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6)
“지금 정부나 군에는 허동주의 끄나풀이 많습니다. 각하의 편은 외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류성일은 말을 이었다.
“허동주와의 내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긴다 해도…… 허동주의 파벌을 숙청하셔야 하고 그 공석을 메우려면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런 인재들을 구할 수 있는 정치 집단은 고려민국 임시정부뿐입니다.”
세 세력이 각축을 벌인 역사를 보면, 어떤 식이든 2 대 1의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그래야 간신히…… 허동주에게 밀리지 않는다.
타당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이런 시도는 전에도 있었으니까.
“그들이 믿어 줄까요? 저는 그들을 속였던 자의 조카인데.”
“쉽게 믿진 못할 겁니다. 협상에 응하게 하려면…… 의심을 떨치고 위험을 감수할 만한 조건을 제시해야겠죠.”
리안은 끄덕였다.
“권력의 일정 부분을 양보하는 건 이미 각오했어요. 허동주의 지분 중 대부분을 내줘야겠죠.”
“하지만 그런 약속만으로는 그들이 손을 내밀기 어려울 겁니다. 말뿐인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징표를 제시해야겠지요. 이번에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징표를.”
그런 징표가 있을까…… 생각하다 리안은 문득 단서를 찾아냈다.
‘약속’. 평양 회담에서 제시되었던 약속. ‘입헌군주제’를 만들겠다는…… 약속.
“‘황손’을 찾아내야겠군요.”
류성일은 끄덕이고, 다시 견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견하 군. 태사 각하를 잘 모시게. 자네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든,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든 말일세.”
류성일은 획 돌아섰다. 동시에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류성일은 들어온 괴한의 이마에 구멍을 냈다.
리안은 머리를 바닥으로 눌러 내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소파에서 바닥으로 엎어지고서야 그 손길이 효윤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총성이 들렸다.
동시에 단단한 쇠에 무언가 부딪혔다가 튕겨 나가는 소리도.
효윤은 소파 뒤로 넘어갔다. 두 손을 칼을 쥐는 모양으로, 어깨너머에서 정면으로 휘둘렀다.
그 단순한 동작을 따라 효윤의 손아귀에 박도가 윤곽, 빛깔, 무게를 차례로 얻으며 허공에서 나타났다.
괴한들이 쏜 총탄이 효윤의 박도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사람의 지혜가 만든 무기와 사람을 초월한 속도가 충돌했다.
칼날이 바람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태풍 같은 풍압이 리안의 귓바퀴를 눌렀다.
고개를 돌리자 마치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효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주변으로 불꽃과 철의 파열음이 깜박였다.
괴한들은 총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환도를 뽑아 들었다.
그래, 그 정도가 무장의 한계겠지. 더 효과적인, 이를테면 화염방사기 같은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요란한 물건으로 나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리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자신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죽고 그 시체가 남아야, 허동주가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며 눈물지을 수 있을 테니까.
중장비를 써서 시신이 크게 손상되면 의심을 산다.
가증스럽고도 치밀한 인간.
리안은 머리를 식히고 상황을 정리했다. 저 두 괴한은 이단일 가능성이 크다. 어제 열차 습격 때 한 명 동원했다가 실패했으니, 적어도 둘 이상을 보냈겠지.
물론 그 청년의 숨통을 끊은 건 리안이지만, 저쪽에서는 이단이 리안을 지켜 냈겠거니 생각할 테니까.
총성이 사라지고 칼날 부딪치는 소리만 남았다.
리안은 눈앞에 있는, 총장실의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아직은 잠잠했다. 하지만 저 너머에도 대기하는 자들이 있겠지. 양쪽에서 덮쳐서 잡는 게 효율적일 테니까.
당장 들어오지 않는 건 혼선을 빚을까 봐서인가? 아니면 저 두 괴한이 보내는 무슨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거나, 일정 시간 경과 후에 들어오기로 한 건가?
효윤이 두 괴한을 빠르게 처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리안은 견하에게 눈을 돌렸다.
“너, 총 쏴 본 적 있어?”
“예? 아, 아뇨…….”
하긴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총을 쏴 봤을 리가 없지. 리안은 권총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도를 견하에게 건네줬다.
어제 이단 청년을 벤 칼이다.
“요령껏 써 봐.”
당황한 얼굴로 끄덕이는 견하에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망설이다, 웃어 보였다.
류성일도 소파 이편으로 건너왔다.
“이럴 땐 제가 이단이 아닌 게 원망스럽더군요.”
노인의 한탄을 한 귀로 흘리며, 리안은 문을 노려봤다. 총을 들어 그쪽을 겨눈다. 효윤에게 도움이 될진 알 수 없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곧 저 문으로도 들이닥친다. 효윤이 이단 둘을, 저 문이 열리기 전까지 처리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효윤은, 대령 계급이 결코 허울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비명이 천장 쪽으로 질질 끌려 올라갔다. 얼마 후 쿵, 하는 울림과 철벅, 소리가 들렸다.
허리가 끊긴 괴한의 상반신이 리안과 견하 앞에 떨어졌다. 내장과 뼈가 노출된 절단면이 그들을 향했다. 피는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튀진 못했다.
괴한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움직여 리안과 견하를 노려봤다. 고통 속에서 집념을 발휘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심한 고통이라 오히려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곧 숨이 끊어질 텐데, 하고 생각했을 때, 견하가 엉거주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곤 괴한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견하에게 뭐라 말하기 전에 리안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효윤은 마치 중력이 거꾸로 된 듯 천장에 도사리고 앉아 다른 괴한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핏자국으로 봐선, 효윤은 괴한을 칼에 꽂은 채 천장까지 끌어 올려, 천장에서 허리를 찢어 버린 듯했다.
효윤은 추락하듯 내리꽂히며, 다른 괴한도 위에서 아래로 갈라 버렸다.
머리카락, 목덜미, 치마와 무릎에 이르기까지, 피에 흠뻑 젖었다. 붉은 먹물에 적신 붓 같다.
숨도 돌리지 않고 돌아서서 문을 노려보는 효윤의 눈을 바라보며, 리안은 되새겼다.
백부가 효윤을 붙여 준 건,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리안은 견하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당기는 대로 순순히 물러나긴 했지만, 그는 두 손이 피로 흠뻑 젖도록 칼날을 밀어 넣고 있었다.
소년은 칼을 잡은 손을 떤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사람을 해친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공포와 혼란으로 떠는 건 당연했다.
리안은 ‘사람을 죽여 본 건 처음이야?’라는 진부한 물음을, 속으로 삼켰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버려 뒀어도 죽었을 거야.”
“……팔을 아직 움직일 수 있었어요.”
리안은 그 대답을 듣고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전에, 문이 열리며 또 한 명의 적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의 남자. 그는 영화 속 악당 같은 대사를 읊으려 했나 보다. 그러나 처참한 동료들의 시체를 보더니 말을 삼켰다.
진지한 얼굴로 칼을 고쳐 잡고, 자세를 취했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 총성은 금속음에 가로막혔다. 이 남자도 이단이다.
효윤이 신중하게 발을 옮기며 남자와 마주했다.
딱 한 번 칼을 부딪쳤다.
남자는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그대로, 역으로 쥔 칼을 맞대어 왔다. 단검보다 조금 긴 칼이지만 효윤의 박도를 상대하면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불꽃을 뿌리며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벌렸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노려볼 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발을 더 옮기면 리안과 견하가 남자 쪽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효윤은 움직일 수 없다. 남자도 이를 알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한 걸음, 효윤은 피하지 않고 베이면서 벨 것이다.
남자는 살아서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이미 암살이 문제가 아니다.
어느 쪽이 유리하고 불리한지, 리안은 가늠할 수 없었다.
암살자 넷, 허동주가 보낼 수 있는 최대 전력일 터. 이 이상은 너무 시끄러워진다. 항전 영웅의 조카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허동주에게 충성하는 이단도 많지 않을 테고.
그러나 버틴다 해서 리안에게 유리한가? 이 상황에서 리안에게 충성하는 자가 구원하러 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설령 누군가 구출을 시도한다 해도, 허동주에게 막힐 테고.
여기서 살고 죽고는 전적으로 효윤에게 달렸다.
연못처럼 잔잔한 대치 상황에 돌을 던지기 위해, 리안은 다시 총을 들어 남자의 머리를 겨눴다. 이단인 이상 막아 내겠지만, 적어도 국면에 변화는 주겠지.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홀연히,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한 소녀가 깨진 유리창 너머에서 방으로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 턱 끝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로 머리카락을 다듬은 소녀.
마치 지나가던 길이라는 듯 효윤과 남자가 대치하는 곳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모두가 그녀를 의식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지? 적인가? 아군인가?
소녀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기에 남자도 효윤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소녀는 계속 걸어왔다.
다음 두 걸음. 적이든 누구든 다음 두 걸음 후에 벤다. 효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칼이 빳빳하게 서는 것 같다.
소녀가 자신을 훑어본다. 뱀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었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걸음을 넘겼지만 효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다음 순간 남자는 제자리 뛰기라도 한 듯 펄쩍 튀어 올랐다. 하지만 다시 지면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효윤이 그랬듯, 소녀도 공간을 가르고 자신의 무기를 꺼낸 것이다. 소녀의 손에서 뿜어지듯 튀어나온 거대한 창 자루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가슴이 있던 공간에 소녀의 창이 나타난 것이다. 동일한 공간에 두 개의 물체가 있다면? 하나는 부서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자의 가슴은 부서져 버렸다.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남자는 움찔대다 늘어졌다. 늘어진 남자의 등 뒤로 언월도 날이 비죽 튀어나왔다.
정석과는 거리가 먼 속임수 같은 싸움법. 허무한 죽음이다.
그래도 잘못은 죽은 자에게 있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에서, 남자는 소녀보다 역량이 부족해 시체가 됐을 뿐이다.
소녀는 먼지라도 털듯 언월도를 흔들어 남자의 시신을 떨궜다. 자루를 쥔 손아귀를 펼치자 언월도는 빛의 조각으로 나뉘어 사라졌다.
리안과 견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적이 아니다.
의문을 담은 눈길을 보내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작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루우’.”
소녀는 리안을, 효윤을, 류성일을, 그리고 견하를 향해 차례로 시선을 준 다음, 말을 이었다.
“소속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