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가 오다 (2)
* * *
“왜 대화하다 말고 뒤로 가고 그래요.”
난 의자를 들어 네모 씨의 앞으로 당겨 앉았다.
“흠. 아닙니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3억’이라는 단어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3억은 큰돈인데.”
“네, 큰돈이죠.”
네모 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근데 갑자기 그 큰돈이 왜 필요한 거예요? 혹시 사고 쳤어요?”
“네?”
내 반문에 네모 씨는 되물었다.
“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안 그러셨잖아요. 출연료를 많이 드린다고 해도, 주 2회만 출연하겠다던 분이…… 갑자기 3억이나 필요하다며 일 좀 꾸며달라고 하시니까.”
“…….”
“어쨌든 저는 강태평 씨와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잖아요.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거면, 저희한테도 말씀을 해주셔야 해요. 저희에게 영향이 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신변 이상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걸까요?”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중 일을 위해 물어봤다.
“뭐…… 큰 빚을 졌다거나, 소송에 휘말려 돈이 필요하다거나, 보증을 잘못 섰다거나…… 그런 거겠죠.”
“건강 이상을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흠! 뭐…… 그것도 포함되죠. 깜빡했네.”
네모 씨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그는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되는 걸 염려하는 것 같다.
아까는 팬이라며 뭐든 들어줄 듯 말하더니, 갑작스레 큰돈을 얘기하니까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신변 이상과는 상관없어요. 그냥 갖고 싶은 게 생겨서 그래요.”
“갖고 싶은 거요? 그게 3억짜리에요?”
“네.”
― 웬만한 명품도 1억은 잘 안 넘을 텐데.
― 차? 차도 3억짜리는 잘 없지 않나?
― 인기 좀 끌더니…… 벌써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모르는 척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는 정카와 네모삼촌.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
네모 씨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뭘 사려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사적인 일이긴 하지만, 정보 공유를 해주셔야 제대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말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겐 특별한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공통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부동산이요.”
“아~.”
네모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 부동산이 갖고 싶어지셨구나.”
네모 씨는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고, 정카와 네모삼촌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와~, 젊은 친구가 대단하네? 벌써부터?”
사십 대 후반의 네모삼촌은 씁쓸히 웃었다.
“나도 아직 내 집이 없는데, 부동산 살 생각을 다 했어? 하긴~ 빠를수록 좋지, 뭐.”
“태평 씨, 어디 사려고요? 좋은 정보 있으면 공유 좀 해줘요~.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 그러지 말고~.”
정카는 내 팔짱을 끼며 재차 물었고, 네모삼촌도 웃으며 다가왔다.
“그래~, 태평 씨. 나도 좀 알자.”
“…….”
하지만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서울 변두리, 주변에 건물 하나 없는 대지를 살 거라고 하면 다들 귀찮게 안 할 텐데.
“진짜 아니라니까요.”
“에이~, 좀~.”
그냥 다 말해 버릴까?
살짝 고민했지만, 관두었다.
이 얘기를 하면 너무 많은 걸 연달아 설명해야 한다.
내가 고아이며, 보육원 출신인 것까지.
“태평 씨이~.”
좀 이러다가 말 줄 알았는데, 돈 독오른 사람처럼 두 남자는 포기할 줄 몰랐다.
내가 말 못 하고 망설이니까, 더 있어 보이나?
“태평 씨는 손만 대면 뭐든 잘되잖아.”
“우리도 끼워줘~.”
하아~,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일단 리스크가 있으니까, 제가 먼저 해보고, 잘되면 알려줄게요. 그럼 됐죠?”
결국, 난 이렇게 말해버렸다.
“진짜다?! 약속했어!”
두 사람은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흠. 태평 씨.”
잠자코 있던 네모 씨가 날 불렀다.
“네.”
“저도요. 저도 알려줘야 해요.”
“……네.”
그리고 네모 씨는 잠시 뜸 들이다가 말했다.
“흠……. 강태평 씨.”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까 3억 얘기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요?”
“네, 근데…… 언제까지 필요한 거죠?”
“당장이요. 아니,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 말씀하시는 걸 봤을 때 예상은 했는데. 급한 게 맞군요.”
네모 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모튜브와 전속 계약을 하시면…… 3억 일주일 안에 드리겠습니다.”
.
.
.
.
“뭐어? 너무 파격적이잖아. 나한테는…….”
나보다 네모삼촌이 먼저 대꾸했다.
“흠…… 삼촌은 나중에 대화해요. 지금은 우선 강태평 씨.”
꿀꺽.
자세한 조건은 들어봐야겠지만…… 혹시나 했는데…… 이게 가능하다는 건가?
3억을 일주일 만에 준다고?
아무런 담보 없이 전속 계약만 하면?
“조건은요?”
“그건…… 저랑 따로 대화하시죠.”
네모 씨는 정카와 네모삼촌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네.”
계약 조건은 비밀유지를 해야 하니까.
“태평 씨, 이쪽으로.”
네모 씨는 스튜디오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 * *
“말씀하세요.”
난 앉자마자, 물었다.
어차피 상황 설명은 밖에서 다 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을 메모지에 받아적었다.
# 전속계약조건
기간: 2년
출연료: 50만 원
출연횟수: 주 3회 이상.
부가수익 정산비: 6대4
특약 사항:
1) 7일 이내 계약금 3억 원 지급.
2) 네모튜브 일정에 적극 협조.
3) 네모튜브 외 다른 곳 계약 불가.
“이상입니다.”
네모 씨는 간략하게 말했다.
“와……. 적은 시간 안에 빨리도 정리하셨네요.”
“저야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니까요. 받아들이시면 이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씁니다.”
“흠…….”
난 메모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출연료가 왜 50만 원이에요? 지금 100만 원 받고 있는데?”
“3억 원을 가불해 드리잖아요. 3억 원이 계약금+선급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속 계약 2년 동안의 출연료를 3억 원과 비교해 보시면,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흠……. 암산을 해봤는데, 뭐, 그런 거 같다.
“부가수익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죠?”
“광고 모델료, 후원금 등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수입이에요. 부가수익은 아마 이 두 가지가 주가 될 겁니다.”
“그럼 정산비는 6대4라면…… 제가.”
“네, 태평 씨가 6입니다. 저희는 부가수익에서 최대한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고 노력할 겁니다.”
“근데 광고 제안이나 후원금이 안 들어오면요?”
“후훗.”
네모 씨는 날 보며 씩 웃었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니, 염려 안 하셔도 돼요. 태평 씨 가치가 충분히 그 정도가 되니까, 이렇게 제안 드리는 거죠.”
그 외에 네모 씨는 다른 세부 사항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주었고, 간단했기 때문에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근데……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네모튜브 외 다른 곳 계약 불가.’
“이건 무엇에 관한 건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물론 태평 씨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제외고요. 그 외에 강태평 씨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다른 곳은 전속 기간 동안 계약 불가라는 뜻입니다.”
“아……. 종이접기와 관련된 곳을 말하는 거죠?”
“아니요.”
네모 씨는 단호했다.
“종이접기 외에 그 어떤 곳도 안 됩니다.”
약간 싸한데.
2년인데? 2년 동안 묶여 있으라는 건가?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요, 제가 방송 출연을 한다든지, 도서를 출판하는 등…… 그런 기회가 생기면요?”
“네모튜브가 계약을 대신합니다.”
“네? 네모튜브가요?”
“네.”
“그렇다면…… 그 수입도.”
“네, 부가수익에 들어가겠죠. 6대4로 나눠야죠.”
“…….”
끔뻑. 끔뻑.
그러니까.
담보가 없는 게 아니구나.
미래를 담보로 3억 원을 준다는 거네.
내 미래를 담보로.
“음……. 지금 계약 사항은 제안이라고 하셨죠?”
“네.”
“제안이면 협의가 가능한 거죠?”
“네, 가능하죠. 근데…….”
네모 씨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이 조건 외에는 협의할 생각이 없습니다.”
“…….”
“제안 드린 계약사항을 받아들이실지, 말지 결정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헛…….”
내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짓자, 네모 씨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불쾌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서로 하면 안 좋으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명백하게 밝히는 게 좋잖아요.”
“…….”
“강태평 씨도 회사일 하시면서 계약 많이 해보셨을 거 같은데. 무슨 말씀인지 잘 아시죠? 그리고…….”
“…….”
“이미 충분히 좋은 제안을…… 강태평 씨가 원하는 걸 제안 드렸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 나도 회사일 하면서 계약은 수도 없이 해봤다.
모든 거래는 계약으로 시작되니까.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왜 이렇게 냉정해지지 못할까.
책임에서 오는 차이 때문일까?
회사 일은 잘못 되면 시말서 쓰면 되지만.
이건…… 내 인생이니까.
내 인생을 두고 계약하는 것.
“잠깐만요. 생각 좀 할게요.”
“네, 집에 가셔서 생각 좀 더하고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오래 고민하기 싫어서요.”
“아……. 네.”
아셀라 보육원.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 어머니와 같은 수녀님이 계시고, 수많은 동생이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내 유일한 추억이며, 보금자리.
3억 원과 2년.
내 나이 겨우 31살인데, 2년 정도 묶이는 건……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다른 대안이 없잖아?
2년 안에 더 좋은 일들이 생긴다면? 지금 네모튜브보다 더?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가능성은 있지만 희박하지.
그리고 그 새에 보육원 부지가 팔려버린다면?
아이고. 머리 아파.
자자. 단순하게 생각하자.
땅이 안 팔리고 날 기다려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3억 원을 7일 이내로 받을 수 있다.
게다가 2년 동안 월급 외에 부수입도 생기는 거고.
결국,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계약서 주세요.”
“훗. 결정하셨군요.”
네모 씨는 곧바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내밀었고.
난 사인을 하기 위해 펜을 집어 들었다. 그때.
띠리리―.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지금은 저녁 8시.
이 시간에 전화 올 곳이 없는데?
‘변 팀장님’
어? 웬일이시지?
“잠깐만요.”
난 펜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강 대리. 늦은 시간에 미안.]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 아오. 이 인간들. 엔간히 부려먹어야지. 짜증 나.]
[네?]
[제이엠인터내셔날 말이다. 갑자기 연락 와서는 내일 8시까지 와서 촬영 좀 해달란다. 꼴랑 2,000만 원에 1년 계약을 해서…… 아주 개고생이네. 그때는 그게 좋은 줄 알았지.]
[…….]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한마디 했더니, 바로 계약 사항 얘기를 하는데…… 아주 얄미워 죽겠어. 도대체 이번 주에만 해도 몇 번을 불러내는 거냐고.]
[아…….]
[공모전 대상 수상자를 말이야! 한탕에 700만 원 받으며 뛰고 있는데. 아오~, 짜증 나! 우리가 실수했어. 그런 계약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팀장님, 고맙습니다.]
[응? 갑자기? 뭐가 고마워? 일하고 싶었어? 어?! 설마 제이엠으로 이직하려는 거 아니지?]
[아, 아닙니다. 그냥요.]
젠장…….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래는 담보로 거는 게 아니다.
[흠, 그래. 어쨌든 내일 회사 말고 제이엠으로 바로 출근하라고. 그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강 대리 고생이 많아. 수고~.]
전화를 끊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속 계약은 안 하는 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