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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2화 (2/251)

00002  피해자와 가해자.  =========================================================================

“아들~~~”

하이톤의 목소리가 방문을 활짝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여성은 바닥에 여자와 남자의 옷가지가 이리저리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에는 나체의 여자와 남자가 서로 뒤엉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중년 여성은 여자를 슬쩍 표독스럽게 째려보다가 이내 여자의 몸을 침대 밖으로 밀어버렸다.

쿵!

“꺅!”

자다가 난데없이 당한 봉변에 여자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를 밀어버린 중년 여성은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여자 대신 침대 위로 올라가 잠들어 있는 남자의 뺌을 쓰다듬었다.

“아줌마 뭐에요!?”

침대 아래로 떨어진 여자가 성질을 부렸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중년 여성의 신경을 건드리지 못했다.

“아들? 이제 일어나서 회사 출근해야지요?”

“으음....”

남자가 뒤척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숨기려 했다. 그 모습에 중년 여성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들~~ 많이 피곤한 거야? 그러게 엄마가 지어 준 한약 먹으라고 했잖아. 어제 안 챙겨 먹었지?”

여자는 남자와 중년여성의 말을 들으면서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일단 자신의 속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옷을 다 입은 여자가 중년 여성을 다시 불렀다.

“저기요. 저기요!!”

중년 여성이 이번에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여자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직까지 거기서 뭐하는 거지? 쫓아내기 전에 당장 내 아들 집에서 나가.”

“허!”

여자는 어이가 없어 팔짱을 끼었다. 아무래도 이 여성은 자신과 밤을 보낸 남자의 엄마인 듯 했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남자의 이름을 버럭 불렀다.

“태상씨!!! 일어나 봐요. 태상씨!!”

그가 이 황당한 일을 해결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 피곤해 하는 거 안보이니?! 어따 대고 큰 소리야! 교양 없게. 여자 좀 골라 만나라니까 애가 착해서 들러붙는 애들은 거절을 못한다니까. 정말 속상해 죽겠네. 너 피임은 했니? 나중에 임신이니 뭐니 해서 우리 아들 발목 잡을 생각하지 말고 약 먹고 가!”

“아이씹, 뭐야?”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에 결국 잠이 완전히 달아난 태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상은 중년 여성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엄마? 엄마가 여긴 웬일이야?”

“웬일은, 내가 뭐 못 올 때 왔니? 아들 보고 싶어서 왔어.”

“흐아아암~ 어쩐지, 왜 이렇게 시끄럽나 했네.”

태상이 기지개를 활짝 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엄마는 다 큰 어른인 태상의 나체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의 뒤로 와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가 많이 뭉쳤다. 오늘 엄마랑 마사지샵 갈까?”

“어. 그렇지 않아도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요즘 피곤해. 여러모로.”

“그럼! 회사 일이 얼마나 바쁘겠어. 어휴~ 엄마 속상하다.”

여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태상과 엄마였다. 여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상씨! 나 여기 있는 거 안 보여요!?”

태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너 아직까지 있었냐?”

“뭐, 뭐라고요?!”

여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 똥 밞은 얼굴로 그를 한껏 째려보다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집을 나가버렸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 뒷담강을 못할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그녀는 태상에게 아무런 항의의 말도 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녀가 태상과 잠을 잔 건 그를 사랑해서도 아니고 하룻밤 원나잇을 원해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배경이 그녀의 몸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잠을 자놓고도 전혀 변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여자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그토록 찐하게 그녀를 사랑해줘놓고, 아침이 되니 완전히 모르는 사람 취급이었다.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여자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건 완전 똥 밞은 거다. 여자가 태상의 집에서 나가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뭐야?!”

“죄송하지만 저희의 앞에서 이 약을 드셔주셔야 합니다. 만일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니 이해해주십시오.”

“이거 설마 피임약이에요?”

맞았다. 경호원들이 그녀에게 내민 건 피임약이었다. 먹지 않으면 절대 보내줄 수 없다는 걸 알려주듯이 경호원이 잡은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넌 애들 좀 가려 자라니까. 저런 애들이 나중에 임신했다고 찾아와서 덜컥 책임지라 그럼 어떡할래?”

태상이 물을 꿀꺽꿀꺽 마신 뒤 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결혼 하면 되지 뭐.”

“저런 애들이랑 결혼을 한다고!? 어머 얘 큰일 날 소리하는 거봐. 절대 안 돼. 엄마가 너 짝으로 할 애 후보 뽑아놨으니까 그런 소리 절대 말어.”

“그런 애들 시시해. 저런 기집애들이 재밌는 거지.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게 뭐 어때서. 가엽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쪽으로 사회에 환원해줘야 하는 거라고.”

“그런 환원을 왜 하필 네가 하니? 엄만 싫어.”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태상이 피식 웃었다.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오늘 퇴근하면 연락할 테니까 집에 가 있어. 마사지샵 가자.”

태상의 말에 엄마가 활짝 웃었다.

“그래 아들~~”

그녀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과의 데이트가 기대가 되는 것이다.

태상은 그녀의 금지옥엽 외동아들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부족함 없이 키웠고, 모든 사랑을 다 주었다. 그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들이 바로 태상.

그게 바로 그녀의 아들 강태상이다.

**

삐-삐-삐-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태상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그 시끄러운 소리가 자꾸 거슬리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고, 저 소리 좀 끄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입술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몸도 무슨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꿈결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뭐지?'

이게 뭐지? 여기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자꾸 이런 생각만 들었다. 온 몸의 감각이 둔했다. 태상은 무거운 자신의 몸을 움직여보려 애를 썼다. 이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은거면, 어젯밤에 마약이라도 한 걸지 모른다.

물론 마약을 하지 않은지는 꽤 오래됐다. 스스로도 좋지 않다 여겨서 손을 데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마약을 한 거라면, 누군가가 그 몰래 먹였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누가 감히 자신에게 이런 짓을 했을까.

그의 친구들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가 싫다고 한 것을 몰래 혹은 억지로 먹일 간 큰놈은 없다. 그렇다면 마약을 한 것도 아니라는 건데, 몸이 왜 이럴까 싶었다.

사고라도 당했나? 술 먹고 운전한 건가?

지금 상태에선 그게 가장 말이 되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것도 아닐 거다. 방금 생각났는데 그는 저번 달에 운전기사 새로 고용했었다.

엄마가 위험하다며 24시간 붙어서 대기하는 전용 운전기사를 고용해준 것이다. 그러니 굳이 술까지 먹은 상태에서 위험하게 운전을 했을 리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알 수 없는 곳에서 물 머금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딱 떠오르는 생각에 아하! 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납치구나!’

워낙 어마어마한 재벌집 아들인지라 어릴 적에 한 번 납치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납치범한테 돈을 주고 깔끔하게 해결을 했었다. 물론 자신을 놔준 뒤에 납치범의 말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돈바구니 속에 위치추적기가 달려 있어서 그가 돌아오자 마자 놈을 잡은 것이다.

납치범을 잡은 건 경찰이 아니었다.

경찰을 개입시키는 걸 싫어했던 건 납치범보다 태상의 부모님들 쪽이었다. 협박전화 한 번에 태상의 부모님이 돈을 순순히 내어주자 납치범들이 잔뜩 방심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경찰에 신고했다면 그놈들은 지금까지 숨은 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도 태상의 부모님은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그놈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태상은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봤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 납치를 당해 느꼈던 공포 때문에 생생한 거냐고?

아니, 그때 느꼈던 굴욕함과 분노 때문에 생생했다. 그리고 또 다시 납치를 당한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당시 느꼈던 분노가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땐 어려서 어쩔 수 없이 당했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삐-삐-삐-삐-

그런데 아까부터 그의 귓가에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 하나가 있었다. 태상은 도대체 저 소리가 뭘까 궁금했다. 근데 그 소리가 아예 처음 들어 본 게 아니라 익숙한 편에 속했다.

뭐지? 뭐였더라....

한참 생각하던 태상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병원에서 나던 소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들리는 소리는 스스로 호흡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한테 씌워주는 호흡기에 붙어 있는 기계소리와 많이 비슷했다.

저 소리가 삐--------시끄럽게 울려대면 그놈은 죽었다는 뜻이 되는 거였다.

그때, 타다다닥 하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 그 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다.

저놈들이 날 납치한 것들인가 싶어 잘 떠지지 않은 눈을 희미하게나마 뜨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갑자기 태상의 몸을 누군가가 이곳저곳 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열심히 뜨려고 애를 쓰던 눈을 획가닥 뒤집는 놈도 있었다.

태상은 덕분에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온통 하얀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상이 기습적으로 눈앞에 있는 놈의 머리채을 힘주어 쌔게 꽉 쥐었다.

“아악!”

“꺄악!”

여자의 비명소리와 머리채를 잡힌 남자의 비명이 섞여 들려왔다. 손아귀에 힘이 별로 없어 머리채를 오랫동안 잡을 수가 없었다. 태상은 뒷골에 땡겨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빠져나가리라 생각했다.

“호, 환자분? 괘, 괜찮으십니까?"

귀가 먹먹해 잘 들리지 않는 태상의 귓가에 무어라 지껄이고 있었다. 태상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로 말했다.

“시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태상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자 캬아악 퉤! 하고 침을 뱉어냈다.

"얼마야? 얼마를 원하기에 인질을 이따위로 관리해? 당신들 초짜야? 돈 안 받고 싶어?!”

목소리가 갈라져 형편없었다. 가래를 뱉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여전히 이상했다.

“아- 아아- 내 목소리는 왜 자꾸 이래?!”

머리채를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목이 좀 더 얇아진 느낌이 들었다.

“진정하세요 환자분! 여기 병원입니다, 병원! 정 간호사!빨리 보호자분 불러요!”

“네, 네!”

여자가 타다닷 움직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납치범인 줄 알았던 놈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그를 구경하고 있는 환자복 입은 사람들이 기웃댔다.

도저히 납치의 현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상은 설마 하며 물었다.

“당신 의사야?”

“예! 의사입니다.”

“하! 웃기지도 않아. 지금 내가 납치를 당한 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였어?”

“네! 환자분은 지금 3일 동안 의식 불명 상태셨습니다!”

의사는 울상을 지으며 얼얼한 머리통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의사는 머리카락이 몇 없는 의사였다. 다른 곳이 아닌 저 의사의 머리채를 잡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할 판이었다. 물론 태상은 의사에게 전혀 그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자신이 1인실이 아닌 이상한 곳에 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져 물었다.

“지금 날 6인실에 입원시킨 거야?”

태상이 의사를 째려봤다. 어떻게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는 건가 싶어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의사대로 어이없어 하는 중이었다.

그럼 6인실에 입원시키지 어디에다 입원시킨단 말인가! 그는 여전히 태상이 잡고 있던 부위를 매만지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머리채가 잡힌 것에 대한 통증보다 머리가 떨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는 의사이기에, 아픈 사람한테 화를 낼 순 없다고 속으로 참을 인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보호자분이 이곳에 입원시키셨으니 저희들이야 어쩔 수 없죠.”

“엄마가 날 여기에 입원시켰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럴 리가 없잖아.”

태상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데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 그를 입원시키겠는가. 분명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의사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몸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까 잠시 협조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불편한 곳? 엄청 많아.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고. 근데 내가 왜 입원을 한 거야?”

“쓰러져 있는 상태로 방 안에서 발견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별 다른 외상은 없는데 3일 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셨고요.”

“아무런 이유 없이 3일 동안이나?”

태상이 금시초문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리고...보호자 분께서 환자분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셔서 아무런 검사를 못한 상황입니다. 보호자분과 이야기를 해보시고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검사를 받지 않으면 저희들로서는 대처를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어쩔 수 없었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태상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정말 이상했기 때문이다. 감기에만 걸려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사를 시키는 게 그의 엄마였다. 그런데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다니, 해가 서쪽에 떠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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