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침략 =========================================================================
"그 다음에 뭘 했는지 모르겠지? 네가 정찰을 다녀온 건 어제였어. 지금 넌 하루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상태다."
토비가 태상의 말에 헛웃음을 토해냈다. 토비도 눈치가 있으니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한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는 건데....
토비는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끊겨져 버린 기억을 찾지 못하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가 정말 소은이를 그렇...게 하려고 했나요?"
자신의 머리를 부여 잡은 토비가 괴로워하며 물었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나, 사실이었기에 태상이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토비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퍽퍽 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때리는 것치고 강도가 강했다.
"뭐하는 거야?"
태상이 그의 손을 잡아 채자 토비가 울먹이며 말했다.
"기억이 안난다구요!!! 이 돌대가리!!!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기억해 내!! 기억해 내라고!"
여전히 자신이 진짜 그랬다는 걸 믿을 순 없었지만, 태상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고로 자신이 진짜 소은이를 강간하려 했다는 건데, 그건 토비에게 너무나도 끔찍한 말이었다.
만약 이게 악마들의 수작이라면, 내부에 혼란을 일으켜서 문제를 만들어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안다 해도 토비의 행동이 악마들이 수작을 부려 한 행동임을 다른 일행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행동으로 크게 실망해버린 사람들이 단순히 태상의 말만 듣고 이해를 해줄까?
그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미쳐버린 건가요?"
토비가 태상에게 제발 답을 달라며 물었다. 태상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단순히 네가 미쳐서 그런 거였다면 난 널 벌써 처벌해버렸을 거다.”
태상의 말에 토비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미친 게 아니라면 지금 제정신으로 그랬다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태상은 그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난 네가 미쳐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보단 악마들이 너한테 수작을 부렸다는 게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 중이야."
"악마....악마가 저한테 수작을 부렸다고요?"
토비가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쥐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정말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소은에게 몹쓸 짓을 했던 것이 악마의 수작이라면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태상은 이번 일을 단순한 사건으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
편하게 일을 해결하려면 토비를 죽이면 된다. 하지만 그건 악마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일단 네 처분은 뒤로 미룬다. 하지만 정확해질 때까진 계속 감시를 당해야 할 거야. 그리고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그 뒤는 나도 널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어?”
“네.”
토비가 태상의 말에 알겠다며 답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않고 고민하다가 이내 말했다.
“그리고 일행한테 네가 악마한테 당했다는 걸 알려서도 안 돼. 그것 때문에 네가 곤란해져도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었어?”
악마들이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분명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고, 그렇다면 자신이 이 문제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좋았다. 더욱이 이번 일이 토비 한 명에게 만으로 국한 된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이다.
“전 괜찮습니다. 다만 꼭 밝혀주세요.”
토비가 결심을 한 듯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건 어차피 마계에 올 때 감수를 했으니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악마들의 수작질로 이렇게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는 건 말이 다르다.
그는 죽어도 명예롭게 죽길 바랐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러마.”
묶인 토비를 데리고 태상은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곳에 가지 않았던 이들도 모두 상황을 들은 터라 토비를 보는 눈초리가 다들 날카로웠다.
어떤 이들은 믿을 수 없어하고, 어떤 이들은 그를 경멸했다.
토비는 기억에도 없는 일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놈 보듯 보는 것에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그는 말했다시피 성격이 조금 소심한 편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저런 눈빛을 견뎌내는 것이 쉽지 않을 터였다.
“왜 사지 멀쩡한 모습으로 데려 오는 거야?”
사로나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간이라니, 정말 끔찍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한 거였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면, 토비가 소은이한테 몹쓸 짓을 하려고 했고, 다행히 도중에 발견해서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심한 짓을 했으니 처벌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전 처벌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태상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다며 그를 이대로 살려둬선 안 된다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동안 토비가 보여준 행동이 있을 텐데,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사람들은 그에게 모두 등을 돌려 버린 것이다.
토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적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믿었던 동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건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다들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때, 종구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냈다.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고, 토비의 눈동자도 종구에게 향했다.
“물론 형이 잘못한 일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일이 한 사람 인생을 망칠 뻔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우리 동료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을 하실 수 있어요?”
“매정하다니! 저놈이 한 행동이 지금 두둔 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그건 아니죠!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여야 된다느니 하는 소릴 들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소은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태상 형이 그렇게 하자는 거면 다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지금 다들 흥분하셔서 누가 한 말인지 파악을 못하고 계시나 본데, 처분을 뒤로 미루겠다고 한 거 태상 형이 하신 말이에요.”
“......”
“......”
종구의 말에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이 잘못 된 말이라 주장할 수 있는 이도 없었다.
더욱이 태상이 그렇게 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어서가 분명하다는 것에 의심을 하는 이는 없었다.
“이유를 밝히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 형 말에 반대를 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들에게 태상은 특별했다.
그가 아니라면 마계에서 살아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 파티는 전적으로 태상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특별했다. 그들에겐 태상의 말을 거부할 권한도 없었다. 지금 그들이 이 척박한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상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지 못했다.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그런 그의 말을 무시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여론을 몰아 그를 압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부당하다 소리칠 순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태상의 결정에 따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소은일 것이다. 그러니 종구의 말처럼 그들이 이렇게 나서서 토비를 압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태상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처분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물론 처벌을 뒤로 미룬다고 토비를 가만히 둔다는 건 아닙니다. 당분간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둘 겁니다. 도망칠 곳도 없긴 하지만요.”
이곳이 마계인데 죽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고서야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생각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태상의 단호한 목소리까지 합해지니 사람들은 조용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뒤의 상황은 당사자와 얘기를 나눠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조심스러우니 시간이 좀 지나면요.”
지금 상황은 소은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결정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는 생각지 못하게 종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그를 바라봤다.
그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졌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행을 보며 크게 상처를 받았는데, 종구 덕분에 깊게 날 상처가 옅은 상흔만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태상도 흥분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진정시켜 준 종구에게 고맙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라가 그런 종구의 팔에 팔짱을 끼며 작게 속삭였다.
“멋있었어요.”
“예, 예? 정말요?”
종구는 자신의 행동을 아이라가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도리어 멋있었다고 하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방금 전의 그는 멋있었다.
지금까지 그를 봤을 때 멋있다고 느꼈던 순간 중 탑5에 들만큼 말이다.
아이라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수줍어하는 아이라의 표정을 종구가 몰라 볼 리가 없었다. 덩달아 그의 표정이 붉어졌다.
“에라이.”
주변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 일행이 서러워 작게 투덜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쏟아지던 분노가 종구 때문에 팍 식은 느낌이었다.
태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친한 동생들이 저렇게 잘 지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태상이 토비를 끌고 움직였다.
“앞으로 종구 네가 토비를 데리고 다녀라.”
“네 형.”
그나마 그의 뜻에 따라 줄 종구이기에 그에게 맡기는 것이 안심이 됐다.
소은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정신적 상처가 컸지만, 태상이 그녀와 1:1 면담을 하고 난 후부터는 제법 기운을 차린 모습을 보였다.
그녀에게는 모든 이야기를 유일하게 해주었다.
그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의 협조를 받아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은은 의외로 믿지 않고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제가 아는 토비가 아닌 것 같긴 했어요. 솔직히 우리들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토비를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땐 너무 놀란 상태여서 제대로 생각을 못했지만, 말하는 거 듣고 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돼요. 그때의 토비는 분명 제가 아는 그 토비가 아니었어요.”
“네가 이해해준다고 하니 다행이다.”
소은의 답을 들은 태상은 한시름 놨다는 듯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제는 또 다시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토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꺄악!”
여자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동료에게 살의를 섞은 공격을 하는 것을 봐서 깜짝 놀란 것이다.
갑자기 난 싸움의 원인은 제임스였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2연참입니다.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