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110화 (110/156)

일 나겠네 (1)

* * *

“할아버지! 잠깐만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헉.

왜 이렇게 숨이 가쁘지. 진짜 한참 숲속에서 헤매다가 온 것처럼…….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는데, 침대보마저 축축할 정도였다.

꿈속에서는 꿈이라고 확신했는데.

이상하게 깨고 나니, 현실처럼 느껴지네.

창밖은 푸르스름했다.

아직 해뜨기 전 새벽인 거 같은데.

‘05:14’

“아, 이런 너무 일찍 깼네.”

알람을 6시에 맞춰놨었다.

조금 더 자려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에이~, 그냥 일찍 가자.”

잠도 안 오고 해서, 난 그냥 출근 준비를 했다.

4호선 수유역.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철 안에 자리가 꽤 있었다.

보통 출근 시간에는 앉아서 가기 힘든데.

막상 앉으니 졸음이 몰려 온다.

꾸벅. 꾸벅. 졸면서 가다가.

간간이 눈을 뜨고 어느 역까지 왔는지 확인했다.

‘이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곧 있으면 충무로역. 여기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양재역까지 간다.

음?!

졸다가 지나칠까 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맞은편 앉은 남성분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데.

그는 핸드폰을 보다가. 내 얼굴을 한번 보고.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핸드폰을 보고.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자꾸 그러니까 신경 쓰였다.

혹시 손끝에 매니큐어 발랐나 봤다.

‘그것도 아닌데.’

아주 남자다워 보이는데…….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가다가, 충무로역에 도착했다.

‘수서행. 수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사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3호선을 탔다.

이제 좀 시간이 지나서일까.

앉을 자리는 없었다. 여느 때처럼 선 채로 손잡이에 몸을 맡기고 흔들흔들 역을 지나쳐가고 있는데.

내 옆에 선 여성분.

핸드폰을 보다가. 내 얼굴을 한번 보고.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핸드폰을 보고.

아까 4호선에서 맞은 편에 앉은 남성의 행동과 똑같았다.

근데 이번에는 그런 사람들이 좀 더 있었다.

내 옆 여성분 포함해서 한 3명 정도.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요즘 내 주변에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난 최대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만 봤다.

‘이번 역은 양재역. 양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 * *

사랑산성 도착.

현재 시각 7시 15분.

출근 시간보다 거의 2시간 빨리 도착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멍하니 있기도 심심해서 청소나 할 생각에 마대 자루를 들었다.

디너 영업 끝난 후 청소를 하고 가기 때문에, 딱히 치울 것도 없었다.

전체 바닥 다 미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아직 8시도 안 됐다.

내 사무공간인 3번 룸으로 들어와서, U자형 의자에 신발 벗고 올라갔다.

이제야 좀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다.

“의자가 넓어서 참 좋아.”

U자형 모양에 맞게, 옆으로 몸을 살짝 말아서 누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

“사장님?”

“…….”

“사장님?!”

번쩍!

동그랗고 큰 눈,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새빨간 작은 입술이 내 눈앞에서 오물거렸다.

“괜찮으세요?”

비몽사몽 간에 누군지 못 알아봐서, 눈을 찌푸리고 한참을 봤다.

“으…… 응?!”

난 화들짝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김, 김지안 대리! 자기가 여기 왜 있어?!”

“네? 근무 시간에 회사에 있어야지 어디에 있어요.”

“…….”

아……. 내 방이 아니구나.

내가 요즘 속이 허한가? 왜 이러지.

이제 좀 정신이 든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어…….”

난 머리를 흔들고는 물었다.

“지금 몇 시야?”

“9시 30분이요.”

“헐…….”

잠깐 눈 감는다는 걸, 2시간을 자버렸네.

“왜 안 깨웠어?”

“힘들어 보이셔서요. 앓으면서 주무시길래.”

내 몸 위로 얇은 모포가 덮어져 있었다.

“더 주무시게 놔두려고 했는데, 지금 비상 상황이라.”

“뭐? 왜?! 무슨 일 있어?”

‘비상 상황’이라는 단어에 조금 남아있던 잠도 확 달아났다.

김지안은 대답 대신 웃었다.

비상상황이라며 왜 웃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시나 보네요.”

“…….”

“4번 룸으로 가시죠. 다 모여 있어요.”

* * *

덜컹. 4번 룸 문을 열었다.

직원들이 모두 앉아서 대기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영업 준비도 안 하고?”

변 이사는 웃으며 말했다.

“이미 재료 손질까지 어느 정도 다 끝냈어. 오늘 희한하게도 다들 8시도 안 돼서 출근해서.”

그때 최경리가 물었다.

“사장님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하신 거예요? 혹시 어제 여기서 잔 건 아니죠?”

“아니야. 7시쯤에 왔어.”

“어쩐지. 제가 7시 50분쯤에 왔는데, 3번 룸에 한 마리 새우가 있더라고요.”

“…….”

“U자 의자 모양에 완벽하게 일치된 모양으로 자세 잡고 주무시길래…….”

변 이사는 날 바라봤다.

“아침부터 영웅옥션 이정수 팀장이 몇 번을 전화했어. 자기가 연락이 안 된다고.”

“그래요?”

‘부재중 10건.’

자는 중에 진동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진짜 몰라?”

“그러니까 뭘요.”

“자기는 신문도 안 보나 봐?”

변 이사는 말을 마치고는 핸드폰 화면을 내게 들이밀었다.

<유명 너튜버 ‘네모의 신’ 영웅옥션에 나타나다>

기사 제목 아래에 내 옆 모습 사진이 있었다.

분명…… 누가 봐도 나였다.

“이, 이게…….”

“나도 놀랐어.”

<120만 너튜브 채널. 네모튜브의 최고 스타 네모의 신은 베일을 벗어 던졌다. 이번에 그가 만든 작품 ‘할아버지의 일생’, 작가명도 ‘네모의 신’으로 하여 출품하였다. 이제부터 공개 활동을 할 것이라는 포석으로 보이며 그의 추종자들…….>

꿀꺽.

“내 정체를 아는 기자일까요?”

“글쎄, 확실하진 않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아.

<팬클럽 ‘네모천국’까지 등장했다. 갑자기 전시장에서 사라진 탓에 그의 정체를 알아내진 못했지만, 곧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영웅옥션 측에도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고객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고 관계자는 말하였다.>

“근데 날 어떻게 알아보고 찍었을까요?”

“호프집 아가씨가 하는 말 들었나 보지. 순식간에 찍었나 봐. 아니면 말고 식으로.”

옆에서 오 대리가 중얼거렸다.

“그 기자는 얻어걸린 거죠, 뭐.”

난 곰곰이 생각했다.

전철에서 느꼈던 시선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정수 팀장이 아침부터 왜 그렇게 날 찾았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휴우―.

난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했다.

어차피 벌어질 일.

좀 더 빨라진 것뿐이다.

일단은…….

“잠깐 통화 좀 할게요.”

드르륵. 철컥.

[작가님~!]

얼마나 기다렸는지, 신호음 한 번에 이정수 팀장은 바로 받았다.

[아, 미안해요. 전화 왔는지 몰랐어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시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정수 팀장 주변 소음이 컸다.

[지금 난리에요! 오늘 경매 날인데, 응찰 신청은 일찌감치 마감됐고, 자리 내어달라고 난리입니다. 특히 기자분들이요.]

[아……. 네.]

[아! 언론에서 작가님 신분 물어보더라고요.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계속 알려달라고 난리입니다.]

[잘하셨어요. 일단은 아무 말씀 마세요. 적절한 시기에 제가 나서서 얘기하겠습니다. 어차피 익명 활동은 이제 안 할 생각이니까요.]

[어휴. 다행이네. 그럼 그렇게만 얘기할게요. 이왕이면 빠르게 좀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얼마나 우릴 볶아대는지…….]

[네, 일단 오늘 경매는 끝나고요.]

소란스러워서 이정수의 말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였다.

[네모의 신 인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숨은 팬들이 진짜 많은 거 같아요.]

[하하. 저도 지금 많이 놀라고 있어요.]

[오늘 오실 수 있겠어요? 경매장 나타나시면 난리 날 것 같은데.]

그럴 것 같긴 하다. 특히나 이 타이밍에…….

하지만 경매 진행 모습은 꼭 보고 싶다.

[제 작품이 몇 번째입니까?]

[54번째에요.]

[그럼 시작한 이후에 늦게 들어갈게요. 가능할까요?]

[아, 그러실래요? 원래는 안 되는데, 제가 얘기해 놓을게요. 특수한 사항이니까. 근데, 언제쯤 들어오시라고 제가 중계는 못 해드려요. 경매 시작하면 정신없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제가 저희 직원이랑 알아서 하겠습니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어쨌든 점심 영업은 해야 한다.

[그럼 이따가 뵐게요. 수고하세요.]

이정수 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 * *

[오늘 52번째 작품은 김환수의 ‘정물’입니다. 지금 제 왼편에 걸려 있는 작품인데요. 1955년 인천에서 완성한 작품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김환수 작가는 함흥에 남겨진 가족을 그리며…….]

지금 5시 20분.

전 직원이 다 오고 싶어 했지만, 인원 제한 때문에 오 대리와 변 이사만 참석했다.

오 대리는 중간중간 캠코더로 경매 진행 과정을 촬영했다.

“드디어 하네요. 이번 경매 최고 출품가 작품.”

“그러게. 사장님 작품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54번째니까요.”

경매사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 정물화의 특징을 보시면 바깥쪽 상단의 은은한 주황색 보이시죠? 햇살. 즉,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겁니다. 그 빛이 정중앙의 사과가 반사되는 빛과 대조되고 있는데, 이는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을 애써 잊으려는 김환수의 심정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출품작들 별 설명도 없더니.”

경매사의 설명을 들으며 변 이사가 중얼거렸다.

“이번 경매 최고 출품가 작품이라서, 신경 쓰는 거 같아요.”

[김환수의 작품 중 수작 중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정물’. 경매 18억에 출발해서, 1억씩 찍고 갑니다.]

“우와, 추정가에서도 최고가로 출발하네?”

김환수 작가의 추정가는 13~18억이었다.

변 이사는 놀라워했고.

오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반응이 뜨거운가 봐요. 김환수 작가 작품치고는 18억도 높은 건 아니죠.”

“오 대리, 김환수 작가 알아?”

“우리나라의 유명한 현대미술 작가예요. 예술성과 시장성 모두 좋은 평가 받는 작품을 많이 했다고 하던데요.”

[19억. 20억. 네, 전화 응찰 있습니까? 21억. 네. 서면 22억. 23억. 24억. 네, 25억 있습니까? 25억!]

순식간에 25억을 넘기고 있었다.

“아~ 부럽다. 우리 태평이 작품도 저렇게 반응 좋으면 좋겠다.”

분위기에 흥분한 변 이사는 직급도 잊고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오 대리 또한 쉴새 없이 올라가는 경매가에 정신이 팔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5억!]

경매사의 손은 호가하는 응찰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25억. 25억! 전화 응찰 있습니까? 네, 없으시고요. 26억 없습니까? 25억. 현재 25억입니다.]

18억으로 시작하여 순식간에 25억까지 올라갔다.

응찰자가 더 없어 보이자, 경매사는 단위를 낮췄다.

[5천만 원 올립니다. 25억 5천만 원 있습니까? 네! 25억 5천만 원. 전화 응찰 있습니까? 없습니까? 후회하진 않으시겠죠? 정말 없으십니까? 마지막 3번 부르고 정리하겠습니다.]

“…….”

경매장 안은 고요해졌고.

경매사의 외침이 들렸다.

[25억 5천. 25억 5천. 네! 25억 5천.]

따당!

낙찰봉 소리와 함께 낙찰가를 호명했다.

[25억 5천만 원. 낙찰입니다! 이번 경매 최고가 경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장내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다음은 53번째 작품으로…….]

이제 연락할 타이밍이었다.

“오 대리, 이제 들어오시라고 전화해.”

“네.”

오 대리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강태평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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