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5)
견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무슨 상관일까.
고려민국 임시정부, 라고 했나.
제3제국을 부정하고, 황제도 부정하는 사람들.
황제는 국민들을 버리지 않고 저항하다 죽은 훌륭한 분 아닌가. 견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종종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정부 관리 암살 등 테러 소식의 주인공이다.
‘의문의 전학’ 사건들도 이들과 관련 있지 않을까?
리안도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그냥 지하조직인 줄 알았는데, 세계대전 당시 3대 세력 중 하나였다니 의외네요.”
“공식적으로는 부정된 역사니까요. 제3제국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어떤 주장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장은 이러했다.
군주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빌린 것이고, 국가는 백성들의 합의로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사라졌을 때, 주권은 당연히 백성들에게 돌아온다.
그들은 반납된 주권으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지금 들으신 논리는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특히 허동주 쪽에 들어가면 좋지 않습니다.”
견하와 효윤은 끄덕였다. 류성일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전쟁 3년 차인 1907년 말, 임시 수도 상경의 분위기는 다소 밝아졌다.
늘 엄격하던 미승휴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를 받았다.
“이 허동주라는 자, 부족한 병력으로 잘도 적을 괴롭히는군. 지원 물자를 더 보내도록.”
“이대로라면 몽골군이 칸발리크를 탈환할지도 모르겠군요.”
미승휴의 참모가 된 류성일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맞장구쳤다.
“동맹의 선전은 좋은 일이지. 우리도 그에 맞춰 반격한다.”
“하지만 태평천국이 조급해진 나머지 대공세 한 번으로 승부를 보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여기 상경이 되겠군. 방어전에 대비해야겠어.”
“고려민국 임시정부 측에도 남쪽에서 양동을 취해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그쪽은 아즈텍, 일본, 류큐, 아이누 등에서 의용군을 지원받아 여유가 있습니다.”
“음…….”
미승휴는 살짝 못마땅한 속내를 비쳤지만, 승인했다.
예상대로 태평천국군은, 상경 공략을 통해 동북 전선을 마무리 짓고자 어마어마한 전력을 쏟아부었다.
근 한 달간, 처절한 공방이 이어졌다.
만약 태평천국이 그 이상 버텼다면 상경은 함락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 한계였다.
먼저 항공전에 투입된 이단들이 빠르게 소모됐다.
자신의 몸무게만으로도 비행은 힘든 일인데, 항공기 보조는 사실상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었다. 피로에 찌든 이단의 항공기는 쉽게 격추될 뿐만 아니라 사고까지 일으켰다.
이단은 잘 보충되지도 않는다. 지금도 이단의 판별법이나 육성법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혈통’에 의존해 발굴한다.
태평천국과 달리, 미승휴는 항공 전력을 모으고 고려의 이단을 철저히 지상전에만 투입했다.
그렇게 축적한 힘이 태평천국보다 우위에 섰을 때, 승패가 갈렸다.
“적이 물러갑니다!”
“방수된 통신은 퇴각령입니다! 적은 퇴각하고 있습니다!”
참모들은 들뜬 어조로 보고했고, 미승휴도 끓어오른 군의 사기를 더욱 북돋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적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반격해서 완전히 무너뜨린다!”
류성일은 그때, 사령부의 환희를 잊지 못한다. 기계처럼 움직이면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쾌감에 전율하던, 반격의 날을.
태평천국의 몰락이 시작됐다.
동북으로는 고려와 몽골, 서남으로는 무굴제국 전선에서 소모된 태평천국은 한계에 다다랐다.
고려로 향하는 지원을 막으려 시작한 잠수함 작전은 일본공화국과 아즈텍 연방의 정식 참전만 불러왔다.
1910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응천이 함락됐다. 세계대전은 그렇게 끝났다.
태평천국은 황실의 존속을 항복 조건으로 내밀었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만 했다.
9월 어느 날 밤, 태평천국 황제 일가는 괴한들에게 끌려 나와 총살당했다. 시신은 장강에 버려졌다.
이를 고려가 저지른 보복이라 판단한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은 강하게 항의했다.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자 고려는 산동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몽골 황족의 칸국을 세우는 데 동의하여, 동맹국들의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나라들이 황하 유역의 키타이, 장강 유역의 낭키아스였다.
***
류성일은 회상에서 잠시 벗어나, 씁쓸하게 말했다.
“그때는 모든 시련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고려가 셋으로 나뉘어, 내전 직전까지 치달았으니까요.”
전쟁이 끝나자 미승휴는 요동시, 즉 지금의 동명특별시가 될 곳에 주둔했다.
여기서 그는, 고뇌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새 나라를 만들 것인가?
전쟁 중에는 애써 잊은 척했지만, 이제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황실과 옛 정부는 괴멸했다. 사실상 나라가 한 번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 상황에서 정부를 꾸리겠다고 나선 세력이 셋이니, 당연히 누가 정통 정부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세 세력 모두 헌신적으로 항전했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그러나 국가 재건에 관한 생각은 모두 달랐다.
“선대 태사께선, 복고주의자셨습니다. 제2제국처럼 황제 체제로 재건하자고 주장하셨죠.”
류성일은 잠시 말을 골랐다.
“각하껜 죄송한 말씀이지만, 선대 각하의 권력욕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충신이자 위대한 재상으로서의 명예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황제로부터 당신의 권위를 인정받고, 신민들 위에 서서 권력을 누리려 했습니다.”
이른바 일인지하 만인지상.
“허동주는 강대한 군사력을 지녔지만 정통성이 부족했죠. 이에 그는 자신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새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군이 중심이 되는 사회.
다시는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온 사회가 군을 뒷받침하며, 군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주장은 당시 사회 분위기상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미승휴보다 우위에 서진 못했다. 허동주는 혼란기를 틈타 성장한 군벌에 불과했으니까.
지리적 조건 역시 허동주가 도전하기엔 불리했다.
허동주의 근거지는 패퇴한 군을 수습한 흥안령 산맥 북부, 칸발리크 인근의 서부 전선, 그리고 산동, 이렇게 세 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자도 내전을 가늠해 보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세 근거지가 각개 격파당할 위험이 크다고 봤겠죠.”
미승휴도 허동주에게 일방적으로 복종을 명하지 못했다. 허동주가 장악한 ‘산동’ 때문이었다.
삼한 반도를 향해 튀어나온 산동은, 평양 폭격을 감행한 태평천국의 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요동에 새 수도를 건설하려던 미승휴는, 반드시 산동을 확보해야 했다. 산동을 고려가 보유해야 새 수도의 방패로 삼을 수 있었다.
전쟁 보상으로 반드시 받아 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산동의 그런 위상이 허동주와 미승휴 사이에 미묘한 균형을 잡았다.
미승휴는 허동주와의 내전은 피해야 했다. 아직은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 전이라, 산동 영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시점이었다. 내전은 산동 확보를 무산시킬 수도 있었다.
세 번째 세력,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으로 이행할 기회를 엿봤다. 자유세계인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이 이들을 지지했고, 때문에 미승휴는 이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고뇌는 깊어졌다.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피를 최대한 덜 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군국주의자, 살아남은 기존 귀족층 등 여러 정파가 만족할 방안은 어디에 있는가?
미승휴가 류성일의 제안을 채택한 것은, 바로 그런 고뇌에 빠져들었을 무렵의 일이다.
“저는 권력을 다소 양보하고 타협하자고, 선대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든 세 집단이 공유할 큰 틀만 잡으면, 차이를 충분히 조율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류성일의 제안은 절반만 받아들여졌다.
***
그때, 아직은 젊었던 미승휴는 이렇게 말했다.
“살무사 중사는 적어도 불순분자는 아니야. 그는 황제 체제를 부정하진 않지.”
“각하, 하지만 그는 극단적인 인물입니다.”
“내가 누그러뜨릴 수 있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애국적’인 군인으로 남게 하지.”
허동주에게 정식으로 원수 계급이 부여됐다. 문하시중이라는 자리도 주어졌다.
요동에서 ‘동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된, 새 수도에 입성한 허동주는 정권의 이인자가 됐다. 그는 황제의 대리인인 미승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911년, 미승휴와 허동주의 연합으로 제3제국이 출범했다. 언젠가 황제가 돌아올 그 날까지, 라는 약속 아래, 미승휴는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미승휴의 첫 ‘처리’ 대상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였다.
황제국을 부정하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사상은 미승휴에겐 반역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태평천국 황실 처단, 태평천국 영토 분할에서 보여 준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의 개입도 미승휴를 언짢게 했다.
“무력 진압은 아즈텍과 일본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네. 일단은 대화로 풀도록 하지.”
미승휴는 ‘평양 회담’을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제안했다. 함께 국가 재건을 논의하자고.
평양 회담은 겉보기엔 성공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제안이 나왔고, 미승휴도 동의했다.
그러나 회담 직후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썼다.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평양에 올라온 고려민국 임시정부 인사 중 상당수가 긴급 체포 됐다.
그들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몇몇은 동지들을 배신하고 살아남았다.
평양 회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지하조직으로 만들고 숨어들었다.
고려민국계 군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싸우다 죽었다. 항복한 군인들도 극북(極北)으로 배치됐고, 그중 장교들에겐 수용소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마지막 자비가 내려졌다.
***
류성일은 말은 멈추고 천천히 권총을 집었다.
“들리는가?”
효윤을 향한 물음이었다. 그녀는 끄덕였다.
“느리고 신중한 발걸음이군. ……이렇게 빨리 냄새를 맡을 줄이야.”
류성일은 리안을 보며 덧붙였다.
“이 정도면 각하의 적들은 상당히 많은 눈과 귀를 보유했을 겁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총구를 문 쪽으로 겨눴다.
리안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허동주의 계획과 음모를 파악하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이 나라의 어두운 면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백부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도, 제3제국이 그렇게 세워진 것도 전혀 몰랐다. 허동주에게 죽은 백부는 허동주의 공범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가 국정을 장악하겠노라 1년을 설친 셈이다.
거기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백부가 권력자로서는 옳았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런 인간이었나. 리안의 입가가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침묵을 깨고 울린 소년의 목소리에 리안은 눈을 들었다. 견하가 묻는다.
“거기서 생각해 낼 수 있는 해결책은 뭔가요?”
견하와 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허동주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고, 각하는 그들과 대결할 생각이시죠.”
격해지는 감정을 누르듯, 소년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자들이 또 사람을 죽이게 놔둘 수는 없어요.”
이 상황에서 그가 든든하다고 느끼면 이상한 걸까.
리안이 답을 재촉하는 눈길을 보냈다. 류성일은 답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와 손을 잡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