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다크로드 알케인@@]
가르딘의 예상대로 출전을 하게 되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은 마이어 공작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남 겨진 잉여인간 가르딘이 바자바인 후작을 돕기 위해 출전해 야 했다.
파스트론 공작과 발리스타 공작이 가르딘에게 무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면서 부탁을 했다. 겉으로는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속으로는 그런 입에 발린 말은 듣고 싶지 않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가르딘에게 배정된 군대는 발키리 영지군을 포함해서 총 5만이 되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병력이었다.
“카니발, 놈들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지금쯤이면 인폴트 성이 함락됐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굳이 바자바인 후작과 전투를 치르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네벨리언 공작령의 주요 성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 쿠베론 성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바자바인 후작과 합류하는 것보다는 놈들의 동선을 따라 매복해서 공격하는 게 좋겠네.”
“그렇습니다. 쿠베론 성으로 가는 길 중에서 매복하기 좋은 곳이 몇 곳 있습니다.”
“안전한 곳이겠지?”
다마트 황자가 보유한 병력이 아직도 30만은 되었다. 매복했다고 해도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효과적인 작전보다는 가장 안전한 작전을 선호하는 가르딘이다. 괜히 희생을 부추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세 곳 중에 두 곳은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선택한 지점은 안심해도 됩니다. 무엇보다 바자바인 후작군이 당도하기 전까지 시간만 끌면 되는 전투이기에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매복하러 가지.”
카니발 백작의 말을 들어보니 매복을 해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에 대한 상세한 작전을 구상한 카니발 백작이었다.
옆에 뛰어난 전략가가 있으니 가르딘은 별달리 고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카니발 백작이 하는 대로 지켜봐 주면 되었다.
‘편하다!’
역시 똑똑한 놈이 옆에 있어야 했다. 필리언, 갈라, 유타처럼 생각하기 싫어하는 놈들이 옆에 있으면 가르딘이 혼자 모든 고민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파멜라가 없는 상태에서는 카니발 백작 같은 인재가 필요했다. 모든 고민을 카니발 백작에게 떠넘기면 되니 말이다. 가르딘의 귀차니즘은 여전한 것 같다.
* * *
바자바인 후작은 다마트 황자가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간파했다. 병력을 따로 빼서 후방을 막고, 빠져나가려는 수작이 보였다. 곱게 보내줄 바자바인 후작은 절대 아니었다. 다마트 황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리기에는 나중에 귀찮아질 것이 염려되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후딱 해치우고 쉬고 싶었다.
“스필언, 미토스! 방해물을 치워라!”
“예! 후작님!”
바자바인 후작은 두 신성을 재투입하여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적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적들이 적당히 물러서며 화살공격을 하기에 제압하는 것이 예상보다는 어렵게 되어갔다.
마력포를 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마력포의 사정거리가 짧아서 뒤로 물러설 때마다 거리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 잘못했다가 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또한 바자바인 후작이 막고 있는 지점이 원래 좁은 지역이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막는 자가 유리한 지형이었다. 방어를 하던 바자바인 후작이 공격으로 전환을 했으니 역으로 막히는 꼴이 되었다.
“이건 생각 못했는데."
바자바인 후작은 뜻밖의 난관에 머리를 긁적였다. 적이 도망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황자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중에 성안으로 들어가서 공성전을 하면 귀찮게 될 수 있었다. 그 전에 사로잡거나 죽여야 한다.
많은 희생자를 낸 다마트 황자군과는 다르게 바자바인 후작의 군대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40만 대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쫓아라!”
무사히 보내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2만의 병력을 투입하여 바자바인 후작의 군대를 지연시킨 다마트 황자는 쿠베론 성까지 최단거리로 이동했다. 쿠베론 성은 네벨리언 공작령 내에 있는 성이기에 병력을 더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쿠베론 성으로 가서 공성전을 준비한다. 그 이후에 마이어 공작군과 양동작전을 펼 것이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다마트 황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였다. 지금까지 패배를 했다고 해도 아직 진 것은 아니었다. 마이어 공작군이 건재한 이상 양쪽에 서 승부수를 띄우면 승산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각 왕국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코카 왕국을 끌어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지.’
카이로만 제국과의 대전으로 큰 피해를 본 코카 왕국이지만 아직도 많은 병력을 보유한 국가다. 다른 왕국들과 병력만 비교하면 압도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귀족들이 코카 왕국에 협조를 보내는 데 공조를 할 것인가였다. 만약 코카 왕국의 협조를 받는다면 대외적인 다마트 황자의 공신력이 떨어지게 된다. 명분을 상당 부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한 제국의 분열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한 코카 왕국이 제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제국이었던 코카 왕국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가만히 있던 다른 왕국들조차 들고 일어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마트 황자는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제국이 분열되는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우선은 황제가 되는 것이 먼저였다. 황제가 된 후 카이로만 제국을 휘어잡고, 대륙을 차근차근 제압해 나가면 되었다. 그 정도의 자신감은 가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바자바인 후작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게 시급 했다. 일부 병력을 희생시키면서 병력은 더 차이가 나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적의 추격권 안에 들게 되면 앞으로의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수가 있었다.
“이동을 서둘러라! 자체하는 자는 죽여버리겠다!”
이전까지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다마트 황자였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마트 황자의 현재 모습이 과거와 너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작은 의심에 불과하지만 궁지에 몰릴수록 의심은 커져서 이후에는 불신이 되어버린다. 다마트 황자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네벨리언 공작을 잃은 것이 다마트 황자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결속력이 점점 붕괴되기 시작했다.
빌링턴 백작 이하 네벨리언 공작의 직속 귀족들은 눈빛을 교환하면서도 아직은 기다리고 있었다.
* * *
한쪽이 가파른 능선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로 길이 나 있었다. 능선은 협곡보다는 낮은 편이지만 그럭저럭 매복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가르딘은 이곳에 5천의 궁수병을 배치하고 병력을 아래에 집결시켰다. 지형적 이점을 내세워 적들이 들어오는 지점을 막아서는 작전이었다. 적절히 시간만 벌고 뒤로 빠지면 별다른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먼저 와서 기다린 가르딘은 단병전에 대비해서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거치대를 만들고 나무창을 역으로 세워놓아 적들이 침입하는 지점을 협소하게 만들어놓았다. 방해물 앞에 작은 웅덩이를 곳곳에 파서 기병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단병전만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또한 화살공격에 대비해 방패를 각자 지니고 있도록 하였다.
미리 이동했다고 해도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서둘러서 움직여야 했다.
가르딘의 기감에 적군의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적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가르딘은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어차피 방해물이 있기에 적들도 눈치를 챌 것이다. 물론 눈치를 채도 상관은 없는 편이다. 여기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적들은 빠른 시간 내에 장애물을 치우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모두 전투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
“예!”
가르딘의 명령에 의해 궁수대는 능선 위에 몸을 숨겼다. 최단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화살공격을 할 것이다. 능선 아래 병사들은 장애물을 땅에 숨겨놓고, 적을 맞을 준비를 모두 갖추었다.
적이 보이기 전까지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대군이 진군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또렷하게 들릴수록 긴장감이 커졌다.
먼지가 일며 다마트 황자가 이끄는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뒤에서 쫓아오는 바자바인 후작의 군대를 따돌리기 위해 쉬지도 않은 것 같다. 병사들의 대부분이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가르딘은 적이 지쳐 있다는 것에 다소 안도했다.
“적들은 지쳐 있다! 우리는 시간만 끌면 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끝까지 살아남아라! 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한 가르딘의 의지가 병사들에게 전이되었다.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자가 제국의 후작이었다. 그가 반드시 살라고 명령했다.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을 위하는 가르딘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마음이 서자 전의가 살아 올랐다.
빠직!
다마트 황자는 적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다지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는 전력도 아니었다.
전투를 치르지 않고 쿠베론 성으로 우회하려면 뒤로 후퇴를 해야 한다. 세 개의 갈림길 중에 가장 짧은 길로 넘어온 지 한참이다. 다시 돌아가면 바자바인 후작과 전투를 벌어야 한다.
치밀어오는 짜증은 분노가 되었다. 막아선다면 단숨에 뚫어버려야 했다. 시간을 지체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쳐랏!”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병대가 뛰쳐나갔다. 1만의 기병대가 적을 향해 과감히 돌진했다. 모여 있는 병력을 뚫어버리는 데 기병대는 필수였다. 말이 달리는 힘을 폭발시켜 적진을 흔들어놓고, 그 뒤를 이어 병력이 출전한다. 기본적인 전투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타다다다닥!
말발굽의 거친 소리가 시끄럽게 했다. 기병대가 전방의 적들을 향해 기세를 내뿜었다. 검을 빼 든 기병대장이 적을 죽이라고 소리쳤다.
“적을 죽여랏!”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들이 쓰러졌다. 작은 웅덩이지만 그 폭과 깊이에 의해 달려가던 기병대가 균형을 잃고 튕겨 나가버렸다. 말이 달리는 속도가 엄청나기에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쿠다다다당!
“으아악!”
작은 웅덩이는 나뭇잎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쉽사리 걸려든 것이다. 함정을 굳이 잘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만들어놓아서 말들이 달려오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었다. 기병대의 돌격이 어처구니없이 막히고 말았다.
“장애물을 들어 올려라!”
기병대가 돌진하도록 유인하려고 바닥에 놓아둔 역창을 들어 올려 길을 더욱 좁혔다. 좁혀진 길 사이로 가르딘과 발키리 기사단, 투르의 창기병이 적절히 배치가 되었다. 병사들은 가르딘의 뒤를 보조하였다.
기병대가 달려가다 대부분 고꾸라진 것을 보자 다마트 황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언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작은 폭의 웅덩이가 기병대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뛰어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기병대를 뒤로 물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끝내려다 병력 피해만 보고 말았다.
빠드득!
“이놈들이 감히 나를 막아선단 말이냐! 어서 놈들을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모두 쳐랏!”
한계 이상의 감정폭발이 일어난 다마트 황자였다. 조급함이 그의 본래 성격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화를 폭발시킨 다마트 황자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일이 계획대로 하나도 되지 않았다.
“이야야얍!”
다다다다다닥!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가르딘을 향해 쳐들어왔다. 가르딘이 이끄는 병사들도 마음 단단히 먹고 적들을 맞이하였다. 가르딘은 병사들을 관통하여 다마트 황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다마트 황자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말이 없이 조용한 그의 성정은 가식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면이 부서진 것인가? 그렇다면 잘됐군!’
전쟁에서 흥분하면 지는 것이다. 특히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절대 흥분해서는 안 된다. 흥분하면 생각의 폭이 좁아진다. 좁은 생각은 아집을 나타내고, 적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전쟁을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가르딘은 적의 흥분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더 흥분하게 해주어야겠지.’
능선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는 카니발 백작이었다. 가르딘은 카니발 백작이 정면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다마트 황자의 입장에서 카니발 백작은 배신자가 된다. 만약 작정하고 카니발 백작을 노리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능선 위의 궁수대를 그에게 맡겼다.
가르딘이 신호를 주자 카니발 백작이 일어섰다. 숨어 있던 궁수대가 일어서서 적을 겨냥했다.
“쏴라!”
돌진하는 다마트 황자의 병사들에게 화살비를 선사해 주었다.
슈슈슈슈슈슈슈슉!
푸욱! 푸욱! 철퍼덕! 털썩!
5천의 궁수대가 쏘는 화살공격이 돌진하는 병사들의 목숨을 거둬가고 있었다. 화살공격을 대비하지 않은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삽시간에 공격하던 5천에 달하는 병력이 죽었다.
부들! 부들!
분노의 수위가 한계를 넘어선 다마트 황자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화가 폭발하다 보니 몸이 떨린 것이다. 가르딘이 교묘하게 다마트 황자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감히!”
다마트 황자가 궁수대 위의 존재를 뚫어져라 보았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마트 황자는 궁수대를 지휘하는 자를 볼 수 있었다.
“카니발! 네놈이 나를 배신한 것이냐!”
카니발 백작임을 확인하자 화가 더욱더 치솟는 다마트 황자였다. 전투에서 패배해 사로잡힌 것도 부족해서 배신을 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카니발 백작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전장을 지휘하는 또 다른 존재까지 확인하자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마법사는 궁수대를 제지하고, 배신자를 죽여라!”
가르딘은 발리스타 공작에게 다섯 명의 마법사를 원조받을 수 있었다. 적의 마법 공격을 적당히 방어할 수준의 마법사들만을 원했다. 공격하는 것보다 방어하는 편이 수월하기에 많은 수의 고서클 마법사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특히 궁수대는 지속적으로 화살을 날려야 한다. 마법사들이 방해하면 능선 아래의 병사들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궁수대를 지원할 수 있는 곳에 마법사들을 배치시켰다.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이 병사들을 지휘하며 공격하였지만 쉽지 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적을 공격하기도 전에 먼저 엄청난 병력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가르딘 후작! 진정 무서운 자구나!”
쿠베론 성으로 가는 길목을 간파한 것도 모자라 그 짧은 시간에 이 같은 방어진을 구축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어설픈 것 같으면서도 대군을 막아서기에 효과적인 방어진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전에 가르딘 후작을 견제하려다가 실패한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빌링턴 백작이 오해하는 면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모두 카니발 백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가르딘은 그저 그에 따른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기습적인 화살공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다마트 황자의 병력은 많았다. 차츰 익숙해진 병사들이 방패를 활용하여 전진을 계속했다.
가르딘은 전진해 오는 병사들을 보면서도 침착했다. 거치대를 이용한 역창이 있기에 쉽게 뚫리지 않을 것이다. 공격하는 병력만 차분하게 막아내면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은 수비에 주력을 두었다. 공격은 시간을 끌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군의 병사들 사이로 발키리 기사단과 창기병이 뚫리는 지점을 보완하였다.
적군은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화살비를 뚫고 오느라 체력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완벽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르딘의 병사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수만 많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 실하게 보여주었다.
채채채챙! 차차차창! 차아아앙!
검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병사들이 계속 죽어갔다.
다마트 황자는 전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침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검붉게 물든 눈빛 속에 적에 대한 살의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기운을 방출하게 되면 자신은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마지막 인내심이 힘의 사용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그가 가진 힘은 이 세상에서 배척받은 위험한 능력이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숨겼다. 다시 사용하게 되면 살 수는 있어도 모든 권력을 다 잃게 된다. 다마트 황자는 힘의 분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딘은 한창 싸우다가 느껴진 기운에 잠시 멈칫했다. 물론 검은 쉬지 않고 움직여 적병을 사살해 나갔다.
‘순간 느껴진 이 불길한 기운은 뭐지?’
찰나의 순간에 생겼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감지하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가르딘의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지만 딱히 어떤 기운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불길한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기운일 수도 있지만 가르딘은 무시하지 않았다. 그랜드마스터를 불안하게 만드는 기운이 보통일리 만무했다.
가르딘이 고민하고 있을 때 바자바인 후작이 본대를 이끌고 전장의 지척에 다다랐다.
바자바인 후작군도 쉬지 않고 다마트 황자의 군대를 쫓아오느라 제법 지쳐 있었다. 하지만 다마트 황자의 군대보다는 조급하지 않아 체력적으로 우세했다.
“역시 날 보고 배워서 그런지 제법 한단 말이야."
바자바인 후작이 가르딘의 작전을 칭찬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은 가르딘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바자바인 후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기도 싫어하는 가르딘이다.
“그럼 상이 차려졌으니 포크 하나 좀 올려볼까나!”
과연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다 차려진 잔칫상에 포크 한 개 달랑 올려놓고 공적을 인정받으려 하고 있었다. 먼저 와서 고생한 가르딘을 칭찬하면서 실속은 혼자 다 챙기고 있었다.
“신나게 날뛰어 보자!”
“예! 후작님!”
바자바인 후작과 두 신성이 부대를 이끌고 다마트 황자의 후미를 공격하였다. 세 명의 오러마스터가 순백의 오러블레이드를 뿌려대며 후방을 공격하자 다마트 황자의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전진하는 것도 어려운 판국에 후방까지 지켜야 하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바자바인 후작의 출현에 다마트 황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황이 너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빠져나가기도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어찌해야 되는가!
다마트 황자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병사들이 죽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10만의 병력을 잃었다. 남아 있는 20만도 힘겨운 전투를 하기는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다.
‘결국 힘을 쓰게 만드는구나!’
다마트 황자가 쥐고 있던 마지막 자제력이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가르딘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뚫렸다!”
“모두 돌진하라!”
다마트 황자는 그 즉시 다시 원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앞을 막고 있던 가르딘과 병사들이 뒤로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마트 황자는 귀족들과 기사들을 독려하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후방을 공격하던 바자바인 후작만 떨쳐 내면 되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이 병사를 일부 희생시켜 바자바인 후작의 공격을 또다시 지체하게 만들었다.
뒤에 남겨진 바자바인 후작은 필사적으로 쫓지 않았다. 길을 터준 가르딘과 합세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해후한 가르딘에게 바자바인 후작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길을 터주었지?”
“고양이도 궁지에 몰리면 쥐를 물기 마련입니다. 굳이 희생을 무릅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3황자를 잡아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
가르딘의 말을 동조하면서도 임무를 잊지 않고 있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3황자를 사로잡거나 죽였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가르딘은 일부러 길을 터주었다. 불길한 기운을 섣불리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병사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전투를 하지 않아도 3황자를 궁지에 몰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희생 없이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위험한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가르딘의 설명에 바자바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방법이었다.
“잔머리 하나는 끝내 주는데.”
“상급 전략입니다.”
“역시 자네는 내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
“저는 열다섯 살 이후로 혼자 컸습니다."
"반항인가."
“저도 후작입니다.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호오!’
“이제는 동급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의 신경전이 장난 아니었다. 전투보다 더 치열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하기만 한 가르딘은 역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반격에 바자바인 후작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러다가 내가 먹히는 것 아냐! 그럴 수야 없지.’
아직까지 가르딘에게 지고 싶지 않은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상황이다. 많이 컸어. 이제는 동급으로 인정해 주지.”
“현실을 인정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작전대로 펼쳐볼까.”
“그러지요.”
이제부터 벌어지는 전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게 된다. 또한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1황자, 발리스타 공작, 파스트론 공작에게 알려야 했다. 중대한 결정을 임의대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자바인 후작은 통신을 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진영을 구축하고 마법사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가르딘의 옆으로 필리언이 다가왔다.
“부단장님을 왜 도발했냐?”
“얄밉잖아.”
“그렇긴 해도 좀 심한 것 같았는데.”
“괜찮아. 저 인간이 그 정도에 흔들릴 것 같아?”
“그래도 조금 수상한데.”
드래곤 수백 마리를 삶아 먹은 바자바인 후작이다. 이 정도의 도발에 꿈쩍할 것 같으면 가르딘이 예전부터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르딘이 바자바인 후작을 도발한 진정한 이유를 말하려고 할 때, 카니발 백작이 오는 바람에 입을 닫았다. 대신에 전음으로 필리언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부단장이 이대로 가만있을 것 같냐!]
[절대 아니지.]
[그럴 줄 알고 도발한 거다. 아마 지금쯤 내가 세운 전략을 자신이 했다고 1황자에게 말해 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내가 다시 말해 봤자 소용없게 될 테지.]
[후작님이 공적을 탐하는 분은 아닐 텐데!]
[그래서 약 올린 거지. 저 인간이 당하고 가만있을 인간은 절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마치 너 같다!]
[뭐! 나만큼 아량이 넘치는 관대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쥐 오줌만 한 아량이 관대한 거냐!]
바자바인 후작이라면 그러고도 남는 인간이다. 사실 바자바인 후작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진행시킬 수 없는 전략이기도 했다. 가르딘은 더 이상 공적을 쌓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이번 작전을 설명하면서 일부러 바자바인 후작을 도발해, 공적을 세우도록 등을 떠민 것이다. 아마 성공만 하면 공작이 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가르딘의 예상대로 바자바인 후작은 통신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 듯한 계책이군!
“감사합니다, 파스트론 공작님!”
-자네의 계책이 성공만 한다면 충분히 우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걸세!
“저는 그저 황자님에게 충성을 할 뿐입니다. 그런 과분한 직책은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겸손하군.
가르딘이 예견한 것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자신의 임의대로 통신을 보내고 나서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마치 대변을 보고 밑을 닦지 않은 것 같은 더럽고 찜찜한 기분이 느껴졌다.
‘당한 것 같은 느낌인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역시 감각 하나는 타고난 바자바인 후작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의심을 하고 보는 유형이었다. 가르딘과 바자바인 후작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아도 답이 안 나오자 그냥 포기해 버리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이것도 가르딘과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쿠베론 성에 다마트 황자가 당도했다.
지속되는 전투의 패배로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는 병사들이었다. 적에 대한 두려움이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재정비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다마트 황자는 우선 쿠베론 성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적들이 진을 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마이어 공작과 다시 통신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마이어 공작이 지속적으로 1황자를 압박만 잘 해준다면 돌파구가 생길 수도 있었다. 또한 주변 왕국과의 협조를 구해볼 계획이었다.
다마트 황자가 전략회의를 하기 위해 귀족들을 불렀다. 회의실로 빌링턴 백작과 로스트 백작 등 귀족들이 모였다.
“적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50만에 육박하는 적군이 쿠베론 성 주위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압박을 하며 우리를 조여 들어올 속셈으로 보입니다.”
“타개할 방법은 있나?”
“현 시점에서 뚜렷한 대책은 없습니다. 마이어 공작이 움직이고 난 후 공성전에서 적들을 이겨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빌링턴 백작의 의견에 회의장은 조용해졌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마땅한 대책이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적군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불안하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병력도 두 배가 넘어가고 있었다. 쿠베론 성 주변에서 급하게 병력을 모집했지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규병도 아닌 일반 평민들이 전투력 증강에 도움이 될지도 의문 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자바인 후작이 이끄는 군대가 더욱더 강력해질 것이다. 공성전에 필요한 무기까지 완벽하게 구비가 되면 이길 가망성이 적어진다. 이번에 선보인 마력포가 쿠베론 성에 쏘아지면 성벽과 성문이 부서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마땅한 대책을 없는 상태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다마트 황자가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었다.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방법이 있다는 다마트 황자의 의견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입니까?”
“주변 왕국의 협조를 얻는 것이다."
“외부간섭으로 인해 내전의 정당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정당성을 따지는가! 이대로 전쟁을 수행 해 봤자 개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을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나! 정말 가만히 앉아서 죽고 싶은 것인가!”
다마트 황자의 말도 딱히 틀리지 않았다. 정당성을 가졌다고 해도 패배한다면 쓸모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일리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빌링턴 백작은 낙관하지 않았다.
“황자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으나 현 시점에서 우리의 손을 들어줄 왕국은 없습니다.”
1황자 진영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이미 대외적으로 내전의 승패가 기울어져 가는 것이 알려졌을 것이다. 또한 1황자는 명분마저 쥐고 있었다. 패배가 보이는 상황에서 손을 잡아줄 왕국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 없다고 생각하지."
“현실입니다."
“한 곳이 있지 않은가!”
“설마!”
“코카 왕국과 협조를 하면 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코카 왕국은 안 됩니다. 그들은 카이로만 제국의 숙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잘못하다 제국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귀족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이로만 제국과 코카 왕국은 오랜 시간 동안 전투를 치렀고, 그 원한은 아직까지도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함부로 손을 잡았다가 일이 잘못 되면 카이로만 제국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다마트 황자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이었다.
“제국의 안위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나와 그대들이 없는 제국의 안위도 생각해야 하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제국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그렇다 해도 너무 위험합니다. 과연 그들이 우리의 뜻을 들어주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못 이긴 척 들어줄 것이다. 물론 요구하는 것이 크겠지! 하지만 내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리면 되는 일이다.”
다마트 황자의 말처럼 간단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조건 반대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기적인 존재들이었다.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한다. 가문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현 시점에서 다마트 황자의 말을 거부할 귀족은 많지 않았다.
‘흥! 어차피 네놈들의 안위를 위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마트 황자는 교묘하게 귀족들의 심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을 자극하고 있기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비밀리에 코카 왕국에 사신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현 시점에서 바로 사신을 보내기에는 위험이 있었다. 적들과의 교전이 있은 후 혼란한 틈에 사신을 보내야 할 것이다.
전략회의가 끝이 난 후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황자님의 성향이 너무 바뀐 것 같지 않나.”
“원래의 본성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마치 미래의 폭군을 보는 것 같구나!”
다마트 황자가 귀족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독선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목숨까지도 위협했다.
코카 왕국의 협조를 얻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해도 그 이후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 계시는 겁니까? 정말 돌아가신......!’
네벨리언 공작이 왜 사라졌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죽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집단은 갈 길을 잃은 방랑자와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 * *
바자바인 후작은 쿠베론 성을 포위하면서 견고한 방어책을 만들고 있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 주변을 에워쌌다.
가장 먼저 쿠베론 성 인근에 통신방해 마법진을 설치하고, 성에서 비밀리에 빠져나갈 수 있는 지점들을 모조리 다 파악 했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다마트 황자가 텔레포트를 하여 도망칠 수도 있기에 굴곡 마법장까지 설치를 완비하였다.
펠칸 성에서 있는 러쉬 황자도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기에 도망을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굴곡 마법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포트는 공간의 굴곡에 상당히 예민하다. 약간의 오차만 있어도 공간 안에 갇히거나 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최후의 수단이 아니면 보통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단위 굴곡 마법장이 설치가 되면, 마법의 조종이라고 불리는 드래곤 이외에는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
10일의 시간이 지나자 바자바인 후작은 완벽한 방어책을 구성할 수 있었다. 마력포까지 완비되어 있어 교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이 상태로 공격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다마트 황자일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조금씩 짜증이 나려고 해서 말이지.”
“그럼 제가 조금 운을 띄우겠습니다."
가르딘은 간간이 공격 명령을 내려 적들의 동향을 관찰하였다. 공격은 철저히 공성병기를 이용한 장거리 공격이었다.
가르딘은 다마트 황자 진영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방법을 계속 사용하였다. 별다른 공격이 아닐지라도 일방적으로 방어하는 입장이라 피해가 누적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정면공격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이제 술이 조금씩 익어가는구나! 슬슬 마실 때가 됐겠지.’
한편, 기습적인 공성병기의 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다마트 황자의 마음은 답답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져야 코카 왕국에 사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사 방을 걸어 잠그고, 통신 마법까지 할 수 없게 만들면 앉아서 고사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문을 열고 정면대결을 펼치기에는 불리했다. 성안에서 병력이 나오기도 전에 마력포와 공성병기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적들이 공격할 의사가 없을 줄은 다마트 황자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렇지만 타개할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적들이 대규모 공격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빌어먹을!”
다마트 황자의 평정심이 점점 깎여 나가고 있었다.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어야 할 타이가라 공작의 부재도 악재로 다가왔다. 누군가 그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자가 필요했다. 현재 다마트 황자와 귀족들 간의 괴리감이 생기고 있었다. 딱히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질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쿠베론 성의 서쪽 능선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노을은 짧았다. 금세 해가 능선 아래로 사라져 어둠이 깔려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다마트 황자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의 내면에 숨죽이고 있는 어둠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와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렸다.
‘절대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존재와 대등한 두 존재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다마트 황자의 상념이 짙은 어둠 속에 잦아들었다.
한편 빌링턴 백작은 누군가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 며칠 전부터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암호가 전달이 되었다. 암호 속에 숨어 있는 뜻을 해석하여 상대편의 의중을 알아내었다.
“그대가 가르딘 후작의 밀사인가!”
“그렇습니다."
“가르딘 후작이 정말 그와 같은 뜻을 내비쳤단 말인가!”
“뜻을 알고 싶다면 호칭에 신경을 써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가르딘은 후작이었다. 빌링턴 백작보다 상위의 계급이다.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를 바라고 있었다. 빌링턴 백작은 가르딘 후작으로 인해 네벨리언 공작이 지시한 일을 실패한 적이 있다. 따라서 약간의 원한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원한에 얽매여서 일생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가르딘 후작님의 뜻이 정말 그렇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백작님이 일만 제대로 해주신다면 이제까지의 과오를 청산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원래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나!”
“여기 후작님의 신표가 있습니다. 또한 약속의 증거까지 서류로 작성하였습니다. 백작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후작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실 겁니다.”
밀사는 가르딘의 증표와 서신을 빌링턴 백작에게 건네주었다. 귀족의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장과 사인이 적혀 있었다. 빌링턴 백작은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빌링턴 백작은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까지 그의 상관이었던 네벨리언 공작이 사라졌다. 네벨리언 공작파의 모든 의사결정은 빌링턴 백작의 손에 달렸다.
네벨리언 공작이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가르딘의 손을 잡지 않겠지만 빌링턴 백작은 달랐다. 그는 이처럼 어이없게 죽고 싶은 마음이 절대 없었다. 이제는 다마트 황자를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3황자의 성급한 결정으로 인해 제국의 안위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을 주겠는가."
“많은 시간을 주지는 못합니다. 현재 공격을 잠시간 보류하고 있는 것은 가르딘 후작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바자바인 후작님의 뜻을 물리치실 수는 없을 겁니다.”
“2일 후 푸른색 깃발을 성의 동쪽에 걸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사삭!
밀사는 그림자 속에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 빌링턴 백작은 어찌 된 것인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 고작 밀사로 파견된 자가 이와 같다는 사실에 빌링턴 백작은 가르딘 후작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빌링턴 백작은 은밀히 귀족들을 불렀다. 모두 부르지 않고 한 사람씩 일을 핑계로 불러 뜻을 일치시켰다. 한꺼번에 모이게 되면 다마트 황자에게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다 마트 황자의 옆에는 타이가라 공작의 수하인 로스트 백작이 자리했다. 그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이 눈치를 채면 일이 어렵게 된다.
네벨리언 공작의 귀족들은 모두 수긍하는 듯했다. 오히려 환영하는 것 같았다. 일이 잘만 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다마트 황자에 대한 의리는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의리보다는 실속을 챙겼다.
사사삭!
그림자 속에 스며든 존재가 연기처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막사는 불이 켜져 있었다.
“왔냐."
눈치를 첸 가르딘이 그림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에 반해 그림자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키다니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있었다.
“인마, 꼭 날 시켜야겠냐.”
“뭘 그래. 내가 좋은 것 가르쳐줬잖아.”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이 나이에 밀사 따위나 해야 하냐.”
“그래도 갈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그럼 투르를 보낼까.”
“그건 좀.”
“거봐, 너밖에 없잖아. 내가 너를 보낸 건 그나마 안전하게 나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야.”
“그렇긴 하지.”
필리언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되지 못하면 개죽음당할 수도 있는 것이 밀사였다. 더군다나 비밀리에 성안으로 잠입하려면 보통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르딘은 필리언에게 잠영술을 가르쳐주었다. 무영투영공이라는 것으로 그림자를 투영하여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잠영술이다. 특히 어둠이 깔리는 밤에 시전을 하면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보일 수 있다.
무영투영공은 귀견살이라고 불리는 중원제일살수의 독문 잠영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영투영공이 신마의 손에 들어간 이유는 귀견살의 살인 목표물이 신마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신마의 손에 심장이 박살나서 죽긴 했어도 잠시 동안 신마마저 위협할 정도로 대단한 잠영술이었다.
가르딘은 쿠베론 성을 포위하는 방어책이 구성되는 동안 필리언에게 무영투영공을 가르쳤고, 필리언은 지금까지 계속 무영투영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제 겨우 5성에 들었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가르딘이 갈 수도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바자바인 후작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때때로 스필언과 미토스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필리언이 대신 밀사로 파견되었다. 물론 가르딘이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자신이 나서기에는 대가리가 많이 컸다.
* * *
2일 후 늦은 밤.
쿠베론 성을 지키는 단단한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성안의 기사와 병사들이 문을 연 것이다.
성 밖에 대기하고 있던 수백의 검은 그림자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짜 맞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성안의 모든 것들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림자들을 이끄는 존재가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존재를 만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르딘 후작님!”
“그대의 현명한 판단에 탄복했소이다, 빌링턴 백작!”
“약속은 지켜지리라 믿습니다."
“물론이오. 내 명예를 걸고 지켜주겠소.”
가르딘 후작의 말에 크게 안심한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이었다. 이후에 가르딘 후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다마트 황자는 어디에 있소?”
“성주의 방에 있습니다.”
다마트 황자를 생포하거나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가르딘의 명령에 의해 발키리 기사단과 창기병이 안으로 들어가 성을 점령해 나갔다. 빌링턴 백작이 대부분의 귀족을 설득했다고 해도 다마트 황자를 따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한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다마트 황자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한밤중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소란은 다마트 황자의 심경을 어둡게 만들었다. 때마침 급하게 문을 열고 로스트 백작이 들어왔다. 로스트 백작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담겨 있었다. 또한 다급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빌링턴 백작이 배신을 했습니다."
“뭐라?”
“가르딘 후작이 빌링턴 백작과 손을 잡고 성안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쿵!
다마트 황자는 심장이 철렁했다. 공격을 할 때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봤을 때 미리 알아 내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가르딘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가르딘이란 말인가! 그놈은 왜 자꾸 내 앞길을 막는 것인가!”
뿌드드득!
가르딘에 대한 원한이 폭발하고 말았다. 내전이 있기 전부터 번번이 다마트 황자의 일을 본의 아니게 지속적으로 방해를 했던 가르딘이다. 어쌔신 길드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세븐다크의 대부분이 가르딘에게 죽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러쉬 황자를 암살하는 일을 실패한 결정적인 요인이 가르딘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놈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다마트 황자의 느낌이 가르딘을 지목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압도적인 기운이 다마트 황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광포한 기운은 끈적끈적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 앞에 있던 로스트 백작이 버티지 못하고 벽면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단 한순간에 익스퍼트 급 실력을 가진 로스트 백작이 죽어버렸다. 굉장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숨겼던 것을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가르딘! 네 이놈!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다마트 황자는 화가 나지만 우선은 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이 순간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해도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군의 수까지 합하면 70만이나 되었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기 마련이었다.
쿠베론 성주의 방 안에는 밖으로 통하는 비밀 문이 있었다. 다마트 황자는 그곳을 통해 빠져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력장 밖으로 벗어나야 한다."
마력장이 있기에 공간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마력장이 펼쳐지는 범위 밖으로 벗어나서 마이어 공작과 합류해야 할 것이다.
다마트 황자는 비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3황자가 사라지고 1분 후 가르딘이 도착했다. 가르딘은 다마트 황자 대신에 죽어 있는 로스트 백작을 발견했다. 급사를 당한 것 같지만 굳이 살피지 않았다. 우선은 다마트 황자를 찾는 게 먼저였다.
“한발 늦었나. 놓치면 부단장이 날 죽이려고 할 텐데.”
가르딘은 기감을 열어 방 안을 조사해 보았다. 바람이 통하는 곳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비밀 문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찾을 시간 없으니!”
가르딘이 검을 뽑아 벽문을 네모반듯하게 오려내었다. 오러블레이드가 둔중한 벽면을 종잇장 자르듯이 가볍게 잘라내었다. 잘려진 벽면을 수공을 이용해서 잡아당겼다. 벽면을 잡아 빼고 들어서 던졌다.
쿠다당!
벽면이 뚫리자 통로가 보였다. 인기척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따라 풍겨오는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가르딘은 그 즉시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황자가 뛰어봤자 별거 아니지."
상황을 보니 황자 혼자서 도망간 것 같은데,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생각을 한 가르딘이다. 보이기만 하면 가볍게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쉬운 일을 마다할 가르딘이 아니다.
가르딘은 독문신법인 섬전행을 시전하여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쌔애애앵!
미세한 냄새를 따라 한참을 쫓아가던 가르딘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황자가 짐작보다 더 빨랐다. 도망치는 자가 다마트 황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다마트 황자는 검술 실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돌아가기에는 미심쩍은 게 너무 많았다. 타이가라 공작도 그렇고 실제 실력은 알려진 것보다 더 강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이유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는 상대를 봐야 했다. 공력을 좀더 높여 신법을 더 빠르게 전개했다.
쿠베론 성의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는 다마트 황자는 마력장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플라이 마법과 헤이스트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달아났다. 이제 까지 알려지지 않던 다마트 황자의 정체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최소 5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소리였다.
일정 거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다마트 황자는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의 기척을 느꼈다.
“뭐지?”
모습을 거의 드러낼 때까지 기감에 잡히지도 않았다. 원래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는 다마트 황자의 경우 그 어떤 존재보다 기감이 발달해 있었다. 기감에 잡힌 존재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는 아니었다.
부웅!
바람이 불고 의문의 존재가 나타났다. 다마트 황자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삽시간에 나타난 존재와 다마트 황자가 서로 보았다.
깜짝!
화들짝!
둘이 동시에 놀라고 말았다.
“뭐야?”
“가르딘!”
가르딘은 다마트 황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광포한 기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겉으로 보이는 기운만 해도 오러마스터에 근접했다. 또한 안에 갈무리된 잠재능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력만으로 이 정도라면 9서클에 이르렀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존재가 다마트 황자라는 것에 있었다. 지금 본 것을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다마트 황자가 9서클 마법사라고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직접 보고 있는 가르딘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뒤로 넘어져서 얼굴이 박살 난 꼴이다.
그에 반해 다마트 황자는 쫓아오는 자가 가르딘인 줄 몰랐다. 오러마스터라고 해도 그처럼 빠를 수는 없다. 신법을 전개할 때 느껴지는 기운을 보니 오러마스터를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감이 확실하게 왔다. 자신의 일을 망친 존재가 모두 가르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만한 기운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네놈이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타이가라 공작과 네벨리언 공작을 죽였구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르딘은 증거가 있어도 발뺌한다. 그 정도에 넘어갈 가르딘이 절대 아니다. 사실을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기에 인정해도 상관없지만 가르딘은 신중을 기했다. 쓸데없는 말이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보다 다마트 황자님이 맞기는 합니까? 마력도 마력 나름이지만 마기라고 불리는 마력을 황자님이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마기를 사용한 마력. 즉 흑마력을 의미한다. 현재 흑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흑마력은 마족과의 계약에 의해서 힘을 얻는 어둠의 마력으로 종신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어둠의 일족이 가진 힘과 성향을 동시에 받게 된다.
어둠의 일족이라고 불리는 마족은 급수가 클수록 더욱 더 광폭하고 잔인했다. 마족의 광폭함과 잔인성이 인간의 성향까지 바꾸어 버린다. 더군다나 흑마법사들 대부분이 인간들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하여 흑마법사들을 대륙에서 공적으로 보았다.
대륙 공적이 된 순간 흑마법사들은 대륙의 모든 존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아무리 강한 흑마법사라도 수에는 장사가 없었다. 결국 대륙에서 흑마법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수백 년이 흘렀다.
가르딘은 그 점을 걸고 넘어갔다. 황자라고 해도 흑마력에 손을 댔다면 대륙 공적이 된다. 그 순간 황자의 지위는 사라지고 공적이 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
정작 다마트 황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정체를 말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여유를 보였다.
“어차피 너와 나는 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좋다. 숙적이 된 김에 나의 정체를 알려주지. 나는 어둠의 일족을 부활시키기 위한 어둠의 주인(다크로드) 알케인이라고 한다. 물론 다마트 황자도 내가 맞다.”
“그런 비밀은 듣고 싶지 않은데.”
비밀을 알려준다는 것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손속을 겨뤄보지 못해서 아직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위험한 존재인 것은 부인하지 못했다.
가르딘의 심정과는 다르게 다마트 황자, 즉 알케인은 거리낌 없이 정체를 드러냈다. 듣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어야 하는 가르딘은 난감 그 자체였다. 왠지 모르게 듣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잠깐! 어둠의 일족을 부활! 설마 마...족...왕...황...신!’
마족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무지하게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것은 안다. 쉴라가 알려준 신언의 내용에 점점 다가가는 것 같아서 엄청나게 께름직했다.
알케인은 원래 리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어둠의 일족에 바친 것이다.
하지만 그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에 비견되는 두 존재의 힘을 빌려 리벌스데스(죽음의 부활)를 실행하였다. 1천 명의 죽음과 영혼의 장악으로 인해 새롭게 영혼을 전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선택자가 바로 다마트 황자였다. 제국의 황제가 되어 어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가르딘으로 인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계획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든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알케인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역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 같았다. 피할 곳도 없을뿐더러 피하고 싶지도 않게 만들었다.
“죽여주마!”
“젠장!”
가르딘은 욕이 치밀어 올랐다. 설마 황자가 흑마법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간단하게 잡을 줄 알고 따라왔건만 일이 요상하게 꼬이고 있었다. 실력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존재였다. 괜히 나섰다가 횡액을 당하고 있었다.
“네놈과 네놈의 모든 것을 다 파괴시켜 버리겠다!”
망설이고 있던 가르딘에게 알케인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가르딘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참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세상이 어찌 되든 그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굳이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가르딘이 원하는 것은 그저 가족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다.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를 그냥 둘 가르딘이 아니다. 내면에서 숨죽이고 있는 가르딘의 파괴본능이 서서히 그의 뇌리를 잠식해 나갔다. 가르딘의 파괴성은 고요하면서도 차분했다. 그래서 더욱더 무서운 기운이었다. 파괴성이 점점 살의가 되어 가르딘의 마음속을 차지해 나갔다.
“껍질을 벗겨주마!”
“잔인하네."
분노한 내면과는 다르게 의외로 차분해진 가르딘이다.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자 상대가 누가 됐건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죽음보다 더한 것도 없으며 더 아래인 것도 없다.
착 가라앉은 가르딘의 변화에 알케인은 일말의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분노는 그런 불안감마저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여기서 물러선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9서클 흑마법사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감히 자신의 뇌리에 불안감을 심어준 가르딘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울부짖게 만들어 주겠다! 크크크크!”
본성을 드러낸 알케인은 잔인함과 광폭함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다마트 황자로서 살기 위해 억눌러왔던 타고난 살인마의 본능이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오히려 더 무표정해졌다. 갑작스럽게 조우했을 때 보였던 놀라움과 황당함과는 다른 이질적이 모습이다.
“난 너를 그냥 죽일 거다.”
“건방진 놈!”
고통스럽게 죽든,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다 죽든, 죽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가르딘은 그저 상대를 죽인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차분하고 신중하게 적을 탐색하며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알케인이 도주하게 되면 가르딘의 신분이 노출되어 버린다. 그전에 깨끗하게 무로 돌려야 했다.
“어둠의 창이 분노를 내릴지어다! 다크 스피어!”
열 개의 검은색 창이 알케인의 정면에 생성이 되었다. 생성된 창이 가르딘을 향해 빗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알케인에게 주문 영창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맛보기로 사용한 것이다.
파파팟!
굉장한 속도를 자랑하는 다크 스피어였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가르딘을 공격하였다. 가르딘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흔들거린 신형은 10여 개로 분산이 되어 나갔다.
-섬전보-첩첩분영.
섬전보가 극의에 이르면 이형환위는 우스운 수준이다. 분리된 가르딘의 신형을 다크 스피어가 꿰뚫고 지나갔다. 열 개의 그림자는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꿰뚫린 그림자가 사라지자 가르딘의 신형이 어둠 속에 물들어갔다. 무영투영공이 섬점보에 결합이 된 것이다. 필리언의 수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둠에 동화된 수준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아니!”
알케인은 가르딘이 기감을 벗어난 영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 즉시 알케인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마력을 개방해 나갔다.
-다크니스(암흑의 공간).
적이 어둠 속에 숨었다면 어둠 안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알케인의 흑마력이 어둠의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가르딘은 어둠 속에 또 다른 어둠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기척을 최대한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자신의 기척을 찾기 위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쉽지 않네!’
기운마저 어둠 속에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적은 또 다른 마법으로 가르딘의 기척을 찾고 있었다. 상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흑마법사는 어둠 속에서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한다. 어둠의 기운이 흑마력의 기운을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어둠이 다가올 때 흑마법사와의 충돌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가르딘은 피하지 않았다. 적의 의도에 과감하게 돌진해 나갔다.
‘찾는다면 나타나주지!’
가르딘은 섬전보와 무영투영공을 이용하여 알케인의 어둠 속으로 뇌전처럼 뛰어들었다. 낌새를 차리는 그 찰나의 틈을 노리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였다. 어둠의 대기를 응축시켜 놓은 것 같은 빠름이었다. 날이 예리하게 선 칼날 위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나는 것 같았다.
슈슈슈슉.
-무극칠검식-2절초-일격참뢰-
질풍처럼 내달리는 힘을 검에 실었다. 단전에서 시작된 천룡무상신공의 공력이 가르딘이 뽑아 든 검에 스며들었다. 어둠을 베어버리는 무상의 검뢰가 알케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늘 아래 그 무엇도 베어버릴 수 있는 무상의 절초 일격참뢰의 섬전 같은 일격이었다.
‘헛!’
알케인은 흑마력으로 만들어놓은 다크니스를 뚫고 들어오는 예리한 섬광에 기겁하며 헛바람을 삼켰다. 너무 빨라서 피할 시간이 부족했다. 다급하게 흑마력을 일으켜 마법을 사용하였다. 마법은 한 가지로 부족해 보였다. 흑마력을 중첩하여 마력을 강화시켰다.
-다크 배리어(어둠의 방패).
응축된 어둠은 어떤 무기로도 뚫어내지 못한다. 9서클 마력으로 형성된 다크 배리어는 절대방어 마법인 앱솔루트 배리어와 쌍벽을 이룬다. 운석이 떨어져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절대 뚫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사아악!
“아니!”
다크 배리어가 섬광에 의해서 어처구니없이 쉽게 반으로 갈렸다. 가르딘이 뿜어낸 검뢰는 알케인을 계속 노리며 들어왔다.
말도 안 되는 위력에 알케인의 표정이 굳었다. 가르딘의 무력이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쿠쿵!
다크 배리어를 삼중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알케인의 허리가 두 동강 나버렸을지도 몰랐다. 알케인의 귀밑머리로 식은땀이 솟아났다 금세 식어버렸다. 방금 전의 공격은 알케인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일격이었다. 설마 검에 저런 위력이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오러블레이드라고 해도 다크 배리어를 저처럼 간단하게 베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의 공간에서 나를 고전하게 만들다니!’
상상 이상으로 가르딘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전까지는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한 수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잘못하면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알케인이 다크 배리어를 쳐서 방어하는 순간에도 가르딘은 지속적으로 검을 출수하였다. 가르딘의 의지를 실은 검이 뻗어나가 3미터에 달했다. 순백의 강렬한 기운으로 응축된 오러블레이드가 다크니스를 마구잡이로 헤집어 버리고 있었다.
가르딘이 어느새 다크니스를 뚫고 알케인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일격참뢰가 비록 절초이기는 하지만 막힐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했다. 일격참뢰는 그저 접근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할 수밖에 없다. 고서클의 마법사들이라면 다르겠지만 가르딘 역시 일반 검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둘 다 고수라면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자가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
빛살 같은 강기가 알케인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일격의 기습공격과는 다르게 이어지는 검세였다. 알케인이 블링크를 사용하여 빠져나갔다. 다크니스 내에서는 외부 마력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알케인이 만들어놓은 어둠의 공간에서는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만약 다크니스가 아니었다면 몸이 산산이 잘라졌을 수도 있었다.
주르륵!
블링크를 하는 찰나의 순간에 가르딘의 검이 알케인의 왼쪽 허리를 베어내었다. 그리 깊은 상처라고는 할 수 없으나 검에 당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알케인이었다.
“미천한 네놈이 감히 나를!”
-다크 파이어(어둠의 겁화).
-다크 캐논(어둠의 광선포).
-헬 파이어(지옥의 겁화).
쉬지도 않고 연속적으로 마법을 날렸다. 가르딘의 신형을 붙잡아놓기 위해서 어둠의 기운을 압축하여 사방을 조여왔다. 다크 그래비티(중력장)가 가르딘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크니스의 공간 안에 있기에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조여오는 어둠이 가르딘의 신형을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까다롭다!’
마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자였다. 이어지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주변 여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면에는 돌기둥이 튀어나와 움직임을 막아서고 있었다.
공중으로 올라선 알케인이 무자비한 공격마법을 퍼부었다. 불계열 마법 중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헬 파이어까지 선보였다. 일반 마력이 아닌 흑마력으로 펼쳐지는 불꽃은 색이 검은 것이 특징이었다.
퍼퍼퍼펑! 꽈과과광!
가르딘이 오러블레이드를 휘둘렸다. 휘두르는 속도가 극에 달해갔다. 번쩍이는 검에 실린 기운이 실타래처럼 뻗어나 가더니 점차적으로 막이 형성되었다.
새하얀 막은 아름답지만 위력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지옥의 불길조차 검으로 형성된 기운에 튕겨 나가버렸다. 주변으로 튀어나간 불길은 바위조차 삽시간에 녹여 용암으로 만 들었다. 불길이 사방에서 솟구쳐 올랐다.
바닥이 기형적으로 변하며 가르딘을 덮어오기 시작했다.
“죽어랏! 얼스퀘이크!”
지진 마법으로 인해 지면이 가르딘의 몸을 삼켜버렸다.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빼앗아 버린 알케인은 인페르노 마법을 난사하여 지면을 용암지대로 만들었다. 사람이라면 용암에 서는 버틸 수 없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케인은 멈추지 않았다. 블리자드 마법을 펼쳐 뜨거운 용암을 식혔다. 아예 땅속에 묻어버리려는 의도였다.
“이제야 죽었구나! 그 속에서 영원히 저주받은 고통에 시달려라! 크하하하하!”
바닥을 완전히 얼음지대로 만들고 나서야 알케인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지금까지 검사를 상대로 이처럼 고전하기는 처음이었다. 만약 일반 마법사들이었다면 가르딘의 일검조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알케인은 가르딘의 놀라운 신위를 생각하자 이가 갈렸다. 이런 놈이 방해를 하고 있었던 것을 진즉에 알지 못한 것이 화가 난 것이다. 먼저 알았다면 이전처럼 안이하게 대응하지 도 않았다. 사전에 미리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는 못하겠지.”
알케인은 가르딘이 죽었다고 단정했다.
순간적으로 용암이 들끓고 삽시간에 얼어버렸다. 가르딘이 아무리 대단해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쩌저저적!
안심하는 그때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알케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대지의 한 부분이 균열을 일으켰다. 마른 대지가 갈라지는 것처럼 균열은 점점 더 크게 넓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자신조차 저 지경에서는 살아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하물며 보통의 인간 따위가 살아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케인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면이 급속하게 부서지더니 서서히 사람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가르딘이었다.
입고 있던 갑옷이 많이 상해 있었다. 눌어붙어 버린 갑옷이 오히려 거치적거릴 지경이다.
“귀찮군.”
기운을 운용하자 갑옷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버렸다. 드러난 가르딘의 몸매는 완벽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적당한 근육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 40살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몸매였다. 이래서 라이나가 가르딘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사랑과 정열을 바치기 위해서는 우선 몸이 받쳐주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몸에 한 톨의 상처도 없다는 것이다. 용암과 냉기에 노출된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10성인가.’
천룡무상신공에 의해서 운용되는 신체는 불사지체에 가까워진다. 일명 천룡신이라고 불리는 경지였다. 10성의 경지에 이른 가르딘에게 용암과 냉기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몰라도 다시 죽여주마!”
-다크 포이즌(어둠의 독).
-다크 클라우드(어둠의 구름).
다크니스 내에서 구름이 형성됨과 동시에 어둠의 독을 분사하였다. 가르딘은 다크 포이즌이 몸에 닿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치지지지직!
가르딘의 몸에 닿은 다크 포이즌이 타면서 역겨운 냄새를 발생시켰다. 천룡신의 경지에 이른 가르딘의 몸에서 천룡강기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와 다크 포이즌을 태웠다.
어둠의 독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보자 다급해진 알케인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상대는 생전처음이었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맛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자신을 노려보았다. 눈동자를 파고 들어오는 가르딘의 위압감에 절로 위축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설마 두려워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나는 어둠을 지배하는 위대한 절대자 알케인이다!”
“어둠의 지배자면 어둠 속에서나 살 것이지 밝은 세상에는 왜 나오는 거냐."
“닥쳐랏! 이 세상을 어둠으로 만드는 숭고한 사명을 모독 하지 마라!”
“숭고함과 사악함을 혼동하는군.”
“닥치라고 했다!”
가르딘의 말에 자꾸 말려 들어가고 있는 알케인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자 가르딘의 말을 흘려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알케인은 보통 마법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다크 블레이드 마법을 꺼내 들었다. 50개의 다크 블레이드가 형성되어 가르딘을 노렸다. 알케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흑마력을 다크 블레이드에 주입했다.
“네놈의 몸을 잘라주마!”
“자를 수 있다면."
“잘난 체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잘난 체라는 것은 능력 없는 놈들에게나 하는 말이지. 나는 잘난 체가 아니라 원래 잘난 존재다."
“미친놈! 죽어랏!”
알케인은 가르딘의 신형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었다. 다크 블레이드는 알케인이 지닌 어둠의 의지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다크 블레이드는 완벽한 어둠의 칼. 어둠 속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빠르기를 자랑했다. 한 개도 아닌 50개의 다크 블레이드를 피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수아아악!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가르딘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기감은 공간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운으로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타타탕! 슈슈슉!
검과 검이 충돌했다. 가르딘의 검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한 개의 다크 블레이드를 쳐내며, 그 즉시 뒤로 돌아 두 개의 다크 블레이드를 갈라버렸다. 세 개의 다크 블레이드는 쳐내자마자 섬전보를 펼쳐 찔러 들어오는 다크 블레이드의 궤도를 벗어났다. 적당히 검으로 쳐내며 섬전보를 함께 펼치자 무적의 위력을 자랑하던 다크 블레이드는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켜보던 알케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떤 방위로 공격을 해도 다 쳐내거나 피해내고 있었다. 인간의 움직임을 초월한 영역을 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가르딘.”
“그...럴 리 없다! 평범한 인간이 어찌 나의 능력을 능가한단 말이냐! 네놈은 인간이 아니다!”
“멀쩡한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나는 뭐라고 하지? 내가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나.”
“이...놈! 나를 농락하지 마라! 네놈은 천족의 떨거지가 틀림없다! 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보낸 신의 대리자가 분명하다!”
“아주 소설을 써라.”
“죽인다!”
-다크 워드 킬(죽음의 전언).
드래곤의 용언 마법에 필적하는 어둠의 전언이다. 정신력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사람의 심령을 파괴하여 죽여버리는 무시무시한 9서클 흑마법이었다.
수백 년을 산 알케인의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존재도 그 능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알케인은 모든 정신력을 다크 워드 킬에 집중시켰다. 가르딘의 마음속에 있는 나약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정신을 분열시켜야 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쿠쿠쿵!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비틀! 비틀!
주르르록!
알케인이 엄청난 반탄력을 받고 휘청거렸다. 입가에는 연방 핏물이 흘러내렸다. 가르딘은 알케인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크 워드 킬은 파워 워드 킬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지 못하면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알케인은 인정하지 못했다. 리치였던 시절까지 합치면 알케인의 정신력은 보통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이겨내지 못하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가르딘의 정신은 천룡무상신공이 지켜주고 있었다. 경지에 달한 무인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천룡의 기운은 일반적인 기운과는 달랐다. 그 어떤 정신적, 물리적 공격도 방어해 주는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천룡은 일반 용과는 비교되는 능력을 가졌다. 천룡은 용들의 왕, 즉 신의 반열에 도달해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르딘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죽어야지.”
이미 죽인다고 공언을 했다. 살아나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후환거리는 절대 남겨두지 않는 가르딘이다.
가르딘의 신형이 알케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알케인은 방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흑마력과 정신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결과였다.
사아악!
가르딘의 검이 냉철하게 출수되었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줄기가 뻗어나가 알케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완벽한 검격이다.
가르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흑마법사들은 상식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없다. 완벽하게 죽이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
“커억!”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비명이 알케인의 입으로 터져 나왔다. 뜨끈한 것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진 허전함이 전부였다.
가르딘의 검이 다시 휘둘러져서 알케인의 허리를 잘라내었다.
사아아아악!
상체와 하체로 잘린 몸뚱이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뻘건 핏물이 바닥을 적시었다.
꿈틀! 꿈틀!
아직도 살아 있는 알케인의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심장이 꿰뚫리고 허리가 잘린 상태라면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 생명력 하나는 끈질기군.”
마지막으로 목을 치기 위해서 가르딘이 알케인에게 다가갔다. 연방 핏물을 입으로 토해내는 알케인은 가르딘을 원독에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망쳐놓은 가르딘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려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크크크! 이...대로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의 뒤를 잇는 녀석들이 아직 있다!”
“좋은 정보 감사한다.”
조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가르딘이 감사의 인사를 날려주었다. 다분히 빈정거리는 투가 역력했다. 괜한 말로 경각심을 심어준 꼴이 되었다. 그것이 몹시 분한 알케인이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상대는 자신을 철저히 비웃고 있었다.
“으윽. 네놈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마!”
“숨넘어가는 주제에 말은 잘하네."
하지만 여기서 가르딘은 말할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방심한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방심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우물! 우물!
알케인이 흑마법 주문을 외우며 서서히 숨을 거둬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무엇을 외우는지는 가르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들어주지 못했다. 가르딘의 검이 알케인의 목을 향해 내리쳐졌다.
탕!
주춤!
반탄력이 형성되었다.
갑작스럽게 알케인의 몸에서 어둠이 일렁거리더니 가르딘의 검을 튕겨내었다.
순간 느껴진 반탄력에 뒤로 밀려난 가르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 죽어가는 놈이 이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뭐야?”
보통은 기다려주기 마련이지만 가르딘은 감각이 뛰어난 편이다. 그 즉시 다시 달려들어 오러블레이드를 휘둘렸다.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카카카카캉!
오러블레이드가 일렁이는 어둠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찰나지간 벌어진 일은 가르딘의 감각을 찌르듯이 자극했다. 어둠 속에서 알케인의 상체가 일어서더니 부풀어 올랐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알케인의 상체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듯이 떨려왔다.
가르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우라질!”
푸아아앙!
가르딘이 신형을 뒤로 물렀다. 알케인의 몸이 터져버린 것이다. 어둠의 마력이 깃든 육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가르딘은 그 즉시 호신강기를 일으켜 날아오는 육편 덩어리를 분쇄시켰다.
“곱게 죽지! 죽기 전에 자살테러를 하다니!”
심장을 찌르고, 허리를 자르고, 목을 자르려고 했던 가르딘이 하는 말치고는 어이없기는 했다. 어찌 되었건 가르딘은 알케인을 죽였다는 것에 안심했다. 마지막 공격이 의외였지만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가르딘은 돌아서려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찌릿!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무지막지한 전투력이 느껴졌다. 가르딘이 황급히 돌아섰다. 알케인이 죽었던 어둠의 공간이 갈라지면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뿔이 드러나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서서히 형성되어 갔다.
가르딘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존재였다.
“미노타우로스!”
쿠어어엉!
가르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미노타우로스와 비슷한 존재가 사나운 포효를 내질렀다. 검게 칠한 듯한 몸을 가진 존재는 등에 날개가 달린 것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미노타우로스였다.
“감히 나를 그따위 하급 몬스터에 비교하다니!”
오오!
가르딘은 무척이나 놀랐다.
“말하는 미노타우로스! 신종인가?”
“닥쳐랏! 나는 마계의 중급 마족인 발록이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한 가르딘이 따져 물었다. 이유도 없이 마계에 있어야 할 마족이 나타난 것에 대한 의문이었다.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한 가르딘에게 발록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유를 들려주었다. 마족으로서 그 정도의 아량은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 죽을 놈에게 설명해 주는 것도 발록의 기쁨 중에 하나였다.
“계약에 의해 너를 죽이러 왔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죽인다는 말입니까?”
“그렇... 헛!”
아무래도 알케인이 죽으면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희생해 발록을 소환한 것이 분명했다.
발록은 마계의 중급 마족으로 권능을 제외하고 전투력만 보면 마왕이라고 해도 쉽사리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발록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발록킹을 말하는 것이지 일반 발톡은 마왕에 근접하지 않는다. 중간계에 마왕이 강림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수단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소환된 발록도 일반 발록 중에 하나다. 그러나 중급 마족이라고 해서 강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었다. 알케인의 능력보다 훨씬 강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가르딘은 일부러 말을 걸면서 접근을 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마족이라면 인간을 우습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가르딘의 예상대로 발록은 인간을 같잖게 보고 있었다. 말을 시키고 난 후 갑작스럽게 최강의 절초를 사용하였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서 시간 끌면 손해였다. 치사함으로 따지면 가르딘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마족을 능가하는 치사함이 있었다. 발록이 사람 잘못 본 것 이다.
-무극칠검식-3절초-무극혼섬.
슈우우욱!
혼을 베어버리는 무극칠검식의 절초가 소대가리인 발록의 머리를 공격하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발록은 별것 아닌 공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마족은 정신체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혼을 공격하는 공격은 발록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가르딘이 알고 그런 공격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본능적으로 가장 적절한 초식을 구현한 것이다. 타고난 위기관리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메...엠!
“비...겁......!”
“마족에게 그따위 말 듣고 싶지 않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
가르딘은 무극혼섬으로 발록의 정신력에 충격을 주었다.
상당한 충격을 받은 발록은 순간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소환이 이루어지고 난 후 힘을 발휘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찰나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본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건만 가르딘이 그럴 여력을 주지 않고 있었다.
발록은 가르딘을 한참이나 잘못 보고 있었다. 가르딘은 용사가 아니다. 격식이나 예의 따위는 땅바닥에 집어던진 지 오래다.
-무극칠검식-6절초-무극만검.
일검에 만검의 의지가 실렸다.
의지가 실린 일검은 수만 가닥으로 갈라졌지만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가닥가닥에 실린 가르딘의 의지는 철벽보다 더 단단하고 굳셌다. 모든 힘을 검에 실어 보냈기에 천하 의 발록이라고 해도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파앗!
만검의 위력은 발록의 육체와 영혼을 수만 개로 잘라놓았다. 잘린 영혼은 미처 다시 구현되기도 전에 강제적으로 소환되는 위기에 처했다.
수만 년 동안 산 발록이 생애 처음으로 중간계에 나올 수 있었는데, 어처구니없이 강제 소환되어 버리고 말았다. 중간계에 나와 발록이 한 것은 자신을 소개한 것밖에 없었다.
“이...런 소... 같은!”
사삭!
먼지로 화해 버리는 발록은 너무 억울했다. 이런 소 같은 상황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찬란하게 소환되어 중간계를 피로 물들이려던 계획은 시작부터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발록이 제대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강제소환 당한 것을 죽은 알케인이 안다면 미치고 팔짝 뛸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알케인의 영혼은 억겁의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해야 한다. 괜한 짓이 되어버렸다.
“후우!”
가르딘은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사실은 너무 위험했다. 발록의 능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기에 더 불안했었다. 다행히도 통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마지막에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는구나!”
악당을 대할 때는 마지막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된 가르딘이다. 다음부터는 말을 하기 전에 입을 찢고, 심장을 박살내서 다시 살아날 수 없게 태워버릴 생각이다.
가르딘은 분주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흔적들을 치워야 했다. 흔적들을 깨끗이 지우고,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처럼 만들어놓은 후 자리를 벗어났다.
“후우! 재수 없는 놈은 앞으로 자빠져도 항문이 찢어진다더니!”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다. 다마트 황자를 잡으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9서클 흑마법사라고 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쉬운 임무인 줄 알고 덤벼든 것이 화근이었다. 다 음부터는 절대 나대지 않고 조용히 지내겠다고 다짐한 가르딘이다.
“그나저나 바자바인 후작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이럴 때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누가 더 뻔뻔한가를 알려 주면 된다.
가르딘이 치열한 대결을 끝마쳤을 때 쿠베론 성의 모든 것이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쿠베론 성에 있는 불순분자들을 대부분 처리하고, 투항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정리가 다 되어갈 시점에 바자바인 후작이 쿠베론 성의 성문에 들어섰다. 늦은 밤이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별다른 출혈 없이 성을 점령한 것에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가르딘이 하자는 대로 한 것밖에는 없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쿠베론 성이 점령됐음을 알리기 위해 성의 최정점에 깃발을 꽂았다. 한 일도 없이 성에 깃발만 꽂아 모든 일이 자신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은 전혀 받지 않는 바자바인 후작이다. 이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기에 무척이나 익숙한 편인 모양이다.
쿠베론 성의 문을 열고 항복을 선언한 빌링턴 백작 이하 귀족들이 바자바인 후작을 알현했다.
“바자바인 후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대들의 뜻을 존중하네.”
“감사합니다.”
“하나, 그 동안의 지은 죄가 있으니 앞으로 러쉬 황자님의 충직한 신하가 되어 죄를 갚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네.”
“러쉬 황자님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빌링턴 백작은 남은 목숨을 연명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이어가기 위해 항복을 선언했다. 배신자들의 경우, 이전의 죄를 상쇄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자칫 불미스러운 일이 하나라도 벌어지면 모든 것이 허물어질 수 있는 상황이 된다. 그렇기에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바자바인 후작은 성의 집무실로 들어가서 빌링턴 백작과 귀족들, 병사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빠른 시일 내에 귀족들과 병사들을 통합하고 재정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병력을 합하면 총 7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된다. 이후 파스트론 공작, 발리스타 공작과 합류하게 되면 100만이 넘어간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병력을 통합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소식이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다마트 황자를 추격하러 갔다는 가르딘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놈 성격상 위험하면 혼자 가지도 않았을 텐데.”
가르딘이 위험한 일을 혼자 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수가 많거나 위험하면 혼자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혼자 쫓아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되었다.
똑! 똑!
때마침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르딘입니다.”
“들어와."
가르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서진 갑옷을 벗고,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갑옷은 다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후작이 되고 나서 제법 돈을 들여 제작한 갑옷이 고철이 되어버려 아쉽기 짝이 없다.
“다마트 황자님은?”
“죽었습니다.”
“시신은?”
“없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검술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다마트 황자를 상대하는데 굳이 죽일 필요까지 없을 것이다. 다마트 황자가 자살하지 않는 이상 오러마스터가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살하면 시체가 있기 마련이었다. 시체도 없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가르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바자바인 후작은 다시 물었다.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죄를 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유가 뭐야?”
“마력탄을 소지하고 계셨습니다."
“설마!”
“저와 같이 죽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다마트 황자가 그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저는 간신히 살았지만 다마트 황자의 몸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원하신다면 살 조각이라도 주워다 드릴 수 있습니다”
‘끄응!’
할 말 없어지는 바자바인 후작이었다. 가르딘이 아무리 대단해도 작정하고 죽으려는 자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마트 황자가 그렇게까지 독할 줄은 바자바인 후작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괜히 마력탄에 잘못 맞으면 며칠 동안 고생한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분란의 씨앗을 제거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러쉬 황자님이 슬퍼하시겠군."
“그렇습니까.”
“자네가 좀더 신경을 썼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찌 그렇게 쉽게 말을 합니까! 만약 똑같은 상황을 부단장님이 겪으면 막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역으로 화를 내는 가르딘이다. 바자바인 후작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자살테러 공격을 막는 것은 여간해서는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피곤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 본전도 뽑지 못하고 당한 바자바인 후작은 짜증이 치밀었다. 같은 후작이라 상급 귀족 모독죄도 통하지 않는다.
“이제 대가리가 다 컸다 이거지. 어디 두고 보자.”
이대로 당한 채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반드시 다음에는 몇 배로 돌려주기 위해 오늘의 일을 가슴에 새겨두었다.
바자바인 후작은 승전보를 1황자에게 알렸다. 1황자는 쿠베론 성의 점령을 크게 상찬하였다. 반면에 다마트 황자의 죽음은 슬픔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러쉬 황자는 동생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지금은 승리를 만끽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예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