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107화 (107/156)

긴장, 설렘, 불안 (2)

* * *

“잠깐만요!”

사랑산성의 주방을 나서려는데, 오 대리가 날 불렀다.

“내일 어떻게 하실 건지 알려주셔야죠.”

“응? 뭘 어떻게 해?

오 대리뿐만 아니라, 직원들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동안 기다려온 행사 당일인데, 다 안 가요?”

‘영웅옥션×디자인 컴퍼니 living with art’

내일 하루 preview(전시)를 진행하고, 3일 뒤에 경매를 한다.

프리뷰는 이번 경매에 관심 있는 분들이 와서 직접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하지만 옥션 측 재량에 따라서 신원 확인 등을 통해 참석자에게 제한을 둘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뷰에 오는 사람들이 경매에 참여할 가능성이 크며, 그분들이 반응을 통해 흥행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

프리뷰는 곧 경매의 시작이라는 의미.

또한…… 내게는 ‘할아버지의 일생’을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날이기도 하고.

“당연히 가야지. 안 갈 생각이었어?”

“…….”

직원들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최경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면 명확하게 내일 쉰다고 말씀을 해주셔야죠. 저희가 사장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아니고.”

“왜 쉬어?”

“…….”

직원들은 더 아리송해했고.

난 가만히 그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변 이사에게 물었다.

“쉬어야 돼요?”

“뭐……. 우리 입장에서는 쉬고 다 같이 가면 좋겠지만, 사장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난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점심 영업 끝나고 다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 프리뷰 보는 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준비는 영웅옥션에서 다 하는데.”

“그래도 기분이…….”

김지안의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뭐~. 내일 경매 당일도 아닌데.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오면 돼지.”

이 말에 직원들은 좀 실망하는 눈치였다.

최경리가 말했다.

“굉장히 쿨하게 말씀하시네요.”

“뭐?”

“표정은 전혀 쿨하지 않은데.”

“…….”

“방금 3시 되자마자, 먼저 가본다고 하셨잖아요. 잔뜩 긴장하셔서 뭐 마려운 표정으로.”

풉.

최경리의 말에 직원들은 일제히 웃었고.

난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럴만하지 않은가?

“최경리, 난 작가라고, 작가. 그 작품의 주인이며, 평가받는 당사자. 긴장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더군다나 나도 일하러 나온다잖아.”

“사장님이 쉬시면 다 쉬는 거니까요. 디너까지.”

“…….”

그렇다. 내가 쉬면 다 쉰다.

하루 매출 6,000만 원이 날아간다.

여파가 너무 커서, 웬만해선 쉴 수가 없다.

직원들은 간혹 연차도 쓰고 하지만, 난 단 하루도 쉴 수가 없다.

하지만 직원들은 은근히 내가 쉬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자자. 우리 모두 강 작가님이 못 쉬시는 이유는 알잖아. 어서 들어가게 해드리자고.”

변 이사가 날 강 작가라고 부르며 말했다.

직원들은 잠자코 있었다.

“먼저 가서 미안해. 다들 내일 봅시다.”

난 변 이사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사랑산성을 나섰다.

* * *

마을버스를 타고, 양재역에 내렸다.

하지만 난 바로 전철을 타지 않고, 강남역 방향을 향해 걸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그냥 걸으면서 기분전환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수많은 차가 대로변을 어지러이 다니고.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많은 사람.

그런 분주함과 어울리지 않는 푸른 잎의 가로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신기한 그런 풍경들을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어느덧 강남역을 지나쳤고.

30분쯤 걸었을까?

차츰 눈앞에 풍경들이 안 보이고, 내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을까?’

경주마처럼 주변이 보이지 않도록 눈 옆에 가림막을 해놓은 것처럼.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 통장에 돈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도 잘 모른다.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않으니, 확인해볼 생각도 안 했었다.

아마 꽤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저 벌기만 할 뿐 쓸 시간이 없다.

왜 이렇게 살까?

어느새 신논현역까지 왔다.

네박사 지도를 본 후, 좀 더 걸었다.

수유역 가려면 7호선 타고 이수역에서 갈아타는 게 편하니까.

논현역까지만 걸어가서, 7호선으로 타야겠다.

늦은 오후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까 고민하던 생각에 다시 빠져 보려 했다.

“실례합니다.”

줄무늬 세미 정장을 입은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저요?”

“네~.”

갑자기 뭐지. 혹시 도를 아십니까?

아니면 또 네모의 신이라고 알아보는 건…….

“제인 빌딩을 찾고 있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요.”

“아…….”

그냥 길 물어보는 사람이구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동네 사람 아니라서.”

그리고 난 살짝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 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몇 발자국 지나쳐 가는데.

그녀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어떻게 잡은 면접인데……. 증말~!”

대충 봐도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데. 면접을 보러왔다고?

난 다시 뒤돌아보았고.

아주머니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주변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마음은 지나치고 싶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그녀 쪽에 가까워졌다.

“저기…….”

난 살며시 불렀고.

그녀가 힐끔 날 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지도 어플에도 안 나오나요?”

“내가 그런 거 쓸 줄 몰라요.”

“왜요?”

“내가 말은 하는데, 한국어가 익숙지 않아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어가 익숙지 않다고?

“중국에서 왔어요. 조선사람이에요.”

“아…….”

조선족은 처음 봤다. 요즘 외국인 자주 만나네.

어째 억양이 좀 독특하다 싶었는데, 난 그냥 사투리인 줄 알았다.

“잠시만요.”

난 어플을 켜서 ‘제인빌딩’을 검색해 보았고.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도 좀 외진 곳에 있어서,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찾기 어려워 보였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멀지도 않고 하니까.

“따라오세요.”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대화 없이 어색하게 걸어가는데.

여자가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죄송한데요.”

“네.”

“뛰어가면 안 될까요?”

“네?”

“면접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네.”

난 지금 정장을 입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발이 빨랐다.

원래 빠른 건지, 급해서 그런 건지.

헉. 헉.

옷 영향 때문일까? 숨이 금방 가빠오고, 땀이 차오른다.

이 순간, 아까 혼자 했던 고민이 문득 떠올랐다.

‘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을까?’

‘제인빌딩’.

다행히 맞게 찾아온 것 같다.

헉. 헉.

난 숨이 차는데, 이 아줌마는 너무 멀쩡해 보인다.

“안 늦었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난 아줌마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얘기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몇 번을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내게 물었다.

“연락처 좀 알려주십시오. 제가 꼭 답례하고 싶습니다.”

“네? 아니에요. 됐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안 됩니다. 알려주셔야 합니다.”

아니, 급하다는 사람이…….

내가 알려주기 전에는 꼼짝도 안 할 기세였다.

오히려 내가 더 급해졌다.

“알았어요! 알았어.”

난 품에서 명함을 꺼내어 건네었다.

“어서 가보세요! 파이팅!”

“파이팅!”

아줌마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어두운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올라간 걸 보고.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별일이 다 있네.

난 논현역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 정류장은 수유역. 수유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1시간 내내 서서 왔더니, 다리가 뻐근하다.

아까 아줌마 덕에 시간 허비만 안 했어도 러시아워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어쨌거나 그 아주머니는 잘하셨으려나…….

전철 문 앞에 서서 대기 중인데.

‘띠링!’

메시지 알림음 소리가 들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뭐지, 보이스피싱은 아니겠지.”

잠깐 망설였다.

메시지 확인한다고 해서 낚이는 건 아니니까.

클릭.

‘강태평 선생님, 아까 길에서 도움받았던 김찬숙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 딸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난 장문의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김찬숙? 아, 아까 그 아줌마인가 보구나.”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대단한 일 한 거 아닌데.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 조금 도와준 것뿐인데.

그리고 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금손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근데, 그렇게 큰 힘이 되었다고?

기분이 갑자기 확 좋아졌다.

나한테 좋은 일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오늘 심란했던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하하. 달리는 게 의미가 있었네.”

긴장되는 하루를 앞두었지만.

오늘 밤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 *

“안녕하세요~.”

사랑산성의 아침.

밝게 인사하며 주방에 들어오는 강태평을 보며 직원들은 의아했다.

오 대리는 중얼거렸고.

“뭐야? 어제 잔뜩 표정이 굳어있더니.”

최경리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긴장감에 정신이 나가신 게 아닐까요?”

“에이~, 최 과장님. 사장님한테 말씀이 너무 심하시다.”

최 과장이 오 대리보다 직급은 높지만, 나이는 오 대리가 많아서 서로 존칭을 하고 있다.

“뭘 심해요? 욕한 것도 아닌데?”

변 이사는 강태평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하하. 강 사장님, 어제 잘 잤나 봐?”

“네~, 잘 잤죠. 근데 이사님도 오늘 일찍 오셨네요?”

변성준은 사장에서 이사가 되면서, 예전 팀장 시절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침에는 항상 시장조사라는 명목으로 늦게 출근한다. 물론 퇴근 시간은 칼이지만.

“에이~, 오늘처럼 중요한 날 시장 조사 갈 여유가 어딨어? 바로 회사로 와야지. 하하.”

변 이사는 민망한 듯 큰 소리로 웃었지만, 강태평은 그저 따라 웃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짝! 짝!

강태평은 박수를 치고는 힘차게 소리쳤다.

“자! 오늘 하루 힘내서 일합시다. 오늘 영업은 칼같이 끝내는 거로. 2시 반까지는 뒷마무리까지 정리합시다!”

“네!”

강태평의 환한 기운 때문일까.

직원들도 덩달아 얼굴이 밝아져서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오후 2시 30분.

사랑산성 앞.

우리는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뷰는 COEX B홀에서 하며, 내곡동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불편하여 3명, 2명으로 나눠서 택시 타기로 했다.

“5명이 그냥 같이 타면 안 되나. 이 인원 쪼개려니까 아깝네요. 회사 경비 아껴야 하는데.”

최경리의 말에 강태평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직원들은 질린 눈빛으로 최경리를 바라봤다.

“한 명 낄 자리 있어요?”

설수민이었다.

“어? 사장님?!”

모두 설수민의 등장에 반가워했다.

강태평이 웃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저도 프리뷰 가려고요~. 꼭 강 사장님 작품 때문에 가는 건 아니니까. 오해 마셔요~.”

“하하.”

부담 주지 않으려는 설수민의 말센스에 직원들은 빙그레 웃었다.

“같이 타고 가도 되죠?”

“오늘 영업은 어쩌시려고요?”

“전 강 사장님이랑 달라요~. 저 없어도 레스토랑은 잘 굴러가요~”

강태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약 20분 뒤.

COEX B홀 앞.

“헉…….”

수많은 인파에 일행은 일동 얼어버렸다.

― 이번에 괜찮은 거 많다.

― 유화지에 그린 작품들이 괜찮던데.

― 김솔 님 작품 색감 멋지지 않았니?

일반 전시회장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꿀꺽.

갑자기 긴장이 확 올라오는 강태평.

그의 시선은 전시장 안을 뒤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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