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8 고립과 기다림 =========================================================================
악마들이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을 군대로 뭉치게 하고, 명령을 내렸던 구심점이 사라지자 그들은 오합지졸처럼 각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악마가 사라지자 체계적으로 움직이던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본래 서로 뭉쳐서 다니는 것을 크게 좋아 하지 않았던 악마들인지라 그 현상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충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해서 마구잡이로 인간들을 습격하기 위해 흩어졌다.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던 것은 대악마가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아니기에 당연하게도 악마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군대가 아니었기에, 인간들이 승기를 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나 하나 이탈한다고 설마 지겠어? 하는 마음을 갖던 악마들이 결국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되는 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인간계에는 악마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인간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계에서 또 다시 악마들이 몰려오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당연히 있었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고, 누군가를 '잃은' 이는 송이도 마찬가지였다.
태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송이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들린 태상의 옷을 바라봤다.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태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앉아 있었다. 태우는 며칠 전에 엉금엉금 기는 것에 성공했다.
다들 태상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숭고했고, 모두들 애도했다. 하지만 송이는 태상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자체가 너무 싫었다. 그가 죽었기에 이 세계가 무사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가 죽었기에 자신이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거라는 게 끔찍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송이에게 세상은 그다지 자비롭지가 않았다.
어느 날, 송이를 찾아 온 혜연은 그녀에게 태상의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시체도 없는데 왜 그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 묻자, 국가에서 하는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전해왔다.
혜연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그렇게 힘겹게 말했다.
국가에선 태상의 영웅적 일대기를 계속해서 선전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널리 알렸다.
태상은 영웅이 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싸웠던 계약자들 또한 영웅이었고 말이다. 나라에서 참전용사와 같은 대우를 해주기로 약속을 했기에 훈장을 주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이상 살아남은 영웅은 꺼려질지 몰라도, 죽은 영웅은 환영할 요소였다. 여러 가지 상징성을 부여시켜서 이용하기 딱 좋으니 말이다. 그들은 마음껏 태상의 이름을 팔아 명성을 드높였다.
때문에 TV에서는 연신 태상의 얼굴이 나오며 그의 업적을 칭찬하기 바빴다. 정말 살아 돌아온다면 그 영광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이의 얼굴에는 한 점의 미소도 피어나지 않았다. 그 영광을 만끽 할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모님."
"......."
"결정을 내려주셔야 해요."
혜연의 손에 들린 서류를 송이가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의 장례식은 국가에서 해주기로 했다. 무려 TV에서 생중계를 한다고 했고 말이다. 이 서류는 그곳에서 송이가 연설을 해야 하는 말들이 적힌 서류였다.
"하고 싶지 않아요....전 아직 태상이가 죽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죄송해요."
더군다나 그들은 송이에게 연설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시체도 없는 장례식이니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송이가 참석을 해줘야 장례식이 더 빛날 수 있었다. 아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의 죽음이 이용되는 것 같아서 저도 많이 분하지만...."
혜연이 말끝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게 그녀도 곤혹스러울 것이다. 태상이라는 영웅의 존재는 악마와의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있는 상태였다.
쓸데없는 이미지 메이킹이었다면 혜연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혜연은 이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위해서 말이다.
"....알겠어요. 참석할 게요."
그게 태상의 아내로서 해야 만 하는 일이라면, 피하지 않는 게 태상을 위한 것이리라.
사방에서 그녀를 찍기 위해 카메라가 분주하게 돌아갔다. 송이는 익숙한 듯 표정에 미소를 살짝 머금고 그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주었기에 송이는 우아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단아한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놀라고, 그녀의 분위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송이의 눈에 담겨 있는 슬픔과 그에 맞지 않은 의외의 단단함이 그들이 찍은 사진에 그대로 담겨졌다.
연설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연설 덕분에 가족을 잃은 이들은 가슴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혜연이 옳았다.
송이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연설을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송이는 그것 외에 다른 일들도 맡아야 했다.
태상의 빈자리를 그녀가 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CMC의 비어버린 사장 자리를 송이가 대신 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송이가 곧바로 CMC 사장 자리를 맡아서 잘 해낼 수는 없었다. 만약 혜연이 송이의 곁에 없었다면 CMC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송이는 생각했다.
송이는 태상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도 명성이 높아져 있었는데, CMC 사장까지 맡게 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에 불려가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세연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연은 송이의 대외활동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태우를 자신 마음대로 키울 수 있어서 좋아하는 눈치였다. 세연은 죽어버린 태상의 빈자리를 태우로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여러모로 고생을 해야 했지만 송이는 제법 잘 적응했다. 혜연이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준 덕분에 송이가 큰 실수 없이 잘 적응 할 수 있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강회장.
그녀의 시할아버님이자, 태상의 할아버지인 강회장이 돌아가셨다.
송이는 아직도 태상이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 따로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태상이 죽고서 반년이 넘고도 한 달이 더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가 죽은 것은 노환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방문객들이 강회장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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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하고 황량한 대지에, 드문드문 피가 고여 있었다. 그 웅덩이에는 작게 반짝이는 보석이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휘이이잉 하는 거센 소리를 내뱉으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황량한 대지에 유일한 생명체라고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은색 로브를 입은 한 인영밖에 없었다. 덥수룩하게 난 수염과 관리하지 않은 머리가 짓궂은 바람에 휘날렸다.
바위에 털썩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 왔으려나."
그의 고향의 하늘은 이곳처럼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런데 붉은색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젠 멀쩡해졌나 하는 궁금증이 돌았다. 그가 한참을 그렇게 하늘만 올려다보다가 이내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왼손에 들린 마나건을 힘주어 잡았다. 오른손잡이였던 그가 이젠 익숙하게 왼손을 사용한다.
그의 오른팔에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태상은 저 멀리서 악마의 기척이 느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마계에 갇히게 된지 반년하고도 한 달이 넘은 날이었다.
그가 기척을 느꼈던, 네 발로 기어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악마를 순식간에 따라잡아 놈의 목을 잡아챘다. 악마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태상이 우드득 놈의 목을 꺾어버리자 이내 축 늘어졌다. 손아귀 힘을 빼자 놈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죽은 것이다. 이제 곧 보석으로 변해서 그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것이다.
마계에 온지 7개월째.
아니, 마계에 갇히게 된지 7개월째라고 말하는 게 훨씬 정확한 말일 것이다.
토다베스를 죽이기 위해 사로나가 검을 들고 달려갔을 때, 태상은 조금 뒤늦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렸다.
정신력으로 몸을 겨우 움직이고 있는 터라 그녀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버린 상태였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기운들이 사로나와 토다베스의 몸을 갈갈이 찢어놓은 후 말이다.
살기위해서라면 어디든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이 기운들이 폭발해버릴 거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불안한 기운들이 주변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더욱 말이다.
그때, 사로나와 토다베스처럼 태상도 죽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기운들이 휘몰아친 사이로 균열이 일어났다.
찰나의 순간.
결정을 내리는데 까지는 오랜 시간 고민하지 못했다.
빠르게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태상은 이 균열 속으로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해서 균열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 후 눈을 떴을 때 마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지 않은 것이다.
대신 이 빌어먹을 마계에 갇히게 됐지만 말이다.
"후우."
태상이 저도 모르게 지난 7개월이 떠올라 한숨을 쉬었다.
그의 꼴이 완전히 타잔 절로 가라 한 꼴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본다면 아마 태상인지 알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삭막한 마계에서 호위호식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악마들을 죽여서 얻은 심장으로 굶주림까지는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려 해도 딱히 단서가 있지 않아 문제였다. 무언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그에겐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가족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조급해지긴 하지만, 그가 달리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걸어나갈 수밖엔 없었다.
"드디어 숲인가."
태상이 자신의 앞을 바라봤다. 그의 뒤에는 한포기 풀도 자라지 않은 황량한 사막같은 곳이 펼쳐져 있는 것에 비해 그의 앞은 우거진 숲이 드러서 있었다.
분명 같은 마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숲의 시작은 그가 드디어 마계의 심층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악마들과 달리 태상은 걸어서 마계를 움직여야 했다. 그로인해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악마들이 심층부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점도 그를 번거롭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심층부에 왔으니 다행이었다.
그가 마계의 심층부에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악마가 자신을 인간계로 이동시켜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악마의 능력 자체가 성희의 이동 능력과 비슷하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가 있는 곳이 짜증스럽게도 심층부라는 점 때문에 태상이 이토록 고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악마에게 무언가를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찝찝한 사실이긴 했지만, 그를 인간계로 돌려 보내는 게 악마들의 안전에 좋다는 것을 알게 해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태상을 이기지 못한다.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