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태상vs명진 =========================================================================
“놈은 이상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내 몸을 자기 몸이랑 바꿨던 것처럼. 그래서 일반인들이 그놈을 상대하긴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내가 나서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놈을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그놈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 정보만 나한테 넘겨주면 돼.
강회장에게 이명진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면 금방 알려줄 것이다.
이런 짓을 해놓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는 간 큰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 놈은 다른 곳에 가기 위해 카드를 쓰고, 핸드폰을 사용할 것이다. 그 카드 내역과 핸드폰 사용이 놈이 어디에 있는지 태상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오히려 도망치지 못하도록 카드를 정지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을 수 있으나, 차라리 그렇게 하고 광범위한 범위를 뒤지는 것 보단 그렇게 카드를 풀어 놓고 장소를 아는 게 더 나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깨문다는 말이 있듯이 궁지에 몰린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마. 그리고 나도 마침 너한테 할 말이 있었다.]
“할 말?”
[삼 일 주마. 삼 일 후에 이곳으로 들어와 살거라.]
강회장이 생각지 못한 폭탄발언을 했다. 태상이 펄쩍 뛰며 말했다.
“뭐? 삼 일이라니! 갑자기 그런 게 어딨어. 생각 안 해봤다고.”
[네 행세 하는 놈도 곧 끝이 날 테니, 네가 더 이상 나가 살 이유가 없지 않겠냐. 네 아비한테 가지 말고 할아비 있는 곳으로 들어 오거라. 언제까지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 나한테 연락을 할 거냐. 너도 이제 네 사람을 가질 때가 됐다. 슬슬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도 받고.]
태상은 새삼스레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고 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후계자 수업을 받고 살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본격적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할배,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본격적인이라는 말을 쓰는 거야?”
태상이 잠시 흥분했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에 심호흡을 했다.
“후우~.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바쁘니까 일단 끊을 게. 근데 삼일은 아냐. 나 아직 그러겠다고 말 안 했다!”
강회장이라면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말하고, 삼일 뒤에 사람을 보내 강제로 그를 이사시킬 확률이 높았다.
태상이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동의 안했다고 신신당부 한 뒤, 서둘러 세연과 송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녀들이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명진을 놓치게 만든 세연과 송이에게 화를 낼 수도 있으나, 그는 그녀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천계와 마계가 연관되어 일어난 일이기에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송이와 세연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 때문에 명진을 놓친 것에 크게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상대하기 전에 명진의 목숨을 끊어 놓고 움직일 걸 하는 아쉬움이 들 뿐이었다.
그랬다면 놈이 도망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자신의 실수가 아쉬울 뿐이다.
세연의 차로 가자 그 안에 송이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태상이 유리창에 똑똑 노크를 하자 두 여자의 눈동자가 모두 똑같이 커지며 태상을 봤다. 차 유리문이 내려지고, 세연과 송이가 그에게 괜찮냐는 안부를 또 다시 물었다. 그는 새삼 또 괜찮다는 말을 하는 대신, 운전석에 있던 기사에게 말했다.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운전기사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라고 하자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운전기사 대신 운전대를 잡은 태상이 차를 몰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집에. 여긴 위험해.”
“도대체 무슨 일인 거니? 그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됐는지 말 좀 해봐.”
세연이 아는 거라곤 그가 위험하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 한 마디에 세연의 머릿속으로 이명진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필시 그놈이 자신의 아들인 태상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확신한 것이다.
그랬기에 세연은 앞뒤 따지지도 않고, 위험을 무릎 쓰고 그를 살리겠다고 달려 온 거였다. 이대로 아들을 허무하게 잃을 순 없었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직감은 무섭도록 정확했다.
“.........”
태상은 세연의 계속 된 질문에 답을 잘 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묻는 질문들 모두가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태상이 입을 꾹 닫아버리자 결국 세연이 포기를 했는지 뒤늦게 말을 줄였다. 차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도로를 달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세연의 집이었다.
“들어가서 얘기해.”
태상의 말에 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이도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세연과 태상은 익숙한 곳이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섰지만, 송이는 어마어마한 집 크기에 놀라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부잣집이기에 클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으리으리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정원에는 연못까지 있어서 그 안에 잉어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태상과 세연이 너무 빠르게 움직인 터라 송이는 연못밖에 보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태상이 돌아다니는 고용인 중 한 명을 불러 말했다.
“아줌마, 지금 모두 다 데리고 자리 좀 비우세요.”
명진의 몸을 한 태상은 처음 보는 지라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리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따라오던 세연이 뭐라 하지 않자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물러갔다. 그녀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태상이 집 안 거실 중앙에 있는 소파를 보자마자 익숙하게 그곳에 몸을 뉘였다. 세연도 태상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송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태상이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손으로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앉아. 뭐해?”
“으응.”
송이가 얌전히 그의 옆으로 앉았다.
“.....”
“......”
“.....”
3명이 마주한 채 앉았으나, 이상하게도 판이 깔리니 선뜻 뭐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세연과 송이가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태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해. 다 얘기해줄게.”
“....그놈은 어떻게 됐니?”
태상의 말에 세연이 일단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도망쳤어. 지금 찾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한동안은 밖으로 나다니지 마. 경호원들 믿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해. 웬만하면 집에 박혀 있어. 아니, 그냥 잠시 어디 외국 여행이나 좀 다녀오는 게 낫겠다.”
놈의 몸이 강태상이니 오히려 집에 있는 게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세연이 알겠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또.”
“응? 또?”
세연이 당황했다. 태상은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 더 해도 돼. 다 대답해줄게. 벌써 다 끝난 건 아니지?”
“.....”
세연이 선뜻 말을 못했다. 당황해서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묻고 싶은 게 어떻게 없겠는가. 명진이 모든 사실을 알고서 나타난 건지, 그 핏자국은 뭔지 등등 물어 볼 게 산더미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럼 더 이상 질문 없는 걸로 생각하고 내가 얘기할게.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여자, 이 여자야. 두 번째 만나는 거지? 서로 인사 해. 그러려고 오늘 자리 만든 거잖아.”
“지...금? 나중에 따로 할게.”
“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잖아. 드디어 만났는데 이렇게 그냥 보내려고? 그럴 거면 왜 만난다고 했는데.”
“......엄마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태상이 딱딱한 어감을 사용하자 세연은 그가 화가 났음을 깨닫고 목소리를 죽였다. 그를 속이고 그녀와 몰래 만나려고 한 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었다. 세연이 시무룩해지자 태상의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자, 그럼 엄마는 됐고....’
이제 제일 걱정 되는 송이의 궁금증을 풀어줄 시간이었다. 태상은 이 이야기를 그녀와 자신 단 둘이서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송이랑 단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
“응, 그렇게 해. 아! 배고프겠다. 난 먹을 것 좀 준비하고 있을 게.”
세연이 가시방석이었던 지라, 냉큼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상은 송이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바뀌어서 그런지 예전 자신의 방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독립을 해서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 변화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태상이 방을 살피고 있을 무렵, 송이는 입을 꼭 다문 채로 태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겐 낯선 이곳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그가 너무 이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명진이 맞는 건지 확신이 들지가 않았다.
자꾸 이상한 생각들이 그녀를 쿡쿡 찔러댔다.
‘넌 도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명진이 맞는 거니? 혹시....정말 다른 사람인 거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위협했던 남자와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은 송이다. 그녀도 대충 상황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들이고, 또 믿고 싶지 않기도 해서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송이는 진실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송이가 드디어 첫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의 말은 가장 핵심을 찔러왔다.
“넌....누구야?”
태상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말했다. 만난 지 오래되었으나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이다.
“내 진짜 이름은 이명진이 아니라 태상이야. 강태상.”
“...강...태상...그래서 그분이 널 태상이라고 불렀던 거구나.”
송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자신이 명진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쿵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난 네가 알고 있는 이명진이 아니야.”
태상은 많은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네가 명진이 아니라면 왜 명진이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혹시 쌍둥이라거나...그런 거야?”
그녀는 최대한 현실성을 고려해 쌍둥이라는 것으로 이해를 하려 했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에게 남김없이 진실을 애기할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야. 이 일이 시작 된 건, 3일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었던 그때야. 난 그날 갑자기 이 몸에서 깨어났고, 이명진은 내 몸을 차지했지.”
“......”
송이는 태상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그녀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 모든 걸 이해하고 있는데, 이해하지 못하고 싶을 뿐일 것이다.
“우린 서로 몸이 바뀌었어. 이명진이 그렇게 만들었거든. 내 삶을 빼앗아서 자신이 가지려고 했지. 난 원래 민세연 강태진의 아들로서, 강태상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곳에서 자랐어.”
“....명진이가 그랬을 리 없어...왜 걔가 네 삶을 빼앗아? 말도 안 돼.”
송이가 고개를 저었다. 태상은 그녀가 저렇게 나올 것이라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불쾌하고 더러웠다. 그녀가 명진에게서 확실히 정을 뗄 수 있도록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의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그녀에겐 힘든 시간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결국 방 안에 걸려 있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족사진이야. 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
송이의 눈동자가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왜냐면,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그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박혀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던, 그리고 태상에게 이상한 말을 하며 그를 위험에 빠트렸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를 부둥켜안고 울었던 세연이 태연하게 그를 위협했던 남자와 함께 미소 짓는 게 찍혀 있었다. 강태상은 단순히 명진과 얼굴이 똑같은 쌍둥이가 아니었다.
명진이 진짜 그의 삶을 빼앗은 거다.
송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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