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여왕 2 =========================================================================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여왕이 우는 소리를 했으나 사로나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서 입으시죠.”
대신 그녀는 여왕에게 우악스럽게 옷을 건넸다. 여왕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주 대충 그녀가 준 옷을 걸쳤다. 야호가 옷을 갈아입는 여왕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머~ 너 남자애지? 그렇게 빤히 보는 남자는 매력 없어. 여자들한테 변태라고 손가락질 당할 걸?”
야호가 여왕의 말에 기분 나쁘다는 듯 그르렁댔다. 녀석이 휙 고개를 돌려 더 이상 여왕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왕은 지금 부끄럼 타는 거냐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움직이자.”
태상이 시계가 가리키는 방향을 주시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왕의 옷차림이 정상적이지 않았기에 그녀를 끌고 가는 것은 혜연과 사로나가 해야 했다. 카살라와 야호는 태상의 뒤를 바짝 붙어서 따랐다.
“근데 왜 여기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야?”
그녀는 아직 밖의 일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악마들이 습격을 해 이곳이 엉망진창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밖이 시끄럽긴 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과연 왜 카반이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 게 좋을 것이라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몇 살이냐, 애인은 있냐,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냐 등등 가끔가다가는 얼마나 강한지, 능력은 뭘 사용하는지 등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사로나는 카반이 경고해준 대로 그녀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 정도 됐으면 여왕도 포기할 만한데,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근데~ 둘 다 처녀야? 아님 저 남자한테 이미 상납했나?”
여왕이 태상을 콕 찍으며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혜연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여왕은 자신의 말이 혜연의 콤플렉스를 건드렸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과는커녕 혜연을 더욱 건드리기 시작했다.
“왜? 뭔가 일이 있었던 거야? 남자들한테 돌림빵이라도 당했니? 근데 그 돌림빵이라는 말, 참 재밌지 않아?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냐면...!”
“.....”
혜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로나는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다 생각했는지 여왕의 말을 막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입 다물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어.”
여왕은 사로나의 말에도 여유로웠다. 그녀에겐 그 어떤 협박도 통할 수가 없었다. 원초적인 두려움인 ‘죽음’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저런~ 그거 굉장히 괴로웠을 텐데, 어떡하니? 상처가 많았겠구나. 널 그렇게 만든 놈들은 역시 악마 계약자들이겠지? 얼마나 당했어? 10번? 20번? 아니면 하루 종일? 이틀?”
“이봐!!”
사로나는 자신의 경고에도 멈추지 않는 여왕에게 소리를 질렀다. 혜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왕은 그 가녀린 모습이 즐겁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잃게 만드는 이는 바로 태상이었다. 그가 마나건으로 그녀의 미간에 총을 쏘았다.
탕!
“....!!”
혜연과 사로나가 놀라 태상을 봤다. 여왕의 몸이 축 늘어졌다. 사로나가 놀라 여왕의 축 늘어진 몸을 서둘러 부축했다.
“쓸데없이 주둥이 놀리면 그냥 죽여 버려. 어차피 살아난다잖아.”
“....감사합니다.”
혜연이 고개를 숙인 채 태상에게 말했다. 그가 다시 길을 앞서 걸었다. 여왕의 미간에 구멍이 났던 것이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던 여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떠졌다.
여왕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나 죽인거야?”
“한 번만 더 입 놀리면 또 죽일 거니까 조용히 따라와.”
태상이 뒤를 돌아 차갑게 말했다. 여왕은 머릿속이 복잡한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죽었다가 살아 놓고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 웃는 모습이 과히 정상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아~정말 오랜만에 자극적이야. 재밌어! 너 성격 한 번 화끈하구나!”
여왕의 모습을 보며 태상은 저 여자가 정말 말 그대로 죽고 싶어 환장한 여자임을 새삼 깨달았다.
여왕은 오랜 세월을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살아왔다. 그 순간순간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끔찍한 악마 새끼들을 낳아야 했을 테니, 오히려 그녀의 정신이 정상인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녀의 사정은 이해한다만, 길드원을 건드리는 것은 가만히 봐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가 여왕에게 총을 쏜 것 때문에 여왕은 한껏 달아오른 표정이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여왕이 태상에게 한 번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말을 시작했다. 혜연은 그녀 때문에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터라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해서 여왕은 이번엔 사로나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나 해주는 얘기 아닌데, 너희들은 마음에 드니까 내가 해줄 게. 후회 안 할 걸? 이렇게 그냥 걷기만 하는 거 지루하지 않아?”
사로나는 저 여자의 입을 막을 천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얘기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으나 막무가내로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오래 된 얘기더라.....잘 기억 안 나니까 대충 옛날 옛적이라고 하자. 옛날 옛적에 한 여자가 살았어. 그 여자는 몸이 아주 약해서 언제 죽을지 몰랐었지. 하루 종일 집에 누워서 숨을 쉬는 게 그 여자의 삶 전부였어.”
여왕은 한 여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도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지 않았다. 태상은 시계를 바라보며 방향을 찾았고, 카살라는 악마를 낳는 그녀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기에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사로나는 여왕을 끌고 가는데 주력했고 혜연은 이미 호되게 당한 터라 그녀의 말소리를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그것을 알면서도 여왕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 그 병약한 계집애한테 악마가 찾아왔거든. 악마가 속삭였어. 네가 원하는 소원을 말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대신 너는 날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어야 한다. 그게 분명 악마가 속삭이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병약한 계집애는 그의 속삭임이 너무 달콤했어. 무엇이든 들어 줄 수 있다는 말에 꽂혔던 거지.”
시계에만 집중하려 애쓰던 태상이 여왕의 목소리에 점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이 여왕이 겪은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병약한 계집애는 말했어. 네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줄 수 있다면, 날 절대 죽지 않게 만들어줘. 어떤 일이 있어도 살 수 있게!”
여왕이 잠시 그때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살기를 담아 말했다.
“멍청한 년!!! 적어도 그 계집애는 악마가 나한테 뭘 시킬지 물어봤어야 했어! 그런 것도 묻지 않았으니 멍청한 년 소릴 들어도 싸지. 악마가 그 멍청한 계집애한테 저주를 씌웠거든. 악마가 소원으로 들어 준 영생을, 마계와 천계 속에 갖혀 새끼 악마들을 낳아야 하는 저주를 말이야.”
여왕이 그 말을 끝으로 또 한 번 침묵하다가 말했다.
“자~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됐게? 궁금한 사람 손!”
여왕이 활짝 웃으며 말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따라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여왕이 김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뭐야, 재미없게. 호응 좀 해주면 안 돼? 오랜만에 만나는 계약자들이라 나 되게 기분 좋단 말이야.”
“..........”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다. 이미 다들 그녀의 말은 그냥 무시하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태상이 그녀를 구원이라도 해주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죽고 싶은 거야, 아니면 살고 싶은 거야?”
“지금 그거 나한테 물은 거야?”
여왕은 잠시 태상의 말을 듣고 침묵하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가 자신한테 말을 시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끄럽다고 자신을 죽였던 남자가 바로 태상이 아닌가.
“..........”
태상은 그녀의 질문에 다시 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여왕에겐 충분한 일이었다. 여왕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내가 죽고 싶은 걸까 살고 싶은 걸까? 악마가 내 배를 가르고 태어날 땐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너희들이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니까 살고 싶단 생각이 드네. 근데 이런 생각해도 어차피 난 못 죽어. 불사거든.”
“만약 죽을 수 있다면?”
태상은 시계가 방향을 왼쪽으로 꺾자 자신도 방향을 꺾으며 말했다.
여왕은 그의 질문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 질문으로 날 동요하려 했다면 미안하지만 실패야.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영원히, 어쩌면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 올 때에도 살아남을지 몰라. 네 아들의 아들놈이 나타나서 나한테 그 질문을 날릴 지도 모르지.”
태상은 엔드가 왜 굳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겼는지 깨달은 상태였다. 여왕을 악마에게 빼앗기지 않고 호위하는 게 이 일의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테니, 엔드는 자신에게 묻고 있는 거다.
네 힘으로 여왕을 죽일 수 있겠냐고 말이다.
태상은 엔드의 얄미운 행동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그가 시계를 보는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악마들의 습격 없이 무사히 카반이 말했던 이동 마법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그 천사가 나한테 굳이 이 미션을 하라고 했는지 알 것 같네.”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도움이 필요한 여자를 외면하는 것도 그다지 그의 성격 상 맞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악마를 잉태하는 여자다. 계속 살려두면 천사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의 말을 들은 사로나와 혜연, 카살라들도 모두 이미 눈치를 챘는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줄만큼의 여자가 아니잖아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여왕에게 당한 게 있었던 혜연은 뾰족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여왕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도 껴줘. 왜 너희들만 아는 얘기를 하니?"
태상은 여왕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계속해서 일행과 대화를 나눴다.
"내 능력이 여왕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해?"
태상의 질문에 사로나가 대답했다.
"여왕한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너라고 생각해. 네 능력은 계약자나 악마나 천사들까지 모두 가리지 않고 모두 통하잖아. 그게 지속 될 때 여왕을 죽인다면 그녀는 안식을 찾을 수 있겠지."
태상도 솔직히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봤다. 태상의 능력은 악마가 쓰는 능력을 무력화 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니 그 무력화가 그녀에게 먹혔을 때, 죽는다면 더 이상 살아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천사들 모두가 실패했던 일이다.
그 불가능한 일을 유일하게 태상만이 할 수 있었다. 만약 여왕이 태상을 놓친다면 정말 그녀의 말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도 귀가 있기에 그들이 뭐라 하는지 모두 들었다. 하지만 여왕은 그들의 말이 어처구니없는 장난질이라 생각했다.
“내가 장난 좀 쳤다고 이러나 본데, 그런 걸로 날 동요시키려 한다면 실패라고 이미 말 했어.”
그녀는 이미 수없이 희망이 짓밟혀왔었다. 그러니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인 ‘죽음’에 대해 저렇게 떠들어도 여왕이 동요할 이유가 없었다. 태상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려 응시하면서 말했다.
“만약 내가 널 죽여줄 수 있다면 넌 나한테 뭘 줄 거지?”
“풋! 아가야, 지금 그 말을 내게 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니?”
여왕은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혜연이 욱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사들이 괜히 널 우리들한테 맡긴 줄 알아? 가능성이 있으니까 맡긴 거야.”
“하아~ 오랜만에 재밌었는데 흥미가 뚝 사라지네.”
여왕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런 식의 도발이 익숙하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변한 것으로 보아 여전히 동요하고 있는 게 맞았다. 태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장난이야. 그러니까 그 장난에 장단 한 번 맞춰봐."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나가시기 전에 추천 한 번씩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