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1 사샤와 계약자 =========================================================================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먼저 그 아이를 보는 게 맞다. 내가 책임지지 못했던 아이니까.”
딸처럼 아끼던 아이였다.
반의 굳은 눈빛에 사로나가 알겠다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의 몸이 나체였던 지라 사로나가 미리 침대에 있는 이불로 그녀의 몸을 가려준 상태였다. 이렇게 가리면 반이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반은 사로나가 길을 비켜주자 천천히 레베카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 그녀가 맞았다.
죄책감 때문에 아파하던, 결국은 도망을 쳐버렸던 약한 아이.
자신이 지켜줘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아이였다. 그녀의 몸에 묻은 찐득찐득한 액체를 본 반이 자신의 소매로 그녀의 몸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이었던 지라 오히려 반의 옷이 더럽혀질 뿐, 그녀를 완전히 깨끗하게 만들어줄 수가 없었다.
반은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는 것을 보고 설마 하며 그곳에 손을 올렸다.
여자아이인지라 이불을 걷어 볼 순 없었지만, 그것이 진짜 레베카의 배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임신’으로 인해 나온 배라는 것도 말이다.
“하...어떻게 이런.....끔찍한.....”
반이 레베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아이였는데, 얼마나 순수한 아이인데..!!!
반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됐다. 악마에게서 느끼는 분노가 그의 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그의 동료들을 죽인 것도 악마였고, 그가 사는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도 악마였다.
모든 게 악마 때문이었다.
레베카는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할 아이가 아니 었다!
“.....”
사로나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다른 계약자들 또한 자세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이 알고 있던 이가 악마에게 당해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는 거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던 계약자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겨우겨우 삼켰다.
한참 레베카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사로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데리고 움직여도 되겠나?”
“물론이죠.”
반이 레베카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의 몸을 이불로 칭칭 감싸고, 조심스럽게 안아들자 너무나도 가벼운 레베카의 무게에 반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악마 놈들, 씨가 마를 때까지 모조리 죽여 버릴 거다. 레베카를 이렇게 만든 놈은 반드시 사지를 찢어서 레베카가 받아야 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고 말 거다!!”
“네. 당연히 그러셔야 해요.”
사로나는 반의 심정을 크게 공감했다. 아이라가 천사에게 소원을 빌어 엄마를 살려냈을 때, 동생이 천사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에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베카의 상황이 아이라보다 더 심각했다.
아이라는 살 수 있었지만, 레베카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삶일 거라는 것이 문제였다. 레베카는 결국 죽을 거다.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이라와는 달리 말이다.
악마들의 습격 원인을 찾아내긴 했지만, 여왕은 여전히 살아 있고 흩어져 버린 악마들이 제법 됐기에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저택에 남아 있는 악마들을 모두 처리하자 일행은 아이라가 있는 본진으로 모두 이동했다.
반은 레베카를 데리고 먼저 이동을 했다.
아이라도 무전을 통해 상황을 전해들은 터라 반을 조심스럽게 맞이했다. 그의 품에 있는 레베카의 끔찍한 몰골을 보며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이라, 부탁 하나 해도 되겠니?”
“물론이죠.”
“네가 이 아이를 깨끗하게 씻겨줬으면 좋겠다.”
“네. 그럴게요.”
아이라가 반에게서 레베카를 데리고 움직였다. 그녀의 몸에 묻은 끈적끈적한 액체들을 닦아내고, 그녀의 비부까지 싹 깨끗하게 처리를 했다. 불룩 튀어나와 있는 그녀의 배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새끼 악마라는 사실이 그녀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가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걸까?
도대체 레베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지도 문제였다. 혹여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면, 문제가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야 했고, 그녀를 이렇게 만든 악마가 누구인지도 물어야 했다.
그래야 반이 그녀의 복수를 해 줄 수 있었다.
깨끗하게 씻기고, 배 부분이 펑퍼짐한 원피스를 그녀에게 입힌 뒤 침대에 눕히자, 청초한 레베카의 얼굴에 편안한 기색이 서렸다.
다 끝났다는 것을 듣고 반이 뒤늦게 합류한 레베카와 함께 레베카가 있는 방으로 찾아왔다.
“깨질 않네요.”
“단순히 기절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목욕을 시키는 와중에도 깨지 않은 걸 보니까 그냥 일반적인 기절은 아닌 것 같아.”
아이라와 사로나가 대화를 나누는데도 반은 레베카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베카, 어서 일어나렴. 그리고 널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구인지 내게 말해줘!”
그놈을 찢어 죽이고야 말 테니까!
반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하지만 그들은 레베카에게 깨어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를 깨우는 것이 이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싫어!’
‘안 돼!!’
깨고 싶지 않아.
그럴 수 없어..!!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아.”
태상이 레베카의 뺨을 쓰다듬었다. 온전히 자신의 남자가 된 태상을 바라보며 레베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어요. 왜 이러지? 감기 걸렸나?”
계약자인 그들이 단순히 감기로 몸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은 많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은 감기에 걸린 거야 라고 생각을 하니 정말 그녀의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태상은 한껏 걱정하는 얼굴로 레베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댔다.
“이런, 정말 감기잖아. 이리 누워봐.”
“으응...네에...”
레베카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다정한 사람이다. 자신만을 완전히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게 꿈이라면, 차라리 깨고 싶지 않았다.
태상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뻔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진심을 고백하자, 놀랍게도 그는 그녀를 받아주었다. 사실 그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과거 사귀던 여자와 의무감으로 결혼을 하려 했던 것이다.
레베카는 나쁜 일이지만, 그 여자를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말이다. 태상은 결국 과거의 여자를 버리고 레베카를 선택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아직도 레베카를 전율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레베카는 어서 이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아이가 생기면 그는 분명 자신에게 청혼을 할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동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와 가정을 꾸리는 거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완벽한 삶이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그이를 소개시켜 주고, 태상 오빠와 자신을 똑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거다.
그 아이의 이름은 뭘로 지을까?
벌써부터 미래에 대한 생각에 레베카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생리를 안 한지 제법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음식을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신 거 싫어하는 데 그런 게 땡기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저 사실 요즘 몸이 좀 이상해요.”
레베카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곳에서는 그렇게 된다. 그녀는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정말?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으음....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병원 말구...산부인과요.”
“뭐?”
태상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산부인과를 간다는 것은 아기를 가진 걸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으니 당연했다. 레베카의 얼굴이 홍조가 돌았다.
“나 어쩜 임신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생리를 안 한지 꽤 됐거든요.”
레베카가 태상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기뻐해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니, 태상은 그렇게 했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듯 입이 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이야?? 왜 그걸 이제 말해!!”
“으음...그치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걸요?”
“하! 하하하! 하하하!!”
태상이 레베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어찌나 기뻤는지, 레베카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고 빙글빙글 몸을 돌렸다.
“꺄아악! 오빠! 애기 놀람 어떡해요!”
“아차차! 미안미안, 하하하! 너무 기뻐서 그만...”
태상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머리를 긁적였다. 레베카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기뻐해줄 줄 알았어.
레베카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어쩐지 벌써부터 배가 불러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속에 생명이 있는 거야....오빠와 나의 아기가...
레베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것이 후에 그녀에게 어떤 슬픔을 줄지도 모른 채 말이다.
**
태상은 마계에서 일을 마치고 성희와 함께 돌아오자마자 아주 불쾌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레베카를 찾았는데, 여왕이 되어 있었어요. 그녀가....레베카가 이번 악마들 소동의 원인이었어요.’
태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빌어먹을 새끼들이다.
그는 마계에서 카카로치가 있는 군대기지를 발견하고, 그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서 인간계로 돌아왔다. 일직선으로 이동할 수 없어서 돌아서 이동한 덕분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사전탐사였다.
그런데 인간계로 돌아와서 들은 소식이 저딴 거라니....!
그는 대악마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여왕에게 들었던 사샤라는 악마는 대악마로 밝혀졌다. 그 정도는 돼야 여왕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을 것이다.
레베카가 여왕이 되었다면, 사샤라는 놈이 인간계에 있다는 말이 되는 거였다.
그놈을 반드시 찾아서 레베카의 앞에 무릎 꿇리고 사죄하게 만들 것이다. 태상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는 일단 깨어나지 못한다는 레베카를 보러 움직였다. 그녀가 사샤에게 나쁜 짓을 당한 것이라면, 그의 능력인 무력화가 그녀를 깨어나게 해줄 것이다. 레베카는 어차피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무력화를 두 번 사용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솔직히 세 번을 써도 그녀는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한국으로 이동되어 졌다. 그녀의 가족은 이미 모두 죽어버려서 책임질 이가 없었다. 해서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태상이 거친 몸놀림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곳엔 일행이 다들 모여 있었다. 사로나, 아이라, 혜연, 카살라, 반 모두가 말이다.
“레베카는?”
“여기요.”
혜연이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레베카가 얌전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침대 주변에는 검은 줄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레베카의 배는 만삭이 되어 있었다.
그의 손으로 죽였던 여왕의 모습을 레베카가 고스란히 닮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친하지 않은 여왕이 겪고 있는 걸 봤을 때에도 동정심이 들었는데, 그가 잘 알던 동생인 레베카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속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야?”
태상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고 차가웠다.
“분명히 잘라 냈는데, 또 어디선가 나타나서 레베카를....괴롭히고 있더라고요.”
괴롭힌다는 것이 그녀를 욕보이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 태상은 개자식....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깨어나지 못하는 건 여전하고?”
“네.”
“아무래도 오빠 힘밖에는 레베카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혜연 그리고 아이라가 태상에게 말했다. 반이 여전히 충혈 된 눈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가 피곤으로 인해 갈라졌지만, 자신의 건강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레베카를 부탁한다.”
“걱정하지마. 잘 될 거야.”
그녀가 깨어나서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안다해도 레베카를 구원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서 반을 안심시키고, 자신 스스로 또한 달래는 태상이었다.
그 또한 레베카를 보며 참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태상이 레베카의 가까이로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냥 평범하게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태상이 레베카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무력화가 무녀의 몸에 깃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베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응 없던 손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레베카가 그의 힘에 반응하여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으음...코, 코멘창이 훈훈해!!
사실 이 파트 생각하면서 그동안 레베카를 욕하셨던 분들이 "잘됐다 저거 꼬시다"
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훈훈하게 불쌍하다고 하시고 행복하게 편안한 곳에 보내달라고 하실 줄이야...여러분들 욀케 착해요? 내가 사악한 건가. (흠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