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93)

   @@[ 제 6장 사이너스 국왕의 최후@@]

   버루거 자작이 기병대를 이끌고, 좁은 길을 지나 밖을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길이 상당히 험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이대로라면 절대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잡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자신이 질지도 모른다.

  ‘시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

  따라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따라잡아도 문제였다. 6천의 병력을 데려오기는 했다. 그러나 상대로 3천의 병력이었다. 이제까지 몇 배의 병력으로도 이기지 못했는데, 막상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쩨쩨하게 병력을 6천만 주다니! 한 2만은 줘야지.’

  3천을 잡는데, 2만을 달라 6배는 차이 나는 병력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아는 버루거 자작이었다. 병력이라도 많아야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솔직히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한 버루거 자작이었다. 지금까지 벌인 전투에서 얼마나 무능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버루거 자작은 잡아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잡지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결론은 잡으러가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 성과도 없다면 코워드 후작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판에 앞뒤 잴 시간도 없었다.

  “어? 저게 뭐야?”

  버루거 자작은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이미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할 병력이 눈앞에 보였다. 사이너스 국왕과의 거리 차이를 생각해 보면 만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왜 앞에서 멈추어져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전투를 벌이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까지 확인하려면 더 가까이 가야 했다.

  가르딘은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제야말로 뒤로 빠져서 후퇴할 때였다. 지금까지 죽일 만큼 많이 죽였다. 동기들도 오러 마스터가 된 판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가르딘은 동기들과 투르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제 뒤로 빠져, 때가 됐다!]

  필리인, 갈라, 유타와 투르가 몸을 서서히 뒤로 빼기 시작했다. 가르딘의 말에 따라 이제는 물러서야 할 때였다.

  가르딘은 거대한 바위덩어리 뒤로 한 개의 진법을 설치했다. 파멜라에 비해 부족할지 몰라도 진법의 원조는 가르딘이었다. 간단한 환영진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이닷! 모두 절기를 발출해!”

  “뇌전폭풍도법 제 4절초 참풍멸마”

  “광룡창법 제 6식 광룡현신”

  맹렬한 기운이 실린 공격이었다. 일정 수준의 거리를 벌리자마자 가르딘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오러 마스터가 되어 펼쳐지는 뇌전폭풍도법의 마지막 오의는 무서울 정도로 대단했다. 좀 전에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지를 진동시킬 정도로 굉장한 위력이었다. 또한 투르의 광룡창법 역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였다.

  꽈과과과과과광!

  동기들과 투르의 공격은 병사들을 향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앞으로 놓인 지면을 거세게 공격한 것이다. 절기가 지면과 부딪치자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나갔다. 앞을 가리는 뿌연 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폭격의 범위에 있던 병사들이 파편이 되어 부서져 버렸다.

  휘이이이이잉!

  폭풍 같은 일격이 휘몰아친 후 한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사라지고 나자 병사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처참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사람이 갈가리 찢겨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놈들이 없어졌다는 것에 있었다.

  “없…다!”

  연기와 함께 사람이 사라진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기사들과 병사들 모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괴물 같은 신위를 보여준 미친놈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되자 병사들은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대지에 쌓여진 시체들과, 잘려진 육편조각들. 참혹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3천의 병력 중에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고작 5명에게 당한 결과였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 싸워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었다. 병사들 대부분은 지금 벌어진 일을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환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이너스 국왕은 놈들을 찾으라고 명령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놈들을 찾기는 힘들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법스크롤을 사용한 건가?’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하여 빠져나갔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마법사가 없는 이상 역추적은 불가능했다. 현실을 냉정히 살피면 절대 이길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계속 싸워봤자 병사들만 희생이 된다.

  사이너스 국왕과 헥토르 왕국군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뒤에서 몰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타다다다다다다닥!

  사이너스 국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뿌연 먼지를 날리면서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쫓아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을 때 사이너스 국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제국군이?’

  카이로만 제국의 제국군이 자신들을 쫓아온 것이다. 말이 되지 않았다. 제국군이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트윈유니크 협곡을 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상당 시간 돌아서 이동을 해야 한다. 거리와 시간상으로 절대 쫓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오러 마스터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뒤에서 추격하는 제국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기적절했다. 하지만 문제는 제국군이 이제까지 오러 마스터들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에 있었다. 5며이나 되는 오러 마스터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제국의 오러 마스터들이라면 전쟁이 한순간에 끝이 났을 것이다.

  “이런 개 같은!”

  사이너스 국왕은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미 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국군은 말을 탄 상태다. 말도 없이 도망가 봤자 뒤를 보여 허무하게 죽을 수 있었다. 방법은 맞서 싸우는 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뿌드득!

  이를 악무는 사이너스 국왕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적군을 맞으라고 하였다.

  “적과 맞서 싸워라!”

  헥토르 왕국 병사들은 뒤로 돌아 병기를 곧추세웠다. 1천 5백의 병력으로 6천의 병력을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지친 병사들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고 있었다. 수적인 열세에 체력까지 고갈되었으니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는 것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환영진 안에 들어간 가르딘과 동기들, 투르는 한숨을 돌렸다. 특히 동기들은 지금 운기행공을 해주어야 하는 상태였다. 오러 마스터가 되었으니 몸 안에서 형성된 오러를 차분하게 관조하여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필리언, 갈라, 유타는 환골탈태를 하지는 않았다. 전번 오러 볼을 먹었을 때 이미 몸의 골격이 오러 마스터에 버금가도록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몸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동기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러 마스터가 될 수 있는 한계의 극복이었다.

  “내가 주변을 지킬 터니 오러 심법을 운용해. 투르 너도.”

  가르딘은 환영진 안에는 다크호스가 같이 있었다. 다크호스는 신기하게 어둠 속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단 길들어진 다크호스는 누구보다 충성스러웠다. 야생의 기운을 한껏 품은 다크호스답지 않았다. 라이젠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 투르가 운기삼매경에 빠져들자 가르딘은 환영진을 돌아보았다. 환영진을 다시 돌아본 이유는 환영진이 완벽하지 않아서였다. 진법을 설치하는 진법 가는 진법을 밖에서는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볼 수 있도록 설치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지금 가르딘이 펼쳐 놓은 환영진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실수를!”

  진법을 잘 펼쳐보지 않았던 가르딘이 진법의 한 축을 잘못 설치한 것이다. 환영진은 기본적인 진법 중에서 약간 어려운 정도의 수준이다. 진법에 대해 조금만 공부하면 실수하지 않을 진법을 실수했으니 가르딘으로서는 상당히 민망한 일이다.

  “그렇다고 저 축을 건드릴 수도 없고.”

  문제는 밖을 보게 만드는 진법의 축이 환영진의 중심축이라는 것에 있었다. 중심축을 괜히 건드리면 환영진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사실 밖에서 볼 수 없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가르딘이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사이너스 국왕 때문이었다. 되도록 사이너스 국왕을 생포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국왕을 생포하여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국왕이 죽으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자포자기 아니면 결사항전을 할 수 있다.

  가르딘은 밖을 보면서 사이너스 국왕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했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획한 것이 마지막에 와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파멜라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지.”

  진법을 가르쳐준 스승이 가르딘이었다. 제자가 청출어람했다고 하지만 실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버루거 자작은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게 웬 횡재냐!’

  도망쳐서 헥토르 왕국으로 사라졌을 줄 알았던 사이너스 국왕이 눈앞에 있었다. 병사들 중 대부분이 죽어 있고, 지쳐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슨 이유로 공격을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이너스 국왕만 사로잡으면 코워드 후작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어서 사이너스 국왕을 잡아라! 저놈을 잡는 놈에게 내가 친히 포상을 내려주마!”

  버루거 자작은 병사들의 뒤에서 소리만을 질렀다. 숫자가 훨씬 많다고 해도 직접 나가서 싸우지는 않는다. 괜히 엄한 칼에 맞을 수 있는 것이 전투였다. 안전지대를 확보한 버루거 자작은 느긋하게 전투를 기다렸다.

  채채채챙! 차차창!

  헥토르 왕국군의 저항이 만만치는 않았다. 지쳐 있다고는 하지만 모두 독기를 품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그러나 수적인 차이가 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체력을 보존한 병사들이 더 강한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실전에서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헥토르 왕국의 병사들이 당하고 있었다.

  “푸우우욱! 커어억!”

  일순간에 병사들이 쓰러져 나갔다.

  사이너스 국왕은 믿을 수가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미친 오러 마스터들이 방향을 가로막고 때마침 제국군이 쳐들어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면 오히려 허탈해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사이너스 국왕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병사들이 죽어가는데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서 적병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짐이 여기 있다! 어서 와라!”

  제국군을 향해 소리를 지른 사이너스 국왕이었다. 그는 겁을 상실한 것처럼 용감하게 싸웠다. 일반병사들보다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검보다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이너스 국왕이었다. 오기와 집념만으로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죽어나간다. 사이너스 국왕의 옆으로 다가온 다르크 부단장이 국왕을 보호했다.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어디로 간단 말이냐! 나는 여기서 끝까지 싸우겠다!”

  사이너스 국왕의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러는 가운데 병사들은 걔속 죽어갔다. 수적인 열세를 끝내 이기 못했다. 너무 쉽게 전투가 끝이 나고 있었다. 

  “안돼!”

  “푸우욱! 커억!”

  사이너스 국왕의 등 뒤를 가격하려던 병사의 창을 다르크 부단장이 막아서다가 가슴을 찔렸다. 창이 한번 박히자 그 주변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창을 찔러 넣었다. 다르크 부단장이라고 해도 인간이었다. 창을 수십 발이나 맞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르크 부단장! 이놈들!”

  수하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다 죽었다. 사이너스 국왕은 분노하여 검을 휘둘렀다. 검에 맞은 병사 한 명이 죽어나갔다.

  “허억! 허억!”

  병사들 몇 명 죽인 사이너스 국왕은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혼자서 많은 병사들은 이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주 극히 짧은 순간에 사이너스 국왕의 시야에 병사들의 주검이 들어왔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느렸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그 앞으로 쥐새끼처럼 웃고 있는 놈이 모였다. 바로 버루거 자작이었다.

  “놈을 생포하라!”

  버루거 자작이 사이너스 국왕을 생포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사이너스 국왕을 에워싸지 시작했다.

  “네놈들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사이너스 국왕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사로잡혀서 굴욕을 당하며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명예로웠다. 대륙을 지배하는 패왕이 되려던 사이너스 국왕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뿐이었다. 손에 쥔 검을 강하게 쥐었다. 방향은 적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과 배 사이의 정중앙이었다.

   “푸우우욱! 크윽!”

  털썩!

  “대 헥토르 왕국…을 위…해!”

  검을 배에 박은 사이너스 국왕은 한줄기 눈물과 함께 차디찬 바닥에 쓰러졌다.

  “안…돼!”

  버루거 자작이 소리를 질렀다. 설마 스스로 자살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버루거 자작으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스스로 검을 자신의 배에 찔러 넣는단 말인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다잡은 고기가 바로 앞에서 사라져 버린 꼴이었다. 살아 있을수록 먹잇감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은 더 컸다.

  “어쩔 수 없지. 사이너스 국왕의 시신을 얻은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시신을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 버려.”

  헥토르 왕국군의 병사들은 필요 없었다. 생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생포한 병사들을 다시 데려가는 것도 번거로울 뿐더러, 이제까지 고생시킨 놈들을 살려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로잡힌 헥토르 왕국군을 처리한 버루거 자작은 사이너스 국왕의 시신을 챙기고, 다시 제국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썰렁한 황야에 남겨진 것은 비릿한 혈향을 풍기는 시체들 뿐이다.

  가르딘은 환영진을 풀었다. 진법 안에 있어도 밖에서 벌어지는 기운의 변화는 확인할 수 있었다. 헥토르 왕국과의 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를 때쯤에 가르딘이 나왔다. 가르딘은 바위기둥 뒤에서 사이너스 국왕이 자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오자마자 검을 들이대도, 배를 찔렀기에 가르딘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가르딘은 약간 허탈했다. 사이너스 국왕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가르딘도 예상하지 못했다. 계획이 약간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또한 버루거 자작의 능력 없음을 탓했다.

  “잡아서 요리하고, 먹여주기까지 했는데 씹지를 못하다니!”

  저런 놈을 수하로 둔 코워드 후작이 불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비슷한 것끼리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코워드 후작이나 버루거 자작이나 거기서 거기인 고만고만한 놈들이라는 말이었다.

  괜히 심술이 난 가르딘이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운기삼매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달콤하겠지.”

  운기행공은 지겹고 반복적인 일이다. 항상 즐겁게 할 수는 없다. 가부좌를 틀고, 자세를 잡아서 숨을 반복적으로 정확하게 쉬며, 무아지경에 드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다만 일단 무아지경에 들면 무척이나 편안하다. 또한 일정경지를 넘어서는 순간은 위험하면서도 경계를 넘어서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때는 황홀감 그 자체가. 왜 사람들이 마약을 하겠는가! 세상의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약에 취해 한순간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현재 동기들은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얼굴이 마치 주신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운기가 30분 정도 더 이루어졌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기운이 12번의 소주천을 이루어 대주천에 이른다. 큰 강물을 작은 물줄기로 나누어 몸 안에 완벽하게 자리 잡도록 만드는 상태였다. 자리 잡은 물줄기는 근원적인 힘이 되어 언제든지 다시 큰 강물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번쩍!

  눈을 뜬 필리언, 갈라, 유타의 안광이 대기를 압도했다. 불을 뿜는 듯한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가부좌상태에서 풀고 일어난 동기들의 입가에는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원하던 경지에 올라섰다. 대륙 역사상 한꺼번에 3명의 오러 마스터가 탄생한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동기들 모두 검을 꺼내서 기운을 주입해 보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다. 세상을 믿지 못하는 동기들은 자신들의 실력조차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믿지 않는 습관을 지녔다.

  부우웅! 우우웅!

  청백색의 타는 듯한 기운을 가진 오러가 완벽한 검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원래의 검에서 1미터나 되는 길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다!”

  “우리가 드디어 오러 마스터가 됐다!”

  “이거 우리 엄청 세진 것 아니냐! 이제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는다!”

  오러 마스터가 되니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올라간 실력보다 자신감은 더 올라간 것 같다. 

  부우웅! 우우웅! 부우우우! 우우웅! 부우웅! 우우웅!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켰다가, 넣었다가, 다시 생성시켰다가 넣었다가를 반복하는 동기들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나머지 장난감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평생을 수련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기사들에게는 상당히 싼 티 나는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쯧쯧쯧!”

  가르딘이 혀끝을 찼다. 다 큰놈들이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모습은 천진난만한 것이 아니라 징그럽다. 더 이상 두 눈 뜨고, 그 모습을 봐주기에는 비위가 상당히 약한 가르딘이었다. 1년 전에 먹은 돼지 수프의 건더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넌 또 왜 그래!”

  “우리가 모처럼 환희의 순간을 즐기는데! 뭐 하는 짓거리야!”

  “이제 우리도 오러 마스터다!”

  도리! 도리!

  가르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투르를 가리켰다. 투르의 광천패왕신공의 화후가 급속도로 상승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 완벽한 갈무리가 되어 더욱 강해진다면 누구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무적의 괴물이 될 것이다.

  “고작 몇 개월 수련한 투르의 기운이 저 정도다. 평생 검만 수련한 놈들이 이제 막 벽을 넘었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다.”

  “뭐!”

  “이런 개 같은!”

  “입이 뚫렸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다!”

  환희의 순간에 찬물을 왕창 부어 버린 가르딘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르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투르야 기운을 한번 끝가지 사용해 봐라!”

  “예! 영주님!”

   투르는 가르딘의 말에 따라 광천패황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하였다. 내공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 보았다. 투르가 극성의 내공을 사용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이뉴는 금강지체이기 때문이다. 극강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공을 받쳐주는 외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초극강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내공과 외공을 같이 수련해야 한다. 그런 반면에 투르는 이미 금강지체의 몸을 타고나서 내공만 수련해도 자연스럽게 상승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강의 몸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었다. 오성만 제대로 받쳐주었다면 스필언과 미토스를 능가하고도 남았다.

  “크아아앙!”

  야수가 포효하는 듯한 기운이 투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일순간에 터져 나오는 기운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광폭했다. 마치 드래곤피어와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오러 피어보다 강하잖아!’

  ‘이 괴물 같은 놈!’

  투르의 성장속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자 필리언, 갈라, 유타는 기가 죽었다. 가르딘의 확인사살이 완벽하게 먹혔다. 효과가 엄청났다. 금세 솟구쳤던 자신감이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간다. 가르딘은 확실히 사람 약올리는 데는 타고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럼 갈가나.”

  승리의 만족감을 만끽하며 돌아서려고 한 가르딘이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는 동시에 눈을 맞추었다. 이대로 가르딘에게 끌려다니기에는 대가리가 너무 컸다.

  “가긴 어딜 가!”

  “우리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아!”

  “이제 우리도 오러 마스터다! 너와 동등한 위치라는 말이지.”

  찌릿!

  가르딘과 동기들 간의 불꽃이 튀겼다.

  “지금 감히 반역하는 거야!”

  “반역은 무슨 한판 떠보자는 거지.”

  “그럼 1대 1인가!” 

  “먼저 오러 마스터에 올랐으니 3대 1 어때!”

  “그런 비겁한!”

  “비겁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 다지지 않는 게 세상사 이치 아니겠어! 이기면 장땡이라며!” 

  이기면 뭐든지 용서가 된다. 그것이 가르딘과 동기들의 평소지론이다.

  가르딘이 즉시 투르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실력을 보이면 되겠지만 투르를 발판 삼아 수적인 열세를 만회해 보려는 가르딘이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는 향상된 실력을 점검해 보고 싶었다. 헥토르 왕국군의 경우, 병사들과의 전투라 제대로 된 실력 검증이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가르딘은 이미 완성된 오러 마스터였다. 실력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상대를 알아야 따라가서 동등해질 것이 아닌가!

  “이것들이 치사하게! 좋아 덤벼!”

  “오늘 여기는 계급이 없다!”

  “오랜만인데! 계급장 떼고 한판 뜨자는 말이야!”

  킹덤나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가르딘과 동기들은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맞짱을 떴다. 일대일 대결에서 이기는 놈이 대장이 되기로 했지만 서로의 실력은 엇비슷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번 대결을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물론 가르딘의 실력이 갑자기 상승한 이후에는 상대가 되지 않기에 맞짱을 뜨지는 않았다.

  “간닷!”

  “와랏! 이놈들아! 오러 마스터에도 격차가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보여주마!”

  가르딘과 동기들, 투르가 서로 모여 실력을 점검했다. 대결의 양상은 엇비슷하게 진행이 되어 갔다. 가르딘의 실력이 확실히 필리언, 갈라, 유타보다 높았다. 일부러 보여준 수준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대결은 오러 블레이드가 난무했다. 친구들 간의 우정을 확인하는 가벼운 대결은 벌어지지 않았다. 동기들의 최선을 다한 대결에서 가르딘이 갑자기 뒤로 빠졌다. 그러더니 다크호스를 타고 도주했다. 동기들은 설마 도망갈 줄 몰랐는지 서둘러 다크호스를 탔다.

  “이놈아! 비겁하게 도망이냐!”

  “내가 미쳤냐! 1대 1도 아니고, 3명을 무슨 수로 이겨.”

  가르딘의 도주로 대결은 싱겁게 끝이나 버렸다. 대신 질리지 않는 추격전과, 서로의 안 할 말 못 할 말 대결은 이어졌다.

  버루거 자작이 코워드 후작 제국군 진영에 도착했다. 버루거 자작이 데려간 병사들 대부분이 무사히 돌아왔다. 이제까지 몇 배의 전력을 가지고서도 피해를 누적시킨 전투와는 확연히 다른 엄청난 전과였다. 가장 큰 전공은 사이너스 국왕을 죽인 일이었다. 코워드 후작도 버루거 자작이 사이너스 국왕을 죽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잡았나?”

  솔직히 궁금했다. 자신은 대군을 데리고 와서도 협곡을 놓고 쩔쩔매고 있었다. 버루거 자작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다.

 코워드 후작의 물음에 버루거 자작은 한껏 자신감이 넘치는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사실과는 다르게 말이다.

  “좁은 길을 지나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놈들이 꾸물거리는 사이에 제가 기습을 해서 사이너스 국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대단한 성과를 올렸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코워드 후작님의 탁월한 전술의 승리입니다.”

  다른 것은 뛰어나지 못해도 아부 하나는 압권인 버루거 자작이었다. 버루거 자작의 입에 발린 말에 또 좋아라 하는 코워드 후작이었다. 둘 다 속이 뻔히 보이ㅤㄱㅚㅆ었다.

  “듣기 싫지는 않은 말이군.”

  “저는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알겠네, 내 자네의 노고는 잊지 않고 보답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코워드 후작님!”

  코워드 후작은 우선 사이너스 국왕의 죽음을 헥토르 왕국 진영에 알릴 생각이었다. 놈들의 수장이 죽었으니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항복하게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와 카이로만 제국 황궁에 소식을 전해야 했다. 가르딘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먼저 소식을 전해야 한다. 자신이 사이너스 국왕을 죽이고, 헥토르 왕국군을 혁파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협곡으로 사신을 보내 사이너스 국왕의 죽음을 알려라.”

  코워드 후작의 명령에 따라 사신이 트윈유니크 협곡으로 보내졌다.

  트윈유니크 협곡에서 비장한 각오로 제국을 맞이하고 있던 멜버른 후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쟁에서 사신을 죽이는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할 경우 전쟁이 끝나도 공분을 살 우려가 있다. 멜버른 후작은 처음에 왜 사신이 오는지 알지 못했다. 사신이 전한 말을 멜버른 후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거리와 시간상으로 제국군은 절대로 국와 폐하를 죽일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해 버리려는 멜버른 후작의 앞으로 사신이 갑옷을 내밀었다.

  비틀!

  멜버른 후작은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것은 헥토르 왕국의 국왕만이 입게 되어 있는 갑옷이었다. 이 갑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사이너스 국왕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갑옷을 위조할 수는 없다. 갑옷에는 헥토르 왕국 특유의 문장과 표식이 존재했다.

  ‘정…말이란 말인가!’

  사이너스 국왕의 죽음.

  헥토르 왕국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코워드 후작님께서는 항복을 권유하셨습니다. 항복하신다면 대륙의 포로협정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륙협정이란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한 협정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일 중에서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일들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협정서다. 그중에 포로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조항의 내용은 투항한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멜버른 후작의 기운이 변했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강력한 살기를 머금었다. 사이너스 국왕은 헥토르 왕국의 국왕이다.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국군이 결국 헥토르 왕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더군다나 이대로 항복하게 되면 헥토르 왕국은 카이로만 제국의 손아귀에 무참히 유린당할 것이다. 멜버른 후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헥토르 왕국에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국군의 사신이 물러나려고 했다. 멜버른 후작이 기사들에게 눈빛을 주었다.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제국 사신이 갑작스러운 기사들의 움직임에 겁을 먹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원하는 답을 주마. 이놈들의 머리를 잘라 놈들에게 전해주어라.”

  “사…신을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시끄럽다. 감히 국왕 폐하를 시해하고 무사하리라 생각했느냐!”

  “어서 이놈들의 수급을 잘라내라.”

  기사들이 사신들에게 검을 들이댔다. 사신들이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했지만 기사들의 검에는 사정이 없었다.

  “여기서 벌어진 일은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하지만 제국군이 이대로 있을까요! 어차피 사실은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절대 놈들은 국왕 폐하를 시해할 수 없는 거리다! 또한 놈들이 내세우는 것이 가짜라고 우기면 된다. 여기에 갑옷이 있는 이상 놈들은 증명할 것이 없다.”

  코워드 후작의 실책이었다. 사신을 보내며 사이너스 국왕의 갑옷까지 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코워드 후작의 안이한 상황판단으로 인해 멜버른 후작의 독기가 잔뜩 올라가게 되었다. 

 샤이닝윙기사단의 제나스에게 멜버른 후작이 서신을 작성해 주었다.

  “왕국으로 돌아가서 빌리진 후작에게 전해라.”

  멜버른 후작이 빌리진 후작에게 서신을 보내는 이유는 현재 헥토르 왕국의 재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면 시간을 버는 동안 최대한 헥토를 왕국이 필요한 일을 해줄 것이라 여겼다. 헥토르 왕국이 직면한 어려운 사정을 해결하기에는 사이너스 국왕의 왕자가 너무 어렸다. 이제 막 10살이 된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빌리진 후작 이외의 귀족들이 들고 일어서면 헥토르 왕국은 자중지란에 빠질 수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에 서로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정권다툼을 한다면 헥토르 왕궁은 대륙에서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빌리진 후작, 뒤를 부탁하도!’

  멜버른 후작은 빌리진 후작의 능력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신을 보내는 것은 그밖에 해답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이너스 국왕이 살아 있었다면 최악의 사태는 어떻게 해서든 막았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멜버른 후작은 무엇을 선택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하지 못했다. 결국 주신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멜버른 후작의 선전포고로 사신의 수습이 협곡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헥토르 왕국은 절대 제국군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결사항전의 의지가 보였다. 이로 인해 죽어가든 헥토르 왕국의 사기가 진작이 되었다.

  코워드 후작은 사신의 머리가 잘리면서 체면이 손상되었다. 자신이 자신감 있게 보낸 사신이 죽었으니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또한 놈들이 항복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결사항전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놈들! 헥토르 왕이 죽었다고 놈들에게 소리를 질러라!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왕이 죽었는데, 무엇을 보고 전쟁을 하겠는가! 코워드 후작은 끈질기게 왕이 죽었음을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헥토르 왕국군에게는 결사항전의 각오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멜버른 후작은 병사들에게 제국군이 헥토를 왕국군을 겁내서 비겁한 수단을 사용한다고 말을 해버렸다. 이로 인해 헥토를 왕국 병사들은 제국군에 대한 반감이 훨씬 더 상승했다.

  코워드 후작이 사이너스 국왕의 시신까지 앞으로 내세웠지만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갑옷까지 벗겨져 있어서 사이너스 국왕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코워드 후작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한껏 고조되었던 성취감이 모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놈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국을 침범한 헥토르 왕국을 고이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개 같은!”

  하는 일마다 모두 어긋나 버린다. 전쟁은 그에게 하나도 맞지 않았다. 생각한 대로 될 것 같았는데 안 되자 짜증은 증폭되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고작 3만도 되지 않는 놈들의 병력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놈들!”

  코워드 후작도 병사들의 희생을 더 이상 좌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너무 많은 피해를 본 상황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이겨도 이긴 전쟁이 되지 않았다. 20만 대군 중에 남아있는 병력이 8만 명 정도였다. 협곡을 올라가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가 되면 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을지 몰랐다. 이렇게 되면 공적을 쌓아도 무능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방법은 놈들의 협곡을 앞뒤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고사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가르딘의 뜻대로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다.

  “발키리 영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뭐야!”

  비린스 자작이 짜증이 난 코워드 후작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전투를 빨리 종식시키려면 아무래도 발키리 영주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내 입으로 그딴 소리를 하란 말이야! 그리고 발키리 영주가 몸이 나았으면 지금이라도 여기 왔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냐!”

  “제 말은 병사들이라도…”

  발키리 영주가 안 된다면 병사들이라도 원조를 받아서 해결을 보는 게 어떠냐는 비린스 자작의 의견이었다. 맨 처음에 왔을 때는 지쳐 있을지 몰라도 지금쯤이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을 것 같았다. 2만의 병력이 여기로 와주면 전투는 조금 더 손쉬워질 것으로 보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발키리 영주가 자신은 출전도 못하면서 병사들을 보내줄 것 같아! 지금까지 병사들을 원조해 주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전쟁의 공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지위권자다. 지위권 자 없이 병사들만 주었을 경우 상대방의 공적을 올려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황궁에서 병사들이 뛰어나다고 알아주지는 않는다.

  코워드 후작이 보기에 가르딘 영주는 공을 탐하는 자신과 같은 과의 인물로 보았다. 가르딘의 연기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반증이다. 아직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코워드 후작은 절대 가르딘에게 먼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온 가르딘은 동기들과 돌아와서 막사에서 쉬고 있었다. 병자가 멀쩡히 일어나서 너무 나돌아다니면 의심받기 딱 좋았다. 병사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움직인 것도 괜한 소문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대부분의 병력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급조했던 1만의 병력은 무너진 공사에 동원이 되어 있었다.

  돌아온 가르딘은 정찰병에게 전방의 소식을 들었다. 소식은 좋지 않았다. 장기전을 각오하며 코워드 후작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도와주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무능한 놈 밑에 있는 사람들만 죽어나가는군.”

  적당히 피해를 봤으면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피해가 너무 컸다. 전쟁을 이런 식으로 수행하는 놈이 후작이라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그놈에게 병력을 원조해 줬다가 발키리 영지군의 손실만 더 커질 수 있었다. 가르딘이 보기에 원조해 주는 병력을 칼받이로 쓸 확률이 컸다. 코워드 후작은 그렇게 하고도 남는 인간이었다.

  “그것보다 이것들이 이제 대가리 컸다고 반항하면 어떡하지?”

  이유가 어찌되었던 필리언, 갈라, 유타도 오러 마스터에 이르렀다. 동기들은 원래 검술과 경험면에서 스필언이나 미토스보다 뛰어났다. 오러 마스터에 올라서면서 이미 초급의 단계는 지났다는 말이다. 내심으로는 같이 여기서 보내고 싶지만, 오러 마스터가 된 놈들을 수하로 부리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여기서 웃고 떠들며, 제멋대로 사는 것도 좋겠지만 동기들을 위해서는 더 높은 곳으로 보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20년 넘게 같이 해온 녀석들이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가르딘이 상념에 가득 차서, 고민할 때 동기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요 근래 보지 못했던 어딘지 이상한 가르딘의 표정을 보며 필리언이 한마디 했다.

  “생각도 없는 놈이 생각하는 척은, 그래봤자 머리에 든 게 없는 네놈이 대단한 것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잖아.”

  “위대한 영주님이 지금 심상수련 중이다.”

  “위대한 것은 네 위장이고.”

  “방귀 하나는 위대하다니까!”

  살인방귀 가르딘하면 킹덤나이트시절부터 알아준다. 수업중에 반 안에 있던 모든 견습기사들을 실신시켰다는 전설까지 전해진다. 

  “그럼 너희들 뜻대로 껴볼까?”

  움찔!

  필리언, 갈라, 유타 모두 밖으로 나갈 준비를 취했다. 가르딘의 방귀를 한번 마시면 코가 썩다 못해 부식돼서 다시 사용하려면 하루는 족히 걸린다. 사람은 어느 정도 맡아 보면 내성이 생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가르딘의 방귀는 내성이 생기기는커녕 매번 색다르게 강하다.

  필리언이 분위기 전환을 노렸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

  “별 거 아냐.”

  “말해 봐. 인마! 괜히 뜸들이고 있어.”

  “너희들은 이대로 만족할 거냐?”

  “그게 뭔 소리야?”

  “너희들이 바라마지 않던 오러 마스터가 됐잖아. 이대로 변방 영지에서 썩을 생각이냐는 말이다.”

  피식!

  가르딘의 뜻밖의 말에 동기들은 피식거리면 웃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고민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언제 부귀영화를 원했냐! 너를 따라올 때부터 그런 것은 생각도 안 했다!”

  “우릴 어떻게 보는 거야!”

  “의리하면 우리들 아니냐! 넌 걱정 마라! 네가 지겨워 할 때까지 남아 있을 테니!”

  “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

  가르딘이 통쾌하게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을 호쾌하기까지 했다. 동기들의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역시 미친놈들이야!”

  “너도 미치기는 마찬가지지!”

  “세상에 명예와 권력 싫다고 하는 놈들이 정상은 아니지.”

  역시나 끼리끼리 놀고 있었다. 코워드 후작 진영과는 전혀 다른 인간 군상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들 간의 존재하는 의리였다. 미친놈들끼리 의리로 뭉치니, 그 힘은 상상초월이었다.

  가르딘의 입가는 즐거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녀석들이기에 친구가 되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친구가 되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동류는 첫눈에 알 수 있다. 과연 본능은 무서운 능력이었다.

  “네놈들 때문에 나까지 미친놈 되잖아!”

  “시끄러! 너 때문에 전염돼서 그런다!”

  가르딘은 동료들과의 티격태격이 오늘만큼 즐거운 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만큼 즐거운 날은 술도 한잔해야 하는데.”

  “전쟁 끝나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내일 해가 뜰 때까지 먹고 죽는 거다!”

  “즐거운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료로 남겼으면 한다!”

  가르딘은 즐거운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은근슬쩍 서류를 꺼내 놓았다. 서류는 이전에 동기들이 봤던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한껏 고조되었던 분위기에 아이스 냉차를 부은 듯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너 아직도 이거 가지고 있었냐?”

  “당연.”

  “우리를 믿는다며.”

  “믿지.”

  “그런데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냐! 인정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놈아!”

  “믿는 것과 서류는 전혀 다르지.”

  “다르긴 뭐가 달라! 그래 좋다! 이번엔 또 뭐냐?”

  “그럴 줄 알고 여기다가 적어 놨지.”

  가르딘이 보여준 서류는 동기들과 술 먹으면서 작성을 했던 귀족서약이었다. 그 당시에 얼렁뚱땅 넘어갔던 서류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동기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가관이었다.

  오러 마스터가 되어도 발키리 영주의 발에 고분고분 따르며, 어떤 반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약 이 사실을 어기는 즉시 귀족서약을 어겼다는 것을 대륙에 밝히는 동시에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아내들과 자식들에게 꼬질르겠다. 

  차라리 귀족서약이 까발려지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뒤에서 아내 몰래 했던 일들을 아내와 자식들이 안다면 그 날로 가정파탄이다.

  “잔인한 놈!”

  “무서운 놈!”

  “가정 파탄범!”

  우정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가르딘과 동기들 사이였다. 동기들은 절대 사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악마의 수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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