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세연 =========================================================================
그만큼 그가 많이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들을 보고 있던 여자손님은 송이의 말에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 하며 태상을 힐난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아마 혼전임신이라 저렇게 송이가 말하는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태상은 생각지 못한 말에 당황하긴 했으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말했다.
“그니까, 그걸 왜 이제 말해? 내가 그애 아빠 아니야?”
“.....그럼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니?”
“그럼 내 애를 임신을 했으면 했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그래야 같이 병원도 가고, 축하도 받고, 애 낳을 준비를 할 거 아냐.”
“......”
송이가 볼에 흐른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예전에 그가 송이에게 임신을 해도 된다 말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진짜 덜컥 임신을 해버리자 두려워졌다. 그가 이 아이를 낳으라고 할까? 좋아하기는 할까? 낙태하라고 하면 어쩌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무서웠다.
그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뀌었던 것처럼 또 다시 예전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송이의 걱정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생긴다는 데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임신 소식에 마냥 기쁜 감정만 느낀 건 아니었지만, 일단 기쁜 감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늘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송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쁨만 느낄 순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임신한 송이에게 그런 감정들을 내색할 순 없었다. 태상은 그녀에게 오로지 기쁨만 보이기로 했다.
“도대체 왜 숨긴 거야? 이리와.”
태상이 송이를 당겨 품에 안았다. 송이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냥...흑...네가 싫어할까봐...”
“결혼 했으면 임신은 당연한 거지. 내가 왜 싫어해? 넌 날 굉장히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
그 나쁜 생각의 근원지가 이명진에게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태상은 여전히 이명진에게 휘둘리는 송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그 안까지 모두 다 자신의 것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통해 비로소 그 모든 것이 태상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이봐, 좀 나가지? 언제까지 그러고 훔쳐볼 건데?”
태상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나가지 않는 여자손님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얼굴이 벌게지며 후다닥 화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매너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았다. 태상은 자신의 품에 안겨 아기처럼 우는 송이를 한동안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병원은 가봤어?”
송이가 족발 냄새를 견디기 힘들어 했기에 족발 집을 나와야 했다. 대신 그녀는 갑자기 설렁탕을 먹고 싶다며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다행이 설렁탕은 입에 맞는지 잘 먹는 그녀였다.
“임신 테스트기를 했는데 계속 두 줄이 나와서...혹시나 해서 가봤어. 그동안 몸이 좀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었거든.”
“그런데는 나랑 같이 갔어야지.”
“바쁜 사람한테 그런 걸 어떻게 부탁하니?”
아무리 천계의 일이 재밌고, 급하다 해도 그런 곳에 같이 가줄 시간은 있었다. 태상은 그녀에게 자신이 검사직을 그만뒀다는 것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다 갖기 위해선 자신이 이명진이 아니라는 것까지 그녀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걸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 될 것이다.
“가끔 바빠질 때가 있긴 해도, 너랑 산부인과 같이 갈 시간은 있어. 언제든지.”
“피이...됐어. 난 신경 안 써줘도 돼. 늘 혼자서 다 해왔던 일인데 새삼스럽게. 넌 일 열심히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 일, 이제 안 해. 검사 그만 뒀어.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도 돼.”
“.....뭐?”
송이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어 되물었다. 태상은 태연하게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만 뒀다고. 사직서 냈어. 벌써 한참 전에 수료됐고.”
송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심호흡 했다.
“검, 검사를 그만뒀다고? 누가?”
“나.”
“말도 안 돼! 여태까지 계속 출근 했잖아!”
“다른 일 때문에 바빴어. 미리 말 못 했다. 미안해.”
송이는 이 황당한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이제 임신까지 했는데, 그럼 우린 도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송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얼마짜리이고, 옷장에서 썩어가고 있는 옷들이 모두 얼마인지 모른 채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린 뭐 먹고 살아? 이제 아이까지 생겼는데, 아이 교육은?”
“너 설마 돈 걱정 하냐?”
태상이 송이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왜 돈 걱정이 튀어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돈 걱정을 하지 뭘 걱정하니?!”
송이가 점점 흥분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태상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귀엽네, 그런 걱정도 다 하고.”
“귀, 귀여워?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귀엽다는 소리가 태연하게 나오니 넌?”
파티에서 보여주었던 훌륭한 적응력은 어디로 간 건지, 지금까지 지냈던 고급 아파트 생활이 영 도움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상은 그녀에게 지금 현재 그가 가진 것들이 대충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이런 걸 자랑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웃기긴 했지만 말이다.
“밥 다 먹었지? 일어나자. 아무래도 너한텐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안 돼. 나 밥 아직 덜 먹었어. 야! 너 얘기하다가 어디가!”
송이의 말에도 태상은 벌떡 일어나 이미 계산을 하러 이동한 뒤였다. 송이가 그의 행동에 한숨을 쉬며 뒤따라 나갔다. 태상은 송이에게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이동했다.
그가 움직이는 곳은 높은 건물이 솟아 있는 번잡한 번화가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었기에 송이는 그가 일부러 화재를 돌리려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실제로도 차 안에서 그녀가 캐묻는 말에 그는 하나도 답해주지 않았다.
“저기 저 건물 보이지?”
그가 가리킨 것은 높게 하늘 위까지 뻗어 있는 건물이었다. 송이가 퉁명스럽게 힐끗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러자 태상이 말했다.
“저게 내 거야. 그리고 또....아! 저기, 저 명품 브렌드샵 보여? 저 가게 있는 상가도 내 거고.”
“.......”
태상이 차를 움직여 조금 더 가더니 또 잠시 갓길에 차를 대고 건물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1층에는 커피숍이 운영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저것도 내거야. 이거 외에도 엄청 많은데, 일일이 가본 적이 없어서 뭐가 내 건지 그 외에는 잘 모르겠네. 서류 확인해 봐야 하거든.”
이게 모두 그의 명의로 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것들은 모두 그의 소유 물건이었고, 그가 처분하기 원하면 문제없이 처분을 할 수 있었다.
저 건물들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저 건물 값을 상회하는 많은 불법적인 상속자금들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저렇게 건물을 소유하게 된 것도 다 그것의 일환일 뿐, 투자를 목적으로 산 것들은 아니었다.
고작 수단이 되는 건물들이라 해도 뿌리박은 곳의 땅값이 원체 장난이 아니었던 지라 돈이 제법 됐다.송이는 황당하게도 건물 몇 개를 찍으며 저게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태도에 헛웃음만 나왔다.
“왜? 아예 강호그룹이 네 거라고 하지?”
송이가 농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 소리를 들은 태상은 몸을 움찔 떨어야 했다.
“너...그걸 어떻게 알았어? 뭔가 눈치 챈 거냐?”
태상이 송이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았다. 송이는 순간 그의 진지한 태도에 웃음기를 지웠다.
“얘가 진짜 머리가 아픈가....”
그의 살아 온 삶을 다 아는데, 갑자기 자신이 부자라고 말해본들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얻은 고급 아파트도 예전에 만났던 강회장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는 과한 재물이라고 생각했다.
강회장의 모든 것이 그의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걸 몰랐던 송이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태상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강호그룹 얘기는 그냥 그녀가 장난으로 말한 듯싶었다. 태상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챘다고 생각해 순간 깜짝 놀랐는데 말이다. 아직도 농담으로 저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그의 말을 영 믿을 수가 없는 듯해 보였다. 그녀를 이해시키려면 아무래도 법적인 서류라도 가져와서 그 이름에 떡하니 석자를 박아놔야 할 듯 했다.
아니지? 자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방금 전에 본 것들 기억 나?”
“당연히 기억나지.”
“그것들 중에 제일 갖고 싶은 게 뭐야?”
“....장난 그만 치지? 넌 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했는데도 그런 장난이 나오니?”
송이가 팔짱을 끼고 그를 째려봤다.
“장난이든 뭐든 빨리 얘기해봐. 방금 전에 봤던 것들 중에 뭐가 제일 갖고 싶은 게 뭐야?”
건물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평범한 소시민은 송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작은 가게 하나라도 새들어서 운영하는 게 꿈인 송이였다.
그녀는 태상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체념하며 말했다.
“마지막 게 제일 갖고 싶어.”
송이는 진심 1%도 담지 않고 대충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태상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임신 축하 선물도 줘야 했으니, 그것으로 선물을 대체 할 생각이었다. 건물의 명의를 송이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주면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의 재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세연이 태상을 임신했을 때에는 백화점 하나를 받았었다. 그러니 지금 송이가 받는 것은 그에 비해 많이 뒤쳐지는 선물이었다. 태상은 나중에 자신의 자리를 안전하게 되찾으면 그녀에게 다시 선물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태상은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굉장히 뜻밖이었으며, 당황과 놀람을 선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통화를 건 사람이 바로 세연이었기 때문이다.
세연은 태상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다. 그는 세연이 납치당하고 나서 잘 지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기에 흔쾌히 알겠다며 만날 시간을 잡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연이 납치당한 것을 구해 냈을 때, 그녀는 기절해 있었으니 그 일은 용건이 되질 못한다. 자선 파티 때 있었던 일을 갖고 만나는 거라면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기에 더욱 말이 되질 않았고 말이다.
태상은 왜 세연이 자신을 보자고 한 것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세연은 납치당했을 때, 그리고 태상에게 구함을 받았 때, 기절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기절을 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 만남은 세연에겐 당연한, 필연적인 만남일 수밖에 없었다.
세연은 태상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는지 약속시간 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태상은 세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세연이 그를 확인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 작품 후기 ============================
진짜 부자들이 저러는지는 잘 모릅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이미 전 졌습니다.
기승전 추천추천!! 감사합니다.
그리고...예전에 송이가 명진이 임신 못하게 했었다는 걸 말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네요. 몇편인지 찾아 볼라 했는데, 못찾았습니다. 이런...나란녀석의 기억력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