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영지 발전(군사력편)@@]
“어이쿠! 내 딸이 그새 더 컸구나!”
이제 8살이 된 브리안이었다. 한참 자랄 때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금세 3센티나 더 컸다. 브리안의 경우 벌모세수의 영향으로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큰 편이다. 계속 자라면 너무 클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들 정도다.
가르딘은 이제부터 건강을 위한 수련을 조금씩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라이나가 공부 이외에는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데, 자기 방어수단 정도는 필요했다. 물론 지금의 브리안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강하다.
아이들한테는 재앙과 같은 존재가 바로 브리안이었다.
이곳에 온 지 1년 정도가 되자 발키리 영지 내 아이들 모두 크레이지 프린세스(미친 공주)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을 정도다. 한번 돌면 아이들에게는 악마나 마신에 버금갔다. 가르딘에게는 천사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정말 보는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자! 아빠 하는 것 잘 따라서 해봐!”
“응!”
“이것은 최소한 동작으로 최대한 빠르게 내뻗는 수법이야!”
가르딘이 가르치는 것은 권격술 중에 하나인 무영신권이었다. 중원에 무영권마라고 불리는 기인이 있었다. 그는 단 한 초식의 권법으로 권마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무영권마가 펼쳐내는 권법을 일권 이상 받아었다. 무영권마가 펼쳐내는 권법을 일권 이상 받아낸 사람이 극히 적을 정도로 그의 권은 빠르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강호의 호사가들이 말하길.
일단 뻗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권은 이미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있다!
이런 말이 나돌 정도로 무영권마의 권격술은 가히 뇌전과 같았다. 무영권마의 권격술인 무영신권의 특징은 바로 최소한의 움직임이다. 무영권마는 사람이 최소한의 움직임을 무한 반복적으로 수련한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무영권마의 아집과 같은 생각은 수련으로 이어졌고, 그러한 생각은 사실로 드러났다.
가르딘이 간단한 동작으로 가르쳐주는 권격술은 하나의 동작으로 깔끔하게 이어진다.
발에서 시작해서 무릎, 허리, 그리고 등을 타고 뻗어나가는 어깨근육의 움직임까지 모두 일직선으로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한번 움직였을 때 모든 근육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동작을 취했다. 말로는 쉽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천재라는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재능이었다.
“이얍!”
가르딘의 동작을 따라하는 브리안의 모습은 앙증맞음 그 자체였다.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일견 무섭기까지 했다. 가르딘이 취한 일권의 움직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의 맥을 정확히 짚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르딘의 가르침이 뛰어난 편이기는 해도 브리안이 뛰어나지 않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딸 잘하네!”
“나 잘하는 거야!”
“그럼 누구 딸이라고!”
가르딘은 가르치는 데는 뛰어나도 딸의 뛰어난 점을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자신의 딸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가르딘의 생각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꾸준히 연습해라. 물론 엄마 보는 데서는 안 되는 것 알지.”
“응! 엄마한테는 비밀로 할게!”
“내 딸은 말도 잘 알아듣고 예쁘기까지 하네!”
딸과 오붓하고 놀고 있는 가르딘은 오늘 같은 날만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르딘이 이곳에 부임하고 난 후 발키리 영지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발전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변화의 물결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상태였다.
가르딘은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진행한 일들이 점점 부풀어 올라 예상을 벗어나니 어쩔 수 없었다. 당겨진 활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았다.
우선 도자기 생산으로 여유자금이 생겨났다. 그 여유자금으로 노예들을 사들이면서, 한편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파멜라는 가르딘과 협의한 후 계획한 일을 실행해 나갔다.
발키리 영지 내에 파견된 행정관들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별해서 합의를 한 후 학교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파멜라의 경우 다른 행정관들과 다르게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하기에 그에 맞는 직책으로 올려주어야 했다.
가르딘은 파멜라의 직책을 시종장으로 임명을 했다. 시종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영주의 저택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겠지만 실제적으로는 영주가 없을 때 대리영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량권을 가진 막강한 직책이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돈은 전부 도자기를 판돈으로 충당을 했다. 도자기의 경우 귀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대륙의 귀족들에게 처음 200개를 팔면서 유행이 번져 나갔다.
유행에 민감한 귀족들이 도자기를 사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급증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가르딘은 점차적으로 도공들을 늘렸고, 기술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도공에게는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그렇기에 도자기도 세분화가 되어 그 상품의 질이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분류가 되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기의 질에 따라 가격도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수량을 늘려도 몬타나의 예상대로 떨어지기는커녕 더 올라가는 실정이었다. 가르딘에게는 돈벼락이 떨어진 일이었다. 예상보다 좋은 호응으로 인해 경제력이 생각보다 높아졌다
두 번째로, 고구마가 생산이 되었다. 일단 씨를 얻어내어 품종을 밭에 심었다. 남는 밭이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컸기에 생산량이 대단히 많은 편이었다.
고구마는 예상대로 어느 밭에서도 잘 자랐다. 더군다나 기초적인 거름을 만들어서 밭에 뿌리니 생산량이 두 배 이상 높아지고 있었다. 고구마라는 것에 생소했던 영지민들도 한 번 그 맛을 보니 상상 이상으로 호응이 좋았다.
파이트너 상단에 고구마를 보여 주었다. 몬타나는 지난번 도자기 계약 성공으로 인해 파이트너 상단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고구마의 효능과 가치를 알아본 몬타나는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어차피 독과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몬타나와 가르딘 둘 다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영지 내에 풍족하게 돈이 융통되었다. 돈을 쏟아 붓기 시작하니 영지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르딘이 돈을 밝히는 편이지만 많은 돈을 독식하는 체질도 아니었다.
그저 라이나와 브리안이 부족하지 않게 생활하는 것 자체로 만족했다. 더군다나 가르딘도 돈을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방탕하게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라이나로 인해 재탄생된 가르딘은 달랐다.
돈을 쓸데는 사용했다. 파멜라가 사용하는 돈의 출처는 모두 가르딘이 관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파멜라도 가르딘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영지의 발전을 외부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도자기와 고구마 모두 파이트너 상단과의 협조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에 비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발전한 만큼 제국에 내는 세금도 많을뿐더러 주변 영지가 도움을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런 뒤치다꺼리는 딱 질색인 가르딘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비밀로 하면서 이대로 조용히 살기로 한 가르딘이다.
가르딘은 고트의 결혼식이 있는 장소에 초대되었다.
늦깎이 결혼식을 올리는 고트였다. 나이 40에 올리는 결혼식이니 엄청 늦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임자가 없어서 혼자였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결혼하는 여인이 고작 17살이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여자아이와 결혼한다는 말이었다.
발키리기사단 대부분의 기사들은 도둑놈 심보라는 말을 공공연히 사용했다. 그렇다고 고트가 일방적으로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둘이 좋아 죽으려고 하는 사이였다. 만난 지 1년 만에 급격하게 가까워졌고, 부모의 허락까지 받은 상태였다.
가르딘도 발키리기사단 내의 경사이기에 축하를 해주러 나왔다. 가르딘의 뒤로 필리언, 갈라, 유타도 같이 따라왔다.
가르딘은 저 앞에서 달려오는 고트를 보았다. 결혼식 예복을 차려 입으니 기사정복을 입을 때와는 달라 보이는 고트였다.
“결혼을 축하하네.”
“영주님이 직접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내 기사단의 기사가 결혼하는데 당연히 와야지. 그런데 자네 능력이 좋구먼!”
가르딘이 한쪽에서 예복을 차려입은 고트의 신부 루이안을 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아버지뻘과 결혼하는 꼴이었다. 남들이 다 도둑놈이라고 할 때 가르딘은 고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해주었다.
“사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능력이 좋아! 자네의 능력만큼 기사단에서도 잘 해내리라 믿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기하는데 가르딘이 칭찬하자 영광스러운 고트였다. 반면에 그 옆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가 가르딘에게 핀잔을 주었다.
“위선자!”
“내가 뭘?”
“만약 네 딸이 저런 나이 차의 사내와 결혼하면 넌 어떨 것 같으냐?”
“뭐! 어떤 개자식이 그런 자식은 살아 있는 것이 지겹게 만들어 주어야지. 썩은 눈을 가진 놈은 세상을 볼 필요도 없어! 그 자리에서 눈을 뽑고, 사지를 잘라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부르르르!
가르딘이 다른 일에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지만 가족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옆에서 듣고 있는 고트는 등골이 오싹했다. 가르딘이 하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가르딘의 몸에서 압도적인 살기가 생겨났다가 사라졌었다.
떨고 있는 고트에게 가르딘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에게 한 말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예… 영주님!”
신경 쓰지 말라고는 하지만 엄청 신경 쓰이는 고트였다.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인가!
가르딘은 자신의 딸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하면 능력 있는 것이지만 직접 당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이중적인 생각. 보통 아버지다운 말투였다.
“신혼이니 10일 정도 시간을 주겠네, 예로부터 가족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으니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고트의 결혼식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하객들도 제법 많이 왔었다. 동료기사들과 가족들이 모두 참석을 한 상태였다. 사람이 많을수록 돈이 적게 든다. 참여한 동료들이 돈을 모아서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이라서 사라지지 않는 일이다.
고트의 결혼식이 끝나고 난 후.
영주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가르딘은 영지의 경제력을 발전시키는 와중에 한 가지 더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로 했다. 아무리 경제력이 발전해도 그에 맞게 군사력도 필요하다.
경제가 발전해도 발전한 경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가르딘이 오러 마스터이기에 함부로 경거망동할 곳은 없겠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지 몰랐다.
일단 당하고 난 후 다시 계획을 세우고,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는 미리 상황을 파악하고 방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르딘이 군사력을 증진시키는 방안으로 모색한 것이 병사훈련소였다. 기사학교를 만드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에 알맞은 재능을 가진 자들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기존의 병사들을 강군으로 만들어 전투에 대한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이제는 수비병으로서의 능력만 있어서는 안 되었다. 성벽을 중심으로 공성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것은 몬스터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특화가 되었다고 해야 맞았다.
한데, 이제는 몬스터의 접근이 대부분 사라졌고, 라이젠의 도움으로 더 이상의 대규모 침범은 없었다. 성벽 위에서 공성전을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다크 랜드의 몬스터와 마수로부터 안전하게 되었으니 수비병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사는 항상 존재해야 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전술훈련과 전투훈련을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발키리 영지의 경우 다크 랜드 인접지역만을 성벽으로 감싼 형태다. 내부적으로 카이로만 제국과 맞닿는 지역과 외부적으로 헥토르 왕국의 접경지역은 허술한 상태였다."
성벽은커녕 제대로 된 성도 하나도 없었다. 만약 맘먹고 쳐들어오면 방어선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워낙 변방인 데다가 헥토르 왕국의 경우 동맹국이기에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동맹국이라고 해서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국제관계에서는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 자국에 중요한 이익이 얻어지는데, 그 이익을 마다할 나라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헥토르 왕국이 기회다 싶으면 침범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일단 침범하고 난 후 다시 밀어낼 경우 이미 발키리 영지는 쑥대밭이 되어 버릴 수 있었다. 다시 찾는다고 해도 전쟁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전쟁복구로 들어가는 돈과 피해가 더 많다는 말이었다.
사전에 충분히 보완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르딘과 필리언, 갈라, 유타, 그리고 파멜라가 집무실에서 군사력 강화에 대한 일을 의논했다. 가르딘이 지적하는 것에 대해 필리언, 갈라, 유타는 나름 이해를 하는 편이지만 전쟁에 대한 경험이 없는 파멜라는 현재의 영지실정에 맞추어 반대를 하고 있었다.
“영주님의 의견이 틀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헥토르 왕국은 오랜 시간 동맹국이었어요. 더군다나 내부적으로 발키리 영지는 변방이라 탐을 내는 영주도 없어요.
또한 영주님은 오러 마스터예요. 미토스 경과 스필언 경도 오러 마스터예요. 오러 마스터가 3명이나 있는 이곳을 누가 감히 침범한다는 건가요. 영주님의 말씀은 우려에 불과해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봤나! 네가 말한 것들을 다르게 돌려 말하면 하나도 없는 것과 진배없지. 스필언과 미토스의 경우, 결국 다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영지에 오러 마스터는 나 한사람뿐이 없게 된다. 또한 도자기와 더불어 고구마 생산, 다크 랜드 몬스터에 대한 습격이 없어진 것을 다른 영지가 안다면 과연 탐을 내지 않을까! 발키리 영지가 네가 보기에 매력이 없는 곳으로 보이느냐? 숨긴다고 해서 그 사실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 같으냐?”
“하지만 비약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전쟁에 비약은 없다. 현실만 남게 되지.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다. 사실 너무 순조롭지. 하지만 한순간 비틀리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질 수도 있는 게 현실이야. 그런 일을 미리 대비한다고 나쁜 일이 절대 아니야.”
가르딘의 말은 약간 씁쓸했다. 사실이 그렇다. 일단 당하고 나면 후회하게 된다. 특히 전쟁의 상처는 치유가 상당히 어렵다. 수많은 인명피해, 상상할 수 없는 재산피해. 전쟁후의 후유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참혹하다.
오랜 시간 동안 전쟁을 겪어온 가르딘과, 필리언, 갈라, 유타만이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겪는 고통은 한두 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아니 평생 동안 자리할 수 있다.
파멜라는 지금 남아 있는 자금으로 도로를 개설하고 싶었다. 전에도 한번 거론된 내용이기에 이번에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가르딘이 먼저 군사력 증강에 돈을 투자하려고 하니 답답했다. 그렇다고 영주의 말을 계속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알겠어요! 영주님의 뜻에 따르겠어요.”
“잘 생각했다. 어차피 이번 일에 너의 진법실력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럼 진짜로 그 일을 실행하려는 건가요?”
진법이라면 파멜라가 지금 심취해 있는 일 중에 하나였다. 바쁜 영지 일을 모두 마치고서 끊임없이 진법을 연구하여 더욱 개량된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실전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은 직접 만들어 봐야 했다. 소규모의 진법은 여러 번 만들어 보았지만 대규모의 진법은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법은 진법가만 있어서는 만들 수 없다. 진법에 필요한 장치를 만들기 위한 기술자도 필요하다. 그러한 기술자는 파멜라가 생각하기에도 영지에 별로 없었다. 대규모 진법을 만들기 위한 고급기술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급기술자가 영지 내에 과연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최고의 기술자를 네게 보내주마.”
가르딘은 드워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파멜라 모르게 밀 2,500포대를 안젤리카를 통해 드워프 마을에 전달한 상태였다. 고구마까지 씨를 구해 주어서 드워프 마을은 식량걱정이 없게 되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준다는 약조를 확실히 받았다.
파멜라는 몇 개월 전부터 계속 물어오는 안젤리카에 대한 것을 언급했다. 안젤리카가 마법학교를 짓겠다며 지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 달라고 했다. 돈은 부족하지 않으니 학교를 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필요한 자재를 구입해 달라고 했다.
영지의 마법사이기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서툴러 보였다. 미리 시일을 결정해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곳곳에 보였다.
“안젤리카 양이 마법학교를 세운다고 필요한 자재를 구입해 달라고 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줘, 어차피 돈은 지가 알아서 낼 거야. 뭘 하던 영지에 피해가 없으면 내버려 둬.”
“그냥 내버려두라고요?”
“갠 신경 쓰지 마. 없는 셈 쳐.”
“하지만…….”
“하지만은 뭐, 그냥 내버려 둬. 절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지 꼴리는 대로 하게 놔둬.”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어.’
가르딘은 안젤리카를 없는 셈치고 있었다. 물론 마법학교가 세워지고 마법양성이 가능하게 되면 다시 볼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만들어지는 학교가 과연 효용이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가르딘은 드래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안젤리카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지켜볼 생각이다. 나중에 도움이 된다면 다시 보면 되었다. 그전까지는 시치미 뚝 떼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물론 일이 커져 피해가 예상되면 중지시키는 것은 당연했다.
파멜라는 가르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사는 고귀한 존재였다. 저처럼 무신경하게 다루어서는 안 되었다. 마법사가 얼마나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데 저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대한단 말인가!
아직 드래곤인지 모르는 파멜라는 안젤리카를 최대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르딘이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대로 하지 않고, 제대로 보조해 줄 생각이었다.
“그보다 기사들 수는 보강이 되는 거냐?”
가르딘이 기사단장 필리언에게 물었다. 기사들의 재량권은 전적으로 필리언, 갈라, 유타에게 주었다. 기사짬밥이 15년이 넘은 베테랑들이었다. 그 정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이었다.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거냐? 지금까지 보강한 수를 합하면 총 80명 정도는 될 거야! 물론 30명은 신입이라 아직 검술의 기초 수준이지.”
“지금 당장 강한 녀석들보다는 앞으로의 미래를 보고 뽑았겠지.”
“당연하지. 그 정도도 확인하지 않은 줄 알아.”
기사는 나이가 어릴 때부터 수련을 해야 했다. 나이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게 되면 수련을 해도 수련의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또한 오러에 대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 재능보다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재능에다 노력까지 하게 되면 더욱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다. 범재는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근데, 문제가 있어?”
“뭐가 또 문젠데?”
“또라는 말은 심히 불쾌한데, 할 말은 해야겠다. 네가 데려온 놈 있잖아!”
“투르가 왜?”
“그놈 도대체 뭐야? 실력은 굉장한데, 하는 행동이 너무 거칠어! 기사단의 정해진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단 말이야.”
투르는 광천패황신공의 영향으로 성격이 괴팍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순진한 인간을 완전히 망쳐버린 가르딘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가르딘도 투르를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으로 변했다. 거칠면서도 독불 기사 같은 녀석이 되었다. 적당히 사회와 타협하고 사는 게 사람 사는 법칙이다. 자신만의 생각이 모두 옳을 수도 없으며 독불 기사는 브레스 맞기 딱 좋은 일이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 투르는 누군가가 그의 비위에 맞춰서 따라와야 했다.
남의 통제에 따른 훈련이나 수련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성미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투르의 실력이 아직 최상급 기사인 스필언, 미토스, 필리언, 갈라, 유타에 비해서는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억누르는 힘이 강하기에 지금까지 참고 있지만 그로 인해 더욱 삐뚤어지고 있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광천패황신공의 광기가 제어되기 쉽지 않았다.
“수비병 중에서 거친 녀석들로 500명만 추려봐.”
“수비병을 추리라고.”
“덩치가 크고, 제법 힘 좀 쓰는 녀석들로 모집을 해. 수비병에서 찾을 수 없으면 영지 내에서라도 찾아. 영지에서 골치 좀 썩는 놈들을 한곳에 모아봐.”
가르딘의 의도를 파악한 필리언이었다. 20년을 같이 다니다 보니 척하면 척이었다.
“정말 너다운 생각이다.”
“그 안에서 제멋대로 설치게 만들어주지 뭐!”
일단 500명을 모집하고 그 안에 투르를 집어넣을 생각이다. 위계서열이야 거친 놈들이니 알아서들 정해질 것이다. 철저한 약육강식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탄생하기 될 것으로 예상이 되어졌다.
반면에 어떤 부대로 만들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만들어 보고 나중에 생각해 보는 가르딘이었다. 이후의 일까지 모두 세세하게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닥!
지축을 흔들며 말이 달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척이나 거칠고 투박한 소리지만 힘이 느껴졌다. 또한 무섭도록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달리는 사이에 잠시 딴 곳을 보니 15미터 앞을 전진해 있었다.
전진하는 말 앞에 있다가는 그대로 깔려 버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띠고 있는 말들이었다. 덩치는 일반 말들보다 1.5배는 더 컸다. 달리는 움직임에서 생동감이 느껴졌다. 달릴 때마다 보이는 뒷다리와 앞다리의 대퇴부 근육의 움직임이 크고, 강렬했다.
보통 말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압도적인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의 말들이지만 눈빛만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더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말들이 달리는 속도와 더불어 일어나는 먼지폭풍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멀찍이 성벽의 망루에서 지켜보고 있던 피터슨이 벌떡 일어났다. 앞에서 뿌연 먼지가 일어나자 놀라서 일어난 것이다.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까지 울리고 있었다. 점심 먹고 나른한 시간에 낮잠 한번 때리려는 찰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뭐야?”
수비병 망루 생활 20년 경력의 피터슨은 지난번 2차 몬스터, 마수 대침공에서도 또다시 살아남아 망루를 지키고 있었다. 다크 랜드의 인접 성벽을 경우 가르딘의 지시로 인해 병사들의 수가 전보다는 허술한 상태였다.
침공이 없다고 확신한 상태에서 많은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낭비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크 랜드의 성벽 앞으로는 노예들이 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일전에 노예들을 사서 그 앞으로 밀 농지를 가꾸고 있었다. 3천 명 정도의 노예를 사서 일군 터전이었고, 그 안에서 생산한 것들은 모두 영지의 소득으로 환수하고 있었다.
노예들이야 밥만 제대로 주면 되기에 인건비는 그다지 많이 나가지 않았다.
피터슨은 즉시 비상종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성 밖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모두 들어올 수 있도록 신호를 보냈다. 습격은 없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였다.
비상문으로 신속하게 노예들을 대비시켜야 했다.
뎅! 뎅! 뎅!
비상종이 울리자 연속적으로 울리며 퍼져나갔다. 비상종이 가르딘의 저택에까지 전달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집무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신호를 받은 가르딘이었다.
“무슨 일이야?”
“또 몬스터의 침입이 있는 건가?”
필리언, 갈라, 유타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가르딘은 이상하다고 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라이젠이 약속하길 다시는 몬스터의 침입이 없다고 했다. 드래곤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지 않은가! 약속을 하면 지키는 종족이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수비병을 총동원하고, 기사단을 소집해!”
“알았어.”
바로 출정준비를 서두르는 가르딘과 동기들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순간이었다. 몬스터들이 침범한다면 그 앞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위험했다. 돈을 주고 산 재산이기는 하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었다.
함부로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르딘은 다크 랜드의 평야가 개척되는 대로 그들을 노예에서 농노로 격상시켜 줄 생각이었다. 일단 농노가 되면 자기 재산은 어느 정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 이후 노력해서 돈을 모으게 되면 평민으로 격상을 시켜 줄 수도 있었다.
물론 극소수에게 혜택을 베풀 것이다. 이유는 그들에게 동기를 주기 위해서이다.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손해 막심! 안 돼!’
절대 안 되었다. 어쩐지 너무 잘 되어가고 있었다.
가르딘이 성벽으로 왔을 때.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기사들과 병사들도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폭풍 같은 먼지를 동반하고 오기에 몬스터의 대침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들이었다. 보통 말들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큰 말들이 고생해서 심어 놓은 밀 싹을 뜯어먹고 있었다. 애써 심어 놓은 밀을 보호하기 위해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용이치 않았다. 어찌나 거칠고, 위험한지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화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수비병 중에 몇 명이 화살을 쏘았는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말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쏜 활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미리 올 줄 알았다는 듯한 반사신경이었다.
“저… 럴 수가!”
말이 사람도 아니고 저딴 식으로 피하는 말은 처음 보았다.
가르딘은 활을 그만 쏘게 했다.
‘굉장한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말들이 온 거지?’
다크 랜드에서 달려왔다면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되었다. 몬스터와 마수가 우글거리는 지역에서 과연 말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저 말들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 말을 길들이기만 한다면 제법 좋은 말들이 되겠는데!”
“거의 미친 말 수준인데, 저 봐! 눈도 빨갛잖아!”
“아무리 좋아도 저런 말은 사절이야!”
필리언과 갈라, 유타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말들이 설치는 바람에 애써 만들어 놓은 농지가 엉망이 되었다. 이미 엉망이 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저 말들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가 중요했다.
가르딘은 눈앞에 보이는 거친 말들을 길들이고 싶었다.
말을 길들이려면 전문적으로 조련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저토록 거친 말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조련시키려면 상당한 전문가여야 한다.
가르딘은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었다.
그때였다.
성 밖의 말들 사이로 한 노인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말들이 저절로 피하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가르딘은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보통 노인이 아니었다.
건장한 청년이 저 노인을 보고 ‘비리비리한 노인네가 어디서 설쳐!’라고 했다가는 바로 골로 가는 수가 있었다.
‘저 사람이! 왜?’
가르딘은 한눈에 그 노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곳에 왔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크 랜드의 중심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노인이 말을 했다.
“성문을 좀 열어주실 수 있습니까?”
모두에게는 수상한 노인네로 보였다. 다크 랜드에서 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험지에 노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문을 열지 않는 게 상식적으로 맞았다.
“열어주어라.”
“영주님! 수상한 노인네입니다!”
“괜찮으니 열어주어라. 힘없는 노인이 수상해 봤자 뭐가 달라지느냐.”
“알겠습니다. 영주님!”
가르딘이 열어주라는 말에 병사들이 문을 열어 노인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노인은 들어와서 가르딘에게 감사하다면 인사를 올렸다.
가르딘은 따로 노인을 불러 독대를 했다. 왜 독대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둘이서만 들어오게 된 장소에서 가르딘이 눈을 부라렸다. 말투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이름은?”
“라이잰입니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라이젠 님!
“라이잰이라니까!”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라이젠과 라이잰. 이름자에서 한 글자만 달랐다. 발음상으로는 전과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네도 딸 가진 입장이지 않나!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더군다나 나는 성의를 생각해서 다크호스까지 데리고 왔네!”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말들을 데려오며 어떡합니까? 만들어 놓은 밀 농지가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하마터면 노예들도 다칠 뻔했습니다.”
“그건 나도 예상 못했네. 하지만 나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네.”
“존재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저 말들은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네. 내가 명마로 조련시켜 줄 테니 나를 말 조련사로 쓰게.”
“말 조련사로요!”
“그러네.”
‘음!’
저런 말들이라면 한번 생각해 볼 만했다. 하지만 몬스터습격인 줄 알고 놀랐던 걸 생각하면 그냥 들어주기 싫었다. 가르딘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라이젠도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가르딘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며 흔들었다. 악수가 아니었다.
“이게 뭔가?”
“밀 농지를 망가뜨렸으면 돈을 내야지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내가 드래곤인데, 그 정도 같고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아니면 말고. 나야 뭐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자, 그럼 가세요!”
자신은 딸을 보러 온 상태였다. 나름대로 유희를 하려는데 처음부터 가르딘이 도와주지 않았다. 어차피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알… 겠네. 주면 되지 않나!”
“그럼 말 조련사로 노력해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말을 놓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우리 잘해 보자고.”
“알겠… 습니다.”
가르딘은 노인의 이름을 기사들에게 알려주었다. 이제부터 저 말들을 조련할 사람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금세 급조한 말들이 이어졌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라이젠은 가르딘의 말발과 거짓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저 말 조련사라는 것만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그 과정까지 세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놈!’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가르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라이젠이었다.
라이젠이 데려온 다크호 난동 소동은 그저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말들에 대한 일은 모두 라이젠이 알아서 처리를 한다고 했기에 무마되었다. 일단 가르딘이 이 일을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영주가 시키면 까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 말에 대해서 토를 다는 것 자체가 배반이었다.
필리언은 가르딘이 시킨 대로 수비병들과 영지 내에서 힘 좀 쓰고, 침 좀 뱉어본 녀석들 500명을 한곳에 모았다. 거친 녀석들이 한곳에 모이자 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일단 영주가 시켜서 모아 논 거친 놈들이었다.
필리언을 비롯한 기사들도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서로 싸우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한번 탄력이 붙고 말리는 사람이 없자 시비가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이랬다.
“캬악! 퉤!”
한 놈이 침을 뱉었는데, 그 침이 옆에 있는 놈의 신발 옆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성깔 있는 놈들이 자신의 옆에 침이 떨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놈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처음에는 기사들이 있기에 멈칫했었다. 그래서 같은 방법으로 가래침을 뱉어 버렸다. 침에는 온갖 다양한 거름이 섞여 먼저 뱉었던 놈의 신발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떨어진 침은 너무 끈적끈적해서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개자식이! 지금 뭐 한 거야!”
“뭐! 개자식! 말이면 단 줄 알아! 혀를 잘라 줄까!”
“네깟 놈이 내 혀를 어떻게 잘라! 어디 한번 해볼까! 조금 뒤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보자! 존만아!”
“그 말은 내가 할 말이다! 병신 같은 놈아!”
말이 필요 없었다. 주먹이 서로 날아갔다. 마구잡이식 싸움이라고 해도 잔뼈가 굵은 녀석들이었다. 독종들 중에 독종이라고 불리는 놈들이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덤벼들었다. 500명의 중간에 위치한 이 두 놈이 싸움을 하자 부딪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주먹을 뒤로 젖히다가 다른 놈의 얼굴에 팔꿈치가 맞았다. 그러자 그놈 역시 발끈하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한 놈이 건드리니 세 놈이 싸움에 끼어들었고, 그 옆으로 멍하니 있던 놈이 날아오는 발을 잽싸게 앉아서 피하니 뒤에 있던 놈이 발차기에 맞았다.
이러니 싸움의 여파가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일단 한 가닥씩 하던 녀석들이라 싸움을 싫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사들도 말리기는커녕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돗자리를 깔아놓으면 하던 짓도 못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이놈들은 돗자리를 깔아주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날뛰었다.
퍼퍽! 퍼퍽!
“빌어먹을! 내 이빨! 죽었어! 내 앞에 있지 마. 이빨 다 부러지는 수가 있어!”
“어이쿠!”
싸우는데 비겁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상대의 약점이 보인다 싶으면 바로 가격하고, 물기까지 했다. 일단 남자의 급소를 맞은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면 봐주는 놈들이 아니었다. 쓰러진 놈이 바닥을 뒹굴자 그 자리에서 서너 명이 달려들어 밟아주었다.
" 쿵! 쿵! 쿵!
이곳은 발키리 영지의 분지에 마련된 장소다. 외부와는 격리되어 떨어진 지역이다. 이곳에 이놈들을 모아 논 것은 외부 사람들이 봐서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가르딘의 판단 때문이다.
싸움이 시작되는 그 안으로 거대한 신체를 가진 녀석이 걸어갔다. 그 녀석은 싸움을 말리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산만 한 덩치의 인물은 투르였다. 가르딘이 투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른 녀석들의 말은 잘 듣지 않아도 가르딘의 말은 듣는 투르였다.
-너의 실력을 보여 주어라! 그리고 그 안에서 네가 대장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어라! 단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명심해라!
죽이지만 않으면 되었다.
투르가 전신의 투기를 개방했다. 개방된 투기가 발산하자 무섭도록 강렬한 안광이 번쩍였다. 한동안 싸움을 하지 못했던 투르는 불만이 쌓여 있었다. 기사단 내에서 투르의 실력은 가히 상급에 달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스필언과 미토스가 있었다.
그 녀석들은 기사의 율법을 지키니 않으면, 투르를 사정없이 팼다. 정말 무섭도록 질리게 패는 놈들이었다. 이래서 정석이 무서운 것이다. 원리원칙 대로 실행을 하는 스필언과 미토스에게 인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본 기사들마저 눈을 피했을 정도였다.
투르의 눈앞에 보이는 500명의 싸움.
가히 난장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싸움이 그저 그런 싸움이 아닌 광기마저 보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이유는 있었다. 다들 싸움 좀 하는 놈들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죽지 않는지 본능적으로 체득했다고 봐야 했다. 엄청나게 많이 맞아보면 어디를 때려야 아프고, 어디를 방어해야 하는지 아는 것과 같았다. 사람의 생존본능은 극한으로 갔을 때 발휘가 되는 것이었다.
“죽어! 이 개잡놈아!”
퍼퍽! 퍼퍽! 크앗!
싸움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안으로 투르가 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놈들은 상대의 덩치가 크다고 해서 겁부터 먹는 놈들이 아니었다. 덩치 크다고 싸움에서 이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투르는 그냥 덩치만 큰놈이 아니었다.
휘이익! 퍼어엉!
한 방을 휘두르자 투르 앞에서 멍청하게 생긴 놈의 신형이 3미터는 날아가서 처박혀 버렸다.
투르는 물 만난 어류처럼 난장판 속에서 군계일학의 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투르의 주먹을 한 대라도 맞은 놈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한 방에 바닥으로 패대기쳐 버린 개구리처럼 만들어졌다. 터져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좋아! 좋아! 마구마구 덤벼라!”
사람을 개구리 밟아 죽이듯이 반죽으로 만들어 버린 투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흡사 미친 드래곤처럼 보였다. 훗날 크레이지 드래곤(광룡)이라고 불리게 되는 투르의 현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투르의 반경 3미터 안에 있던 20명의 껄렁한 놈들이 바닥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싸움꾼들은 감각이 뛰어났다. 생존본능만큼이나 상대가 위험한 놈이라는 것을 금세 파악하는 신기한 능력이 존재했다.
방금 등장한 거대한 덩치. 즉 투르가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세 싸움이 멈추어졌다. 투르를 중심으로 원이 형성되었다. 강하다고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서 한 놈을 패려는 식으로 바뀌었다. 강한 놈을 먼저 밟아주고, 나중에 다른 놈을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상당히 치사하지만 자신이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놈을 먼저 죽여!”
우르르!
다들 한꺼번에 투르를 향해 덤벼들었다. 어떤 놈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중에 굵은 것을 집어 들고 투르의 등판을 가격했다.
빠아악! 뿌드득!
있는 힘껏 휘두른 나무 몽둥이가 오히려 부러져 나갔다. 투르의 몸은 금강지체다. 원체 단단한 몸이었고, 광천패황신공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져서 오러가 아닌 이상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는다. 부러진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던 놈이 기겁했다.
“괴… 물!
”퍼퍽!
“크아앗!”
정신 줄을 놓고 있으면 안 되었다. 투르는 건드리는 놈들 모두를 한방에 날려 버렸다.
“놈의 다리를 잡아!”
일단 잡는 게 우선일 것 같아 여러 명이 투르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투르의 힘은 일반적으로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달려들어 잡든 말든 마구잡이식 주먹이 연거푸 이어졌다.
투르의 쌓인 화는 보통이 아니었다. 화가 폭발하며 광기에 휩싸일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투르였다. 투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한순간에 공황상태가 되어 버렸다. 500명이나 되는 독기 가득한 놈들도 투르의 광기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했다.
300명이나 쓰러져 바닥에 뒹굴렷다. 일단 서 있는 놈들도 주춤하기 마련이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럴 수가!”
“어디서 저런 괴물이!”
“이…길 수가 없어!”
도망쳐야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살려 달라고 해서 봐줄 놈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뒤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을 칠 수 없게 되었다. 사라졌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모두 시퍼런 검날을 뽑아 들고 있었다. 발키리기사단의 앞에 기사단장 필리언이 나섰다.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참수시켜 버리겠다.”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필리언의 목소리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진정으로 죽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익!”
놈들은 분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외진 곳에 모아 놓고 죽이려고 하다니!
영지 내에서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영지의 주인인 가르딘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괴물을 동원해 죽이려 하다니 사람 같지도 않았다. 영주에 대한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이대로 죽기는 모두 억울했다.
“그래 저놈은 한 명이야! 힘을 합치면 죽일 수 있어!”
“저놈만 죽이면 살 수 있어!”
“저놈을 죽이자!”
기사단의 수는 정확히 80명이나 되었다. 그들 모두 예리한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투르는 맨몸이었고, 한 명이었다. 도망치던 놈들이 죽기 살기로 투르에게 덤벼들었다.
악을 품고 덤벼드는 놈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지독한 살기 앞에서는 미소를 짓고 있는 투르도 여간 독한 것이 아니었다.
500명이 장렬히 산화되고 있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도 질리고 있었다.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악착같이 덤비는 놈들이나 그걸 좋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투르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독한 놈들!’
“이제 끝났나.”
모든 것이 끝나갈 때 가르딘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등장해야 가장 적당하다는 법칙을 지키고 있었다.
“저놈들이 말을 제대로 들을까?”
독한 놈들일수록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필리언이 근심 섞인 말을 이었다. 그러자 가르딘이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말했다.
“두고 보면 알아. 발키리기사단은 모두 돌아가라! 가서 수련이나 열심히 하도록. 내가 가르쳐준 오러 심법을 꾸준히만 수련하면 모두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충!”
기사단에게 가르딘은 생명과도 같았다. 오러 심법은 아무에게나 전수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직계가신이 아니라면 전수하지도 않는다.
킹덤 나이트의 경우, 일정 수준의 자질을 갖추기 전까지는 카이만 심법을 전해주지 않으며 카이만 심법을 익힌 기사들은 자신 이외에는 전수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가르딘이 전수한 오러 심법은 결코 카이만 심법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필리언, 갈라, 유타에게 전수한 뇌전폭풍 심법보다는 떨어진다. 자신에게 가까울수록 비전을 주는 것은 인간의 심리였다. 가르딘이라고 해서 인간의 본능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르딘이 기사단에게 전수한 것은 현운 심법이었다. 현묘한 기운과 표홀한 구름의 기운을 동시에 가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름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 속에 내재된 기운을 몸 안으로 차분하게 쌓아주는 안정된 오러 심법이었다. 꾸준히만 익히면 충분히 상급의 오러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발키리기사단이 모두 분지 아래로 내려가고 나자 가르딘이 안젤리카에게 회복마법을 쓰러진 놈들에게 걸라고 했다. 6서클 마법사로서의 역할을 하는 안젤리카였지만 그 마법능력만큼은 보통의 6서클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마법력을 강화해서 한 번에 치료해 버렸다.
가르딘이 투르에게 다가갔다.
“기분이 어떠냐?”
“마음이 뻥 뚫리는 게 시원해요!”
쌓인 화를 모두 풀어낸 투르는 전보다 기운이 조금 더 맑아졌다. 광천패황신공의 영향으로 성향이 너무 거칠어졌고, 화가 쌓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난폭한 행동을 했었던 것이다. 17년 동안 기억한 내용들이 모두 당한 것들뿐이었다. 이제 그러한 기억은 지워버릴 때가 되었다.
“너도 이제 다 자란 성인이다. 성인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해. 지금처럼 무턱대고 싸움만 해서는 성인이라고 할 수 없지. 과거의 네가 당한 것은 이제 이쯤에서 풀어라. 그것으로 인해 네 인생이 결정된다면 너무 아쉽지 않느냐! 성공해라. 이것이 네가 돌아가신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다!”
가르딘은 사념안으로 투르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념안은 큰 영향을 주는 술법이라고 할 수 없다. 작지만 그 작은 마음을 이끌어 주는 능력을 발휘한다. 투르의 마음속에 자리한 예전의 마음이 조금씩 커져나갔다. 화가 풀렸으니 사념안이 더욱더 잘 먹혀 들어갔다.
“영주님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투르가 말투를 고쳤다. 가르딘을 주군으로 인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전까지 가르딘에 대해 자신이 따라야 하는 부모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달랐다. 이제는 그가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주군이었다.
투르는 결코 멍청하지 않다. 성격으로 인해 멍청해 보였을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배움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는 녀석이었다.
“여기에 쓰러진 놈들은 모두 쓰레기라고 불리는 놈들일 것이다. 성격이 거칠어서 주변 사람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혼자만 잘난 척,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쌓여 있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지만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이들을 이끌어 창기병으로서 성장 해 주었으면 한다.”
“창기병이요?”
“사실 창기병와 창병대의 역할을 동시에 해주었으면 하지만 우선은 창기병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네가 이들의 대장으로 그 임무를 수행해 주어야 한다.”
창기병은 전쟁의 선봉 역할을 한다. 단숨에 적진에 뛰어들어 일순간에 적들의 예봉을 꺾어 버린다. 잘만 되면 아군의 사기진작에 가장 도움이 되는 부대다. 단, 창기병은 돌진력이 강해 일단 적의 함정에 빠지면 모두 죽는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모두 호전성과 더불어 겁이 없어야 한다. 반드시 산다는 각오로 악기와 독기로 뭉쳐 있어야 한다.
가르딘이 창기병을 생각해낸 이유는 숫자적 열세를 감안해서였다. 그리고 돌진성과 더불어 파괴력만 제대로 갖추어 진다면 영지방어에 최적의 부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투르가 서 있다면 다른 놈들도 알아서 쫓아올 것이다.
투르는 겁이 없어졌다. 그리고 호전성이 남다르다. 이점을 잘만 활용하면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때마침 라이젠이 다크호스라는 명마를 가지고 왔다. 무적의 창기병을 구성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투르는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더불어 자신이 대장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몹시 흥분이 되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이 아니라 결과로 보여 주어라.”
전투와 전쟁에서 최선은 없다. 다만 그 결과만이 진실로 남아 전해질 뿐이다. 아무리 잘 싸우고, 많은 전투를 이겨도 승리를 하지 못한다면 변명거리에 불과하다. 이것이 냉혹한 현실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이기도 하다.
“이놈들을 이끌어 가는 것은 단지 힘만 세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 가장 기초적인 군사적 전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전투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네가 대장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이제 대장이다. 대장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수하들이 죽는다. 그 책임을 네가 지는 것이다. 책임은 무겁다. 저들이 하찮은 놈들일지라도 목숨까지 하찮다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고귀한 것이니까!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가르딘이 보기에 이런 거친 놈들의 대장에 투르가 적격이었다. 하지만 투르는 아직 어리다.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창기병의 대장 노릇을 하며 세상을 배워갈 필요성이 있었다.
“여기 라이잰이 네게 도움을 많이 줄 것이다.”
가르딘의 등 뒤로 라이젠이 다가왔다. 라이젠은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다. 원래는 금발의 잘생긴 미남이지만 유희를 하는 동안 말 조련사로 지낼 생각이었다. 또한 투르에게 가르침을 내릴 인물이기도 했다.
“기초적인 것들은 라이잰에게 물어보도록.”
[이보게, 나는 말 조련사일 뿐인데!]
라이젠이 메시지(전달)마법을 가르딘에게 보냈다. 갑자기 투르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라니 이것은 유희의 법칙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누가 스승 노릇하라고 했습니까! 그저 창기병에 필요한 전술을 가르쳐주기나 하십시오.]
[정말 이러긴가!]
[싫으면 돌아가든가!]
[끙!]
툭하면 돌아가란다. 딸을 보기 위해 온 라이젠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참아야 했다. 그렇지만 짜증이 치밀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르딘은 라이젠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 채고 달래는 말을 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조언을 조금 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그 정도라면!]
[제가 안젤리카의 유희를 위해 모든 일을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 정도도 해주지 못합니까!]
[정 그렇다면 알겠네!]
사실 가르딘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젤리카가 도움이 필요하면 파멜라가 알아서 해결을 해주고 있었다. 파멜라의 능력이라면 안젤리카에 원하는 것을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현 시점에서 안젤리카는 즐거운 유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원하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라이젠도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가르딘의 말을 섣불리 거절하지 못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딘이 생각하기에 보통의 가르침이 통할 투르가 아니었다.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자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그 적임자로 라이젠이 선택되었을 뿐이다.
‘광천패황신공이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데 일반적인 놈이 어떻게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까!
’지금이야 안정을 차렸으니 망정이지 폭발한 투르의 성정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가르딘은 속이 시꺼멓다. 그 시커먼 속을 다른 사람이 절대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혹 들여다본다고 해도 암흑밖에 없을 것이다.
“안젤리카! 우리는 이만 내려가 보자고, 파멜라에게 이곳에 막사를 짓도록 말을 해놨으니 생활하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가르딘은 되도록 창기병이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기는 비밀로 싸여 있어야 그 효능이 크다. 그렇기에 비밀병기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무기가 되어야 비밀병기의 기능을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빠! 수고하세요!”
“걱정 마라. 너도 열심히 해라!”
“모두 아빠 덕이에요!”
“크흠!”
딸의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에 라이젠도 우쭐해졌다. 이것 모두 가르딘의 의도대로였다.
가르딘은 안젤리카에게 되도록 아버지께 좋은 말을 하도록 유도했다. 기분이 좋을 때 부탁하기도 좋은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식이라면 당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서 진을 형성하고, 이 부분을 파서 그 중심에 이르는 흐름이 연이어서 환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하겠어!”
파멜라는 자신이 직접 설계한 내용을 적어 놓은 책을 보며, 현장에 맞게 수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발키리 영지의 서부지역에 와 있었다. 이곳은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헥토르 왕국과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사실 발키리 영지의 경우 외부와의 거리가 상당히 긴 편이다. 다크 랜드라는 특이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길이 상당히 험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평시에는 보통 상태로 하고, 전시에 변화를 준다면 더욱 효과적일 테지.”
평상시에도 진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했다. 간혹 가다 사람들이 휘말릴 수도 있을뿐더러 진의 위치가 노출될 수 있다. 진은 모르고 당했을 때 더욱 효과적이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진법에 걸려들게 하여 적을 소멸하거나 가두는 역할을 해야 했다.
파멜라는 수치와 거리, 그리고 주변 자연환경을 계산하면서 백지상태의 책에 적어 나갔다.
이미 적은 책과 비교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와는 차이가 상당했다.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실험이 필요할지 몰랐다.
“생각보다 범위와 환경이 달라! 쉽지 않겠는데!”
가장 큰 문제는 파멜라의 손발이 되어 줄 수 있는 기술자였다. 진법의 경우 한 치의 오차에 의해서 전체가 완전히 다르게 진행이 될 수 있었다. 하나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오차 범위를 줄이면서 상황에 따라 지시한대로 정확하게 따라줄 수 있는 기술자가 필요했다.
고급기술자가 없다면 차라리 직접 하는 것이 나았다. 그렇지만 이 넓은 대지를 혼자서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랐다. 물론 마음 단단히 먹고 한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대신에 시일이 만만치 않게 걸릴지 모른다. 진법만 만들다가 평생 모든 시간을 소비할 우려가 있었다.
파멜라에게 진법도 중요하지만 영지 내에 벌여 놓은 일도 마무리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영주님은 도대체 기술자를 어떻게 마련한다는 거지?”
그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지 내에 그런 기술자가 있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다. 모든 행정에 관한 서류를 관리하는 사람이 파멜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법기술자에 대한 자료는 전혀 찾지 못했다.
외부에서 마련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 과연 미드라이언 대륙에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신 개념의 학문이었다. 가르딘과 파멜라만이 알고 있는 진법이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 진법실력만 따지면 파멜라가 가르딘보다 나았다. 가르딘이 기초적인 진법만 알고 있다면 응용진법까지 거의 완벽 수준에 달한 파멜라였다.
파멜라가 진법계산에 여념이 없을 때 가르딘이 누군가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영… 주님! 그런데 그 옆에 분들은?”
가르딘의 옆으로 20명 정도의 짧은 다리를 가진 이 종족이 서 있었다. 뚱뚱하면서도 털이 많고, 짧은 신체구조에 비해 단단한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 장비를 여러 개씩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개 달린 작은 가죽주머니에 기술 장비를 꽂아서 어깨와 가슴, 허리 사이에 차고 있었다.
“설마! 드워프!”
파멜라는 처음 보는 드워프의 모습에 놀랐다. 드워프가 1명도 아니고 20명씩이나 되는 것도 처음 보았다. 파멜라가 드워프를 보다가 가르딘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드워프를 알고 있는지 알고 싶을 지경이었다.
홀로 다크 랜드에 드나들며, 드워프를 알고, 오러 마스터에다가 진법까지 알고 있는 가르딘. 그 생각을 하자 파멜라는 머리가 복잡했다. 도대체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가족들과 있을 때는 팔불출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알고 싶을 지경이다.
‘도대체 영주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과연 사람이 맞나요?’
“사람 맞다.”
움찔!
“어떻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 게 바보지!”
놀람과 더불어 불신, 그리고 경악이 섞인 파멜라의 표정이었다. 다양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모른다면 상황파악 못하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가르딘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이분은 드워프마을의 장로직을 맞고 있는 멘돌프 장로님이다.”
“멘돌프라고 합니다.”
“파멜라예요.”
파멜라에게 드워프들을 소개하고 난 후 가르딘은 진법설치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곳에 놀러 온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을 끝내야 했다.
“어때! 제대로 설치가 될 것 같은가?”
“지금은 무리예요. 우선 계산은 어느 정도 맞추었는데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렇군! 그럼 바로 실행해 보지 뭐! 네가 지시한대로 이분들이 잘 움직여 주실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자재는 안젤리카를 통해 아공간으로 배달이 될 테니 이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비밀유지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가르딘은 진법을 이곳 모두에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곳곳에 진법을 설치하고, 빈틈은 사람을 통해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 중심에 투르의 창기병이 선봉이 될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어떤 적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수가 많다고 전쟁에 이기라는 법은 없었다.
여기에 시범적으로 설치를 하고, 영지 곳곳에 진법을 설치할 계획이다. 세상일은 어떻게 변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의심 많고, 걱정 많은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는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의 감각 때문이다.
날카로운 감각이 경고성을 보내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든 지는 꽤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실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에 따라 감각뿐 아니라 앞으로의 예지능력까지 발달하고 있었다.
정확한 예지는 아니더라도 경고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었다.
좌우로 거대한 기둥이 여러 개 설치가 되어 있고, 그 중심으로 한참을 따라가야 되는 대전. 넓이만 해도 작은 성에 비견되는 대전의 중앙에 황제가 앉아 있다. 코카 제국의 황제. 무르카인이 턱을 괴고 고민을 하는 듯하다. 무르카인 황제의 옆으로 코카 제국을 떠받드는 재상 휼턴 공작과 이지마하 공작이 서 있었다.
공작의 옆으로 가딩스타 후작이 부상에서 복귀했다. 한동안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는 거동이 불편했었다. 가르딘이 날린 일격으로 인해 아직도 가슴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신성력으로 없앨 수도 있으나 그날의 원수를 갚겠다며 흉터를 내버려두었다.
“약속된 왕국의 수는 얼마나 되지?”
“12개의 왕국 중에 4개의 왕국과 협상이 됐습니다.”
12개의 왕국이라고는 하나 모든 왕국이 제국과 인접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그단 왕국과 덤바인 왕국의 경우 해상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지원 자체가 어려운 곳이다. 그곳에도 사신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우선 필요한 것은 카이로만 제국과 인접해 있는 왕국을 포섭하는 일이었다. 4개만 되어도 상당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놈들이 눈치 챌 확률은?”
“이미 어느 정도는 경계를 하고 있는 상대입니다. 상대는 우리와 같은 제국입니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휼턴 공작의 말에 무르카인 황제도 동조를 했다. 수백 년간 싸움을 계속한 카이로만 제국과 코카 제국이었다. 코카 제국으로서는 가장 강대한 맞수.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쉽지 않은 승부를 벌어온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겠지. 정보력에서는 놈들의 수준이 상당할 테니 말이야. 그것보다 비밀리에 추진한 것은 알 수 없게 했겠지.”
“그렇습니다. 다른 왕국들보다 치밀하게 접촉을 했습니다. 카이로만 제국에서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계획대로만 된다면 놈들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는 게 되겠지.”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코카 제국으로서는 상당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카이로만 제국의 약점을 공략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무르카인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본 가딩스타 후작을 보았다.
“상처는 모두 나았나 보군.”
“폐하의 성은을 입었습니다. 불충한 소인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 목숨을 바쳐 폐하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 말 잊지 말도록.”
“예! 황제 폐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무르카인 황제가 신관을 보내주었다. 궁정을 지키는 마법사까지 가딩스타 후작에게 보냈다. 사실 무르카인은 두 번이나 실패한 가딩스타 후작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가딩스타 후작은 코카 제국의 오러 마스터였다. 그의 전력이 아직은 필요했다. 전쟁의 승패에서 오러 마스터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가딩스타 후작은 이를 갈았다. 그에게는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르딘! 네놈만은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가슴에 상처를 낸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딩스타 후작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존재였다. 또한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만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자신을 믿고 있는 듯하지만 무르카인 황제의 성격이 얼마나 냉정한지 알고 있는 가딩스타 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