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일류의 싸움법 (1)
푸르가토리움 1층 화룡도.
이곳은 지옥의 최하층을 형상화한 듯한 곳이었다.
넘실대는 용암의 바다 위에 기암괴석이 솟아올라 있는 섬. 액션 게임이면 꼭 하나씩은 넣어두는 지하세계의 폭열 지옥.
나와 차카는 쇠고랑이 채워진 채 이곳에 뚝 떨어졌다. 어떤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뜨겁다.”
그야말로 내 몸이 밀가루 반죽이었다면 10분 만에 쿠키로 구워질 것 같은 열기였다. 하지만 해롱대는 나와는 달리 차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교도관이라는 쥐새끼도 없어졌겠다, 널 시식해 보실까.”
젠장. 그러고 보니 더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난데없이 불 위의 프라이팬에 떨어진 셈인데, 그 프라이팬에 나를 씹어 삼키고 싶어 하는 홉고블린이 1+1 패키지로 딸려 왔다.
“너 내가 돼지라고 했던 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걸로 세 번. 너는 벌써 세 번이나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를 지껄였다.”
“음. 사실 내가 있던 별에선 돼지가 몹시도 신성한 동물이다. 오죽하면 우리 인간들은 부귀영화를 빌기 위해 돼지머리 앞에서 절까지 한다고. 믿어 줘라.”
“크흐흐. 웃기지 마라. 수작 부려봤자 안 통해.”
녀석이 내 목을 붙잡으려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하늘에서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졌다.
꽈아아앙!
“너희들이 새로 온 신참인가.”
자세히 보니 바위가 아니라 엄청난 덩치를 가진 괴물이었다.
질겨 보이는 회색 가죽을 가진 인간형 몬스터. 얼굴은 코뿔소의 그것과 흡사했다.
“나는 2번 방장 다이몬이다. 신참에게 감방 생활의 규칙을 알려주고 있지. 일단 네놈들의 꼬락서니가 미풍양속을 해치는군.”
다이몬은 회색 바탕에 남색 가로줄이 그려져 있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근육이 너무 탄탄해 죄수복이 쫄티처럼 팽팽하게 늘어날 정도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에 차카 녀석은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교도관! 이 녀석들 이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내버려 둘 거야?”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권능을 발휘합니다.]
나와 차카의 몸에 빛이 번쩍인 다음 사라지자 어느새 죄수복이 입혀져 있었다. 다이몬은 만족했는지 콧김을 내뿜었다.
“이제 뜨거워서 기절할 일은 없을 거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숨 막히던 열기가 다행히 꽤나 누그러진 느낌이었으니까. 방열 기능이 있는 건가.
“인간 수감자. 죄수 명단에 적어야 하는데,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박상······ 아니, 슈바인 스트링거다.”
교도관이 나를 이 이름으로 불렀으니 나도 빨리 이 일곱 글자에 적응해야 한다. 물론 육성으로 내뱉기엔 꽤 간지러운 이름이지만.
그때 차카는 다이몬을 의식했는지 상체를 부풀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차카 도기노브라고 한다. 네가 방장이라고? 여기엔 방장이 몇 놈이나 있냐.”
“방은 총 16개다. 방장의 수도 당연히 그만큼이지.”
“그, 그래?”
차카 녀석은 다이몬의 어깨와 팔뚝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상대의 힘을 가늠해보고는 이런 괴물이 열다섯이나 더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이름: 다이몬 키리스]
[종족: 트리케리안], [클래스: 백인대장]
[칭호: 화룡도 2번 방장]
[HP: 1,290], [MP: 210], [근력: 164], [민첩: 47]
[형량: 360년]
[무저갱의 미궁에서 한 층을 주름잡던 마족입니다. 자신만의 규율을 따르는 결벽증이 있으며 때문에 화룡도 1층에서는 보안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보안관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후회할 것입니다.]
강하다. 저 정도면 보통 게임에서 초반 스테이지의 보스몹 정도 되지 않을까. 저 차카 도기노브 녀석은 중간 보스 정도 되고.
“오오오, 신참이다아아!”
그때,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방장들만이 날 마중 나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위 언덕 곳곳에서 엄청난 수의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둘이나 왔어. 이쪽 좀 봐줘라!”
“야, 비실이! 엉덩이를 좀 흔들어 봐!”
“저 비만 고블린은 우리 방에 오면 너무 좁겠는데.”
하나같이 꿈에 나오면 오금이 저릴 것처럼 살벌하게 생긴 얼굴들. 그런 놈들이 아낙을 희롱하는 무뢰배들처럼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지금은 거리가 멀어 용사의 심안으로 가까이서 들여다볼 순 없지만, 개중에는 분명 다이몬급으로 강력해 보이는 녀석들도 포진해 있었다.
“잠깐만. 그런데 왜 둘이지?”
다이몬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코에 난 큼직한 뿔을 긁었다.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명부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지금 결원이 있는 방은 13번 방 하나야. 왜 두 놈이나 입소한 거지? 교도관 놈들이 또 멍청한 짓거리를.”
다이몬은 곤란하게 되었다는 듯 나와 차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한담. 빈자리는 하나뿐인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에 다이몬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유감이다, 인간 죄수.”
“이봐, 뭐 하는 거야?”
코뿔소 거인은 손가락으로 기암절벽을 가리켰다. 절벽 아래엔 펄펄 끓는 마그마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 놈이 왔어야 했는데 두 놈이 왔어. 예상 밖의 사태는 딱 질색이야.”
“그래서?”
“하나로 줄여야지.”
분명 차카 녀석보다 내가 훨씬 가벼우니까 절벽으로 집어 던지기 편하다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자식, 두뇌도 코뿔소 수준인가.
“어? 뭐야? 한 놈 버리는 거 같은데.”
신참을 구경하러 온 죄수들은 혀를 차고 있었다.
“쟤 오자마자 죽는 거야? 그냥 나한테 넘기지. 가죽을 벗겨서 양탄자로 만들면 딱 좋겠고만. 금발은 양탄자 끄트머리에 뭉치로 달고.”
“꽉 막힌 다이몬답네. 저 새끼 유도리가 없어, 유도리가.”
“난 차라리 저 인간 놈이 부러운데. 어차피 감옥에서 썩을 거, 빨리 뒈지는 게 행복일 수도.”
이 미치광이 죄수들이 뭐라고 떠드는 거냐.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떡하지? 이대로 가면 게임 클리어는커녕 첫판에 죽게 생겼다!
“잠깐. 죄수가 다른 죄수를 죽일 경우 형량이 추가되고 그런 건 없어?”
다이몬은 의표를 찔렸다는 듯이 주춤했다.
“정식 죄수가 정식 죄수를 죽일 경우엔 그렇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안내 음성이었다.
[1층의 교도관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둘은 정식으로 배정된 죄수가 아니기에 아직 판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알립니다. 누군가를 죽여도, 죽임을 당해도 미배정 죄수에게 교도관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대기실의 생쥐가 우릴 쉽게 소멸시킨다느니 할 수 있었던 거야. 아직 정식 죄수가 아니라서 그렇다는 거지?”
다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처럼 신참이 입소하는 날이면 그가 정식 배정을 받기 전을 노려 재미삼아 사냥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걸 막기 위해 너희를 배웅 나온 거지.”
하지만 두 명이 입소해버리는 바람에 원칙주의자인 이 코뿔소의 머리가 복잡해져버렸다 이거로군.
“좋아, 좋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 다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상황파악은 다 끝났다. 흘러가는 운명대로 죽어버릴 순 없지.
마침 떠올랐다.
이 상황을 ‘공략’할 완벽한 방법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가 확실해져야 한다.
“그러면 다이몬. 미배정 죄수끼리 싸우다가 한쪽을 죽이는 건 상관없나?”
“뭐? 내가 알기론 그렇다만…… 왜 그걸 묻는 거지?”
나는 손가락을 뻗어 내 입소동기 차카 도기노브를 가리켰다.
“그럼 저 돼지 새끼와 날 서로 싸우게 해 줘. 한쪽이 죽을 때까지.”
*
“싸워라! 죽여라!”
“시시하게 금방 끝내지는 말아줘!”
“그래! 원래 X밥 싸움이 제일 꿀잼이라고. 허접들끼리 치고받는 게 최고지.”
‘피를 본다’는 생각에 죄수들이 더욱 가까이 몰려들었다. 흥분한 관객들이 모여서 원을 만들자 절로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 한가운데서 나와 차카는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제법 뱃심은 있는 놈이구나.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나와 싸우게 해달라니.”
“어쩌겠냐. 티켓이 하나뿐이라는데. 내 너를 잊지 않으마. 그 지독한 입 냄새도.”
“그래, 얄미운 네 주둥이가 그냥 용암에 녹아버리도록 하는 건 아깝지. 널 녹여버려야 할 액체는 내 뱃속의 위산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다이몬은 일이 이렇게 흘러간 게 불만이라는 듯 혀를 찼다.
“층장이 알게 되면 짜증 낼 거야. 죄수가 다른 죄수를 때려죽이는 걸 안 좋아한다고.”
그 옆에서 한 죄수가 해맑은 어투로 다이몬을 다독였다.
“걱정 마. 층장은 지금 사냥 중이잖아. 사나흘은 안 돌아올걸?”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층장은 뭐고, 사냥은 또 뭐야?
차카 도기노브가 쇠고랑이 채워진 수갑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어이! 교도관! 이것 좀 풀어주지? 묶여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관중들이 그 말이 옳다며 동조했다.
잠시 후 화룡도 전체에 안내방송처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층의 교도관 ‘불꽃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수감자 차카 도기노브의 건의를 수용합니다.]
스르륵.
녀석과 나의 쇠고랑이 마술처럼 사라졌다.
“크하하! 1층의 교도관은 제법 말이 통하는군!”
차카는 호탕하게 웃어젖혔지만 내 속은 살짝 타들어 갔다. 용사의 심안이 파악한 녀석과 내 능력 차이는 아득했다. 맨주먹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선 쇠고랑처럼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요소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는데, 아쉽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 ‘자리 쟁탈전’]
[용사는 제비뽑기의 결과로 1층 교도관의 영역인 화룡도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1층에 남은 빈자리는 하나뿐. 용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차카 도기노브의 공격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고 1층 수감자의 자리를 획득해야 합니다.]
[기한: 30분]
[보상: 근력 +1]
[실패 시: 사망]
또다시 나타난 퀘스트 알림.
대기실에서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에 접촉했을 때도 이것이 나타났었다. 르팔타커스의 의지가 느껴졌다. 자신의 길을 따라가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크아아아아아!”
포효하는 돼지의 머리가 퀘스트창을 뚫고 나타났다. 내가 멍을 때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선제공격을 해온 것이다.
“죽어랏!”
살인적인 니킥이 내 복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차카의 무릎에 직격당한 나는 30미터나 뒤로 날아가다가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커헉!”
머리가 띵하고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야, 신참. 한 방에 뒈진 건 아니지?”
“일어나, 이 새끼야. 역배당인데도 너한테 걸었다고! 잭팟 좀 터트려보자.”
잭팟이 터지기 전에 내 오장육부가 터질 판국이다.
비틀비틀 일어서며 몸 상태를 점검해봤다. 관절 이곳저곳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HP: 64/100]
한 방에 훅 깎인 HP였다. 단순 계산으로 녀석의 공격을 정통으로 2번 더 맞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 된다는 소리였다.
차카가 다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왜 갑자기 조용해지셨나. 한 번 더 까불어 봐라, 응?”
“너 주로 어린 엘프들 잡아먹었다면서. 나 먹으면 배탈 나는 거 아니냐? 응?”
“걱정 마라. 반찬 투정 안 하는 타입이다.”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해보자.
녀석이 니킥을 작렬시켰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점프해 충격을 완화시켰다. 휠체어에 앉아 생의 절반을 보낸 인간 박상식에게는 불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반사신경이라고 봐야겠지.
‘그래, 이 몸은 용사다. 내가 가진 기술을 쓸 수만 있다면…….’
[S급 공격스킬 ‘승룡과강’ - 근력 부족으로 실행불가]
[B급 공격스킬 ‘비뢰선풍각’ - 근력 부족으로 실행불가]
역시 발동 안 되나.
어쩌지. 이 위기를 타개할 기술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이를 악물었을 때 시스템의 안내가 흘러나왔다.
[도움이 필요할 때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친구들이 응답하여 힘을 빌려줄 것입니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라니.
생면부지의 감옥에서 친구가 어딨다고?
그때 불현듯 르팔타커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짐의 친구가 되겠는가.’
차카가 또다시 땅을 박차고 짓쳐들어왔다.
밑져야 본전. 나는 설명대로 하나의 이름을 외쳤다.
“르팔타커스, 도와줘!”
그러자 내 오른팔에 새겨진 사자의 문신에서 광휘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