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76화 (76/156)

진심은 보이는 법 (1)

* * *

“아니지. 명확하게 얘기하자면 예상했었어요.”

난 얘기 나눌 기분이 아니어서, 지나치려다가.

설수민이 덧붙인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떠졌다.

“예상하다뇨?”

“…….”

설수민은 아무 말 않고, 빈 룸을 가리켰다.

“잠깐 앉아서 대화 좀 하실까요?”

“……네.”

설수민을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설수민의 미모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앉았으니까, 얘기 좀 해보시죠.”

“며칠 전에 민경원 사장님을 만났었어요.”

“…….”

설수민이 민 사장을 왜 만나지?

“만나자마자 대뜸 강 대리님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사장을 바꿀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

“가맹주에게 사전 고지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거라면서…… 저에게 부탁을 하나 하시더군요.”

황당한 일 연속이다. 난 그저 묵묵히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강 대리님을 설득시켜 달라고.”

“그래서 저 지금 설득시키려고 보자고 하신 건가요?”

상황 정리는 다른 사람 시키고, 민 사장 본인은 잠수 타겠다는 건가?

내가 설수민에게는 함부로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아……. 정말. 상황 참…….”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설수민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저와 직원들 또한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말이 날 잡아끌었다.

“뭘 동의하시는데요? 지금 변 사장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아시나요?”

“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다음 사장에 대한 말만 했었지…….”

“…….”

“우리 모든 직원은 강 대리님을 신망해요. 마음속 깊이 따르고 있다고요.”

“…….”

“우리처럼 음지에서 외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 쉽게 마음을 안 주지만 일단 주면 다 주거든요.”

난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따르는 강 대리님을 더 높은 자리에 앉히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더군요. 그리고…… 강 대리님이 이런 처우를 받는 걸 더 두고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이런 처우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변 사장님께 이용당하는 거요.”

하아……. 젠장, 또 그 소리야.

“이용을 당하다뇨~. 도대체 왜 자꾸 그런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갔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설수민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뜻을 굽히진 않았다.

“중요한 일은 강 대리님이 혼자 다 하는데, 왜 생색은 변 사장님이 내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게 제가 원하는 방향이라서 그렇다니까요.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주변에서 난리인지 모르겠네요.”

“…….”

설수민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깊은 눈.

내 속까지 살피는 눈빛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자처럼…… 밖에선 보이지 않는 중요한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게…… 강 대리님이 진짜 원하는 삶이에요?”

“…….”

“그렇게 살라고 하늘이 강 대리님께 재능을 주셨을까요?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헉…….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내가 금손을 얻었을 때, 산신령이 가진 재능을 활용하고 숨어 살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래, 속초에서 돌아온 뒤 예전보다는 확실히 숨어 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귀찮은 일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러는 거라고 위안했지만.

진심은…… 아직도 세상의 눈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강 대리님이 그런 삶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변 사장님이 그렇게 두면 안 되는 거라고요. 만약 어떠한 의도가 없을지라도…….”

꿀꺽.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이용’이에요.”

설수민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변 사장님이 훌륭한 부분은 많지만, 리더로서는 강 대리님께 큰 실수를 하신 거예요.”

“…….”

“불편할지라도 올바른 길을 가게 해야지, 편한 길로만 가게 하는 걸 어떻게 좋은 리더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제 그만…….”

난 손을 들어 설수민의 말을 멈췄다.

“이제 알겠어요……. 이제 알겠어.”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나 혼자만의 중얼거림인지 헷갈린다.

열심히 살아는 온 것 같은데, 내가 뭔가 잘못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죄송해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 * *

다음 날은 토요일이다.

이런 상황과 기분에 일하기 싫었는데 다행이다.

토요일 오전 내내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에서 시작된 고민은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번져갔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속이 시끄럽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아……. 젠장.”

낮술이나 한잔할까?

술 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잠이나 한숨 푹 잘까.

“…….”

아니야, 그건 도망치는 거잖아. 그러진 말자.

변 사장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과 그가 날 이용했다는 다른 사람의 말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뭐가 맞는지, 틀린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 얘기 나눌 친구도 한 명 없다는 게 서글프다.

네모튜브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이해해 줄 리도 없고, 얘기 꺼내기도 조심스럽다. 부끄럽기도 하고.

오랜만에 형님한테 전화나 해볼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마음의 평안은 얻겠지.

난 김레오 수사.

내 보육원 시절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달 전, 종이학 2,500마리 접으러 방문한 이후 처음이다.

드르륵.

덜컹.

신호 한번 만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태평아!]

[형님~, 뭐예요? 왜 이렇게 전화를 빨리 받아요? 내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너한테 전화 걸려던 참이었다~. 하하.]

[네? 이거 텔레파시인가?]

[얀마, 수도사한테 텔레파시가 뭐냐. 성령이 임했다거나, 영점 교감이 이루어졌다든지 그런 표현을 써야지.]

[흠! 형님이 수도사인 걸 간혹 깜빡해요. 하하.]

근데 궁금했다. 어쩐 일로 내게 전화할 생각을 했을까.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저한테 왜 전화를…….]

[얀마, 꼭 일이 있어야 전화하냐? 너 왜 이렇게 마음이 각박해졌어~.]

[아…….]

[어젯밤에 기도드리는 와중에 네 생각이 자꾸 나더라. 주님께서 널 위해 기도하라고 그러셔서……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절 위해 기도하셨다고요?]

[그럼~, 어제뿐이겠냐. 항상 널 위해 기도하지.]

날 위해…….

이 세상에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

[고마워요, 형님.]

[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는걸.]

마음이 심란해서일까. 김레오의 몇 마디가 묵직하게 와닿았다.

나도 모르게 말끝이 자꾸 떨렸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덕분에 얼어붙었던 가슴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근데, 넌 어쩐 일이니? 학만 실컷 접고 볼일 끝나니까 연락도 없던 녀석이?]

[미안해요~. 바빴어요.]

[그래. 사회생활 바쁘겠지. 그럼 뭐, 별일은 없는 거지?]

휴우―.

그가 도움이 되든 안 되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형님한테 고민되는 얘기 좀 털어놔도 돼요? 이건 수사님이 아니라, 형님한테 하는 얘기예요.]

[알았다~. 앞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하하. 편하게 얘기해 봐라.]

난 그에게 변 사장이 팀원으로 강등된 사건에 대해 말하였다.

때로는 소리도 지르고, 가슴도 두드리면서…… 민 사장 뒷담화도 까면서. 허심탄회하게 쏟아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내가 ‘이용’당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것도 해주었다.

그로 인해 내 속이 시끄러운 것도.

김레오는 ‘어, 그래?, 어이쿠, 이런 나쁜 사람!’ 추임새만 넣을 뿐, 별말 않고 내 말을 다 받아주었다.

한참을 쏟아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소연을 하다 보니, 스스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

휴우―.

내가 흔들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지 말아야 될 게 흔들렸었다.

[…….]

모든 얘기를 다 쏟아낸 후,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김레오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평아, 후련하니?]

[네……, 형님. 저 너무 못났죠?]

[무슨 소리야. 못난 게 아니라, 너무 잘나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 저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글쎄……. 난 이미 네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훗.

수화기 너머 김레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야.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은 주변을 살필 줄 알아야 해. 영향력이 있으니까.]

[…….]

[그리고 나설 때는 용감하게 나서야지.]

[…….]

[잃으면 어떻고, 좌절하면 어떻니? 네 옆에는 내가 있고, 주님이 계신데?]

[…….]

[좀 힘들더라도, 과감하고 용감하게 가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변 사장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일단 빨리 만나야 하지 않을까?]

[…….]

[만나보면 알 거야, 그분의 진심을.]

[…….]

[한 가지 말해주고 싶은 건, 사람의 의심은 끝이 없단다. 의심은 하고자 하면 끝도 없이 할 수 있어.]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이제 전화를 끊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과묵한 형님이지만, 설교는 길다.

[형님~, 미안해요. 음식 배달한 게 와서요.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응? 어~, 그래. 우리 태평이, 파이팅이다~.]

* * *

다음 날 일요일.

한 손엔 과일 바구니, 한 손엔 휴지 박스.

휴우―.

변 사장의 집 앞에서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만나보면 알 거야, 그분의 진심을.]

김레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겨우 며칠 못 봤다고, 만날 생각하니 약간 어색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지.

변 사장이 오지 못하게 할까 봐, 일부러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현관 앞에서라도 잠깐 대화만 나누고 갈 생각이다.

휴우―.

왜 이렇게 어색하지.

사장이었던 분이 다른 팀원이 되고.

그분의 아래 있던 내가 그분의 자리로 발령받은 상황.

물론 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사모님 목소리였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변성준 사장님 회사 동료, 강태평 대리입니다.]

[어머, 잠시만요. 여보~, 회사 동료분 왔다는데?]

뒤이어 문 뒤로 변성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어디서 왔다고?]

[강태평 대리님? 아는 사람이야?]

[응?! 태평이가 왔어?! 당연히 알지!]

후다닥.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띠리리―. 철컥.

현관문이 활짝 열렸고.

반바지에 런닝 차림의 변성준 사장이 나타났다.

그의 뒤로 두 딸이 보였고, 사모님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강 대리…… 여기 어쩐 일이야.”

변 사장은 날 마주하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흑……. 강 대리.”

그는 참고 있던 뭔가가 무너진 것 같았다.

변 사장은 뒤에 가족들이 들을까 봐, 숨죽여 울었고.

난 그의 진심을 보았다.

그는 날 진심으로 반가워했고, 와준 걸 고마워했다.

표정과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질수록, 난 너무 미안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흔들렸었다. 그를 조금이나마 의심했다는 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와락.

난 눈물 흘리는 변 사장을 꼭 끌어안았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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