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납치 =========================================================================
“강태진 그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 네가 납치당한 거? 전부 다 강태진 때문이야. 그러니 원망하려면 내가 아니라 그놈을 원망해야 할 거야. 그럴 거지?”
동춘이 동의를 구하듯 묻자 세연은 강제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하하 웃었다. 비록 칼을 들었기 때문이지만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아보이자 그가 다시 칼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는 것을 알리 듯 주머니를 손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세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내가 좀 더 자세하게 알려줄게. 그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말이야. 너도 궁금하지?”
“......”
세연은 그가 뭐라 말하든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동춘은 잔뜩 흥분해서 그녀에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강태진이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해주겠다고 해놓고 말을 바꿨어. 덕분에 내 회사는 망했지. 근데 그놈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몰라. 날 폭행하고, 돈으로 메꾸려고 했어! 돈? 돈 좋지. 근데 돈보다 먼저 사람이 됐어야 해!”
동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세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무서웠다. 제발 누가 자신을 구하러 와줬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대로 누군가가 그녀를 구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자신을 구하러 오겠는가.
동춘은 세연에게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거야!! 날 봐!!”
“흐으윽...흑...”
동춘은 세연이 파르르 떨며 겨우 눈을 뜨고 자신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널 납치 한 거야. 그놈이 악마라는 걸 전국민이 알 수 있게 할 생각이거든. 그놈의 가면을 벗길 수만 있다면 나 하나쯤은 희생되도 상관없어. 난 희생하는 거야. 그놈한테 당했던, 그리고 당할 사람들이 모두 날 영웅으로 생각 할 걸?”
동춘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낄낄거리고 있었다. 세연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투자를 한다고 했다가 취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런 일로 모든 죄를 태진에게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하지만 동춘은 그게 모두 태진의 탓이라며 모든 원망을 그에게로 쏟고 있었다.
“이제부터 영상을 찍을 거야. 넌 내가 적어준 그대로만 읽으면 돼. 착하지? 이 영상은 전국민이 다 보게 될 거야. 다들 우리가 연락을 보내오길 기대하고 있거든.”
“.......”
그는 품에 넣어 두었던 종이에 미리 적어두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세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야 했다. 종이에는 동춘이 말했던 것처럼 읽을 대사가 적혀 있었다.
동춘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연은 파르르 몸을 떨며 그의 끔찍한 손길을 받아내야 했다. 더러운 손길이었다. 벌레가 자신의 머리를 기어가도 이보단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세연은 이게 부디 악몽이길 바랐다.
깨어나면 자신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밧줄이 움직일 때마다 쓸리며 그녀에게 통증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통이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착하게 잘 읽으면 상을 줄게. 알았지?”
동춘이 뒤를 돌아 아까 전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카메라를 의자에 올려놓았다. 세연의 모습이 모두 한 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동춘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이 입술을 꽉 깨물고 그가 건네 준 종이에 도대체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확인했다.
그곳에는 아까 전 그가 자신의 회사가 강태진 때문에 망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저 글을 그녀에게 읽게 하고, 이 얘기를 퍼트릴 생각인 것이다.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이 이미 언론에 흘러갔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그녀의 납치상황을 주목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지금도 구설수에 올라 회사에 타격이 갔을 텐데, 이 내용까지 퍼지게 되면 범인인 동춘을 동정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다.
거대 기업이 중소기업 없애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이 꼴이 난 거겠지 하고 수군거릴 게 뻔했다.
그럼 당연하게도 회사 이미지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안위가 중요하다 해도 세연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이에 적힌 것이 회사에 얼마나 치명적일지 잘 알았기에 세연의 입이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녀의 가족이 모두 우스운 꼴을 당하는 모습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시작한다? 자, 읽어!”
카메라에 빛이 들어오고, 동춘이 세연에게 신호를 주었다. 하지만 세연은 고개를 푹 순인 채 종이를 바라만 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읽으라니까?!”
동춘이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연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자 한자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이동춘...이다...”
“그래, 좋아.”
“내가...이 여자를 납치..한 이유는....강..태진 이사 때문..이다.....모, 못하겠어요.”
세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세연의 말에 동춘이 화가 나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어서 빨리 읽으라는 협박이었다. 세연이 칼을 확인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칼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 속에 박힐 것 같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으면 읽어. 읽으란 말이야!!!!”
동춘이 칼을 들고 세연에게 다가갔다. 그는 세연을 정말 찌를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세연이 그 모습을 보고 발버둥 치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자가 뒤로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칼에 찔릴 거라는 공포 때문인지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동춘은 세연의 몸을 발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뭐야? 기절한 거야?”
진짜 찌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겁을 주려던 것뿐인데, 그것에 겁을 먹고 기절을 한 거였다. 동춘은 기절한 그녀의 몸을 계속해서 흔들어보았지만 세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동영상은 찍지 못할 것 같았다.
동춘이 김이 셌다는 생각에 투덜거리며 뒤를 돌았다.
“끄아아아아악!!!!”
그때였다. 동춘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동춘이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어깨에 박힌 건 긴 못이었다. 못이 그의 어깨에 반쯤 박혀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다. 하지만 동춘은 이게 왜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박혔는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끄흐으으윽.....으...!”
못이 뚫린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마 이 못을 빼내면 더 많은 피가 흐를 게 분명했다. 못은 녹슬어 가만히 두면 파상풍에 걸릴 것만 같아 보였다. 이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그의 어깨에 박힌 것일 리가 없었기에 동춘은 아픔을 참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 누구야!!! 당장 나와!!”
당황해하는 동춘을 향해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춘은 뚜벅뚜벅 걸어오는 확실한 인기척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손에 든 칼을 기척이 들려오는 곳으로 겨눴다.
“누구냐?!”
동춘의 물음에 상대방이 친절하게도 대답을 해주었다.
“나? 강태상.”
“강, 강태상? 강태진이 아니라 강태상이라고? 태상이라면....그놈 아들이구나!”
동춘은 태진의 가족 신상을 모두 조사했기에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닥불 곁으로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강태상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동춘은 남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 외쳤다.
“넌.....강태진 아들이 아니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 얼굴이 다르다고!!”
“정말 내가 강태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확신 할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부잣집 아들놈이 이런 곳에 직접 왔다고? 그럴 리 없지! 제 몸 사리기 바빠 사람을 시켰을 게 뻔하잖아!”
태상은 피식 웃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네가 강태상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확신하는 걸까?”
태상의 말에 동춘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뜩이나 어깨가 아파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다친 몸만 아니었다면 저놈을 어떻게든 상대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무슨 수로 자신의 어깨에 못을 맞혔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세연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으면 절대 공격을 해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동춘은 쓰러져 있는 세연의 의자를 힘겹게 세우고,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눴다.
“네놈이 이 여자 아들이건 말건 사실 상관없잖아? 결국 넌 이 여자를 구하러 온 거고. 난 아직 내 할 일을 모두 이루지 못했으니 그럴 수야 없지.”
그가 한 발작만 움직여도 그녀의 목에 상처를 내 겁을 줄 생각이었다. 태상은 그의 행동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웃어? 지금 이 상황이 웃긴 거냐? 그래 놓고 네가 이 여자 아들이라고 우기는 거야?”
동춘이 그를 노려봤다. 어차피 인질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다. 저놈은 절대 자신을 헤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태상이 엉뚱한 소리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게 깔려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동춘은 저놈이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집중해서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그러니까 초등학생이었을 땐가? 아마 그 정도 쯤이었을 거야. 이런 비슷한 곳에 납치가 된 적이 한 번 있었어.”
“.......”
“그때, 납치범은 돈을 요구했지. 그때 당시 1억이었나? 그랬을 거야. 그래서 그때 내가 그 납치범한테 한소리 했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동춘은 과거 일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아저씨, 고작 1억 때문에 날 납치한 거에요? 제 통장에도 1억은 있어요. 제 몸값이 그것밖에 안 될 것 같아요? 기왕 받을 거 5억으로 하세요. 그 정도는 할아버지가 해주실 걸요?”
지금 상황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태상의 말은 동춘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어린아이였을 그가 정말 납치범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하고나서 뭔가 굉장히 울컥 했나봐. 납치범이 날 막 때리기 시작하더라고.”
태상은 정말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 아련한 눈빛을 하며 말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태상이 말을 이었다.
“그때 다짐했어. 앞으론 절대 누군가에게 이렇게 굴욕적으로 당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내 가족은 내가 지킬 거라고. 지금은 어려서 납치범을 죽이는 걸 아버지한테 양보 했지만, 다음에는 내가 직접 처단하고 말 거라 생각했었지.”
“......”
태상의 눈동자가 동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동춘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소름이 돋고 절로 긴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에 인질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그래서 네가 엄마를 지키겠다 이거냐? 지금 이 상황이 만화영화인 줄 알아?! 이거 안 보여? 내가 손에 힘주고 슥삭하면 네 엄마는 끝나! 알아?! 그딴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 끌 생각인가 본데 절대 그렇게는 못 하지!! 무릎 꿇어! 당장!! 안 그러면 네 엄마, 아주 많이 다치게 될 거다!”
동춘은 태상이 시간을 끄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이도 그의 짐작은 전혀 틀렸다. 태상이야 말로 최대한 빨리 그녀를 구출해 내는 게 더 좋았다. 시간을 끌면 다른 이들이 이곳을 덮칠지도 몰랐다.
만약 저놈이 경찰에게 넘겨진다면, 그건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태상은 동춘이 계속해서 세연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꼴을 보고 있는 게 거북했다.
“넌 지금부터 이상한 일을 당하게 될 거야. 어느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하소연 해봐도 소용없을 거고. 도리어 널 미친 놈 취급할 걸?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현실이 맞아.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간다느니 뭐니 하지 마.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태상이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동춘이 기어코 그녀의 목에 칼을 깊게 가져다댔다. 그녀의 목에 가느다란 실처럼 핏물이 맺히자 세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몸이 움찔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춘은 그녀가 기절했던 게 아니라 영악하게도 기절한 척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의 몸이 무언가에 휩쓸려 벽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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