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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6화 (6/251)

00006  피해자와 가해자.  =========================================================================

그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신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저렇게 모든 걸 버리고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한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물론 그도 결혼은 할 생각이었다. 정량적으로던, 아니면 정말 그와 한 번 잔 여자가 그의 애를 낳고 와서 책임지라고 하던 둘 중 하나로 말이다.

사랑해본 적이 없었기에 누가 자신의 짝이 된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를 많나는 폭이 넓어졌다. 한 여자만 만나는 건 지겹다. 그게 계속되다보니 습관이 되서 같은 여자를 두 번 안는 걸 싫어하게 됐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늘 옆에 새로운 여자가 생겨났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는 결혼을 한다 해도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도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 상상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저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이해되질 않았다.

저 여자는 만약 자신이 버려진 것을 알아도 그를 사랑할까?

**

라마스가 말한 적절한 때는 과연 언제인지 몰랐기에 태상은 밥을 먹고 난 후 그것을 고민했다. 지금 그에겐 유일한 탈출구가 그것밖에 없었다.

그가 멍하게 앉아 있자 부지런하게 집안일을 하던 송이가 다짜고짜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상이 뭐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송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진짜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야? 평소 같지가 않아.”

“내가 평소엔 어땠는데?”

“적어도 이렇게 멍 때리고 앉아 있진 않았어.”

“아파서 그래. 그러니까 저리 가라.”

손을 휘두르며 훠이훠이 저리가라는 표시를 하자 송이는 되레 더욱 가까이로 다가와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태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얼굴을 뒤로 물리자 송이도 그만큼 더 앞으로 다가왔다.

말똥말똥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바라보는 게 예쁘지 않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몸을 빼앗은 남자의 아내였다. 그에겐 원수의 아내인 건데, 그런 여자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들이대?"

지금 당신 눈앞에 있는 남자, 그쪽 남편 아니거든?

“남의 여잔가? 자기 여자지?”

태상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던 송이가 그렇게 말했다. 여자가 갑자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도톰하게 내밀어진 입술이 태상의 시선을 끌었다.

“.......”

태상은 오는 여자는 안 막았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오는 여자를 가만히 두고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남녀노소 같으니 말이다.

"난 원래 오는 여자 안 막는데."

태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송이가 그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짝! 하고 때렸다.

“그게 아내한테 할 말이니? 오는 여자를 안 막는다고? 왜 안 막아! 잘 막고 다녀! 골기퍼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거든? 아프니까 봐주는 줄 알아!”

그렇게 말한 송이가 향긋한 향기를 남기고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사라졌다.

아, 하긴. 결혼했으니까 저 여자한테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쩝.

“나름 귀엽긴 하네.”

태상이 머리를 긁적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락방이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침대도 없었다. 해서 태상은 바닥에 대(大)자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몸을 바닥에 누이고, 낮은 천장을 바라본 태상은 라마스가 도대체 언제 올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혼자 있어도 보고 마냥 기다려도 봤지만 영 소식이 없어 답답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 적절한 때가 언제라는 거야? 답답해 죽겠네.”

창문을 타고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배도 부르고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니 절로 잠이 왔다.

태상은 오는 졸음을 애써 막지는 않았다. 그가 눈을 감고 몸을 맡기자 숨어 있던 잠이 순식간에 태상의 몸을 감쌌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이명진님”

“라마스?”

갑자기 나타난 라마스의 모습에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마스는 천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날개를 펄럭이며 그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적절한 때라는 게 잠들었을 때를 말한 거였어?”

“죄송합니다. 저희는 명진님의 삶도 중시하기에 잠들어 있을 때를 이용해서 저희 세계에 접속하게 하고 있습니다. 피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피로를 풀어드리고 있으니까요.”

이곳에 접속하게 되면 몸은 잠든 상태로 영혼이 이동하게 된다. 그러니 밤에 그가 사라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해줬음 좋았잖아. 언제 올지 몰라서 한참 기다렸다고.”

“그러셨군요. 그때, 명진님의 몸을 누군가가 깨우고 있어서 설명해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긴, 송이가 그를 깨우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마스가 말했다.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응."

"이곳은 천계 아트레아입니다. 현재 천사 계약자들이 이곳에서 저희를 도와주고 계시죠."

"천계 아트레아라...그럼 난 이제 여기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걸 얘기하기 전에, 우선 몸을 스캔하겠습니다.”

“몸을 스캔해?”

“어떤 능력을 각성하셨는지 알 수 있고, 현재 명진님의 체력, 힘, 민첩 등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실 전투에서 보조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뭐 도움을 주기 위한 거라고 하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태상이 돌연 그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나 이명진 아니다. 강태상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강태상이라고 불러줘. 그 개자식 이름 듣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강태상 계약자, 스캔 시작하겠습니다.”

라마스의 눈동자에서 붉은 레이저 같은 게 나와 태상의 몸을 스캔했다. 그러자 홀프로그램 같은 것이 태상의 몸과 똑같은 형체 그대로를 보여주며 나타났다. 그곳에는 다양한 퍼센트 수치가 나타났는데, 그게 아무래도 그의 몸 상태인 듯싶었다.

태상은 놀라는 것보단 흥미로운 눈빛을 했다.

멀쩡한 사람 몸까지 바꾸는 놈들이니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이게 내 몸 상태?”

“네, 맞습니다. 현재 태상님의 몸 상태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체력과 힘이 우수한 편에 속하십니다. 민첩은 일반인들에 비해 약간 좋은 편이며, 지능은 우수하신 편이십니다.”

라마스의 말에 태상이 피식 웃었다.

“내가 좀 머리가 좋아. 그런데 이 비실한 녀석 몸이 그렇게나 좋다고? 그건 좀 안 믿기는데.”

“지금은 영혼의 능력치를 측정하는 겁니다. 고로 실제 몸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몸이 바뀌었다 해도 능력치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

“옳은 이해이십니다.”

그건 무척 마음에 드는 얘기였다. 자신의 영혼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니 말이다.

“종합해서 말씀드리자면, 체력 상급 힘 상급 민첩 중급 지능 최상급이십니다. 전투에 굉장히 뛰어난 모습을 보이실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대체적으로 만족스럽네. 그래서 이젠 어떡하면 돼?”

만족스러운 건 태상뿐이 아니었다. 라마스도 그의 능력이 이렇게 좋게 나온 것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하게 될 모든 일의 공은 라마스에게 오게 되는 거였다. 그러니 그가 뛰어나면 뛰어날 수록 라마스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보통 힘을 각성하게 되면 특유의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턴 그 능력이 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라마스가 태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라마스와 태상의 몸이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됐다. 그들의 앞에는 동그란 수정구슬이 둥둥 허공에 떠 있는 곳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게 바로 그 수정구슬이었는데, 그 공간에는 그것 빼곤 딱히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뭐 점이라도 쳐서 아는 거야?”

“이게 바로 태상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이것 위에 손을 올리면 앞으로 태상님이 사용하게 될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신기하네. 어떻게 보여줄지 어디 한 번 보자.”

태상이 망설이지 않고 수정구슬의 위에 손을 쫙 펼쳐 올렸다. 수정구슬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따듯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정구슬이 부르르 진동이 일다가 멈췄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쫘악 빛이 쏟아지고, 그곳에 태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건 마치 TV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태상의 몸을 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앞에 악마로 추정되는 검은 날개를 단 기이한 생물 하나가 나타났다. 놈은 태상을 향해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때 태상의 몸에서 빛이 생겨나더니 놈에게 쏘아졌다. 하지만 그 빛은 놈의 주먹질을 막지 못했다.

놈이 기어코 태상의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명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왠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통쾌해지는 태상이었다.

헌데 무식하게 큰 주먹을 맞았는데도 명진의 몸은 멀쩡했다.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태상이 그 영상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야? 몸이 막 엄청 튼튼해지는 능력이야?”

그의 물음에 라마스가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능력은 꽤 유용한 편이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때렸는데도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자 화가 잔뜩 났는지 계속해서 그를 공격했다. 무차별적으로 명진의 몸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하지만 마치 솜털방망이로 맞은 것 같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며 명진이 피식 웃음까지 보였다.

“재수 없어.”

지금은 자신의 얼굴이지만 기생오라비 같은 놈의 얼굴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태상이었다.

구슬에서 나오는 빛이 사라지고, 영상도 함께 사라졌다. 태상은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영 알지 못 하겠자 라마스에게 물었다.

“무슨 능력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넌 알아?”

저런 거 말고 좀 더 화려한 능력이 생기길 원했던 태상이었다. 능력도 좋은 편이라고 하니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라마스의 말은 그런 태상의 기대를 폭삭 무너지게 만들었다.

“방금 그 능력은 보조계열에 속하는 ‘무력화’입니다.”

“뭐?! 보조계열?”

태상이 라마스의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도 아닌 내가 보조계열이라고?

남 뒤나 받쳐주는 그딴 짓을 하라는 거야?

“난 남 뒤나 봐주고 만족하며 살기엔 성격이 좀 호전적인데...? 그리고 보조계열이면 뛰어난 능력치가 아깝잖아.”

“하지만 태상님의 능력은 보조계열입니다. 무력화는 상대방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0으로 만들어주는 보조계열 능력입니다.”

아무래도 라마스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안 해! 바꿔 줘.”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 받은 능력은 제가 손 쓸 수 없습니다.”

“이거 능력 받는 거 랜덤이야?”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갖고 남을 보조나 하고 살라니!! 이건 끔찍했다. 몸이 바뀐 것과 맞먹는 끔찍함이었다.

“고유 영혼의 파장이 제 힘과 만나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랜덤은 아닙니다.”

그 말은 태상의 고유한 능력이 저 딴 쓰레기 능력이라는 거였다. 한껏 고무되어 있던 태상은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라마스는 실망스러워하던 표정을 지우고 태상에게 말했다.

“일단 능력을 한 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좋아. 한 번 해보자. 어떻게 사용해?”

공격하는 놈을 향해 빛이 막 뿜어져 나왔었다. 볼 땐 쉽지만 직접 하라고 하니 막막한 태상이다. 라마스는 또 다시 태상의 어깨에 손을 올려 공간을 바꿨다. 태상은 이제 공간이 갑자기 바뀌는 것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곳은 연습장입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므로 안전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잠깐만, 손에 아무 것도 안 쥐어 주고 그냥 가는 거야?”

라마스가 말만 하고 휑하니 사라져버리려 하자 다급하게 태상이 물었다. 라마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밑을 내려다보라고 말했다.

밑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바닥에 다양한 무기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

별의 별걸 다 한다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신기한 능력이었다.

“원하시는 무기를 모두 고르셔도 됩니다. 가장 손에 익고 편한 걸 찾으시면 앞으로 그걸 익혀 나가시면 될 겁니다.”

태상이 흐음~ 신음을 내며 고민에 빠졌다.

그의 발치 아래에 펼쳐진 무기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했다. 사용 방도를 전혀 모르겠는 이상한 모양의 무기 같지도 않은 것들도 있었다. 칼도 있고, 도끼도 있고, 채찍도 있고......하지만 그런 무기들은 태상의 마음을 훔치지 못했다.

대부분 무난하게 검이나 단검, 몽둥이를 들곤 하는데 태상은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며 자꾸만 라마스에게 다른 것들을 보여 달라 졸랐다. 라마스가 계속해서 무기 종류를 바꿔주자 태상은 드디어 한 가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무기를 들자마자 태상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무기가 그의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비이상 수정했어요.

저런 단어 어디서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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