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피해자와 가해자. =========================================================================
“....이놈..? 꼭 네가 한 말 아닌 것처럼 말한다? 네가 신신당부했잖아.”
“......”
태상은 이 몸의 주인이 무척이나 수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를 닦달해 그는 집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동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험난했다. 그녀가 택시를 타려는 그를 붙잡아 버스를 탄 것이다.
여기서 집까지 거리가 얼만데 택시를 하려고 하냐며 그에게 화를 내는데, 태상은 너무 황당했다. 택시가 얼마나 한다고 비싸서 버스를 탄다니,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네 병원비 때문에 이번 달은 좀 빡세게 살아야 돼. 그러니까 참아.”
그녀의 그 말 때문이었다. 얼마나 궁핍하게 살면 병원비를 내느라 생활할 돈이 없다는 걸까. 남의 돈을 내고 버스나 택시를 타야하는 상황이었던 태상이 반항을 할 순 없었다.
심호흡하고 탄 버스의 승차감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끼익-!
“윽...!”
갑자기 급정거를 한 덕분에 태상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런 식으로 운전을 하고도 멀쩡히 버스운전사를 해먹고 살 수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운전사에게 쌍욕을 하고 싶은데, 그건 태상 혼자만의 생각인 듯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없었다.
그건 태상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운전을 이따위로 하는데 왜 가만있는 거지?”
여자는 태상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응? 그래? 별로 그렇게 못 느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그나마 그가 앉아서 이동을 했기에 이 정도였지, 서서 버티고 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맞봤다면 말할 정신도 차리질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태상은 결국 입을 꾹 닫고 눈을 감았다. 말해본 들 황당함은 자신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끝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어딜 가냐며 환승을 해야 한다고 그를 붙잡았다. 여자는 영 안색이 좋지 않은 태상을 위해 약국으로 달려가 멀미약을 먹이고서야 겨우 버스에 다시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버스 하나를 더 타고 한참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도 아닌데,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야! 젠장.“
자신이 놀이기구를 못 타는 체질이었다면 아마 버스에 타자마자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상이었다.
그에 비해 아주 멀쩡한 상태인 여자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태상은 졸래쫄래 그녀를 따라가며 동네를 두리번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빨리 좀 걸어.”
여자가 성화를 부리자 태상이 황급히 그녀를 따랐다. 이런 달동네는 TV에서나 나오는 곳인줄 알았는데 진짜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저 멀리 계단이 엄청나게 많았고, 군대 군대 낡은 집들이 보였다. 대문은 녹슨 쇠로 만들어 치안에 아주 많이 취약해보였고 말이다.
이를 본 태상이 혀를 차다가 이내 저렇게 살아도 도둑이 들어오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저들보다 도둑이 더 잘 살 테니까 말이다.
비실비실해보였던 몸은 생각보단 연약하지 않았다. 계단을 한참 올랐는데도 숨이 그다지 차지 않았다. 여자는 녹색 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뭐야? 문도 안 잠그고 다녀?”
열쇠를 꺼낸 적도 없는데 열리자 태상이 말했다. 여자는 새삼스러운 걸 묻는 태상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는 잠그고 살았니? 현관문은 잠궜으니까 괜찮잖아. 그러니까 집에 좀 자주 들어와. 자꾸 외박만 하니까 이런 것도 다 까먹는 거 아냐.”
‘예예~ 그러시겠죠. 나참.’
이명진이 이 집에서 완전히 사는 건 아닌 듯 싶었다. 외박을 자주한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태상은 그놈이 왜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건지 십분 이해했다.
자신같아도 이런 집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24시간 365일 방범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 사는 태상은 이런 모습이 신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빨랫줄에 줄줄이 늘어져 있는 여자 속옷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속옷들은 위아래 짝이 맞는 게 없었다.
다 각자 디자인과 색깔이 달랐다.
태상이 빤히 속옷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여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역시나 생각했던 데로 이곳저곳 금이 가고 녹슬어 있었다. 심지어 천장 부분에는 거미줄이 있기도 했다. 도대체 청결이라는 건 어디에다 삶아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손으로 코를 막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집에 들어간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사진이었다.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여자와 이몸의 주인 명진이 활짝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여자와 명진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태상은 설마하며 물었다.
“설마 너....이 몸이랑 결혼 했냐?”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배고프지? 좀만 기다려. 차려 올게.”
여자는 태상의 말을 아주 쿨하게 넘겼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태상은 답을 듣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집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외관은 낡고 더러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에는 굉장히 깔끔하게 해놓고 사는 듯 했다. 먼지 쌓인 곳 없었고, 물건들도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집을 구경하던 태상의 시선에 다시 사진이 들어왔다. 사진 아래엔 [영원히 사랑하자 송이♡명진]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의 이름이 송이인 듯싶었다.
“성이 천씨인가?”
그럼 그는 별에서 온 외계인이 되는 거니 이런 황당한 상황도 말이 된다.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득거린 태상은 떠오른 다락방에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락방을 찾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이 워낙 좁아서 몇 걸음 가지 않아 방문을 여니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여기군.’
발을 올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계단이었다. 무너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지만 다락방을 봐야한다는 각오아래 계속해서 움직였다.
먼지가 잔뜩 끼여 있을 줄 알았던 다락방 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태상은 다락방을 보고 다른 의미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락방 벽과 바닥 천장에 온통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양들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건 없었다.
한쪽 벽면을 채울 만큼 책들이 가득 놓여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미 문양에 정신이 팔려 있던 지라 그것까지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페인트로 그려 놓은 건가 싶었으나 그건 또 아닌 듯 했다. 이렇게 빛을 내뿜는 페인트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짓을 해야 저런 게 가능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락방이 수상하다 싶었는데 그의 짐작이 맞았던 것이다. 태상이 무릎을 꿇고 바닥 문양을 매만졌다. 차가울 줄 알았던 바닥이 생각 외로 따듯했다.
보일러라도 때운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바닥을 만진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벽을 잡자 신기하게도 벽도 따듯했다. 한 여름인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효율이 좋은 건 아니었다. 겨울이면 모를까 말이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점점 문양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세기를 더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태상은 이내 아 뜨거! 하고 문양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깜빡이며 갑자기 뜨거워진 문양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의 앞에 믿기지 않은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다.
“으헉!”
태상이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존재는 무척이나 커다랬으며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흰 깃털이 펄럭이며 그 존재가 태상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천장이 낮은 다락방에 저런 커다란 게 어떻게 있지? 의아함이 든 순간 그의 눈앞이 180도 빙글 돌았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다시 떴을 때엔 그가 주저앉아 있는 곳은 더 이상 다락방이 아니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환장할 것 같은 기분에 태상이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있는 곳은 사방이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하늘을 봐도 밑을 봐도 온통 새하얗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여전히 깃털을 펄럭이고 있는 존재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새도 아니면서 날개를 갖고 있는 놈은 이마에 긴 뿔을 하나 갖고 있었고, 키가 짐작하건데 2M는 넘는 것 같아 보였다. 긴 머리 탓에 여자인 것 같아 보이긴 했으나 가슴이 평평한 것을 보아 남자인 것도 같아 보였다.
“당신 뭐야? 너 뭐냐고!!”
태상이 놈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놈이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 피어난 미소는 무척이나 자애로웠다. 하지만 태상은 그 미소가 불길하기만 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뭐?”
놈은 태상이 생각지 못한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당신에게 특별한 힘과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생을 바꿔보고 싶지 않습니까?]
태상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당신이 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그렇습니다.]
“왜?”
[당신이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말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자신을 도와라는 말인 것 같았다.
“네가 누군데?”
[저희들은 여러분들에게‘천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천사....?
확실히 날개도 있고 하니 천사를 연상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천사라고 말해봤자 의심이 되는 건 여전했다. 아무래도 악마 보다는 천사의 이미지가 좋긴 했지만 말이다.
“천사가 내 도움이 왜 필요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는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악마와 오랜 시간 전쟁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600여 년 동안 그 전쟁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서로를 처참하게 망가트릴 뿐이었죠. 우린 전쟁의 결말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나보고 600년이나 이어진 전쟁을 끝내달라는 거야?”
[악마와 저희들은 서로 어디에 있는지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좀 더 다채로운 공격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그들을 훌륭하게 해치워 전쟁의 주역이 되어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결국 소원하나 들어 주고 개처럼 부려 먹겠다는 건가?’
태상은 그가 들어 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네가 말한 소원이 어디까지 되는지 감이 안 잡히는데?”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것도 가능합니다. ]
“상상하는 것...그 이상이라....”
태상은 왠지 자신이 이 꼴을 당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놈에게 물었다.
“이 몸이랑 다른 사람 몸이랑 막 바꾸고 그런 것도 가능한 건 아니지?”
태상에겐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그에겐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그는 말해왔다.
[가능합니다.]
그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태상은 눈에 띄게 환해졌다. 일단 천사든 악마든 내 몸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좋았다. 이딴 몸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했는데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가 재빨리 그에게 물었다.
“가능하다고?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해? 하긴 네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그런 게 된다는 말을 믿지 못할 것도 없지.”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걸 소원으로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부, 권력, 명예, 사랑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걸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부, 권력, 명예, 사랑이라......
그걸 원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다들 재벌2세가 되길 바라니까.
신데렐라가 되길 원하는 건 남녀 구분 없이 모두 공통 된 감정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받았고, 그 네 가지들을 모두 원했다면 그의 몸을 바꿔 달라 소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 세계 사람들에겐 달콤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저들을 도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런 제안을 받으면 거절할 사람이 없을 거다.
“이런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나 말고 많겠지?”
[예?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의 용사들이 뽑혀 지금 저희들을 돕고 있는 건 맞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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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