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포의 밤 (1)
* * *
변성준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아니,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장이었는데.
이제 사장이 아닌 직원으로서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난 얘기할 때, 사장이었던 변성준을 최대한 배려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무심코 한 말에 그가 상처받거나, 불편해하지 않도록.
“으하하. 조개구이 맛있네~. 아~, 강 사장님 나이스 샷!”
“…….”
그냥 예전의 변 팀장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음……. 그때보다는 조금은 더 성실하고 회사에 관심 있어 보인다는 게 약간 다른 점이랄까.
“강 사장님~, 술 시켜야지?”
변성준은 당연한 듯 말했다.
맘대로 시키지 않고, 먼저 물어봐 줘서 고마웠다.
“네, 시켜도 되는데,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일 얘기 좀 더 해야 하니깐.”
“아유~, 뭐예용. 밥 먹으러 왔는데엥.”
김지안이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었다.
“하하. 그게 싫으면 스터디 카페에 좀 더 있다가 다시 밥 먹으러 가도 돼.”
“와……. 냉혈한.”
뭐어?
누가 말했나 했더니.
역시 최경리였다.
“야야, 최경리. 사장님한테 말하는 거하고는.”
나 또한 뭐라 하려고 했는데, 변성준이 나섰다.
“혼잣말이었는데요.”
“그럼 안 들리게 해.”
“안 들으면 되죠.”
“확~!”
변성준은 숟가락을 높이 들었고.
최경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오로지 변성준에게만 약하다.
“이제 강 대리 아니야. 강 사장님이야. 예의 갖춰. 알겠어?!”
“……네.”
최경리는 들릴 듯 말듯 대꾸했다.
“자자, 됐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려 해서, 난 나서서 말렸다.
“모두 제 잔 한잔 받으세요.”
난 돌아가면서 소맥을 말아주었다.
잔을 가득 채운 후.
“잔 올리시고!”
모두 잔을 올렸다.
“제로백 컴퍼니에서 하듯이 하면 우린 분명히 잘될 겁니다.”
“…….”
“유능하신 변…… 있으시고.”
난 말 하려다가 멈추고, 손으로 변성준을 지칭했다.
“그리고…… 제 손이 있으니까요!”
잔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반짝반짝 흔들었다.
― 와~, 하하. 강 사장님 웃긴다.
― 이제 대놓고 뻔뻔하시네요.
― 이건 인정할 수밖에.
난 웃으며 네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손 옆에는 네 분이 있으시죠. 손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해요.”
“…….”
변성준, 최경리, 앤더슨 오, 김지안.
네 사람을 향해 난 한껏 미소를 지었고.
그들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현실에 급급하지 말고, 새로운 사업 재밌게 한번 해봅시다.”
“알겠습니다!”
난 잔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사랑산성을!”
이 단어에 직원들은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외쳤다.
“위하여!”
* * *
“그때 얘기 좀 해주세요. 부산에 두 분이 오셨었다면서요.”
김지안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살짝 술기운이 올랐고.
동그란 테이블에 모여앉은 우리는 일상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부산국제사진공모전.”
변성준이 대답했다.
“그때 진짜 스펙타클했지. 안 그래? 강 사장님?”
“네? 아, 뭐.”
내 손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했던 계기.
하지만 공모전을 생각하고 준비한 건 변성준과 홍지아였다.
공모전 대상은 내 금손으로 이룬 결과이지만, 두 사람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조직이 간단하게 이뤄진 게 아니라고. 다 여러 부침을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불과 1년 전 일이긴 한데~.”
변성준은 신나서 세 사람에게 부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전년도 공모전 수상자 신종국을 찾아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일, 출사 온 사람들 따라다니다가 또 쫓겨난 일, 부산항 컨테이너에서 운명적으로 건진 수상작품 ‘별 헤는 사람들’까지.
“우와~, 진짜. 맨땅에 헤딩하셨었네요?”
“맨땅에 헤딩인 줄 알고 덤볐는데, 사실은 결승 골이었던 거지.”
변성준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액션이 중요한 거야. 일단 잘 모를 때는 덤벼드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길이 보여.”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이런 심오한 뜻이 있어서 한 건 아니었고.
민경원 사장이 자꾸 팀 해체시키려 하니까, 뭐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등 떠밀리듯 부산에 왔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다.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고.
“어라? 왜 웃어? 같이 좀 웃자?”
변성준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쳇. 이러기야?”
금손을 들고도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어리버리하기만 했던 내가.
네 명의 직원을 둔 사장이 되다니.
“참……. 인생 모르는 거네요. 변…….”
난 잔을 들고, 변성준을 지칭하려다가 또 말을 먹었다.
짠~.
변성준은 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인생 모르겠는 건 알겠는데, 호칭 좀 어떻게 안 될까? 그냥 지금 딱 정하자! 언제까지 눈빛으로 날 부를 거야?”
“…….”
탁.
난 잔을 내려놓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모두 주목!”
* * *
한창 각자 대화 중이던 직원들은 내 부름에 멈추었다.
최경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 얘기 하는 건가요? 왜 안 하나 했어요.”
“흠……. 일 얘기이긴 한데, 그냥 방침을 알리려는 거니까.”
“그게 일 얘기지, 뭐.”
최경리는 그냥 투명인가 취급하련다.
그녀의 말을 씹고, 난 하려던 말을 했다.
“직급 말인데…… 난 직급 체계를 좀 올리고 싶거든?”
“…….”
“나랑 가까운, 그러니까 사장 직급과 가까워야 나 또한 호칭하기 편하기도 하고. 직급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낮은 직급 때문에 다른 회사 직원들 만날 때 밑 보이는 것도 싫고.”
진일상사는 승진을 더럽게 안 시켰었다.
나이가 마흔 다 되어 가는데도 대리 직급인 사람들이 허다했다.
일하다 보면 협력사나 경쟁사 만날 때가 있는데.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봤을 때는 괜히 문제 있어 보인다.
능력 없고, 조직에서 밀려나서 직급이 낮은 게 아닌가 하는.
그냥 회사 시스템과 사장이 엿 같아서 그런 것일 뿐인데.
“아……. 생각하니까, 욕 나오려 그러네. 진작에 나올걸.”
“뭐가요?”
김지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면.”
“…….”
직원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모두 내 입만 기다렸다.
# 새로운 직급 초안
변성준 전무
최경리 이사
앤더슨 부장
김지안 부장
“…….”
“어때요?”
“…….”
모두 말을 잃었다.
그저 황당한 얼굴이었다.
“자, 잠깐.”
최경리는 손을 살짝 들었고.
“어, 최경리 씨, 말해 봐.”
“저 솔직한 감정을 얘기해도 될까요? 약간 격한 표현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난 마지못해 말했다.
“욕이랑 반말만 하지 마.”
“알겠어요.”
휴우―.
최경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건 혁신 정도가 아니라…… 또라이 수준인데요.”
“…….”
“웃음거리 만드시려고 작정하셨어요? 무슨…… 이사는! 최 이사? 지안이는 김 부장이에요? 허, 참나. 적당히 해야지.”
“…….”
방금 좀 혼난 것 같다.
이상하다. 욕이랑 반말 들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새로운 시도? 아, 뭐, 좋은데, 적어도 좀 상식선에서 움직여야죠. 지안아! 김지안 부장. 이렇게 불리니까 좋니?”
“…….”
김지안은 또한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야심 차게 생각한 거였는데, 이건 좀 아닌가.
그때 앤더슨이 손을 살짝 올렸다.
“강 사장님, 질문 있습니다.”
“얘기해 봐요.”
“그럼 월급 올려주시는 겁니까? 부장 대우 해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에이~, 이게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앤더슨의 반응에 난 좀 머쓱해졌다.
변성준을 바라봤다.
“저……. 변 전무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무라고 하지 마…….”
“…….”
“내가 웬만하면 자기 편 들어주려고 하는데.”
“네.”
“직급 이렇게 부르면, 모르는 사람들은 사랑산성이 룸살롱인 줄 알 거야.”
“…….”
“룸살롱 최하 직급이 상무잖아.”
아…….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
그래서 김지안의 표정이 굳어진 거였나.
“취지는 좋은데. 직급은 조금만 올리자. 지금은 너무 올렸어. 21살 먹은 여 직원을 부장이라고 부르면 어떡해.”
난 빠르게 수긍했다.
모두 반응이 격정적이니,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취지는 나쁘지 않죠?”
다들 대답은 않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죠.”
# 새로운 직급 최종안
변성준 이사
최경리 과장
앤더슨 대리
김지안 대리
아까보다는 덜 했지만, 여전히 표정들이 어색했다.
변 이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그냥 부장하면 안 될까? 차장이었는데, 2계급 특진은 좀 그렇다.”
“무슨 소리세요? 차장이 아니라 사장이셨죠. 직급이 내려가신 건데.”
“…….”
이 말에 변 이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여기서 더 양보 못 합니다. 저도 사장이라고 불리는 거 부담스러워요. 받아들이세요.”
“알았어…….”
최경리도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는 그냥 대리하면 안 돼요?”
우리 직원들은 왜 이렇게 겸손한 걸까.
“저 아직 시집도 안 갔는데, 과장이라고 불리면 나이 들어 보일 거 같은데.”
“시집갈 생각이 있었어? 그건 몰랐네.”
“죽으실래요?”
“뭐?”
“욕도 반말도 아니었습니다.”
난 한숨을 쉬었다. 그냥 말을 말자.
“만약 부담으로 느껴진다고 해도 그냥 받아들여. 그만큼 더 책임감 있게 하면 되는 거지.”
“…….”
“오해하지 마. 부담 갖지 말라는 뜻에서 얘기하는 거니까.”
난 빈 잔을 채워주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새로운 직급으로 부르는 거야. 알겠죠? 변 이사님?”
“응……. 알았어.”
“제 잔 받으세요.”
변 이사는 잔을 받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내가 알던 강태평 씨 맞으신가?”
“네?”
“꼭 다른 사람 보는 거 같네. 며칠 새에 많이 달라졌어.”
“…….”
무슨 의미인지 되묻는 표정으로 변 이사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은 뜻이야. 아주 좋은 뜻.”
“아……. 네.”
하긴, 나도 변 이사가 팀장에서 사장이 되었을 때 몇 번 들었던 생각이긴 하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맞나보다.”
변 이사는 술잔을 쭉 들이키며 말했다.
“꼭 좋게만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자네는…… 참 다행이야.”
“열심히 할게요.”
“자넨 잘할 거야.”
그렇게 청사포의 밤은 깊어갔다.
* * *
“이제 적당히 하고 들어가지 왜 이렇게 달리는 거예요?”
난 이들을 이끌고 2차에 왔다.
1차에서 꽤 많은 얘기를 나눴고, 시간도 11시가 넘었다.
하지만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
2차는 근처의 조용한 선술집으로 잡았다.
“달리긴 뭘 달려. 술 많이 안 마셨잖아. 일부러 안 줬구만. 그리고 워크숍은 오늘 하루거든.”
최경리가 직원 대표로 투덜대고 있었다.
“네? 부산까지 와서, 겨우 1박 2일이에요?”
“빨리 끝내고 쉬게 해주려고.”
“아…….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다들 자리 잡고 앉은 뒤, 난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 얘기만 남았으니까, 여기선 편하게 마셔도 돼.”
“그게 뭔데요?”
김지안의 물음에 난 씩 웃으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거. 과업 정리.”
변성준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워크숍 참 알차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