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일류의 싸움법 (2)
세계가 하얗게 암전됐다.
우주가 지워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둠 속에 나와 상태창만이 남았다.
차캉!
아무것도 없던 빈 슬롯에 무언가가 채워졌다.
그것은 이름.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일곱 글자의 이름이었다.
‘이거였구나.’
무기나 아이템을 넣는 게 아니었다.
르팔타커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생겨난 이 슬롯의 정체. 그것은 내가 감옥에서 사귄 ‘친구 목록’이었던 것이다.
[친구 르팔타커스 시온의 액티브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 Lv. 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친구의 스킬은 같은 층에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위력은 시전자의 숙련도에 정비례합니다.]
그는 검투사였다.
수만의 관중이 모인 원형 투기장에 서 있는 사내의 등이 보인다. 그의 눈앞에는 살육의지에 몸을 내맡긴 검사와 창병, 괴수가 이끄는 전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유로웠다.
그의 별호는 ‘만전불패(萬全不敗)’.
일평생 패배를 몰랐기에 굴복과도 인연이 없었던 투사였다.
그런 ‘르팔타커스 시온’의 힘이 내게 스며들었다.
*
차카가 내뻗는 주먹이 보인다.
그것도 0.1배속으로 재생한 액션 영화의 동작처럼 느리게.
나는 침착하게 어깨를 틀어 녀석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응?”
놈은 나를 지나쳐간 다음 잠깐 의아해했으나 이내 씨익 웃었다.
“운 좋게 피해냈구나.”
운이 아니었다.
차카의 공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의 나는 마치 검투장에서 수만의 적수를 물리친 챔피언이었으니까.
“그래. 내가 말실수를 했어.”
“인제 와서 빌어보려고? 그래봤자 소용없어. 판이 너무 커졌잖냐.”
“아니. 배탈 날 거라고 얘기한 거 말야. 분명 엘프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처잡쉈겠지. 원래 돼지는 잡식성이니까 말야. 그치?”
실실 웃던 차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척추를 뽑아주마!”
차카의 손바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내 목을 틀어쥐려는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간발의 차이로 그걸 피해냈다.
그래, 더 흥분해라.
그럴수록 공격의 루트는 단순해지는 법이니까.
“이 녀석이?!”
광분한 홉고블린이 양팔을 휘둘렀다.
나는 춤추듯 다리를 놀려 녀석의 공격을 흘렸다. 주먹이 빗나갈 때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마그마의 불빛을 반사했다.
관중들의 탄성이 들려온다.
“저걸 다 피해? 제법인데.”
파괴력 넘치는 공격이라 한들 맞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잃으면 머리가 그대로 으깬 감자가 되는 외줄 타기였다.
‘이것이 르팔타커스의 체술.’
이족 보행 몬스터의 공격은 주먹과 발에서 뿜어져 나오지만 그 발동은 어깨와 허리의 회전에서 시작된다.
내 머리는 스펀지처럼 검투사의 체술을 빨아들여 내 것으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알파 테스터가 하는 일이 이런 것이었다. 누구도 만져본 적 없는 조작 시스템이 주어졌을 때, 최대한 빨리 그것의 핵심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것.
뛰어난 드라이버라면 처음 시승해보는 타입의 차량도 능력껏 몰 수 있는 원리다. 게다가 이건 보통 차도 아니고 한 우주를 호령했던 슈퍼카다.
‘좋아. 내 몸의 가동범위가 점점 파악되고 있어.’
주먹은 피하고,
박치기는 흘린 다음,
발차기엔 물러선다.
“으아아아아아!”
결국 차카 녀석이 마구잡이로 펀치를 쏟아내자 빈틈이 생겨났다. 상체를 숙여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방비한 갈비뼈를 향해 회심의 훅을 장전했다.
디딤발을 강하게 딛고 허리를 회전시켜 하반신의 힘을 그대로 주먹에 전달!
빠악.
[차카 도기노브의 HP에 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에게?
거목의 나무껍질을 맨손으로 긁어내는 수준이었다. 있는 힘을 다 쏟아부었는데도 차카의 복부는 멀쩡했다.
이것은 검투사의 체술이 아니라 내 몸이 가진 물리력의 한계. 녀석의 근육을 뚫고 내장에 충격을 주기엔 내가 가진 근력 스탯이 지나치게 형편없었다.
“백날 때려봐라. 간지럽기만 한데?”
설상가상으로 차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내가 반격을 했던 것이 오히려 녀석으로 하여금 힘의 격차를 확인시켜 준 셈이 된 것이다.
“너처럼 요리조리 피하는 녀석을 잡는 방법이 있지.”
믿기지 않게도 녀석은 훌쩍 뛰어올라 육박해왔다. 나는 질겁해서 뒤로 물러났는데 차카가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양손을 모아쥔 녀석은 그것으로 땅을 거세게 내리쳤다.
콰아아앙!
박살 난 지면에서 튀어 오른 돌멩이가 내 이마 위를 직격했다. 검투사의 체술로도, 용사의 반사신경으로도 피할 수 없는 예측 불가의 습격이었기 때문이다.
“끄으으윽.”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피가 줄줄 흘러 오른쪽 시야가 흐릿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차카의 작전은 훌륭했다. 공격을 예상해서 피해내는 적을 잡으려면 공격의 궤도를 ‘무작위’로 바꿔 예측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가진 건 힘밖에 없는 무식한 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 똑똑한걸.
“넝마로 만들어주지!”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차카는 우직하게 덤벼들지 않고 굴러다니는 돌무더기를 걷어찼다. 그러자 자갈 크기의 돌멩이가 정강이로 날아왔다.
“커허억.”
한쪽 다리로 비틀대던 나는 뒤로 넘어져 절벽 끄트머리까지 굴러갔다. 땅을 짚고 일어서는 팔다리가 후들댄다. 아직 체술의 숙련도가 낮아서 무작위로 날아오는 공격까지 다 파악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시야 한쪽에서 내 상태창이 불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HP: 16/100]
내게 돈을 걸었다던 죄수 녀석이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에 대다수의 관중들은 결착의 피 냄새를 맡았다는 듯 더 시끄럽게 소리쳤다.
“끝이다. 눈알을 먼저 뜯어내!”
“무슨 소리. 미적 감각이 없구만. 머리를 척추째로 뽑아내는 게 최고지.”
마치 응원하는 축구팀이 인저리타임에 페널티킥 찬스를 얻었을 때처럼.
하지만 나는 저 죄수들의 구경거리가 될 생각이 없었다.
[1층의 교도관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에 날 가둔 교도관들의 유흥거리가 될 생각도 없었고.
“아아, 졌다. 돼지 녀석아.”
그 무엇보다 저 식인 돼지의 식사 거리가 될 생각만큼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마그마가 넘실대는 낭떠러지까지 물러선 다음 양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서 자비를 빌어보려고? 내 뱃속에서 용서를 구하도록 해주지.”
차카 녀석은 여전히 나를 잡아먹고 싶어 했다. 놈의 그 식탐과 집착이 내가 파고들 유일한 허점이었다.
“그건 싫어. 차라리 이 아래로 뛰어드는 게 낫지. 너한테 먹히는 것보다는.”
군침을 흘리던 홉고블린의 안색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이어이, 진심이냐? 안 돼! 뛰어들지 마!”
“작별이다. 안녕.”
나는 진짜로 뛰어들려는 듯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이대로 몸을 뒤로 뉘기만 하면 용사의 몸은 불길에 집어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
“그렇게는 못 둬!”
차카 녀석의 가슴이 후욱 하고 부풀어 올랐다.
나와 싸우면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준비 동작. 그래, 인마. 그거야말로 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광경이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타악!
방향을 바꿔 힘껏 도약했다. 절벽 위가 아닌 홉고블린의 정면을 향해.
‘내가 미쳤다고 자살을 해?’
제작사로부터 어떤 게임을 받아들든지 나는 몬스터의 설명을 대충 넘긴 적이 없다.
녀석의 프로필엔 분명 자신을 쫓아온 병사에게 ‘독을 뿜어’ 죽음을 선사했다고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 놈이 가진 ‘MP: 80’이란 스탯이 내 무모한 작전에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크로로로록.”
차카에겐 원거리 독 공격이 있다. 다만 그걸 쓰면 날 산 채로 먹을 수 없으니까 아껴뒀던 것뿐.
어느덧 놈이 지근거리에 들어왔다.
[인벤토리가 열립니다.]
온통 사용 불가 플래그로 도배된 내 인벤토리에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레벨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체력 회복약’ 10개가 빨간 약물을 찰랑이며 용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약을 빼 와 벌컥벌컥 들이켰다.
[HP가 최대치까지 차오릅니다.]
탈옥을 위해선 최대한 아껴야 하는 소모 아이템. 하지만 지금 안 쓰면 언제 쓴단 말이야.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고 절뚝이던 다리에 힘이 솟구친다.
“이야아아아압!”
차카는 내가 자신 쪽으로 달려들자 당황했다. 하지만 위장에서 뭔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라 몸을 빼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취해야 할 동작들이 떠오른다. 분명 르팔타커스는 차카와 같은 아인종과의 격투 경험도 풍부했던 모양이다.
타악!
놈의 무릎을 밟고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등 뒤를 빼앗은 다음 두툼하게 솟아오른 녀석의 어금니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아래로 당겼다.
촤아아아아악!
불길한 녹색 액체가 차카의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방향은 내 쪽도, 차카의 몸통 쪽도 아니었다.
바로 살육의 현장을 좀 더 가까이 지켜보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와 있던 구경꾼 죄수들 쪽이었다.
“으앗! 피해라아!”
맨 앞줄에 있던 죄수들이 펄쩍 뛰어 피했으나 뒷줄에 있던 리저드맨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치이이익!
맹독 브레스에 직격당한 리저드맨의 머리와 오른쪽 팔이 녹아내렸다. 몸통만 남아 스르르 허물어지는 리저드맨에게 어떤 죄수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내 머리에서 내려와!”
0층의 교도관에게도 그러했듯 차카는 누가 자신의 머리에 올라타 있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나는 놈이 발광하기 직전 뒤로 몸을 빼 멀찍이 물러섰다.
그리고 울그락불그락해진 식인 고블린을 향해 선언했다.
“내가 이겼어, 돼지 새끼야.”
“뭐?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 덤벼라! 이 자식이…… 웃어?”
그럼 웃어야지.
내가 그토록 바라던 메시지가 눈앞에 뜨고 있는데.
[돌발퀘스트 #1 ‘자리 쟁탈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차카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아 1층의 빈자리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근력이 1 오릅니다.]
돌발퀘스트의 달성 조건은 차카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수감자의 자리’를 획득하라고 했을 뿐. 차카를 죽이는 것만이 퀘스트를 달성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관중들 중에서 누군가가 죽어도 ‘빈 자리’가 하나 생기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 힘으로 만들었다.
푸르가토리움 1층 화룡도의 ‘빈 자리’를.
메시지가 스르륵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나와 차카의 수갑과 족쇄에 다시 쇠고랑이 채워졌다.
철컹.
“크아아악! 당장 이거 풀지 못해.”
식인 홉고블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발버둥을 쳤지만 발이 꼬여 우당탕 넘어질 뿐이었다.
[교도관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슈바인 스트링거와 차카 도기노브를 정식 죄수로 인정합니다.]
우리 둘 다 정식 죄수가 됐으니 이제 차카가 나를 죽이면 형량이 추가될 것이다.
나는 씩씩거리는 차카에게 껑충껑충 뛰어갔다.
그리고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녀석은 많이 봤어.”
룰에 반항하는 자는 삼류다.
눈앞의 차카처럼 룰에 굴복하는 자는 이류고.
룰을 이용하는 자. 그게 일류다.
“난 절대 이 감옥에서 죽지 않을 거야.”
물론 이 감옥에서 살지도 않을 거고.
나는 벗어날 것이다.
지금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