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악마 계약자 =========================================================================
악마와 전쟁을 한 게 1~2년도 아니고 수 백 년을 해온 그들이다. 오죽했으면 인간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흉측하게 깎여지고 파인 붉은 바위, 저 멀리에서 흰 날개 짓으로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천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바위에 앉아 있는 이들은 어딘가 크게 다친 이들 뿐이었다. 날개가 아예 통째로 뜯겨져 나갔거나 다리가 없거나 하는 것들은 약과에 불과했다.
태상의 머릿속에 이 붉은 바위가 그들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든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했지만 그러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전투를 쉬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들은 계약을 맺은 인간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태상은 그들이 모든 싸움을 인간들에게 미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이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있는 천사들의 표정은 모두 초췌하고 피곤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라마스가 티를 내지 않아 몰랐던 일인지라 태상이 물었다.
“너도 계속 전투를 하고 있었던 거야?”
라마스가 특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휴전 중이 아니니 당연히 계속 해왔죠.”
“전혀 몰랐어. 계속 싸우고 있는줄.”
라마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사들은 악마와 싸우며 목숨을 잃고 있을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궁지에 몰리다몰리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절 따라와주십시오.”
천사들만 있는 곳에 인간을 데려 온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들 라마스와 태상이 걸어가는 것을 힐끗힐끗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라마스가 말한 곳에 도착을 했는지 원형의 탁자에 천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이 라마스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저 자가 그 자입니까?”
“미파엘님도 오셨군요. 예, 맞습니다.”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총 모인 천사의 숫자는 10명 정도가 됐다. 다들 태상보다 훨씬 몸집이 컸기에 그들이 빙 둘러 서서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잠시 헛기침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가 방금 전 당했던 일들과 상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태상의 이야기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거나 끔찍해했다.
“어떻게 그런 짓까지....그들이 지금 재정신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예전부터 미친놈들이었습니다! 새삼 그런다고 놀라울 일도 아니지요!”
천사쪽 계약자와 악마쪽 계약자가 서로 이를 들어내고 으르렁거리듯이 천사와 악마들도 당연하게 서로를 뿌리 깊게 증오하고 있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현실을 노린다면, 저희들의 계약자를 지킬 방법이 필요해요.”
“놈들이 그렇게 나오니, 우리들도 같은 방법을 써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천사가 그렇게 말을 하자 잠시 천사들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라마스는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악마들이 했다고 저희들도 따라하게 되면 인간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겁니다.”
“그럼 어떡합니까? 악마들이 인간계를 정복하게 되면 저희들은 전쟁에서 지고 말 겁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천사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금 하려는 게 얼마나 좋지 않은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무거운 어둠이 담기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싸움에 끼어들게 하는 것도 그들로서는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결정이었다.
악마들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지만 천사들은 달랐다.
싸움보다는 평화를 좋아하고, 수호하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방법을 좀 더 강구해봅시다. 이렇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이렇게 직접 와서 얘기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사실을 빨리 알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뒤늦게 알았다면 이미 인간계는 악마의 손에 넘어간 후였을 겁니다. 그대 덕분에 이 천계를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천사의 과한 칭찬에 태상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라마스는 앞으로 저 천사들과 계속 바쁘게 회의를 해야 할 듯 했다. 라마스가 태상을 배웅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나왔다.
“난 좀 더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이 있는지 알아볼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도 큰일을 당할 뻔 하셨는데, 또 같은 일을 반복할 순 없죠. 나머지 일들은 저희들에게 맡기...”
라마스의 긴 말을 태상이 중간에 끊었다.
“내가 사는 곳 문제이기도 해. 악마 놈들이 그곳에서 날뛰면 내가 제일 곤란하다고. 내 문제이기도 하니까 조사하는 거야. 그리고 다신 이런 식으로 다치는 일 없어.”
지금 생각해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으드득 갈린다. 놈이 총에 맞는 모습을 보고 눈을 감아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마 이곳에서 깨어나자마자 날뛰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놈한테 복수를 하러 가기 위해서 말이다.
허나 놈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했고, 태상의 진짜 능력이 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렇게 나대다가 총에 맞은 것이고 말이다.
‘분명 깨어나면 병원일 텐데....송이가 엄청 난리 피웠겠는 걸?’
생각지 못한 상황이 일어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다가 이내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그제야 떠올랐다. 출근하겠다고 갔다가 피토하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테니, 수습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닐 것이다.
여러모로 이곳도, 현실도 복잡한 문제가 얽혀 태상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래, 쓸데없는 걱정하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지.”
뭐가 어떻게 됐든 부딪히고 봐야겠단 생각이었다.
라마스가 손짓하자 곧 태상의 주변이 흐릿해졌다. 바로 현실로 돌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태상은 분명 뜨고 있었던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눈앞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선잠이 들어 있는 송이의 얼굴이 보였다.
‘엄청 울었나보네.’
휙휙 고개를 돌리니 입원실이었다. 산소마스크까지 끼고 있는 걸 보아 아무래도 꽤나 상태가 심각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드고의 눈물을 먹은 태상의 지금 상태는 어느 때보다도 완벽하게 좋은 상태였다.
태상이 송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슥슥 쓰다듬었다.
“?”
송이가 머리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눈을 떴다가 태상이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명진아!”
“어.”
“괜찮아? 의사 선생님 불러올 게!”
송이가 일어나서 나가려하자 태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송이가 왜 그러냐며 그를 쳐다보자 말했다.
“의사 부를 필요 없어.”
“안 돼! 너 엄청 심각했댔어. 수혈을 얼마나 많이 받은 줄 알아? 의사 선생님이 아무리 검사해도 모르겠다고 하셔서...흑....저번에 너 3일 동안 못 일어났었잖아! 그거랑 분명 관련 있는 거야. 너 지금 아픈 거 맞아.”
송이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태상이 잠시 고민하느라 침묵했다. 송이는 그 사이 후다닥 사라져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갔다.
태상은 자신의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검사해달라고 했고, 하루 종일 걸려 다시 검사를 한 결과 멀쩡하다는 판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물론 송이는 절대 말이 안 된다며 입원하라고 우기고 우겼지만 태상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앞으로 현장에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럼 집으로 가는 거 허락할게. 아니다. 너 저번에 검사 그만둔다고 했었지? 그냥 그만 둬버려!”
얘가 한 번 다친 걸 보더니 막 나가기 시작했다.
“야 좀 진정 하지? 갑자기 그게 그리로 튀는 게 어딨어.”
지금 태상은 좀 더 검사직을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지금 이명진이 일했던 곳이 마침 비 이상적인 현상에 대해 수사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일이 단순히 그놈 한 명만 하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놈들을 잡으려면 지금 일하는 곳에서 계속 일을 해야 했다.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
의사가 굉장히 난감해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태상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다. 만약 나중에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은 곳이 있으면 꼭 병원에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말이다.
“이 검사님!”
송이가 퇴원수속을 밞고 있어 로비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던 태상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해왔다. 태상이 힐끗 돌아서서 보자 얼굴을 아는 이였다.
바로 도정희. 이명진이 함께 일했던 동료 여자였던 것이다.
“괜찮으신 거에요? 이렇게 나와 계셔도 돼요?!”
정희가 호들갑을 떨자 태상이 괜찮다며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정말 깜짝 놀랐는데....그러게 제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무모하게 혼자서 움직이실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죠?”
“네? 그 사람? 아..! 범인이요?”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어요. 총 맞아서 그 자리에서 사망해서요.”
역시 죽은 건가.....
놈이 쓸데없이 잡혀서 귀찮게 만들지 않게 된 건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놈에게 동료가 있을 테니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죽은 범인 신상정보에요. 가족 구성원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이 있고요. 중학교 때 어긋나서 일진 생활을 계속 해왔던 모양이에요.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서 아무런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묻지마 범죄라기엔 동선이 수상해요. 마치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것처럼 서울에서 살던 범인이 부산까지 가서 피해자를 죽이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게 확인됐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놈은 반드시 그들만을 콕 집어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태상이 그녀가 건네 준 서류를 보고 있는데, 정희가 잠시 머뭇대다가 자신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이 검사님. 또 할 말이 있는데....휴우....이 일로 경찰관들이 많이 죽어서 아무래도 언론에 흘러갈 것 같아요. 최대한 막아는 보고 있지만 안 될 확률이 더 높고요.”
“언론에서 믿기 힘든 이런 사건을 취재해서 방송한다는 겁니까? 설마 뉴스는 아니겠죠?”
방송사에서 관심을 갖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다른 방송도 꺼려지는 마당에 뉴스에서 이 일이 다뤄지는 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물을 부리는 능력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가 있다는 말을 누가 쉬이 믿어줄까? 취재를 한다 해도 직접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장면을 찍은 화면이 없다면 기사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태상의 말에 도정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으음....그게....아무래도 그 영상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영상 때문에 뉴스에서 다룰 가능성도 있고요.”
“뭐라고요?”
지금 천사들이 아직 어떻게 할지 정하지 않은 상황인지라 섣불리 먼저 이 일이 퍼지게 되는 건 좋지 않았다. 다들 이곳에선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을 텐데,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면 악마와 천사들끼리의 전쟁이 현실에서도 계속 될 수 있었다.
“이번에 범인이 경찰관을 죽인 곳에 CCTV가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 쪽에서 기자 한 명이 정보를 들은 모양이에요. 그 기자가 영상을 확보 했다고 들었어요.”
제일 피해야 하는 상황이 왔음에 태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상이 뉴스에서 나오면 그건 전국으로 그 일이 퍼져나간다는 뜻이었다. 그럼 천사쪽이며 악마쪽이며 너나 할 것 없이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태상이 머리를 굴려 해결 방법을 얘기했다.
“일단 영상은 조작으로 몰아가세요. 전문가가 조작이라는데 설마 뉴스에 내보내겠어요? 지금 이 일로 사람 몇이 죽었는지 아시죠? 단순히 연쇄살인으로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더 크고 위험한 일이 섞여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 영상은 조작 된 것이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건 아니죠? 안 된다 해도 되게 하세요. 뉴스에 나가는 것만은 절대 막아야 합니다.”
태상의 말에 정희가 입술을 꾹 다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될 때까지 해볼게요.”
“명진아.”
주먹을 불끈 쥐고 정희가 말하고 있는데, 송이가 마침 퇴원 수속을 밟고 돌아 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태상이 처음보는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굉장히 수상했기에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태상이 아닌 명진은 그녀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와 애인관계를 유지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병원에서의 일 때문인지 그 여자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긴 했다. 송이의 시선이 정희를 향해 집요하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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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페스티벌 중에는 제목을 바꿀 수가 없나보네요.
하지만 코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