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직: 강태평 팀원, 제로백 컴퍼니 사장(겸)
※ 인사명령 발효일은 명일 09시부터이며, 겸직은 보직 예정자임을 알림.
“씨바…….”
욕이 절로 나왔다.
황당했다.
민 사장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미적거렸던 거는 다 연기였나?
단칼에 변 사장을 잘라버리고, 그 빈자리를 나로 곧바로 채워 버린다?
나보고 변 사장과 대화해보고 연락 달라더니…….
정말…… 뒤통수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민경원 사장.’
난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 뚜―.
신호음이 들렸다. 전화 받기만 해 봐라, 아주.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안 받아?!”
이후 몇 번을 더 걸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민경원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하는 것 같았다.
“아오!”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일단 회사로 갈까?
난 수유역에서 내리지 못했고, 두 정거장을 지나 창동역까지 왔다.
“…….”
난 변 사장에게 전화했다.
뚜― 뚜―.
덜컥.
[강 대리~.]
그는 다행히 전화를 바로 받았다.
[사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괜찮으신 거예요?]
[응? 뭐가?]
[인사명령이요!]
태연한 그의 목소리가 날 더 화나게 했다.
[아~, 하하.]
젠장.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나?
[회사에서 인사명령받는 게 뭐 어때서? 때 되면 받는 거지.]
[사장님! 지금 그런 말이 나오세요? 어떻게 사장님을 영업 2팀 팀원으로…….]
차마, 더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그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민망했다.
[훗…….]
변 사장은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고.
[강 대리, 어쩌다 보니 손 한번 못 써보고 당했네.]
[…….]
[내가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그냥 내 조직과 사람들 지키려던 것 말고는 없었는데.]
휴우―.
말 그대로…… 황망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얘기했잖아. 요즘 너무 잘돼서 불안하다고. 하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구먼.]
어쩔 수 없다는 듯 처연히 말하는 목소리. 더 마음이 쓰렸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그대로 계실 건가요?]
잠자코 있던 변 사장이 입을 열었다.
[일개 팀원이 뭘 하겠는가?]
[…….]
[내 후임으로 팀장들이 아니라, 자네를 세웠으니 구성원들 반발도 심하지 않을 거고.]
일단은 상황을 좀 보자.
감정으로 항의한다고 달라질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게 있었다.
[혹시…… 퇴사하실 건 아니시죠?]
이런 인사발령을 받고 회사에 다니라는 게 더 잔인하긴 하지만.
난 그래도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그가 버텨주기를 바랬다.
[왜 그만둬. 우리 딸들 아직 학교 다니고 있는데. 허허.]
[…….]
[버틸 때까지 버텨봐야지. 어쨌든 월급은 나오잖아.]
[휴우―.]
한숨 소리가 절로 나왔다.
피식.
변 사장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강 대리, 난 괜찮으니까. 자기 할 일을 해. 그리고…….]
[…….]
[나 내일 하루 연차 낼 거니까. 급한 일 있으면 연락 줘.]
[알겠습니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가슴이 쓰릴 것이다.
마지막에 그가 한 말이 자꾸 뇌리에 박혔다.
연차 보상금 받는다고, 여름 휴가도 안 가는 사람인데.
딱 하루만 쉬겠다는 말이.
* * *
사랑산성.
오전 10시 50분.
아침 촬영을 마치고, 조금 빨리 도착했다.
어제 내가 그렇게 전화를 했음에도, 민 사장에게는 아직까지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한 통 없다.
“아, 답답해 죽겠네.”
얘기를 들어봐야 뭐라도 파악을 할 텐데.
대화 자체를 차단하고 있으니, 뭘 할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 같다.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주방으로 들어오자, 김지안이 밝은 표정으로 날 향해 인사했다.
난 방금 지나온 복도 뒤를 돌아봤다.
변 사장님이 온 건가?
“강 사장니임~.”
목소리가 밝았다.
지금 나한테 사장이라고 한 거였어? 기분이 좋아?
욱.
화가 치솟으려 하는데.
“사장님, 재료 준비는 끝났습니다.”
앤더슨도 환하게 웃으며 김지안과 똑같이 날 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만…… 최경리만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트레이만 닦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온 걸 알고 있지만, 그녀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제로백 컴퍼니는 변 사장, 나, 최경리, 홍지아 이렇게 넷이서 런칭한 회사다.
최경리는 초창기부터 시행착오를 함께 겪었고, 나를 알기 전에 변 사장님과 함께 일했었던 사람이다.
아마…… 참담한 기분은 나 못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변 사장을 아끼고 의지했으니까.
난 밝은 표정의 김지안과 앤더슨을 무시하고, 최경리에게 다가갔다.
“최경리 씨.”
“네……. 오셨어요?”
“…….”
최경리는 닦고 있는 건, 트레이 떨어진 그녀의 눈물이었다.
난 말 없이 휴지로 최경리의 눈가를 닦아 주었고.
그게 방아쇠가 되어, 최경리는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흑……. 강 대리님!”
난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내가 바로 잡을 거야. 지금 실컷 울고, 더 울지 마. 우리 정신 바짝 차려야 해.”
“흑…….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변 사장님을 하루아침에 팀원으로 보내버리냐고요. 회사에 기여한 게 잘못인가요?”
최경리는 억울한 마음에 한참을 울었고, 나 또한 눈시울이 붉어져서 살짝 훔쳤다.
“이런 걸 토사구팽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
“한고조가 통일시킨 이후 한신 장군을 죽인 것과 비슷한 이치지요.”
앤더슨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씨불이고 있었다.
강태평의 눈빛이 변했다.
낮은 목소리로 그를 조용히 불렀다.
“앤더슨 씨.”
“네.”
“좀 닥치세요.”
“왓?”
“셧 더 마우스 하라고. 새끼야!”
강태평은 항상 온화했다.
그런 그가 눈을 부라리자, 앤더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강태평은 김지안과 앤더슨을 바라보고 말했다.
“두 사람 다 똑똑히 들어.”
“…….”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날 사장이라고 불렀다간, 함께 일 못 하게 될 거야.”
“…….”
“그리고 이빨 보이지 마. 초상집 와서 웃고 다녀? 미친 거 아니야? 그것도 한 가족이?”
김지안은 입을 오물오물거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조용히 해! 듣기만 해!”
“…….”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기에.
앤드슨과 김지안은 강태평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또한 강태평이 사장 예정자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 들지 못하여 함께 일하지 못 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한 번이지만 엄청난 성과급 맛도 봤었고.
“일하는 데 평소와 다를 거 없어. 어서 오픈 준비해. 앤더슨과 김지안은 방금 내가 한 말들 명심하고.”
“……네.”
주방에 흐르는 정적.
각자 자리로 향했지만,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강태평은 음식 준비를 하려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되돌아보았다.
“내가 좀 흥분했었어. 방금 심하게 말한 건 사과할게. 하지만 우리…… 좀 상식적으로 행동하자. 지금 상황에 웃으면서 날 맞이하는 건 좀 아니잖아.”
김지안과 앤더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
강태평은 한우 손질을 하면서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휴우―. 젠장.
* * *
그날 영업을 끝마친 후, 난 오후 촬영 일정은 미뤘다.
런치 오브 제로백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에, 꾹꾹 참고 일했지만.
도저히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영업 끝나고 민 사장에게 몇 번 더 전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피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직원들을 먼저 보낸 후, 주방에서 이런저런 생각 하며 정리하다가.
오후 4시쯤 느즈막하게 주방을 나섰다.
“음?”
복도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설수민이었다.
“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제 나오시네요.”
설수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
“소식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