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156화 (156/156)

주인이 바뀌다 (2)

* * *

꿈일까? 분명 꿈일 거야.

이런 짙은 어두움은 꿈속 말고 본 적이 없다.

어느 시골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데, 가로등도 없고 불빛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뜬 달과 어둠 흔들리듯 반짝이는 작은 빛만 보이는데, 이게 반딧불이라고 하는 건가?

영화 속에서만 본 적이 있다.

어쨌든, 너무 어두워서 달이 유난히 더 밝게 느껴졌다.

그나마 있는 달도 구름에 일부 가려져서 칠흑 같은 어둠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내 눈이 어둠에 적응해 갔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마을 울타리 같은 게 보였고, 조금 더 걸어가니.

“헉…… 뭐야? 민속촌이야?”

하얀색 복장.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누리끼리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횃불로 환하게 밝힌 한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아무리 봐도 조선시대 사람들 복장 같다.

무언가 구경 중인 듯한데, 모인 사람 중에 안경을 쓴 어르신도 보인다.

‘조선시대인 것 같긴 한데…… 구한말 정도 되려나?’

꿈이 정말 리얼하다. 내가 꿈인 걸 자각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철썩!

한 남자가 곤장을 맞고 있었다.

“아흑!”

철썩!

그런데 주변에는 슬퍼하는 이도, 괴로워하는 이도 없었다.

모두 멍하니 이 광경을 보고 있다.

구경꾼들이 마네킹 같다.

곤장을 맞고 있는 남자만 괴로워할 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인다.

난 끔찍해서 눈을 찡그렸다.

철썩!

“아이고~”

곤장을 때리는 사람들도 꼭 로보트 같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난 가까이 다가가 봤다.

철썩!

“아이고~ 나 죽네!”

곤장을 맞고 있는 남자는 울부짖었고.

난 눈을 찡그리고 그의 몰골을 자세히 살폈다.

끔찍하기 그지없다.

곤장을 맞은 곳에는 짓물러진 살과 피가 엉겨 있고.

형틀에 묶여 있는 팔…… 그리고 손!

유난히 손이 눈에 띄었는데.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어떤 고문을 당한 건지 흐늘흐늘해진 닭발처럼 보였다.

그의 손을 보고 난 끔찍하여 시선을 돌렸는데.

“이봐.”

철썩!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보러 왔으면 똑바로 봐야지.”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형틀에 묶인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날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철썩!

그는 여전히 곤장을 맞고 있는데, 이젠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다.

“잘 봐. 어떤 꼴이 되는지.”

그는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뒤.

찰싹!

“으아악!”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 *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끔찍한 모습을 계속 보다가.

몇 번 눈을 깜빡였을 때.

“엇?!”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허름한 호롱불 아래, 한 남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데.

좀 전에 곤장을 맞고 있던 그 남자다.

“잘 봤어?”

얼굴이 없다.

분명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긴 한데, 외모가 머릿속에 각인이 되지 않았다.

“누구세요?”

좀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자네가 이사 올 때까지 살던 사람.”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수서동 분묘가 떠올랐다.

역시…… 파묘의 여파가.

어쩐지 찜질방에서 자고 싶더라니.

뒤늦은 후회였다.

“어쩌다 보니……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닐세.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자네가 신경을 많이 써줘서 풀렸어. 뭐, 지금 옮긴 곳도 만족하고.”

난 그의 손을 바라봤다.

손목 아래에 손이 없었다.

“혹시…… 제가 짐작하는 게 맞습니까?”

“맞네.”

얼굴 없는 남자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후련해. 그 손은 내게 영광을 가져다줬지만, 결말은 좋지 않았지.”

“…….”

“어떻게요?”

“보여줄까?”

잠시 눈을 깜빡인 순간.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금손을 활용하여 그가 해왔던 일들. 사람들의 환호. 기세등등한 남자의 모습.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사람들의 시기. 그를 이용하고, 구속하고.

마지막은 끔찍한 처벌이었다.

“잘 봤나?”

“…….”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가진 게 있으면 써야 하는 게 맞네.”

“…….”

“하지만 잘 써야겠지. 지혜롭게.”

“어떻게 쓰는 게 지혜로운 겁니까?”

“글쎄…….”

이 질문에 얼굴 없는 남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실패했던 사람이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겠나?”

“…….”

“아, 이런 방법이 있겠네. 내가 했던 것과 반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후. 후.

표정은 볼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난 노력하지 않았고, 아주 인생을 쉽게 살았어. 나에게는 그 손이 있었으니까.”

“…….”

“그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썼지.”

후. 후.

“내가 말이 많았네. 고맙다는 말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데.”

“…….”

“그럼 이제 가시게. 아! 내가 자네에게 질문 하나만 남겨놓고 갈게.”

“…….”

“나중에 만났을 때 좋은 답을 들었으면 좋겠네.”

“네, 어르신.”

점점 얼굴 없는 남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그 빛에 그의 실루엣도 사라질 때쯤.

내 귀에 또렷이 꽂히는 음성이 있었다.

‘자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팟.

눈을 떴다.

침대보가 땀으로 흥건해져 있고.

창밖이 밝아져 있었다.

* * *

사랑산성. 오전 10시.

오늘 완전 지각했다.

헐레벌떡 내 집무실인 4번 룸에 들어갔더니.

“엇?!”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 뭐야?!”

최경리는 날 보고 물었다.

“사장님이야말로 뭐예요? 오너는 이렇게 막 지각해도 되는 거예요?”

직원들 모르게 하려고, 정말 조심히 들어왔는데.

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흠! 지각은 무슨. 시장조사 다녀왔어. 시장조사!”

사장이 가오가 있지.

지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변 이사의 고정 멘트를 빌려보았다.

“어머,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셨어.”

최경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푸하하.”

변 이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강 사장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숨을 약간 헐떡이면서, 땀 닦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말해야지. 연기 너무 못한다~”

“…….”

내가 아직 내공이 깊지 못하다.

변 이사에게 더 배워야 할 것 같다.

“흠! 근데 다들 어쩐 일이에요? 일 안 하고.”

김지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장님이 안 오시니까 걱정되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얘기 중이었어요. 어제 일이 좀 신경 쓰여서.”

변 이사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강 사장님. 괜찮은 거야? 안색이 안 좋은데.”

“네, 괜찮아요. 그냥 잠을 얼마 못 자서…….”

꿈을 꾼 건지, 밤새 돌아다닌 건지 헷갈릴 정도로 피곤했다.

“아, 저 물 한잔할게요.”

방 한 켠에 놓인 정수기 물을 따라 마셨다.

꿀꺽. 꿀꺽.

“캬~!”

탄성이 절로 나온다.

피곤도 가시고, 기운도 솟고.

난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설마 손도 쓸수록 능력이 더해가는 건 아니겠지.

“어이쿠. 강 사장님 안색 돌아왔네. 하하.”

“어머, 다크 써클 사라졌어요. 호호.”

직원들은 이젠 별로 신기해하지도 않는다.

변 이사가 날 다정하게 불렀다.

“강 사장님~”

“네.”

“오늘 금강 건축사사무소와 미팅하기로 했는데. 기억해?”

“아, 오늘이에요?”

일정 참 타이트하게 잡았네.

하여간 우리 회사는 모든 게 급하다.

“일주일 전에 얘기했었는데, 기억 못 하나 봐.”

“아…… 제가 분묘처리에 너무 집중했었나 봐요.”

“하하. 괜찮아~ 이해해. 그럼 지금 갈까?”

“지금이에요?”

약간 피곤함이 느껴져서 말했다.

“그냥 저 빼고 갔다 오면 안 돼요?”

변 이사는 도리질을 하고 말했다.

“안돼. 안돼. 오늘 중도금 보내는 날인데, 계약당사자가 있어야지. 가까운 이웃일수록 더 정도를 지키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야.”

하아……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오래 안 걸리겠죠?”

“응~ 빨리 끝낼게.”

금강 건축사사무소.

전 직원이 다 함께 갔다.

박상국 사장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박 사장이 악수를 건네었고.

난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네~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하하, 네 이쪽으로.”

우리를 안으로 들인 뒤, 박상국 사장은 차를 내왔다.

“일은 잘 마무리되셨나 보죠?”

“네. 덕분에 잘 마무리됐습니다.”

박 사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나 문제 생길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다행이네요.”

“하하. 문제 생겨도 사장님 사업에는 지장 안 가게 하죠~”

박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계약 파기 된다고 해서 저희가 손해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전 사랑산성이 걱정되었던 거죠. 분묘처리 건은 문제 생기면 완전 수렁에 빠지는 거거든요. 그런 사례를 몇 번 본적이 있어서…… 하여간 정말 다행입니다. 역시 사장님과 변 이사님 수완이 좋으신가 봐요.”

박 사장의 연이은 덕담에 사무실 안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난 피곤했기에 빨리 업무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오늘 중도금 드리면 바로 건축 개시하는 거죠?”

“네네. 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토지 용도변경부터 하고, 건축자재 구매도 동시에 진행될 겁니다.”

“아 네. 저희가 뭐 해야 할 게 있습니까?”

박 사장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몇 가지 필요한 서류만 오늘 변 이사님께 말씀드릴 거거든요. 그것만 챙겨주시면 나머진 신경 쓸 거 없습니다.”

“…….”

“그냥 건물 올라가는 거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변 이사는 내 어깨를 두들기고 말했다.

“내가 얘기했잖아. 오늘 중도금만 보내면 더 신경 쓸 거 없다고.”

지금까지 사랑산성은 온갖 일을 직접 해왔다. 심지어 분묘개장 업무까지도.

건축은 특수분야라 어쩔 수 없이 업체에 맡겼지만, 새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난 박 사장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 요청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사무실과 보육원 침실 건축 시에, 제가 현장에서 같이 작업해도 될까요?”

“네? 사장님이 직접요?”

이 건물에 조금이라도 내 손이 거들게 하고 싶다.

나와 내 사람들이 오랜 기간 쓸 공간.

하다 못 해 벽돌 하나라도 내 손으로 직접 쌓고 싶었다.

변 이사는 무슨 뜻인지 알았는지 피식 웃었고.

난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저 노가다 좋아하거든요.”

* * *

토지용도변경부터 시작된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처음에 박 사장은 공사기간이 7개월이라며, 변수까지 고려한 일정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성향을 생각해 봤을 때, 분명 그보다 빠르게 완료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토지용도변경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끝내고, 토목공사, 골조작업까지.

박 사장은 빠르게 진행했고.

난 그런 건축 진행 단계를 변 이사를 통해 수시로 보고 받았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건물 짓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며.

보석 세공 사업을 꾸준히 했는데.

‘솔러 루비 반지’처럼 회사의 운명을 걸고 한 건 아니고.

국내에 있는 보석으로 소소하게 반지하나 귀걸이 하나. 이렇게 2개 정도 만들었다.

처음에 고난도 경험을 해봐서일까.

보석 세공 사업은 김지안과 손발이 척척 맞아서, 크게 힘들이지 않았다.

소소한 것이다 보니, 2개 만들어 얻은 수익은 10억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0억도 큰돈인데…… 100억짜리를 팔은 경험이 있어서일까. 아주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건축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지났을 때쯤. 박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강 사장님 안녕하세요~ 박상국입니다.]

[아~ 네! 사장님.]

[내일 사무실과 침실 공사 들어가려는데요. 오실 건가요?]

난 손의 뼈마디를 풀고는 말했다.

[네, 가야죠.]

나를 만나다

* * *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간간이 보고만 받고, 최근 1개월 새에는 와보지 않았는데…….

“우와…… 빠르네.”

외관은 거의 다 완성이 되어 있었다.

내부 건축단계인 듯한데.

건물이 이렇게 빨리 올라간다는 게 신기하다.

다른 건물들 봤을 때는 몇 년은 걸려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물을 반년이면 올릴 수 있다는 게 참…….

역시 해봐야 아는 것이다.

“강 사장님~ 오셨습니까.”

박 사장은 나와 있었다.

“엇, 사장님도 나오셨어요?”

“하하. 그럼요. 강 사장님이 오신다는데 나와야죠.”

“아~ 이거.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괜히 죄송하네요.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그럼 브리핑 시작할까요?”

그는 주섬주섬 상황판을 꺼내려 했고.

“아, 아닙니다. 저 진짜 작업하고 싶어서 온 건데.”

“네? 정말 노가다 뛰신다고요?”

“하하. 네~ 저와 소중한 사람들이 앞으로 지낼 곳인데. 제가 손을 좀 보태고 싶어서요.”

“하하.”

박 사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여간 강 사장님도 참 독특한 면이 있으신 거 같아요.”

“하하.”

“동료분들이 강 사장님의 이런 마음을 아셔야 할 텐데.”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모르면 또 어떻습니까.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박 사장은 꺼내려던 상황판을 어쩌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준비를 하신 건가요?”

“아, 네. 보통 건축주분들이 오시면 하던 데로…… 가볍게 준비했습니다.”

정말 이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성 들여 준비를 했을 텐데.

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박 사장님께 설명 듣고 작업투입 하면 더 효율적일 수 있을 테니.”

준비했다는데 들어 줘야지.

그게 뭐 어렵나.

“하하. 네. 그럼 바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촤라락~

그는 지지대 위에 상황판을 펼쳤다.

상황판은 고화질로 아주 세부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거 가볍게 준비하신 게 아닌 거 같은데?”

“하하.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안 주머니에서 쇠막대기를 하나 꺼내더니, 끄트머리를 잡고 쭉 뽑아내었다.

지시봉이었다.

“강 사장님, 지금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아, 네.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금번 사랑산성에서 의뢰하신 수서동 121번지…….”

박 사장은 토씨 하나 버벅대지 않고,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리허설을 여러 차례는 했을 듯, 아주 능숙했다.

아무리 봐도 가볍게 준비한 게 아닌 듯한데…….

박 사장 눈두덩 아래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하아…… 현장에 괜히 왔나.

어째 미안해지네.

* * *

“이상 브리핑 마치겠습니다.”

짝짝짝.

단 한 명을 위한 브리핑.

너무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귀에 들어온 건 몇 가지 없지만.

난 열렬히 박수를 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박 사장은 안전모를 내게 건넨 뒤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현장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아뇨.”

이번엔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저 혼자 움직일게요.”

“네? 혼자요? 위험하실 텐데…….”

그래서 난 생각했던 걸 말하였다.

“십장님한테 연결만 시켜주세요.”

“십장이요?”

“네, 저 오늘 하루만 노가다 하러 온 인부로 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다만 제가 요청했듯이 사무실과 보육원 침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말씀만 잘해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

“제 신분에 대해서는 일절 말씀하지 말아 주시고요.”

박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난 그의 팔을 붙잡고 콧소리 섞어서 말했다.

“아이~ 괜찮아요. 제가 원해서 그러는 거니깐.”

“우리 십장이 입이 좀 거친데…….”

“제 주특기가 욕먹기에요. 괜찮아요.”

똥손 시절에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잠들기가 허전했었다.

“허허.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박 사장은 십장에게 날 소개해줬다.

“그러니까, 제 조카니까. 너무 막 대하지는 말고. 응? 무슨 말인지 알겠죠?”

박 사장은 날 친척 동생으로 소개했고.

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박 사장님.”

“그래. 수고하세요.”

박 사장은 내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태평이도 수고하고.”

“네, 삼촌.”

난 눈을 찡끗하며 대답했고, 박 사장은 어색한 몸짓으로 돌아섰다.

박 사장이 사라지자 십장은 대뜸 말했다.

“너 이름이 뭐냐?”

“강태평이요. 십장님은요?”

“알 필요 없고. 뭐 할 줄 아는데?”

“한 번만 보여주시면 다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미친 새끼 지랄하네. 얼굴은 허여멀게 가지고. 공사판이 놀이터인 줄 알어? 한번 보고 다 따라 할 수 있게?”

뭐…… 딱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악의를 갖고 하는 욕이 아니라, 그냥 입이 거친 사람 같았다.

“박 사장 저 잣 같은 새끼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샌님한테 어려운 작업을 시킨다는 거야?”

그는 날 보고 물었다.

“사무실이랑 침실 작업 시켜달라고 했다며.”

“아, 네.”

“그럼 단도리 작업이나 하다가, 손 쓰는 거 봐서 코킹 작업이나 하고 가라.”

뭔 말인지 모르겠어서, 난 멀뚱거렸다.

“야! 날치!”

십장은 누군가를 불렀는데.

비쩍 마른 츄리닝 차림의 한 청년이 안전모를 쓰고 털래털래 뛰어왔다.

“네.”

“얘 좀 데리고 일해라.”

“알겠어요.”

날치를 따라가는데, 뒤에서 십장이 한마디를 했다.

“애매한 건 하지 마! 사고 치지 말고!”

“네.”

난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단도리 작업이 뭐예요?”

“공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공구 설치나 자재 준비 등의 작업 준비를 말하는 거예요.”

“아~ 용어가 생소하네.”

“그냥 편하게 시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다는 뭔지 아시죠?”

그 정도는 안다. 남 일 거드는 잡부.

약 1시간 정도.

단도리 작업이 끝날을 때쯤, 날치가 말했다.

“이제 사무실 작업 현장으로 가볼까요? 뭐, 거기서 일해야 한다고 하시던데.”

“아, 네.”

날치를 따라서 사무실로 가보니, 내부 자재 세팅 단계 같아 보이는데.

아직 사무실 차례가 안 된 것인지, 자재만 쌓여 있고 인부는 한 명도 없었다.

“자, 받으세요.”

날치는 내게 주둥이가 뾰족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실리콘 통을 건네었다.

“십장이 코킹 작업하라고 했거든요. 보시면 외벽과 걸레받이 사이에 틈 있죠? 그 사이를 지금 드린 실리콘으로 메우시면 돼요~”

“아~ 이걸 코킹 작업이라고 하는군요.”

너무 간단한 작업 같아서 좀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취지는 내 공간에서 뭐라도 손길을 닿게 하는 거였으니까.

“그럼 이쪽에서 하세요. 전 반대편에서 할게요.”

“네.”

“속도보다는 실수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천천히 해도 좋으니까요.”

“알겠어요.”

우리는 묵묵히 작업에 몰두했다.

한참을 묵묵히 일하다가.

너무 적막이 흐르니, 뭐라도 말을 걸고 싶어졌다.

“날치 씨?”

“네.”

“죄송해요. 제가 성함을 몰라서…….”

“괜찮아요. 공사판에서는 그렇게 불리는 게 편합니다.”

“네. 일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5년 됐나?”

5년?!

그 정도면 오래된 거 아닌가?

근데 왜 여적 잡부 일만 하는 거지?

방학 때만 간간이 나와서 하는 건가?

“학생이신가요?”

“아니요. 이게 제 직업이에요. 전국의 공사판을 다니고 있어요.”

“아…… 근데 왜.”

궁금했지만 섣불리 묻기가 좀 그랬다.

“왜 잡일만 하냐고요?”

“…….”

“제가 똥손이거든요.”

* * *

난 놀라서 날치를 바라봤다.

똥손?!

빈말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 한에 사무쳐서, 삶을 포기하고 체념한 듯한 말투.

분명 2년 전에 속초 사고 나기 전의 강태평. 내 모습이었다.

“진짜예요. 무슨 저주가 들린 건지. 손만 대면 망가지거나, 부서지거나, 누가 다치는데…… 진짜 십장님 아니었으면…….”

꿀꺽.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언제부터…….”

몇 달 전 분묘 개장할 때 이상한 경험을 해서일까.

난 시점이 궁금했다. 설마…….

“모르겠어요. 그냥 어릴 적부터 그랬던 거 같은데.”

휴~ 다행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네.

“이놈의 똥손 때문에 살 궁리가 마땅치 않다는 걸 십장님이 아시고, 공사판에 저를 데리고 다녀주세요.”

“아…….”

“입이 좀 거칠긴 하지만, 사람 괜찮아요.”

그사이 난 한쪽 면을 다 끝냈다.

“저 다했는데. 다음 어디 할까요?”

“네? 벌써요?”

날치는 아직 반의 반의 반도 못 했다.

그는 다가와서 내가 작업한 걸 보고서는…….

“우와! 완전 깔끔해!”

“…….”

“직접 한 거 맞아요?”

“그럼 여기 또 누가 있었나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본 코킹 작업 중에 최고인데요? 진짜 처음 맞아요?”

“아…… 네. 몰랐던 재능을 오늘 발견하게 됐네요.”

딱히 댈 만한 이유를 못 찾겠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날치는 다른 쪽 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외벽과 걸레받이 연결된 곳은 다 한다고 보시면 돼요.”

“오케이.”

난 순식간에 해치웠고.

날치는 그동안에도 한쪽 면도 다 끝내지 못했다.

난 하던 걸 멈추고, 날치 가까이에 다가가서 봤더니.

퀄리티도 아주…… 엉망진창이다.

작업한 걸 내가 자세히 보고 있자, 날치는 민망해했다.

“아유…… 저는 단도리 작업이랑 이것밖에 안 하는데도 이 모양인데. 부럽네요.”

난 날치를 바라보았다.

패배감에 절은 얼굴.

‘난 원래 이러니까, 내가 손대면 원래 그런 거니까.’

슬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 마음.

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 * *

강태평이 말했다.

“날치씨.”

“네?”

“망쳐도 좋으니까, 자신 있게 해봐요.”

“그쪽이 뭔데 망쳐도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되는 사람.”

강태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날치는 그의 말이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위엄이 느껴졌다.

“어서요.”

그리고 강태평은 실리콘 통 위에 날치의 손을 올리고, 그 위에 자기 손을 포개었다.

“자, 이대로 쭉 가는 겁니다. 망쳐도 돼요.”

“아, 안 되는데.”

뿌욱~!

실리콘 통 입구에서 강렬한 짜내는 소리와 함께.

날치의 손은 강태평의 손과 함께 과감하게 움직였다.

“히익!”

조심스럽게 하느라 새똥만큼 실리콘을 싸고 있던 날치로써는…….

이 과감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실리콘이 지나간 자리,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강태평은 웃고 있었다.

“하하, 거봐요. 아까 날치 씨가 한 것과 차이가 있나요?”

“…….”

그러고 보니 날치가 전전긍긍하며 실리콘을 짜내던 것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나았다.

“똥손이라고 해서 마음까지 지면 안 됩니다. 그냥 자신 있게 하세요. 깨지면 물어내고, 잘못되면 고치면 되는 것이지요.”

똥손 시절에 나는 갖지 못했던 마인드.

똥손인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는데, 난 왜 죄인처럼 소극적으로 살았을까.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이 너무 후회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서 많은 게 달라진다는 걸 배웠다.

나야 금손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지만.

날치라는 청년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혹은 나처럼 기연이 생기지 않는 한, 평생을 이렇게 숨죽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손. 날치 씨 탓입니까? 아니잖아요.”

“…….”

“자, 다시 한번 해보세요.”

날치는 실리콘 통을 들고 다른 면으로 갔다.

그의 손이 지나간 삐뚤빼뚤한 실리콘 자국.

내 눈에는 미흡함이 아니라, 노력과 용기로 보인다.

에이타워

* * *

날치는 속도를 내어 작업을 해나갔고, 난 그를 맞춰 주느라 일부러 속도를 조절했다.

“형님.”

날치는 어느새 부턴가 나를 형이라 부르고 있었고.

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네.”

“형님 말씀이 맞네요. 빨리하나 느리게 하나 똑같네요.”

“하하. 그렇죠?”

하지만 날치는 뭔가 개운치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난 그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이고, 그냥 자신 있게 삽시다.”

“…….”

날치에게 말하지만,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과거의 내 자신에게.

난 날치가 작업한 자리를 살피며, 너무 심하게 삐뚤어진 부분은 보완하였다.

그래도 내가 살아갈 곳인데, 보기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곧 코킹 작업은 어느 정도 끝이 났다.

“형님, 야리끼리인데요.”

“네?”

“여기까지 하면 끝이라고요. 일하시는 건 능숙하신데, 현장 용어 못 알아들으시는 거 보면 확실히 처음이시네요.”

야리끼리? 어쨌든…….

“아직 대낮인데.”

겨우 오후 3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형님 덕분에 일찍 끝났어요. 어쨌든 십장에게 지시받은 할당은 끝냈으니까, 이제 퇴근이에요.”

날치는 목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노가다가 이런 곳인가?

상당히 실적주의네.

“형님, 안 가세요?”

“먼저 가요. 전 좀 더 하고 갈게요.”

“네?”

날치는 내가 이 건물의 주인이 될 거란 걸 모른다.

인부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납득이 안 되겠지.

“열심히 해봐야 몸만 축나요. 일 잘하는 거 십장이 알게 되면 더 까다로운 일 시킬 텐데?”

“…….”

“적당히 하는 게 좋다고요. 적당히. 좋을 게 없어요.”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내가 살 곳인데 적당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 지금 적당히 할 수가 없어요. 이 일이 너무 중요하거든요.”

“네? 돈 받는 건 똑같다니까요?”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이 중요하지.”

“…….”

날치가 멍하니 날 바라보는데.

감명을 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와…… 형님. 짱 멋있다. 저 이렇게 노가다판에서 소명 의식 갖고 일하는 잡부는 처음 봐요.”

“…….”

그냥 여기 주인이라는 걸 얘기해야 하나.

주인이라는 단어만 빼고 대화를 하니, 불필요한 오해를 받네.

“사람이 살아갈 곳이니 대충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이제 뜻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냥 주인이라고 말을 할까.

“직업에 귀천 없다. 잡부도 천직이다.”

“그만해…….”

날치는 이제 날 위인 보듯 바라봤다.

“아까 실리콘 바를 때도 그렇고…… 저 오늘 형님한테 여러 차례 감명받네요. 좋습니다. 더 하죠. 저도 소명 의식으로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야리끼리? 됐다 그래~ 씨바.”

날치는 전투력이 상승하여, 목장갑을 다시 끼었다.

* * *

저녁 6시경.

전기공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부 공사는 다 끝났다.

날치가 손재주는 없어도 경력이 있어서인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즉, 날치는 감독하고 난 일하고.

“에이~ 형씨! 그거 아니라니깐.”

“뭐어? 형씨?”

“앗, 죄송요.”

간혹 일에 집중해서 나한테 말을 너무 편하게 할 때도 있었지만.

꽤 재주가 있었다.

본인 손재주가 없어서 뭐든 할 때 많은 궁리를 해서일까.

일의 절차와 노하우에 대해서는 정말 빠삭했다.

그러니까,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해온 것이다.

그 덕분에 공사도 빠르고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난 마무리로 침실의 내장 벽지를 깔끔하게 붙인 후, 날치를 향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야리끼리?”

“오케이! 야리끼리!”

찰싹.

우리는 힘차게 하아파이브를 했다.

“형님, 실력 좋다. 우리 좋은 파트너가 될 거 같은데. 계속 나랑 같은 조 하자~”

“하하. 글쎄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말을 편하게 했다.

“왜~ 하자~ 완전 나랑 찰떡인데.”

“글쎄. 생각해볼게.”

난 진심을 담아 말했다.

“형이 일해보니까, 너 머리가 상당히 좋거든?”

“에이~ 무슨 소리야.”

“아니야. 정말이야. 네가 손이 딸리니까, 평소에 머리를 많이 썼나 본데.”

“…….”

“인부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좋겠다. 머리가 좋아.”

“훗. 살다가 머리 좋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네. 고마워 형님.”

* * *

탕. 탕.

어디선가 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십장이 연장을 들고 입구에 서 있는데, 그 뒤에는 박 사장이 있었다.

두 사람 다 완벽하게 내부 공사가 끝난 걸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는데.

탕. 탕.

십장은 표정과는 달리 거칠게 말을 뱉었다.

“야, 누가 시키지 않은 거까지 하라고 했어?”

십장의 인상 쓴 모습에 날치는 당황하여 황급히 대답했다.

“하다보니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요.”

“네가 일을 알아 미친 새끼야?”

“못 해서 그렇지, 알고는 있어요.”

“그게 모르는 거야. 새끼야.”

십장은 말끝마다 ‘새끼’를 붙였고.

스타일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듣기가 참 거북했다.

“거, 그만 좀 하시죠. 잘했으면 그냥 잘했다고 하면 돼지.”

강태평은 결국 한마디 했고.

십장의 흰자위가 커졌다.

“뭐?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귀가…….”

“내 조카. 조카.”

박 사장이 옆에서 툭툭 건드리며 말했고, 십장은 강태평에게 욕을 퍼부으려다가 삼켰다.

“박 사장님. 앞으로 이런 부탁 하지 마쇼. 경험 없는 애 막 일 시켰다가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

박 사장은 대꾸하지 않았고.

강태평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긴, 문제 생기면 다시 돈 들여서 고치면 돼지.’

“하여간 일도 못 하는 것들이 욕심만 있어서는…… 현장이 장난이야? 소꿉장난이냐고.”

십장은 내부를 꼼꼼히 살피면서 계속 시불거렸는데.

‘시바, 뭐야. 왜 이렇게 잘했어?’

꼼꼼한 마감. 견고한 박음질. 디테일이 살아있는 끝선.

수십 년 경력의 인부가 작업한 것 같았다.

“날치.”

“네.”

“내부 공사 너가 한 거 아니지?”

“저기…… 형님이.”

날치는 강태평을 가리켰고.

십장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야, 너 내일부터 일 나올래?”

노가다 판은 실력 위주의 사회였다. 좀 전까지는 욕하고 막말하더니, 바로 태세가 바뀌어 제의하고 있었다.

“단가 높은 거로 시켜줄게.”

강태평은 피식 웃었다.

“글쎄요. 제가 좀 바빠서. 박 사장님.”

“응? 아, 네.”

강태평은 이제 박 사장을 삼촌이라 부르지 않았다.

연기가 끝난 것이다.

“오늘 기회 주셔서 감사하고요. 좋은 경험 했습니다.”

“아, 네. 강 사장님.”

십장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강태평과 박 사장을 번갈아 보았다.

“뭐, 뭐에요?”

박 사장은 짧게 설명했다.

“이 건물 주인일세. 오늘 현장경험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

“네?! 이, 이 새끼…… 분이?”

십장은 말을 더듬거렸고.

강태평은 신경 쓰지 않고 십장에게 말했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아 네…….”

강태평은 박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현장 인사권이 있으십니까?”

“네, 물론이죠.”

“십장이 한 명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작업 분야별 반장을 십장이라고 부르니까요.”

“그러면 이분을 십장으로 써주실 수 있으십니까?”

강태평은 날치를 가리키며 말했고.

“네?!”

박 사장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반문했다.

날치는 놀란 표정으로 강태평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형님이라고 불렀던 강태평이 건물주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나보고 십장을 하라고?’

“아…… 그건 좀.”

박 사장은 선뜻 대답을 못 하였지만.

강태평은 물러서지 않았다.

“주제넘은 거 압니다. 그래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뭐…… 그렇게까지.”

박 사장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날치와 강태평. 겨우 반나절 본 사이인데, 그렇게 정이 들었나?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날치 씨에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잘하실 거예요.”

“…….”

박 사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하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잠시 생각하더니.

“알겠습니다. 현장 관리인에게 얘기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태평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벅. 저벅.

강태평이 나간 뒤.

십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이 건물주라고요? 노가다 판에 20년 이상 굴러먹은 실력인데?”

그는 다시 강태평이 작업한 곳을 살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 사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20년 굴러먹었으면 초등학생 때부터 노가다했다는 건데. 무슨 말도 안 되는…….”

“해놓은 거 보세요. 이게 진짜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리고 날치를 향해 말했다.

“너 뭐야? 낙하산이야? 난 십장되는데 몇 년이 걸렸는데?!”

날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저도 참 당혹스럽네요.”

날치, 강태평의 낙하산 타다.

* * *

1개월이 더 지났다.

드디어 박 사장에게 최종 통보 메시지가 왔다.

‘ANLF타워 완공했습니다.’

ANLF 타워.

(Asella Nursery school & Love Fortress)

아셀라 보육원과 사랑산성의 영문 첫 글자만 따서 지은 이름이다.

처음에 큐브타워(네모타워)라고 하려 했는데, 직원들이 ‘네모’ 좀 그만 쓰자고 난리를 쳐서.

ANLF 타워로 이름을 지었다.

다만 이름 부르기가 어려워서, 우리는 약어로 에이 타워(A tower)라고 부른다.

변 이사는 문자 받은 내용을 직원들에게 공유해 주었고.

―우와~!

―하하!

―드디어!

―언제 이사 가면 돼요?!

―짐도 없잖아~ 오늘 가요!

직원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들 이 건물이 완공되기만을 기다렸다.

단순히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산성’의 성과.

우리가 지금까지 열정을 갖고 해왔던 것들.

그 결과에 대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나 또한 ‘완공’이라는 연락을 받으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변 이사는 내게 말했다.

“강 사장님, 완공식 일자 잡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완공식이요? 그런 것도 해요?”

“그래~ 당연히 해야지. 낮술도 한잔하고.”

“하하.”

변 이사는 신나서 말했다.

“우리 기뻐할 일 있을 때는 마음껏 기뻐하자고. 인생 너무 빡빡하게 살 필요 없잖아.”

난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할까요? 레스토랑 직원들도 포함해서 사랑산성에 기여한 모든 분 다 초대하죠!”

“아~ 좋지!”

난 김지안에게 말했다.

“김 대리! 들었지? 설수민 사장님께도 연락드려.”

“알겠습니다!”

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완공식 날. 수서동 에이 타워.

이 건물의 설립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런치와 디너 직원들.

아셀라 보육원의 김성애 수녀님.

강레오 형님.

네모튜브.

영웅옥션.

진일상사 동료들. 민경원 사장은 빼고.

다들 반갑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 사장님, 이제 시작하지. 오실 분들은 다 온 거 같은데.”

“아, 얘가 좀 늦네. 잠시만요. 하여간 시간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왜? 누구 기다리는데.”

“설립 멤버요.”

“무슨 멤버?”

말 끝나기가 무섭게 택시 한 대가 올라왔고.

철컥.

뒷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헤. 안녕하세요. 오랜만~”

변 이사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변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홍지아.

홍지아는 웃으며 인사했지만, 변 사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머, 아는 척도 안 하기에요? 그렇게 매몰차게 내보내시더니? 호호.”

변 이사는 울고 있었다.

홍지아도 눈시울이 불거져 있는데, 애써 웃으며 말했다.

“헤헤. 민망하다.”

“지아야, 미안해.”

변 이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인연의 힘

* * *

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의아했다.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최경리와 오 대리는 가만히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우우우…….

변 이사는 소리를 죽이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히잉. 왜 자꾸 울어요.”

홍지아도 결국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입주식이야 조금 늦춰서 해도 되니까.

난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죄송한데.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10분 정도만…….”

양해를 구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건물 뒤 공터.

변 이사, 홍지아,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 원년 멤버가 모였다.

사랑산성의 시작은 제로백 컴퍼니였고, 제로백 컴퍼니의 시작은 촬영 1팀. 촬영 1팀의 시작은 영업 3팀이었다.

우리는 빛을 보지 못하던 시절부터 함께였다.

“오랜만이네요.”

난 웃으며 말했고, 변 이사와 홍지아는 여전히 어색한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홍지아 씨도 그만 울고.”

홍지아는 찡찡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변 사장님이 울잖아요. 난 꾹 참고 있었는데. 울어야 할 사람은 나거든요?”

홍지아는 높은 목소리로 말했고.

변 이사는 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미안해…….”

“자꾸 그러지 마요~ 힝.”

난 가만히 변 이사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당시에 홍지아를 잡지 않은 변 이사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장이 된 지금. 변 이사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한정된 인력으로 회사를 운영해 가야 하는 초창기 상황이었다.

사장이 먼저 내보낸다는 것도 아니고 직원이 변심한 거였다.

뒤늦게 성과급 때문에 마음을 돌렸던 건데…… 그런 직원이라면 함께 하기에 고민이 되었을 것 같다.

변 이사는 이제 고개를 들고 홍지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때 내 원망 많이 했지? 미안해. 당시엔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하지만…… 후회 많이 했어.”

“…….”

“책임감 때문에 회사 생각만 했었어. 적어도 만년 팀장이던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니에요…… 제가 먼저…….”

변 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홍지아의 말을 끊었다.

“아니야. 가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그 순간엔 내가 가족처럼 대하지 못했어. 딸 버리는 아빠가 어딨어.”

“변 사장님…….”

홍지아는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여전히 변 이사를 사장이라고 불렀다.

“잘됐네.”

난 씩 웃으며 말했고.

변 이사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가 잘 돼?”

난 웃으며 말했다.

“에이 타워 관리자가 필요해서, 홍지아 씨 채용하려고 하거든요.”

“…….”

변 이사는 눈물을 뚝 그쳤다.

“건물관리? 홍지아가 건물관리를 한다고?”

“현장 전문 관리인도 당연히 채용할 거지만, 에이 타워 관리 담당으로 사랑산성 정직원 TO를 하나 늘리려고요.”

“아…….”

“이왕이면 검증된 인력을 선발하고 싶었거든요. 홍지아 씨도 오고 싶다고 하고요. 변 이사님과 껄끄러울까 봐 염려했는데.”

난 손가락을 겹쳐 네모로 만든 후, 두 사람을 그 안에 담으며 말했다.

“그림 좋네요.”

홍지아는 변 이사에게 손을 쭉 내밀며 말했다.

“변 사장…… 아니. 변 이사님! 잘 부탁드려요.”

“으응…… 그래.”

변 이사의 대답이 어째 좀 떨떠름 하다. 놀라서 그런 거겠지?

“변 이사님?”

“어~ 좋아. 어서와! 환영해~ 하하.”

* * *

입주식 컷팅을 마치고, 우리는 에이 타워 식당으로 들어왔다.

보육원 아이들이 식사할 공간인데, 오늘만 연회장으로 꾸몄다.

음식은 뷔페식으로 준비했는데.

팔보채, 수비드 안심구이, 샥스핀 탕 등 지금까지 만들었던 고급 음식들에 더해서.

수제 군만두, 딤섬, 로제 떡볶이 등의 대중적인 음식까지.

런치 직원들이 재료 준비와 플레이팅 등 보조를 맞춰 주었고, 모든 조리는 내가 다했다.

요리는 꽤 오랜만에 하는데.

역시 손에 착착 달라붙는다.

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아. 여러분. 오늘 음식은 다 제가 만들었거든요?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제 손맛 아시죠? 하하. 마음껏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와 대박!

―떡볶이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역시~ 믿고 먹는 강 사장님 음식.

― 사장님~ 외식 사업 확장하시면 안 돼요?

―맞아. 체인점 내고 싶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사람들은 좋아했다.

탁 트인 통유리 창밖으로 대모산 자락과 서울 시내를 보며.

와인과 샴페인. 맛있는 음식.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무르익었다.

난 오늘의 호스트인 만큼 초대한 사람들을 돌며 인사를 나눴고.

가장 먼저 큰 어른께 갔다.

“어머니~ 형님~”

김성애 수녀님과 강레오 수사님. 두 분은 함께 앉아 계셨다.

“아이고~ 우리 아들~”

난 수녀님 옆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내 등을 쓸면서 말씀하셨다.

“장하다~ 장해. 우리 아들 출세했네~”

“하하.”

“레오야. 태평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너무 신기하지 않니?”

강레오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고.

도리어 내가 수녀님께 반문했다.

“엇, 방금 무슨 뜻이에요? 넌 어릴 적부터 뭔가 좀 남달랐어~ 이렇게 나오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녀님은 참 정직하시다.

“에이…… 솔직히 그건 아니지.”

“…….”

그리고 수녀님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하긴, 너가 노력할 줄은 알았지. 뭐만 만졌다 하면 사고만 치면서도, 가장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니까.”

수녀님은 빙그레 웃었다.

“맞네~ 그게 남다른 거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거? 살아갈 궁리를 찾는 거.”

그냥 간단하게 생존력이 강하다는 말을 하는 건데.

그렇다. 난 내 저주받은 손에 불만은 많았지만, 삶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생각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참 신기하긴 해. 이 거대한 건물을 태평이가 올렸다는 게.”

그때 잠자코 있던 강레오 수사가 말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겠죠.”

강레오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너가 저주라고 생각했던 시간. 그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을 거야.”

역시 말씀하시는 게 수사님답다.

웃으며 대화하던 자리는 수사님 덕분에 분위기가 묵직해졌고.

수녀님이 웃으며 말했다.

“얘는 참.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이 분위기 어쩔 거야. 갑자기 경건해지잖아.”

사회생활 오래 하신 수녀님이 확실히 다르다.

“하핫. 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라서. 태평아~ 형 산속 수도원에 있잖아. 이해해줘~”

“하하. 알았어요~ 그럼 전 인사해야 해서……. 맛있게들 드세요.”

난 자리를 이동했다.

지금도 간혹 나가고는 있지만, 예전처럼 자주 못 보는 얼굴들을 향해 걸어갔다.

“여어~ 네모의 신~”

네모삼촌이 날 향해 손을 흔들었고.

정카가 술잔을 찰랑이며 말했다.

“술 따라놨어요~ 어서 와요.”

“하하.”

난 자리에 앉자마자 네모튜브 사람들과 원샷부터 했다.

네모씨는 곧바로 다시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태평씨 축하해요. 건물 진짜 멋지게 잘 지었네.”

“감사합니다.”

정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건물 올릴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그것도 강남에? 이게…… 돈만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닐 듯싶은데.”

“내 집은 언제 생기냐…….”

옆에서 네모삼촌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하. 그러고 보니 저도 아직 집은 없네요. 이 건물은 회사건물이나 마찬가지고요.”

물론 등기부등본에 소유주는 나로 되어 있고, 자본 또한 100% 내 자본이다. 심지어 대출도 안 끼어 있다.

때로는 모든 진실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 맘 편하라고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건물 짓는데 운이 많이 따랐습니다. 아니, 운이라기보다는 인연의 힘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인연의 힘?”

“네. 뭐라고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그냥 지어진 건물은 아닙니다. 하하.”

나와 내 사람들의 추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

어쩌다가 보육원 땅 주인은 땅을 팔려 했고, 무리해서라도 내가 그 땅을 사게 되었으며, 우연히 거기서 많은 이득 얻었기에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앞일은 모른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

네모씨가 말했다.

“네모의 신님은 언제 복귀하실 건가요? 요즘 얼굴 안 비치신다고 팬들이 난리입니다.”

정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네모천국. 빡세. 빡세…….”

난 대답 대신 빙그레 웃자, 네모씨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아니죠?”

네모씨는 내가 네모 튜브를 완전히 떠나게 되는 걸 염려했다.

“예전처럼 자주 찾아뵙기는 어렵겠지만, 저 또한 종이접기가 너무 좋아져서요.”

이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 분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아니라, 저희 사랑산성과 비즈니스 하셔야죠. 조만간 큰 프로젝트 한번 하시죠.”

네모씨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좋죠! 대환영입니다. 연락만 기다리고 있을게요.”

짠~!

우리는 크게 잔을 부딪쳤다.

“네모튜브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전 앞으로도 계속 네모의 신이에요.”

처음엔 부끄러웠던 활동명.

이젠 입에 착착 붙는다.

“고마워, 태평씨.”

네모삼촌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우리 함께 일본 오리가미(종이접기) 본부에 가는 꿈 꿔봐도 될까?”

“네? 아 뭐…… 좋으실 대로.”

꿈꾸는 건 자유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영웅 옥션으로 갔다.

이정수 팀장만 부르고 싶었으나, 혼자 뻘쭘할 것 같아서 동료들과 함께 오라고 했다.

“강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이정수 팀장은 평소처럼 내게 깍듯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 팀장님 덕 많이 봤습니다. 하하.”

“뭘요. 저희에게 의뢰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술잔 나누는 동안 이정수 팀장은 비즈니스와 관계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룬 성과를 축하해주며, 건물에 대한 칭찬뿐이었다.

난 그의 이런 배려와 깔끔함이 참 좋다. 이러니 다른 거래처를 찾을 이유가 없다.

결국, 내가 먼저 얘기했다.

“이 팀장님. 앞으로 보석 세공 사업을 키울 생각이거든요.”

“네.”

“준비 좀 부탁드립니다. 전 영웅 옥션과 일하고 싶어서요.”

솔러 루비 거래 시에 잠시 중개역할을 했을 뿐, 영웅 옥션은 미술품만을 다룬다.

하지만 경매 루트를 알기에, 난 이들이 준비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진일상사 동료들과는 가볍게 인사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회사에서 내가 있던 영업 3팀은 외딴 섬 같았다.

민경원 사장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를 무시했었다.

지금 온 동료들과 나 사이에 친분은 거의 없다. 변 이사가 그래도 불러야 하는 거라고 해서 초대했을 뿐이다.

그들이 대부분 하는 얘기는 자리 생기면 연락 달라는 거였는데.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아무래도 보육원 건물 짓는 거 보고 착각했나 본데, 난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자리 생기면 연락 달라는 말에는 건성으로라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 사장님~

―휘이익~

이제 내 진짜 식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런치와 디너 직원들은 날 열렬히 환호해주었고.

변 이사 이하 사랑산성 직원들 또한 빙그레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자~ 모두 주목!”

난 오 대리가 건넨 잔을 높이 들고 직원들을 바라봤다.

“우리 축하는 잠시만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하죠. 먼저 할게 있어서.”

직원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승진 발표가 있겠습니다~”

나아가자

* * *

―승진?

―갑자기?

런치와 디너 직원들은 웅성였고.

강태평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것도 없는 회사를 열정만으로 버텨준 고마운 직원들이 있습니다.”

강태평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말씀하셨죠. 직원들에게 고마우면 입으로 말고, 성과급으로 보여주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거든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공치사하고 싶네요.”

강태평은 외부에서 온 손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짧게 하겠습니다. 잠시만 함께 들어주시겠습니까?”

짝 짝 짝

네모튜브, 영웅옥션, 진일상사 등 외부 사람들은 박수로 대답을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강태평은 인사를 한 후, 말을 이어갔다.

“최경리 과장.”

강태평에게 이름이 불리자, 안 그래도 경직된 최경리의 얼굴이 더 경직됐다.

“겉모습은 딱딱하지만, 속은 따뜻하고 깊은 사람입니다. 겉바속촉이죠. 하하. 외부 업무가 많아서 직원들이 다 정신없고 바쁠 때, 안 살림을 잘 맡아주어서 늘 고맙습니다.”

“…….”

“특히 사랑산성 런치 레스토랑은 최 과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안정적으로 유지되기가 불가능했을 거예요.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최경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볼이 울룩불룩. 울컥거림을 참고 있었다.

“오늘부터 최경리 차장입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사람들의 박수에 최경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강태평과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강태평 또한 최경리에게 목례로 답했다.

“승진 처우로서, 연봉 50% 인상됩니다. 성과급은 지금처럼…… 알죠?”

―우와~

연봉 50% 올라간다는 말에 주변에서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사랑산성은 성과급이 중요하다. 직원들이 잘 알고 있다.

강태평은 다음 사람을 불렀다.

“앤더슨 오 대리.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오 대리는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엇…… 저두요?”

강태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앤더슨 오 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이중국적자이며, 세계적인 기업 출신입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인재죠. 근데,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며 한국에 왔고, 자진해서 군대까지 다녀왔습니다.”

이 말에 오 대리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근데 같이 일해보니…… 처음엔 징그럽다며 해산물 못 만질 때는 군대 갔다 온 게 맞나 좀 의아하기도 했었지만. 하하.”

하하!

좌중에서도 웃음소리로 터졌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습니다. 스마트 하고, 아는 것도 많으며, 심지어 융통성도 있습니다. 같이 일하면서 제가 도리어 오 대리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인재를 만난 게 정말 행운이라고…… 혼자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오 대리는 살짝 울컥해서는 말했다.

“아이…… 사장님. 제가 감사하죠.”

강태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 고마워. 오 과장.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사, 사장님…….”

강태평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앤더슨 오 과장입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사람들의 박수에 오 과장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강태평은 이어서 말했다.

“연봉 50% 인상. 승진 처우는 동일합니다. 불만 없지?”

“하하. 지금도 차고 넘칩니다. 회사 다니면서 돈 걱정은 안 하게 됐어요.”

오 과장이 자리에 앉은 뒤.

강태평은 김지안을 바라봤다.

“김지안 대리.”

“…….”

그녀는 집안 환경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학원 한번 못 다니면서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입학했고, 등록금 등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다.

설수민, 변성준, 강태평을 만나서, 노력했던 시간이 빛을 발하고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생 많았어. 김 대리는 리더감이야, 리더. 앞으로도 우리 회사에 계속 있어 주면 좋겠네. 딴 데 갈 생각 하지 말고.”

강태평은 김지안의 개인신상과 업적에 대해서 길게 말하지 않았다.

“갈 리가 없잖아요.”

김지안은 눈가를 훔치며 웃었고.

강태평은 그녀를 가리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김지안 과장입니다. 모두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짝 짝 짝

김지안까지 승진 발표가 난 후, 변 이사는 강태평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강 사장님, 잘했어. 직원들 사기 제대로 올려줬네.”

“…….”

“이쪽으로 와봐~ 금강 사무소 박 사장님도 한 잔 드려야지. 건물 올리느라 고생 많았는데.”

“잠시만요.”

강태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 * *

“어?”

변 이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강태평을 바라봤고.

강태평은 변 이사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 설마…….”

“마지막 변성준 이사님입니다.”

강태평은 옆에 선 변 이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모르시는 분들도 있겠네요. 우리 회사 ‘사랑산성’의 전신이 ‘제로백 컴퍼니’였습니다. 그리고 변 이사님은 제로백 컴퍼니의 사장님이셨고요.”

영웅 옥션이나 금강 건축사사무소 등 첫 거래를 사랑산성과 한 곳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 그랬구나.

―어쩐지, 강 사장님이 변 이사님을 너무 깍듯하게 대하더라.

―근데 어떻게 보면 대단한데? 부하직원을 사장으로 모시고 있는 거잖아?

강태평은 술렁이는 소리를 묻으려는 듯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랑산성은 제로백 컴퍼니의 모든 부분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변 이사님은 이 회사 그 자체이십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강태평의 말에 집중했다.

“이 건축 프로젝트의 담당이기도 하셨고요. 사랑산성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인재이신데. 이런 날 승진 대상에서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하하.”

이 말에 최경리, 앤더슨 오, 김지안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변 이사님은 인정이지!”

“변 이사님~ 사랑합니다~”

강태평은 소리치는 이들을 가리킨 후 말했다.

“오 과장과 김 과장을 채용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둘 다 제로백 컴퍼니 때 입사했거든요.”

좌중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변 이사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왜 이래…… 부끄럽게.”

“변 이사님이 저라면 안 그러셨겠어요?”

“에이…… 임원이 무슨 승진이야. 지금도 충분해.”

강태평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아니요. 상무로도 부족해요.”

“뭐어?”

강태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변성준 이사님은 오늘부터 변성준 전무입니다.”

변 전무는 깜짝 놀랐다.

“뭐어? 강 사장!”

사람들 또한 놀라서 수군거렸다.

―대박. 이사에서 전무?!

―두 계급 승진이야?

―신임이 대단하네.

강태평은 눈을 찡긋하고 변 전무에게 말했다.

“공개된 자리니까, 욕하시면 안돼요.”

“혹시 그래서, 일부러 이런 자리에서…….”

“하하.”

강태평은 큰 소리로 웃었다.

변 전무가 고사할 것을 알고, 일부러 사람 많은 장소를 택한 것이다.

연 매출 30억 정도의 조그만 회사에서 나이 오십이 되도록 팀장이었던 변성준.

2년 만에 전무가 되었다.

그것도 내년에 연 매출 500억이 기대되는 회사에서.

내년이니까 그 정도지, 2, 3년 뒤에는 몇 배나 커질지 가늠이 안 된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태평은 변 전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말했다.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립니다.”

“나 55세 되면 은퇴할 건데.”

이 말에 강태평은 무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누구 맘대로요?”

변 전무는 놀라서 눈을 껌뻑이며 그를 보다가.

“하하하.”

강태평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크게 웃었다.

* * *

일주일 뒤.

아셀라 보육원의 에이타워 입주날.

짐들이 먼저 다 들어온 뒤.

늦은 오후, 보육원 아이들이 버스로 도착했다.

―꺄아~ 완전 좋아!

―진짜 오늘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와…… 서울로 오길래 설마설마했는데.

―말도 안 돼 진짜…….

난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기분 좋다. 마음이 뿌듯해지고 보람을 느꼈다.

어딘가 항상 그늘져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오늘은 햇살에 밝게 빛났다.

얼굴에 설렘이 가득하고, 어두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태평이 형~”

아이들이 각 침실로 이동하는 걸 돕고 있는데, 한 아이가 날 불렀다.

“어~ 민우야.”

김민우. 올해 16세.

내가 보육원에 생활했던 막바지 때 민우는 아기였다.

난 고등학생 때부터 보육원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었다. 물론 똥손이라서 손 많이 가는 건 피했지만.

근데 참 희한하게도 민우에게만은 내 손이 닿아도 별문제가 안 생겼다.

그래서 민우는 젖 먹는 것 포함해서 내가 전담으로 맡았었다.

내겐 친동생 이상인 녀석.

“형~ 여기 너무 좋아.”

“하하. 그러냐?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

민우는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하지만 웃었다.

보육원 아이들의 눈물 흘리는 방식이다.

눈물은 흘리지만, 애써 울지 않는다.

“형, 나 정말 잘할게.”

“그래~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잘 자라야 해~”

그리고 난 민우에게 말했다.

“형한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형이 좋아서 한 일이니까.”

민우는 혀를 쭉 내밀며 말했다.

“형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우리가 고마워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리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하하, 뭐 인마?”

민우의 말이 재밌어서 난 그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민우는 갑자기 뒤돌아서 아이들을 향해 손짓했고.

―지금?!

―하하. 좋아!

“어? 어?”

난 아이들 손에 이끌려 에이 타워 정중앙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형. 여기서 기념사진 한번 찍자.”

“좋지. 근데 어머님이랑 수녀님들 모셔서 같이…….”

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나중에 또 찍으면 되고, 지금은 우리 형제들끼리 찍자~”

한 아이가 벌써 카메라를 들고, 멀찍이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민우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렇게라도 형을 세워주고 싶어서 그래. 지금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

“형은 특별하니까.”

난 민우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래, 그러자.”

자세를 잡자, 한 아이가 녹슨 삼각대 위에 조그만 디카를 올려놓고 달려왔다.

그리고 민우가 크게 선창했고.

“태평이 형!”

모든 아이들이 함께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찰칵!

울컥.

아이들이 외칠 때 뭔가 느껴졌다.

사진을 찍은 후 아이들이 사방에서 날 안아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어쩌지 못하는데.

코끝이 찌릿했다.

―형.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저희 잘할게요.

―고맙습니다.

난 아이들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도 더 열심히 살아볼게. 고맙다. 우리 함께 힘내자.”

민우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형, 우리 준비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응? 뭔데?”

“형, 고소공포증 없지?”

“어?”

우르르.

아이들은 날 들어 올렸다.

“어? 어?”

휘이익―

아이들은 날 하늘로 던졌다.

“아이고~”

꼬맹이들이 어쩌려고…….

처음엔 무서웠다.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하늘 위로 잘만 날았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하늘을 훨훨 날았다.

* * *

에이 타워 옆의 별관.

새로운 사랑산성의 사무실.

저녁 8시.

완전히 어두워진 시각, 사무실 2층의 바(bar)에서 나와 변 전무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경 좋네.”

2층이지만 건물이 대모산 중턱에 있어서,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인다.

오늘 사무실 이사는 다 끝마쳤다.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한단 말이지?”

“하하.”

변 전무의 말에 난 웃었다. 나도 사실 실감이 잘 안 난다.

“자~ 한잔해~”

짠!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각자 위스키 10잔은 넘게 마신 것 같다.

“회사생활 하면서 별일을 다 겪어보네. 바가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를 다 해보고 말이야.”

“좋죠?”

“당연히 좋지~ 자! 한 잔 더 해!”

짠!

벌컥. 벌컥.

꽤 마셨지만, 취기가 잘 안 오른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일까.

“근데 김정식 의원님은 왜 안 부른 거야?”

“불렀죠. 오늘 일이 있으시다고 못 온다고……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하던데요.”

변 전무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불렀을 때 김 의원이 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아~”

변 전무는 탄식을 하며 신문을 펼쳤다.

“이거 봤어? 어쩔 거야?”

Love fortress is a company that has been established for over a year…….

(사랑산성이 만든 솔러 루비 반지. 사랑산성은 설립된 지 1년 된 회사로서…….)

오후에 앤더슨 오 과장이 전해준 ‘맨하튼 타임즈’에 실린 기사.

솔러 루비 반지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낙찰된 지 몇 달이 지나도 국내 언론이 잠잠하기에 보안 유지에 성공했나 싶었는데.

외신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변 전무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내일 되면 장난 아닐 거 같은데?”

“…….”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다가, 에이 타워까지 보고 나면 더 난리 나겠어.”

어쩌겠는가. 감당해야지.

물길 따라 흘러가야지.

“영원한 비밀은 없나 봅니다. 일 커지겠네요. 하하.”

변 전무는 내가 웃는 걸 황당하게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강태평이 많이 변했네. 조그만 일에도 전전긍긍하던 사람이었는데.”

짠~!

우리는 잔을 부딪쳤고.

변 전무는 한숨 섞인 말을 토해냈다.

“그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난 이 나이 먹고 누구 덕분에 일복이 터졌구만.”

“하하.”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가.

“태평아.”

“네.”

“그때 말이야.”

“…….”

“사실 나 너 이용했었어.”

“…….”

“제로백 컴퍼니 막바지 때 말이야. 민 사장과 설수민 사장 말이 맞아. 너 이용했었어.”

변 전무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업이 너무 잘 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 당시 내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만 했었으니까. 난 널 이용했던 게 맞아. 의심의 여지 없이.”

“…….”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변 전무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저도요.”

난 변 전무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선배님 이용했어요.”

“뭐?”

“저의 팀장님일 때부터 지금까지 쭉이요.”

변 전무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서는 말했다.

“태평아…….”

난 그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요. 서로 의지하고 이용하면서요.”

“…….”

“계속 건강하셔야 해요.”

똥손이 금손으로 바뀌어 살아온 지난 2년.

여러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것들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을 뿐.

근본은 똑같다.

변 전무도 없던 사람이 나타난 게 아니다.

몰라봤고 뒤늦게 발견했을 뿐.

연못에서 산신령을 만났을 때, 내 입으로 했던 말.

그 말이 진실이지 않을까?

‘똥색인지 금색인지 내 피부 속에 어떤 색이 입혀져 있는지 모른다.’

“한잔해!”

변 전무와 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아직 몰라볼 뿐, 소중하고 귀중한 것 투성인 세상.

다가올 미래가 기대된다.

《금손으로 살아가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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