨담?”
“단장니임!”
뒤늦게 하룬이 진료소에서 뛰어나왔다. 하룬이 무사한 걸 보자 바이런의 표정이 조금 더 누그러졌다.
하지만 바로 호통이 쏟아졌다.
“이 녀석! 진료소에 사고가 났으면 바로 달려와서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네가 왜 진료소에 파견이 되었는지를 벌써 잊었나?”
“죄, 죄송합니다. 전투 마치고 좀 피곤해서 쉬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크흠.”
바이런은 더는 책망하지 못했다. 농땡이를 부린 것도 아니고, 오늘 고블린을 상대로 멋진 활약을 보여 준 하룬이었다. 충분히 쉴 자격은 있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바이런이 근엄히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를 하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겠슴다.”
“좋아. 모두 집합! 본부로 복귀한다!”
바이런이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아그네스와 하룬은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거짓말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 * *
마리가 잠든 것을 확인한 준은 다시 진료실로 내려왔다.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준을 기다리고 있던 마리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딸은요?”
“이제 잠들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일찍 각성에 들어간 것 같군요.”
“각성이라 하면…….”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마리의 아버지는 2층 병실로 올라가 딸의 곁을 지켰다. 준은 밖의 상황을 한번 살피고 진료실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음미하며 생각에 잠기는 준.
‘각성이 생각보다 빠르게 됐어.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뭐가 기점이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계는 자신이 차근차근 해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지의 힘이 자신보다 먼저 움직인 것이다.
준은 턱을 괴며 다시 그때의 일을 되돌아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뒤.
‘설마?’
의심이 가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이 전개한 치유 마법으로 생명력을 되찾은 꽃을 마리가 손에 쥐었을 때. 바로 그때였다.
‘혹시 내 치유 마법이 각성의 촉매가 된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마나에 대한 감응력은 인간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최근 마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정신도 조금은 더디지만 성숙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험한 마법적인 자극은 각성의 충분한 동기가 될 만했다.
무엇보다도 마리의 심장을 죄고 있는 결계는 준의 마나로 통제되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과 자극이 결계를 무너뜨린 게 분명했다.
“선생님.”
아그네스와 하룬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준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
그제야 준이 반응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걸까. 흔히 있는 일은 아니라 아그네스는 걱정이 됐다. 대신 하룬이 나섰다.
“혹시 마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아니. 상태는 괜찮아. 걱정할 거 없다. 그나저나 바이런 씨는? 아까 보니 자경단원들이 몰려온 것 같던데.”
“단원들 중 빛을 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갔어요. 그냥 넘어가 주신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그네스의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니면 그만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아그네스가 재차 물었다.
“그런데 이제 마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나를 느끼게 됐으니, 이제 그걸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지.”
“마법사가 되는 거네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여운은 길었다.
부러운 일이다.
만약 자신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치유사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준은 그 눈빛을 고스란히 읽었다.
“마나는 부차적인 기술일 뿐이야. 약초학에 대한 지식을 부지런히 쌓고 환자에게 애정을 갖는다면 훌륭한 치유사가 될 수 있어.”
“그랬으면 좋겠어요.”
“왜 치유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 그 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될 거다.”
얼마 전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제야 아그네스의 표정에 여유가 생겼다.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하지. 다들 고생 많았다. 뒷정리를 부탁하마.”
“예, 선생님. 오늘은 좀 푹 주무세요.”
“쉬십쇼.”
진료실을 나선 준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리가 누워 있는 병실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충격으로 인한 가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하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저런 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부성애인가?’
자식을 낳고 키워 본 적이 없는 준의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은 장면임엔 분명했다.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차갑게 식어 버린 마음을 잠깐이나마 따뜻하게 만들어 줄 정도였으니까.
똑똑―
준이 노크를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진찰 좀 하겠습니다.”
“아, 예. 부탁드립니다.”
준은 마리의 맥을 짚어 마나를 흘렸다. 충격으로 인해 실신했지만, 마리의 내부는 무척 평온한 상태였다. 모든 결계가 부서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결계가 한 번에 부서졌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도, 진료소도, 그리고 누아 마을도.
“내일이면 깨어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좀 쉬셔도 됩니다.”
“하지만…….”
“절 믿으십시오.”
마리의 아버지는 기운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준은 병실을 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오는 밤.
준은 침대에 편히 누웠다.
‘우연히 각성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마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술식과 마나 운용의 묘리만을 전수하는 게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한 술식과 효율적인 마나 운용법만을 익힌 마법사들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일단 눈 좀 붙여야겠어. 요즘 편히 쉬어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기껏 윤회의 사슬을 끊었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제발 좀!」
릴리의 목소리였다. 피식 웃은 준은 이불을 당기며 눈을 감았다.
‘잘 자라.’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준은 세안을 하고 의복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내려가는 길에 병실에 들르니 마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 이불이 흐트러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만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몰래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어디로 간 거지?’
바로 1층으로 내려온 준은 사방을 살폈다. 진료소는 텅 비어 있었다. 기감을 끌어 올리니 진료소 밖 야생화밭에서 기척 하나가 잡혔다.
준은 바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은발의 소녀가 화단에서 야생화를 쓸어 만지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대부분 낯선 모습이었다. 각성 이후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
“기분은 좀 어때?”
준이 물었고, 돌아선 마리가 싱긋 웃었다. 야생화와 잘 어울리는 그런 예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