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93)

   @@[8제7장 드래곤과의 조우@@]

  새싹이 피어오르는 생명력이 가득 찬 계절이 다가왔다.

  신성제국의 경우 이미 여름이나 마찬가지지만 발키리 영지는 아직 겨울잠에서 겨우 깨어나는 시기였다.

  말라붙은 계절에서 벗어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3개월이 지나는 동안 가르딘도 바쁘게 지냈다. 성벽을 보수하는 일을 황궁에서 지원해 주는 바람에 거지꼴을 다행히 면한 가르딘이었다. 이제는 곧 농사철이 다가온 다. 그 일을 대비하기 위해 수로를 정비하도록 명령했다.

  가르딘은 수로와 농사지역을 돌아보며 영지민들을 둘러보았다. 영지민들은 영주가 직접 행차하자 반기면서도 어려워했다. 처음 영주 취임식 때 보여준 가르딘의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금을 원래대로 해주었기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비가 그다지 많이 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1년에 10차례 정도 오는데,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물은 다크랜드에서 내려오는 것을 사용한다는 말이군.”

  다크랜드는 비가 많이 오기에 물이 풍족할 겁니다. 여기에 터를 잡은 이후 수로가 마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가르딘은 마을촌장인 파이크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차피 농사에 대한 것은 농민들이 가장 많이 아는 내용이었다. 가르딘은 그저 그들이 어떤 것이 불편한지 파악하고 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가르딘은 농민들의 말을 들어보고, 난 후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원래 백작급 영주들의 경우 저택이 아니라 성을 쌓는 것이 보통이지만 발키리 영지의 경우 외부 성곽을 쌓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 저택을 만들어 놓았다. 어차피 외부 성곽이 무너지면 안에 성이 있건 말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몬스터와 마수의 침입이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간간히 산발적으로 침입했던 몬스터와 마수들까지도 모두 처리가 되었기에 이제는 조금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밀농사로 바쁜 것은 농민들이지 가르딘이 아니었다.

  가르딘은 곧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는 이미 파멜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파멜라는 요즘에 무척이나 바빴다. 발키리 영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파멜라였 다. 만약 파멜라가 없었다면 그 모든 일을 가르딘이 해야 할지 몰랐다. 가르딘은 간혹 그걸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한 마디로 파멜라는 복덩어리였다.

  가르딘이 파멜라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제부터 하기 싫다고 하면 정말 암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무슨 일이야?”

  “영주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편하게 말해 보렴.”

  “전임 행정관이었던 바우만 남작이 발키리 영지의 대부분을 관리했어요. 영주님 취임식 때 바우만 남작의 측근들을 모두 내쳐버렸잖아요.”

  “그렇지. 계속 해봐."

  “저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발키리 영지는 생각보다 크거든요. 지금은 각 마을의 촌장이 알아서 관리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체계가 무너질 수 있고, 다시 비리가 생겨날 수 있어요. 정확한 통계와 세수확보를 위해서는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모든 사람이 너와 같은 것은 아니니까.”

  파멜라가 지금까지 발키리 영지를 운용한 것이 신통할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커지고 세분화되어 갈수록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가르딘도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파멜라의 말이 틀리지 않지만 아무나 데려다가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만 쓸 수 있다. 함부로 써서 더 큰 화를 불러 들이 는 것은 사양이었다.

   “영주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여기 제가 작성한 서류예요.”

  파멜라가 작성한 서류에는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사람의 나이, 신분, 지역,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식과 학과성적 등이 세세하게 나와 있었다. 카이로만 제국의 명문인 오스라인뿐 아니라 다른 학교의 인물들까지 있었다. 적힌 내용을 모두 종합해 보면 하나였다. 모두 뛰어난 인재지만 신분의 장벽에 막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네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아는 것이냐?”

  족히 30명은 되었다. 오스라인이야 파멜라가 다녔던 곳이니 상관없지만 다른 학교까지 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와 같이 여자의 신분으로 아무리 잘해도 이미 막혀 있는 길을 뚫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각 학교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부를 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앞으로 발전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사실 오스라인에 모인 인재들 대부분이 귀족가의 자식들이에요. 상급귀족의 자재들이야 실력이 없다고 해도 연줄이 있기에 충분히 등용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모두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실정이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가 똑같다. 하지만 이미 나누어진 신분과 연줄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들을 모두 활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제 국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내놓고, 주변에 나누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가르딘의 경우 하늘이 혜택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제국에서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기사였다. 킹덤나이트의 사상체계가 실력 있는 기사를 뽑자 는 취지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초기 선황 폐하가 만들어 놓은 유지가 카이로만 제국의 전통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으로 마법사다. 마법사가 적은 제국에서 고등 마법사가 된다면 실력을 인정받아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반면에 공부만 가지고서는 절대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연줄이 있어야 한다. 뒤에 배경 이 없는 천재는 어쩔 수 없이 사장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생각은 괜찮군.”

  “이들을 징세관이나 세관원으로 사용하면서 마을과 마을, 그리고 영지 전체에 대한 거미줄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된다면 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영지를 관리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영지를 발전시키는 일을 하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지. 네 뜻대로 하여라!”

  “감사합니다. 영주님!”

  가르딘이 허락하자 파멜라는 상당히 기뻐했다. 그동안 같이 공부하면서 교류를 나누었던 친구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단, 나는 전적으로 너를 믿고 사람을 들이는 것이다. 이 말이 무얼 의미하는 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실수하는 것은 네가 실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책임이 네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물론이에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확실하게 해결을 하겠어요."

  “또한 네 생각과는 다르게 위험인물이거나, 영지 내에서 선동하는 행위를 한다면 나는 가차 없이 내칠 것이다.”

  소수의 인물들.

  특히 뛰어난 머리는 있지만 세상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꼭 반란이나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르딘이 파멜라에게 경고를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평온한 영지생활을 하려던 가르딘에게 위험분자는 절대적으로 사양이었다.

   “아니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 나도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경우가 있었거든. 살아가면서 원치 않았던 일을 하게 될 때도 있고, 뜻하지 않게 숨겨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네가 한 번의 일을 결정할 때 열 번 이상은 생각을 해라. 아무리 네가 똑똑해도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격은 똑똑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해.”

  가르딘은 말하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은 철저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라이나와 브리안만은 절대 변하지 않지. 네게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파멜라는 가르딘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보았다. 점점 가르딘에게서 백작의 위엄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람이 지위를 만든다는 말과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 자리에 있기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리에 맞게 노력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도 못한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르딘은 점점 자격을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주님의 말을 명심하겠어요. 제가 좀 전까지 자만했던 것 같아요.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겠지요. 제가 생각한 것을 말하기 전에 수십 번을 고민하고 확인을 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나.”

  “다음으로 상의할 것이 있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좀 전에 생각하겠다는 말은 저 멀리 건너가 버렸는지 몰랐다.

  “무엇이냐?”

  “영주님에게 말하기 전에 이미 수십 번 생각한 것이니까,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이번에 말씀 드릴 내용은 학교에 대한 것이에요."

  “설마 영지 내에 학교를 만들자는 말이냐?”

  “맞아요. 학교를 만들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해요.”

  가르딘은 솔직히 이번에 말한 것은 들어주기 곤란했다. 사람이 아는 것이 많을수록 원하는 것이 많아진다. 제국에서 우민정책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신분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리에 있는 경우였다. 배우지 못했기에 그 자리에 안주하고 다스리기 편하다. 가르딘도 그런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모르기에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자신의 생각은 주장할 수 없다, 가르딘은 영주민들을 위해서 안전과 발전을 책임질 수는 있지만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선동하는 인물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위험한 일을 하고 싶을 리 없는 가르딘이었다.

  영지민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무식하게 시키는 일을 묵묵히 따라와 주기만을 바란다. 그것이 가르딘의 생각이었다.

  “평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냐?”

  “사실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에요. 발키리 영지 내에 작위가 없는 귀족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적어요. 그 정도 수를 가지고서 능력이 있는지 시험하고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든요.”

  신분의 벽을 넘어 사랑을 이룬 가르딘에게도 고심이 되었다. 이기적이지만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 컸다. 다른 사람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르딘이 심각하게 생각하자 다시 말을 올리는 파멜라였다.

  “영주님이 생각하시는 위험한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황궁의 오스라인이나 다른 학교처럼 대규모의 학교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신분이라는 벽에 가려진 사람들 중에서 똑똑한 자를 양성하자는 거예요."

  “소규모로 보석을 가리자는 말이냐?”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라면 충분히 기회를 잡을 거예요. 특출난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기회를 잡는 녀석들에게 공부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예요.”

  “여기에서 모든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을 네가 아니지 않느냐.”

  “영지에서 기초적인 공부를 마치면 바로 오스라인이나 다른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보낼 생각이에요. 그리고 배우고 난 후 이곳으로 와서 다시 인재로 채용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영주님이 결정을 내리면 그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어요.”

  평민을 등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어차피 발키리 영지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파멜라도 결정을 내리고 말을 한 것이다.

  가르딘은 고민을 해야 했다. 들어준다고 해서 어려운 점은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경우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턱대고 모든 것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파멜라에게 전 권을 맡기지만 어느 정도의 제재와 감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가르딘이 꼭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확인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평민까지는 들어주마. 노예는 안 된다. 정 필요한 인재라면 내게 데려와라. 내가 직접 보고 선택을 하겠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설전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파멜라의 뜻대로 이루어 졌다. 파멜라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르딘은 그런 파멜라에게 한마디 더 쓴 소리를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네가 선택한 자들에게 무조건 동정을 보낸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사정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생각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니 신중하게 선택을 하도록 하여라.”

  “영주님의 말씀 깊이 새기겠어요.”

  파멜라가 필요한 내용은 이미 상의가 되었고, 가르딘이 필요한 것을 물었다.

  “진법은 이제 완숙해졌느냐?”

  “예, 기초적인 응용력은 제법 늘었다고 생각해요.”

  “진법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계산해 낼 수 있느냐?”

  “크기요? 설마 다크랜드 접경지역에 진법을 사용할 생각이세요."

  가르딘이 한마디 하자 금세 상황을 파악하는 파멜라였다. 역시 머리가 좋기에 길게 말하지 않아서 편했다.

  파멜라가 진법의 크기를 계산해 보았다. 현재 활용할 수 있는 진을 최대한 이용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순식간에 연산해 내었다.

  “오행진은 50미터, 팔괘진은 30미터, 구궁진은 25미터 정도예요. 응용진은 아직 5미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 정도면 되었다.”

  “예, 하지만 다크랜드 접경지역은 족히 50킬로미터는 되요. 그 먼 거리를 모두 설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요.”

  “어차피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인간의 냄새를 맡고 오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니까. 또한 몬스터는 지능이 없다. 군데군데 설치를 해놓고 혼란을 주면 된다. 그 것만 해도 놈들은 어차피 서로에게 짐이 될 것이다.”

   몬스터들이 지능이 있어 진법을 파헤치고 넘어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요한 곳에 설치를 하고, 나머지 부분은 병력으로 막아내면 되었다. 성벽이 튼실한 곳은 병력으로 막고, 부실한 곳에 진법을 설치해서 한곳으로 모이게 만들어야 했다. 우왕좌왕하게 되는 몬스터와 마수들은 서로 뒤엉키게 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하라는 것은 아니니 반년 안에 진법실력을 더욱 높여라. 추수가 끝나고 시간이 되면 나와 함께 가서 보자구나."

  “영주님이 원하시는 실력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오늘은 이만 가보아라.”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진법으로 시간을 벌고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완하려는 가르딘이었다. 한두 번 부서지는 것은 괜찮지만 계속 공격받고 무너지면 곤란했다.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몬스터, 마수의 침입이 있은 후 동기들의 잇단 항의에 시달려야 했던 가르딘이었다. 그런 항의를 무마하기 위해서 가르딘은 떡밥을 던져 놓았다. 그 떡밥은 대단히 중독성이 강해서 아직도 유효했다.

  먹는 즉시 다시 뱉을 수 없는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르딘이 고려한 것이 바로 검술이었다. 킹덤나이트에서 배우는 스톰 검법과 일렉트릭 검법은 모두 초대 카이로만 제국의 황제인 카이로만 대제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실 그랜드 마스터라고 알려진 카이로만 대제는 스톰 검법과 일렉트릭 검법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는 다르게 배우는 자들은 동시에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카이로만 대제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전수를 한 것이다. 이후에 킹덤나이트의 정규코스로 정해져서 바뀌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익혀 왔기에 킹덤나이트 출신들은 스톰 검법 과 일렉트릭 검법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한 것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것은 힘들었다.

  가르딘은 신마의 기억 속에 자리한 도법을 기억해 내었다. 바로 뇌전폭풍도법이었다. 빠름과 강함을 동시에 추구한 하나의 도법이다. 스톰 검법과 일렉트릭 검법의 정수를 한가지로 혼합시켜 놓은 도법이기에 그 위력은 대단했다. 카이로만 대제는 검법의 핵심 정수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적어 놓지 못했다. 그로 인해서 가르치지 못했지만 가르딘은 달랐다. 이미 정수를 제대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다음으로 킹덤나이트의 비전 오러 심법인 카이만 심법을 손봐주었다. 뇌전폭풍도법을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이동경로로 바꾸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가르딘의 경우 천룡무상신공이 있기에 어떤 검법이나 도법을 펼쳐도 상관없지만 필리언, 갈라, 유타는 달랐다. 그들의 실력을 높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행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이었다.

  뇌전폭풍심법이라고 그냥 이름 붙였다. 갖다 붙일 이름이 딱히 없고, 이름이 실력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기에 성의 없이 붙인 가르딘이었다.

  진기의 이동을 강제적으로 바꾸어주는 작업을 펼친 가르딘의 놀라운 능력에 필리언, 갈라, 유타는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것보다 가르딘이 훨씬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부터 동기들은 가르딘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가르딘이 진기타통을 시켜준 후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막혀 있었던 오러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에 이르게 된 세 명이었다. 실력이 이토록 상승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잔말 말고 따라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휘이이잉!

  파아아아앙!

  필리언의 검이 일직선으로 내리쳐졌다. 검 주위에 미세한 바람과 뇌전이 서려 있었다. 내리쳐지는 순간에 유타가 검을 들어 막아내었다. 둘 다 뇌전과 바람이 조금씩 서리게 되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진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실력이 점차 높아진다는 말과 같았다. 만약 대성한다면 폭풍과 같은 바람과 섬전과 같은 뇌전이 서리게 될 것이다.

  가르딘은 동기들이 기사단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이 중요했다. 처음 자세를 잘 잡아주어야 쓸데없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기초를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틀어지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다시 잡아 주기 더욱 힘들다. 그래서 가르딘은 착실하게 지켜보며 자세를 잡아주었다.

  뇌전폭풍도법은 1초식 천뢰섬, 2초식 와선광천, 3초식 폭풍뢰, 4초식 참풍멸마의 총 4식으로 되어 있었다. 한자로 되어 있는 단어를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기에 초식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동작을 보여주었다. 놀랍도록 빠르고 폭풍처럼 강한 도법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일이었다. 사실 백번 읽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효과 만빵이었다.

  가르딘이 지켜보고 있자 필리언, 유타, 갈라가 땀을 닦고 다가왔다.

  “정말 대단한 검법이야.”

  “너 어디서 이런 검법을 배운 거냐?'’

  동기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가르딘은 어디에서 구했다고 말을 하기 힘들었다. 신마의 사념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둘러대는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구비해야 할 이야기를 준비해 놓았다.

  “정말 너희들은 바보들이구나!”

  “뭐야! 조금 띄워줬더니 건방져!”

  “잘 생각해 봐라, 일렉트릭 검법과 스톰 검법을 익힌 너희들이 익히는데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원래부터 익히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녹아들고 있었다. 새로운 검법은 몸이 저절로 반응하도록 익히면서 수만 번 반복해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몇 번의 동작만으로 몸에 착착 감겨 붙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설마 이게 일렉트릭 검법과 스톰 검법을 합친 거야!”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사실 이것은 비밀인데, 킹덤나이트 도서관에서 카이로만 대제가 사용했던 검의 정수를 발견했거든. 내가 그 정수를 발견해서 수련했더니 금세 실력이 쑥쑥 커가더라고.”

  필리언, 갈라, 유타는 무지하게 놀라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카이로만 대제였다. 그가 남겨둔 검법이 일렉트릭 검법과 스톰 검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랜드 마스터 에 이른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밝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가르딘이 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다. 공증을 받고 싶어도 증명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천 년 전에 죽었으니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렇게나 지어내고 꿰맞추는 가르딘이었다. 그런 가르딘이 놓친 부분이 있었다.

  “가만 킹덤나이트 시절이라면 같이 학교 다닐 때잖아, 그럼 그때부터 이 좋은 것을 혼자만 수련했다는 말이야!”

  역시 갈라였다.

  핵심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왔다. 이야기의 허점을 모두 파악했다고 자부한 가르딘이었지만 친구 간의 우정을 놓치고 말았다. 대실수였다. 상황반전을 초래할 수 있는 위기가 다가왔다.

  “네 놈은 친구도 아니야!”

  “맞아, 저 이기적인 놈!”

  “어쩐지 쥐뿔도 없는 놈이 마스터가 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가르딘은 위기에 몰려서도 다시 한 번 상황반전을 노렸다.

  “어, 자꾸 이렇게 나오면 다음 검술을 안 가르쳐준다.”

  치사하게 나올수록 더 치사한 가르딘이다. 필리언, 갈라, 유타가 금세 입을 닫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다음 검술이 뭐냐?”

  “그래, 친구끼리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농담이야!”

  “너희들 하는 것 봐서 알려주지.”

  가르딘은 입을 열 생각이 없다. 이미 다 가르쳐주었으니 다음 검술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놓으면 다음 검술이 있는 줄 알고 알아서 행동을 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직 멀었다. 이놈들아!’

  가르딘은 동기들에게 수련만 하지 말고 기사단 훈련도 하고, 기사를 새로 뽑을 생각을 하도록 지시했다.

  병사들의 훈련까지 동기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나니 막상 가르딘은 할 게 없어졌다. 이제야말로 가르딘에게는 황금과 같은 시간이다.

  가족과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가르딘은 콧노래를 부르며 라이나와 브리안에게 걸어갔다.

  한동안 발키리 영지는 조용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발키리 영지의 주력이자 밀농사의 근간이 될 수 있고, 모든 주민들의 식수원이 되는 곳인. 수로가 마르고 있었다. 발키리 영지가 개척되고 난 후 처음으로 겪는 일에 영지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신이 재앙을 내리지 않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홍수를 모두 신의 뜻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르딘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인해 머리가 아파왔다. 하필이면 자신이 오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당연히 물이 있어야 한다. 물 은 만물의 근원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물이 없이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르딘은 즉시 수로로 가보았다.

  대수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수로가 존재했다. 수로가 갈리는 곳마다 저수지가 있어서 그 안의 저장한 물을 생활수와 농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대수로에 있었다. 대수로로 흘러 들어오는 물의 양이 현격히 줄었다. 이 상태로 계속 지나면 농사철이 지나게 된다. 수확량이 주는 것이 아니라 농사자체가 망한다고 보면 되었다.

  “심각한 거냐?”

  옆에 있는 슈안에게 물었다.

  “이 정도 물로는 식수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보기에도 많이 줄었다.

  바닥이 거의 보일랑 말랑 할 정도다. 가르딘은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크랜드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위험한 다크랜드로 기사들을 이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발키리 영지 최악의 재앙이 될 것이다. 밀농사를 망치면 주민들이 굶어죽는다. 또한 이로 인해 세금이 걷히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라에 낼 세금이 부족하게 된다. 그럼 제국에서 가르딘을 무능한 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오러 마스터이기에 내치지는 않겠지만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기 힘들다.

  다크랜드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비가 왔는데도 물이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아무도 몰래 가보아야겠군.’

  하루 정도 집무를 마치고 난 후 동기들에게 미리 말을 나누었다.

  다크랜드에 갔다 올 테니 다른 사람들이 물으면 알아서 대답 잘 해줘라.”

  “뭐, 그 위험한데 가겠다고."

  “그럼 어쩌냐, 물이 나오는 곳이 다크랜드인데! 가서 확인 해야지.”

  필리언, 갈라, 유타는 차마 같이 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가지 말라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잘못 말했다가는 같이 가자고 할까봐 겁이 나서 하는 말이었다. 필리언, 갈라, 유타에게도 다크랜드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너희들 나 알잖아! 위험하면 바로 도망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오러 마스터니 우리들보다 낫겠지.”

  “곧 돌아올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다.”

  “알았어,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라.”

  가르딘은 변장을 하고 난 후 빠르게 이동했다. 성벽의 높이가 10미터가 넘지만 그 정도 높이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넘어 반대편으로 착지했다.

  착!

  착지한 한 후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10점!’

  누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완벽한 착지였다는 뜻이었다.

  “역시 완벽해!”

  가르딘은 그 즉시 다크랜드로 달려갔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이곳을 모두 다크랜드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적으로 제국영토의 사분지 일에 해당하는 지역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다크랜드의 크기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워낙 위험한 지역이라 들어가는 것 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르딘은 평야를 뛰어 가면서 생각했다.

  ‘이 땅을 개간하면 정말 엄청난 양을 생산할 텐데.’

  제국에서 세 번째가 아니라 대륙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영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제국에는 제대로 보고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돈을 가르딘의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면 평생 떵떵거리며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꿈은 깨지라고 있는 거니까. 포기!”

  누가 감히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는가! 꿈은 꿈일 뿐이다. 개꿈에 목매어서 사는 것 자체가 불쌍한 인생군상들이다.

  가르딘이 한참을 안으로 들어갔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수로로 들어오는 물길이 있기에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되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괜히 몬스터들과 시비 걸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귀찮을 뿐이다.

   “크르릉!”

  쿠쿵! 쿠쿵!

  아직 외곽이기는 하지만 영지에서는 한참이나 멀어진 거리였다. 가르딘의 앞으로 5미터에 달하는 괴물이 서 있었다.

  “이런!”

  기척을 죽인다고 했지만 냄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머리는 소처럼 생기고 몸은 거대한 오우거와 같다. 대형몬스터 중에서도 상급의 몬스터인 미노타우르스였다. 힘과 단단함에 있어서 오우거보다 더욱 강한 녀석이었다.

  “머리는 소면서 냄새는 개처럼 잘 맞는구나!”

  소 주제에 냄새를 따라왔다는 말이다. 조용히 접근한다고 하지만 워낙 큰 덩치라 발걸음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았다.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은 놈이기에 단 한 번에 끝을 내버릴 생각을 했다.

  사사삭! 쌔애앵!

  빛살처럼 빠른 가르딘이었다. 순간적으로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어차피 몬스터에게 인정을 봐주느니, 동물들을 사랑하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가르딘의 오른손이 검손잡이를 잡았다. 검과 검집에 힘이 응축되었다.

  사아아아아악!

  검집에서 빠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무섭도록 빠른 발검이었다. 응축된 힘을 한 번에 폭사시키는 일검필살의 발검술이다.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기우뚱! 쿠쿵!

  주르르르르륵!

  미노타우르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반대쪽으로 넘어간 가르딘이 검을 검집에 다시 넣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목이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주인을 잃은 몸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폭포수처럼 많은 핏물이 사방을 적셨다. 곧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몰려들 것이다. 보통은 대형몬스터를 건드리지 않지만 부상당했거나 죽었다면 상황이 다르다. 순식간에 몰려들어 잡아먹으려는 속성이 있었다.

  가르딘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으로 보았다.

  물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물길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헤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물길은 제법 커서 강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물길은 물이 줄어서 길만 남겨져 있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보였다.

  물이 잘 흘러 내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강폭이 줄어들어 있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한참을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멀었다.

  낮에 출발해서 저녁이 되서야 비로써 그 끝이 보였다. 물론 완전 끝은 아니었다.

  가르딘은 물길에서 벗어나 산으로 더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주변을 보았다. 엄청난 크기의 호수가 형성이 되어 있었다. 주변 경관과 호수에서 생기는 안개로 인해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호수의 한쪽에 누군가 수문을 만들어서 물이 흘러 내려가지 않게 만들었다.

 엄청난 크기의 수문이었다.

  성벽을 통째로 지어서 막아놓았다. 다크랜드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기분이 들게 만드는 수문이 있었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거야!”

  수문으로 인해 계곡이 막히는 바람에 발키리 영지의 수로가 말라버린 것이다. 어떤 자식이 했건 말건 저 수문을 부숴야 하는 가르딘이었다.

  “참 가지가지 하게 만드네!”

  수문은 열고 닫을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문의 맨 아래에 적게 물이 흐르게 해서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부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수문은 커도 너무 컸다. 일반적인 검질으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있는 수문이 아니었다.

  가르딘은 몸 안의 기운을 활성화시켰다. 활성화된 천룡무상신공의 기운이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갔다. 순식간에 전신에 충만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가르딘이 검을 뽑아 들었다. 뽑아 든 검신이 부르르 떨더니 검 끝에서 또 하나의 검이 형성되었다.

  검의 절대경지인 오러 블레이드였다. 1미터를 뽑아만 내도 굉장한 능력이라고 평가받는 오러 블레이드가 10미터에 달하는 크기까지 늘어났다.

  가르딘은 뽑아낸 오러 블레이드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휘둘렸다. 수문의 크기를 생각하고 적당한 지점을 찾아 오러 블레이드를 날린 것이다. 가르딘에게 거리는 상관없었다. 거리를 격하고 날아가는 오러 블레이드였다.

  사아아악! 사아아악!

  대지를 가르는 듯한 기운이 공간을 일순간에 갈랐다. 오러 블레이드는 사선과 사선이 교차되듯이 수문을 베어버렸다. 무섭도록 날카로우며 강력한 2검이었다. 단 두 번의 검질이 끝나고 나서 검을 다시 검집에 넣는 가르딘이었다.

 수문은 잠시 동안 아무렇지 않았다.

  쩌저저적! 치지지지직!

  쇠와 쇠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수문의 크기가 너무 크고 넓어서 소리가 상당히 컸다. 쇠로 된 수문의 한쪽이 어긋나더니 점차적으로 밀려 내려왔다. 밀려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투과과과광! 푸아아아아앙!

  더 이상 수압을 버티지 못한 수문이 무너지더니 그 안에 가득찬 물이 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가르딘은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시원하게 내려가거라.”

  가르딘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소리가 정말 시원하면서도 압도적이었다. 한 번에 쏟아지는 물은 어느 거력보다 대단한 광경을 연출했다.

  일을 마친 가르딘은 산뜻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찌릿!

  가르딘의 감각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무섭도록 강력한 기운이었다. 가르딘 생애에 이토록 무서운 기운은 처음이었다.

  “뭐지?”

  몬스터와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다크랜드라고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가르딘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기운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위험한 기운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가르딘은 전신의 모든 털들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르딘은 긴장감이 드는 순간 날카롭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언제라도 검을 출수할 수 있도록 검의 그립(손잡이)을 잡았다.

  가르딘은 긴장했지만 긴장으로 인해 몸이 무뎌지지 않도록 했다. 불안감과 초조는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슈웅!

  가르딘의 20미터 앞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공간이동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마법사들일 가능성이 컸다.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힘의 크기를 재보던 가르딘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감지했다.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지니고 있는 힘이 너무 크다!’

  갑작스럽게 다크랜드에 가르딘 이외의 또 다른 인간(?)이 나타났다.

  금발의 청년은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무너진 수문을 보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수문을 보다가 가르딘을 보았다.

  치지직!

  가르딘과 금발의 청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전신에 전율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천둥이 치고 뇌전이 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르딘은 놀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상대는 한명도 없었다. 일대일로 붙어서 진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가르딘이 이제까지 능글능글하게 생활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실력이었다. 실력만 놓고 보면 코카 제국의 기사단을 혼자서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는 감정보다는 두근거림이 더욱 컸다. 물론 진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금발의 청년.

  다크랜드의 주인이자 모든 존재들의 상위에 서 있는 고룡 라이젠이었다.

  라이젠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르딘이 가진 힘의 크기를 생각하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어찌 이런 거대한 기운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라이젠은 가르딘이 인간이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했다. 인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강한 힘이었다. 이만한 힘이라면 자신의 딸인 안젤리카조차 당할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안젤리카가 웜급의 성인드래곤이라고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이 자리에 딸이 있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라이젠은 분노했다. 딸을 위해 마련한 호수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딸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분노였다.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딸의 안식처를 망가뜨린 네놈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라이젠이 아니었지만 침입한 인간을 가만히 둘 정도로 착한 드래곤은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집안까지 침입해서 물건을 부수는 인간을 가만히 둘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르딘은 금발의 청년이 가진 힘이 너무 강하다는 것과 기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뭘 했다고 분노하는 거야! 설마 저 수문을 부쉈다고 이러는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가르딘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애송이가 화를 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며 호되게 야단치겠지만 상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꽈악!

   검의 그립을 강하게 움켜잡은 가르딘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르딘이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공격이 날아왔다.

  슈슈슈슉! 카카캉! 카카캉!

  무섭도록 빠르고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마치 바람을 압축하여 칼날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칼날이 가르딘의 전신을 조각내듯이 날아왔다. 가르딘은 그 즉시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시켜 바람의 칼날을 막아내었다.

  라이젠이 날린 기운은 6서클 마법인 원드 블레이드(바람의 칼날)였다.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은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과 질적으로 엄청난 괴리감이 존재했다. 1서클이라고 해도 인간이 만들어낸 마법으로 막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물며 6서클의 마법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르딘은 한순간에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검막을 시전했다. 공간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는 가공할 검의 기술이었다.

  모든 기운을 한순간에 와해시켜 버린 가르딘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대화로 풀어질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다짜고짜 공격하는 인간을 상대로 끝까지 말로 한다는 것 자체 가 어리석은 일이다. 가르딘도 마음을 먹자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었다. 죽이겠다는 필생의 의지가 서려있다.

  ‘네가 누구건 상관없다! 이제부터는 생사대결이다!’

  라이젠은 처음의 공격으로 끝낼 수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드래곤에게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고작 6서클 마법에 당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상대의 역량이 과연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를 시험한 것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8서클의 마법을 준비했다.

  “아무리 네놈이 강해도...아니!”

  바로 앞에서 윈드 블레이드를 막아내던 인간이 발을 내딛자 사라졌다. 가르딘이 삽시간에 사라지자 그 즉시 공간을 탐색했다.

  라이젠의 기감으로도 가까스로 잡힐 정도로 미세했다. 드래곤의 감각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기척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가르딘이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나타난 가르딘의 검이 아래서 위로 그어졌다.

  무극칠검식의 제2절초인 일격참뢰였다. 일전에 벤투스를 상대할 때와는 위력자체가 달랐다. 극성의 섬전보를 통해 얻어진 힘과 속력을 검에 담아 휘둘렸다. 빛을 가르는 일격참뢰였다.

  사아악! 치이잉!

  퍼어어엉!

  가르딘은 검이 막혔다는 것을 알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보통을 넘었다.

  주르륵!

  뒤로 한참이나 밀려난 라이젠의 눈가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본능적으로 앱솔루트배리어(절대방어)를 시용하지 않았다면 몸이 이등분이 되어버릴 뻔했다.

  “네...놈은 도대체?”

  가르딘은 라이젠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번의 공격이 막혔다고 해서 애써 잡은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가르딘의 파상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마법사에게 거리를 준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앱솔루트배리어를 삼중으로 펼쳐서야 겨우 막아내었다. 다시 이어지는 공격으로 인해 라이젠은 정신이 없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할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가르딘은 처음으로 천룡무상신공의 힘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이익!

  라이젠은 고룡이었다. 오랜 시간 살아온 라이젠이 인간의 공격에 당황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속적으로 펼치는 가르딘의 공격은 피할 사각을 모두 배제하게 만들었다. 무섭도록 빠르면서도 까다로웠다.

  ‘빠르다!’

  ‘놀랍도록 강하다!’

  둘의 생각이 같았다.

  라이젠은 가르딘의 공격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절대정지마법을 걸었다.

  -앱솔루트 홀드(절대정지).

  멈칫!

  “이런!”

  라이젠의 용언마법으로 인해 가르딘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그사이에 라이젠이 거리를 벌려 위로 솟구쳐 올랐다. 인간의 능력으로 하늘에서는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르딘은 마법이 걸리는 순간에 천룡무상신공을 극성으로 운기했다. 기운이 운기되자 가로막았던 기운을 무너뜨렸다.

  하늘로 솟아오른 라이젠이 고서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헬버스터(지옥의 광선)를 시작으로 윈드 익스플로젼(바람의 폭염)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마법은 엄청난 기운을 함축 하고 있었다.

  “지옥을 구경하며 죽어라!”

  -헬파이어(지옥의 불길).

  지글! 지글!

  가르딘은 주변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천룡신의 경지에 이른 가르딘의 몸은 한서불침이었다. 한서불침인 가르딘이 뜨거움을 느낄 정도의 기운이었다.

  ‘잠깐! 헬파...이어! 설마!’

  헬파이어는 불계열 마법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9서클의 마법이었다. 인간이 9서클 마법을 마구잡이로 날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고서클의 마법을 연속적으로 주문영창도 없이 날렸다. 이것만 봐도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9서클 마법을 주저 없이 날린다는 생각이 들자 가르딘은 그제야 뒷골이 땡겨왔다.

  ‘드...래곤!’

  일생에 한 번 보기 힘든 드래곤이 여기에 나타났다. 가르딘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왜 드래곤이 수문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곳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제는 물러서지도 못한다. 드래곤에 대한 기초적인 소문은 광폭함이었다.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고 전해졌다.

  ‘내 가족을 위해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가르딘은 책임감을 절실하게 느꼈다. 여기서 지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영지를 받고 오붓하게 살려던 계획이 모두 어긋나게 된다. 이대로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이 아닌가!

  꽈과광! 주르르륵! 꽈과광! 주르르륵!

  라이젠은 10여 개의 헬파이어를 형성시켜 가르딘에게 날렸다. 가르딘은 날아오는 헬파이어를 검으로 교묘하게 쳐내면서 빠르게 섬전보를 운용해 나갔다. 헬파이어의 중심을 흩트려 놓는 고단위의 검술이었다. 헬파이어의 위력은 대단했다. 지면에 닿자마자 터지더니 주변을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녹였다. 녹은 지형지물이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라이젠은 기가 막혔다.

  헬파이어를 저런 식으로 막아낸다는 것과 무섭도록 빠른 가르딘의 움직임에 놀라워했다.

  “인간이 저럴 수도 있는 건가!”

  아직 본체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자존심이었다. 인간에게 본체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르딘은 본체로 돌아가지 않는 라이젠의 행동에 안심했다. 드래곤의 마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은 역시나 본체였다. 약간의 방심이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가르딘은 힘겹게 피하는 척하면서 천룡무상신공을 극성으로 운기하여 무극칠검식의 5절초인 파천멸환을 시전할 때를 기다렸다.

  파천멸환은 검환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응축시켜 동그란 원형의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 점에 힘을 극대로 모아 검환을 형성시켜 라이젠을 향해 뛰어들었다.

  섬전행을 사용했다. 섬전행이 극성에 이르면 어풍비행술이 가능했다. 어풍비행술은 대기 중에 흐르는 기운을 따라서 날아갈 수 있는 기술이었다.

  라이젠의 헬파이어와 더불어서 날아오는 스톰 블레이드(폭풍의 칼날)를 딛고 날아오른 것이다. 상대의 공격을 타고 날아오르자 바로 허점이 노출되었다.

 공격에 집중한 라이젠은 순간적으로 날아오른 가르딘의 신형을 잡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가르딘의 검에서 파천멸환이 펼쳐졌다.

  퍼어어어어어엉!

  대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천멸환의 폭발력은 대단했다. 모든 것을 부서뜨리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크으으윽!

  라이젠의 절대방어는 소용없었다. 파천멸환은 하늘마저 부수는 기운이었다. 아무리 강한 방어마법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비명성과 더불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라이젠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가르딘도 떨어져 내려가는 라이젠을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죽이지 않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죽여야 한다!”

  가르딘도 필사적이었다. 본체로 헌신하는 것만은 절대사양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진정으로 목숨 걸어야 한다. 일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

  쿠우웅!

  바닥에 내리꽂힌 라이젠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오른쪽 팔 부분을 시작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파천멸환의 파괴력으로 인해 상체의 삼분지 일 정도가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면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드래곤이었다.

  라이젠은 절망했다. 한순간 방심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인간이 이처럼 강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상대는 절대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 놈이었다. 어느새 내려온 가르딘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고 했다. 라이젠은 죽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안...젤리카!”

  딸의 얼굴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멈춰요!

  멈칫!

   가르딘의 검이 라이젠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조금만 더 가면 목을 잘라버 릴 수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애달프게 소리를 질렀다. 소리의 발생지를 돌아본 가르딘은 그녀 역시 범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풍기는 기운이 쓰러져 있는 드래곤과 같았다.

  같이 덤비면 곤란했다. 애절한 목소리에 멈추기는 했지만 위험상황이었다.

  “그만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어요!”

  안젤리카가 나타나서 가르딘에게 부탁했다.

  쓰러져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라이젠은 절망했다. 이 인간이 마음 독하게 먹으면 자신을 죽이고, 안젤리카 역시 죽일 수 있었다.

  “안젤...리카야! 어...서 도망쳐라. 아비는 괜찮으니 어서!”

  “안 돼요. 어떻게 아빠를 두고 갈 수 있어요! 저는 죽어도 못해요!”

  “어서 가거라! 어...서!”

  드래곤 부녀의 눈물겹도록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런!’

  가르딘이 순식간에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원래 이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상황이 이상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불한당이 부녀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가르딘은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직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저 부녀가 속이는 것이라면 문제가 컸다.

  “도대체 날 공격한 이유가 뭡니까?”

  가르딘은 이유나 알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라이젠은 아직 회복이 덜 되었지만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네놈이 내 귀여운 딸의 목욕탕을 부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 딸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네놈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느냐!”

  ‘응, 목욕탕?’

  목욕탕은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위생시설이다. 보통 크더라도 방 한 칸 정도가 대부분이다. 누가 호수를 목욕탕이라고 표현하겠는가! 그렇기에 선뜻 매치가 되지 않는 가르딘이었다.

  “설마, 저 큰 호수가 목욕탕!”

  가르딘은 머리가 아파왔다. 설마 하는 생각이 사실이었다. 고작 목욕탕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었다.

  ‘그럼 뭐야? 목욕탕을 만들어서 물이 마른 거라는 거네. 제기랄!’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그저 목욕탕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발키리 영지에서는 대재앙에 버금갔다. 생명줄인 물이 말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젠은 계속 말을 했다.

  “본...체로 돌아가지...않은 것이 억울할 뿐이다.”

  가르딘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래곤을 죽인다고 일이 끝나는 것 같지 않았다. 가르딘이 알기에 성인이 된 드래곤은 모두 개개인의 생활을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는 달랐다.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니 인간하고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만약 여기 드래곤을 죽이고 난 후 다른 드래곤이 덤벼온다면 그것도 골치 아팠다. 차라리 설명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물론 아직도 검은 라이젠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위험 상황이니 말이다.

  “우선 이름이나 알죠. 참고로 저는 가르딘 카이로스라고하며 카이로만 제국의 백작입니다.”

   “누가 네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느냐!”

  스윽!

  가르딘이 검을 라이젠의 목에 좀 더 가까이 갖다 대었다.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라이젠의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라이젠 크라이스고, 제 이름은 안젤리카 크라이스예요! 그러니 그러지 마세요!”

  보다 못한 안젤리카가 통성명을 해주었다. 가르딘이 조금만 더 움직이면 라이젠의 목을 자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화란 것이 원래 편안한 분위기에서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참고로 아직 검을 치워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라이젠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화를 토해내지는 않았다. 라이젠도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딸을 놔두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자신이 죽으면 안젤리카도 위험했다.

  우선은 가르딘이 대화하자는 말에 어느 정도 안심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가르딘은 왜 이곳까지 와서 드래곤을 상대해야 했는지를 설명해나갔다. 가르딘의 설명능력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자기식대로의 해석이 강하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유리한 설명을 할뿐이다. 불리한 단어나 문체는 이미 빼버리고 없는 상태였다. 전적으로 유리하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을 절대 놓치지는 않았다.

  설명을 들을수록 라이젠과 안젤리카는 왜 이렇게 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목욕탕을 만들었을 뿐인데,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재앙이 되었다. 간단한 것이지만 가르딘의 말에는 과장이 심하게 섞여 있었다.

  “고로 제가 불가피하게 수문을 부순 겁니다. 저는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영지의 주인이 됐는데 영지민들이 굶어죽는 것을 어떻게 봅니까, 저는 명확한 대의를 갖고 영지민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가족의 안전과 개인의 영달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그...런가!”

  “어쩜, 정말 미안해요!”

  라이젠과 안젤리카가 설득당해 버렸다. 가르딘의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말에 낚여 버린 것이다. 그래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겉으로 인정하는 척하지만 뒤로 똥 쌀지 몰랐다. 이미 나온 똥은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그곳에 사람들이 사는지 몰랐다. 알았다면 굳이 이곳에 호수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젠은 2천 년 만에 깨어났다. 그 기간 동안 한번정도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고, 다크랜드 주변에 영지가 생겨난 줄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라이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뿐이었다.

  “호수를 만들지 않...도록 하겠다. 그러니 이 검을 치웠으면 한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오해는 풀렸잖아요. 아버지를 놓아주세요!”

  가르딘은 다짐이 필요했다.

  “드래곤은 언약이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이후로 저와 발키리 영지를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해 주십시오.”

   라이젠과 안젤리카는 조금 놀랐다. 가르딘이 무리한 요구를 할 줄 알았다. 드래곤의 목숨을 가지고 수많은 금은보화나 세상을 정복해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들어준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말이었다.

  “나 라이젠 크라이스는 가르딘 카이로스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신이신 라이니언께서 정해놓은 율법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저도 같아요!”

  그제야 가르딘도 검을 치웠다.

  아주 힘겨운 일을 끝낸 것이었다.

  ‘오늘 십년감수했다.’

  목숨이 한 20년은 절단 난 것만 같았다.

  안젤리카가 라이젠에게 다가가서 힐링마법을 시전해 주었다. 원래 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스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마음을 받는 라이젠이었다.

  완벽하게 부활한 라이젠이 일어섰다.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원래 오해라는 게 작지만 크게 되는 성향이 있는 겁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게 풀려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습니다.”

  가르딘은 드래곤을 다르게 보았다. 처음의 폭력성과 다르게 말을 섞어 보니 이해를 하고 사과를 할 줄 알았다.

  ‘사람이 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드래곤이 된 드래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성격은 생각보다 폭력적이지 않았다. 성급한 판단이 조금 문제이기는 하지만 딸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가르딘도 그와 별반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과하는 기념으로 자네를 내 레어에 초대하고 싶네."

  움찔!

  이것은 조금 다른 상황이다. 초대한다고 해도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가르딘이 망설이자 안젤리카가 부탁했다.

  “같이 가세요, 제가 맛있는 음식과 차를 대접할게요.”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하면 나중에 뒤탈이 있을까 겁이 난다. 대화는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도 중요하다. 잘되다가 똥물에 빠트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맛있는 음식이 나는 아니겠지.’

  설마 하는 심정과 더불어 불안감이 작용했지만 수락하는 가르딘이었다.

  “좋습니다. 같이 가서 담화를 나누어 보지요.”

  “잘 생각했네. 그럼 가볼까."

  -워프(공간이동).

  라이젠이 공간이동마법을 시전하자 안젤리카와 가르딘을 동시에 이동시켰다. 역시 마법의 조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말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생물이었다.

  라이젠의 레어로 이동을 한 가르딘은 레어 주변을 보며 놀라야 했다.

  생각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성처럼 큰 레어였다. 그 안에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오밀조밀한 면도 보였다. 사람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저택이 통째로 안에 들어가 있었다.

  “대단하군요. 사람 중에 드래곤 레어에 초대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일 겁니다.”

  “그렇지는 않다네, 아주 오래전에 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

  “그렇습니까, 그래도 두 번째라는데 자부심이 무럭무럭 생깁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 가볍게 농담을 했다.

   어차피 굳어진 상태에서는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상대를 어려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너무 어려워하면 대화단절의 시초가 된다.

  “저는 차를 가져올게요."

  안젤리카가 직접 차를 내온다고 하며 주방으로 갔다. 주방도 인간들처럼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원래 차를 직접 만듭니까?”

  “가끔씩 마시는데 차가 어찌나 맛있는지 나도 모르게 10잔은 마신다네. 허허허!”

  ‘나랑 같은 과다!’

  자식 자랑하는 특성을 보자 즉시 동류의식이 생겨났다. 가르딘도 자식 자랑하는데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제 딸도 가끔씩 쿠키를 구워 오는데 그게 얼마나 맛있는지 입에서 사르르 녹습니다. 한번 맛보면 이거 아니면 못 먹게 됩니다. 식사 대신으로 사용되는 중독성 있는 과자를 아주 잘 만듭니다.”

  “음, 내 딸아이가 만드는 수프는 입에 넣자마자 안으로 들어가서 온몸에 기운을 불끈 나게 만든다네. 아마 한번 맛보면 자네는 잠을 이루지 못할 걸세."

  한번 시작한 팔불출 아버지의 자랑은 끝이 없었다.

  드래곤 팔불출과 인간 팔불출의 대결과 같았다. 누구 딸이 더 똑똑한지, 아니면 더 귀여운지 대결이었다. 이 대결에서 지고 싶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꿈틀!

  서로의 대화가 화기애애함을 넘어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과 같았다. 한참동안 끝 모를 딸 자랑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안젤리카가 들어와서 그만 하라고 했다. 같이 있기 부끄럽기까지 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자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둘 다 그만 하세요. 어떻게 하는 짓이 이렇게 똑같죠.”

  안젤리카는 가르딘과 라이젠을 보면서 혼동이 왔다. 아버지와 저처럼 똑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물론 인간을 본 적이 없으니 다른 인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는 못했다.

  “내 딸이 더 예쁘네!”

  “제 딸이 더 예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딸이 더 예쁘다니까!”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니 제 딸이 더 예쁘다는 것으로 끝내지요!”

  빠직!

  안젤리카의 이마에 힘줄이 생겼다. 보통 때는 귀엽고 말 잘 듣는 안젤리카지만 수틀리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만 하라는 말 못 들었어요. 둘 다!”

  가르딘과 라이젠 모두 움찔거리며 입을 닫았다. 더 했다가는 피 볼 수 있다는 공통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뜨거운 차에 혀가 타는 줄도 모르고 마셔버렸다.

  후르륵! 후르륵!

  “차가 무척이나 맛있습니다.”

  “그러게 오늘따라 차 맛이 좋군. 어서 들게나!”

  가르딘과 라이젠이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다시 음식을 하러 주방으로 들어가는 안젤리카를 보고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조율자가 사라진 사내들의 입은 가볍기까지 했다. 지나가는 미풍에 날아갈 정도로 가볍다.

  “수면기에서 깨어나셨다고 했는데,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네.”

   가르딘은 들으면 들을수록 순서가 맞추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드래곤이 깨어나서 한 일을 생각하자 발키리 영지에 몬스터와 마수들이 침입한 사건들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었다.

  ‘설마!’

  가르딘은 정말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대하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드래곤이 한 일은 별거 아니었다. 별 거 아닌 일이 인간에게는 대재앙이 되었다.

  “혹시 수면기에서 일어나면 드래곤 피어가 발생합니까?”

  “처음 깰 때는 자연적으로 나오는 현상이네. 모든 종족이 그렇듯이 자기 방어와 종족의 굴레를 확인시키는 본능적인 것이지. 그런데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보는 건가?”

  확실히 특이했다.

  드래곤의 마법이나 브레스, 보물 등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드래곤의 수면기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어디에 레어를 짓는지 물어보는 것은 이상했다.

  가르딘은 그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발키리 영지에 벌어진 몬스터, 마수들의 대침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 말 이다.

  설명을 들을수록 불리하게 돌아가는 라이젠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수많은 인명, 재산 피해를 냈다는 말이 아닌가!

  “그건, 미안하게 됐군.”

  “괜찮습니다. 원래 이 대지의 주인은 라이젠님이 아니십니까.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의 책임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아야 하는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혼탁하고 모진 세상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다 아프군요...등등!”

  가르딘은 라이젠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과 더불어서 아버지로의 입장과 자식의 입장을 교묘히 섞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라이젠이 미안해지고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에 라이젠이 반박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 다 있다니! 허참!’

  놀랍기까지 한 라이젠이었다. 드래곤 앞에서 이처럼 말 많은 녀석은 용생에 처음이었다.

  “원하는 게 뭔가?’

  결론은 하나였다.

  “없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들어 주겠네!”

  “저는 사사로이 무언가를 바라는 소인배가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의 고통이......"

  짜증이 나는 라이젠이 말을 끊었다.

  “아아! 그만 알았으니 말해 보게.”

  “라이젠님께서 그토록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드래곤 체면이 있지 그렇게까지 사정조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쏙 들어가게 만드는 가르딘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아니네, 그냥 부탁이라고 하고 말해 보게.”

  가르딘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별것 아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한 것을 말해 보았다.

  “그러니까, 자네 아내와 딸을 위한 좋은 마법아이템을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좀 전까지 대의와 영지민들을 위한다는 말은 무언가?”

   “그건 부수적인 것입니다. 저와 제 가족이 안전해야 영지가 안전한 것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말이 어째 이상한 것 같지만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구먼."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호마법과 위치마법 정도가 걸린 마법아이템을 달라고 한 가르딘이었다. 가르딘이 없을 때를 대비한 장치였다. 만약에라도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가르딘은 자신을 위한 마법아이템은 필요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드래곤이 떼거리로 덤비지 않는 이상 안전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안심이고 말이다.

  원하는 목적을 얻자 가르딘이 집 칭찬을 해주었다.

  “라이젠님은 마음이 참 넓으십니다. 그리고 집도 참 넓고 좋습니다. 화려한 가구들과 귀공품의 예술적인 선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자네가 보는 눈이 있구먼."

  물론 가르딘은 예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보는 눈이 그렇게 좋으면 라이나가 대륙 제일 미인으로 보이겠는가!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라이젠은 마냥 기분 좋게 대화를 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음식을 가져오는 안젤리카였다. 안젤리카가 가지고 온 것은 간단한 요리였다. 집의 규모와 화려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담백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인 것은 틀림없었다.

  “육질이 참 좋습니다.”

  “그럴 거예요. 전에 잡은 오우거 고기를 잘게 칼집을 내서 양념에 3일 동안 숙성시킨 것이니까요.”

  한참 잘 먹다가 가르딘의 이빨질이 멈추었다.

  잠시 착각한 것이 있는데,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의 식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가르딘의 실수였다.

  “왜 그러는가? 맛이 없나.”

  무섭게 노려보는 라이젠이었다. 차마 몬스터 고기를 싫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가르딘은 눈 딱 감고 다 먹어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자네가 잘 먹었다니 흡족하군."

  가르딘은 라이젠에게 집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왔는데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드래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다. 나중에 동기들에게 자랑 하며 말해 주거나, 브리안이 컸을 때 아버지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좋은 자료로 남을 것이다.

  안젤리카가 라이젠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라이젠이 가르딘에게 작은 구슬을 던져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잠시 혼자 둘러보게. 행여라도 길을 잃지 않을까 주는 통신구슬일세."

  위치추적마법까지 걸려 있는 미아방지통신구였다. 통신구슬을 받은 가르딘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제가 애도 아니고 이건 좀!”

  “자네 나이가 몇인가7’

  “38살입니다만.”

  “나는 8천살이 넘었네.” 

  “......”

   할 말 없게 만들었다. 8천 살에 비하면 자신은 어린애라는 말이었다. 가르딘은 두말하지 않고 라이젠의 뜻에 따랐다. 라이젠은 딸과의 오붓한 대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뭐냐?”

  “저도 이제 다 자랐잖아요.”

  “그렇지. 2천살이면 웜급에 달하니까."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아빠는 웜급일 때 어떤 일을 하셨나요?”

  “나야, 뭐 간단하게 인간 세상을 유희했...응? 설마 너 유희를 하고 싶다는 말이니?”

  “이제 유희를 해볼 때가 됐잖아요. 제가 유희도 못해 보고 사는 것을 아빠도 원하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라이젠은 망설여졌다. 레어를 곁에 짓는 것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유희를 하겠다고 한다. 들어주어야 하는 일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신도 했고, 선대 드래곤들도 다 해본 일이다. 인간 사회의 유희는 재미를 위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세상을 배우기 위한 일종의 교육이었다. 드래곤의 압도적인 힘으로 인해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다른 종족의 세상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 인간을 따라가겠다는 거니?”

  “저분은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악하다면 아버지와 저를 살려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겠지."

  대화를 나누어 보니 가벼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가르딘에 대해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라이젠이었다. 사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른 힘을 가진 인간이 세계정복 보다는 자신과 같이 가족을 돌보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보면 상식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세상에 딸을 내보내야 하는 아버지로서 옆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주는 것도 괜찮았다. 못 미더운 면을 떠나서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또한 거리도 가까운 곳이니 자신이 직접 안전을 책임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다.”

  “역시 아빠야, 허락해 주실 줄 알았어요!”

  쪽!

  안젤리카가 라이젠에게 안기더니 볼에 입을 맞추었다. 라이젠의 입가가 절로 벌어졌다 “이 녀석. 그렇게 좋니!”

  부녀의 오붓한 자리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지지지직! 라이젠님! 라이젠님! 나오십시오!

  통신구로 가르딘이 라이젠을 불렀다. 라이젠의 예상대로 가르딘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갔는지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우선은 가봐야겠구나.”

  라이젠과 안젤리카가 가르딘을 찾아 들어갔다.

  가르딘은 드래곤 부녀의 예상대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가르딘이 들어간 곳은 레어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간 외진 곳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 가 놀라운 일이었다.

  가르딘이 들어간 곳은 어두컴컴한 곳이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불이 없다고 해도 어둠을 투영할 수 있는 가르딘이었다.

  이곳으로 온 라이젠은 조금 당황했다. 이곳에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무기가 존재했다. 고대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만 들었을 뿐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모든 드래곤이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인가?’

  라이젠은 가르딘에게 이곳에 왜 온 것인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이거 저 줄 수 있습니까?”

  “안... 되네."

  가르딘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신이 만들어 놓은 최강의 무기이자 강력한 마장기였다. 골렘과는 다른 타이탄의 일종이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최강의 무기인 드래곤나이트였다. 드래곤조차 그 위력에 벌벌 떨던 시절이 있을 정도라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드래곤나이트는 움직인 적이 없다. 드래곤나이트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독특한 오러 심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실전이 되어버린 오러 심법이기에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라이젠이 이곳에 레어를 만들어 놓은 것도 선대부터 이어져온 드래곤나이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나타날 인물을 위해서 말이다. 드래곤이 만들어 놓은 고서에 의하면 드래곤의 기운을 가진 자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가르딘이 그걸 달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가르딘의 말이 가관이었다.

 “정말 안 되나요?”

 “저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네.”

 “물건이라니요?”

  가르딘이 가리킨 곳은 드래곤나이트가 아닌 그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가르딘이 보기에 드래곤나이트는 그저 골렘의 일종으로 보일 뿐이었다. 골렘이 비록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었다. 골렘의 옆에 자라고 있는 이끼들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땅의 기운을 받아서 자란다는 만년석균이었다. 서늘한 곳이고, 땅의 지력이 솟구치는 지역이기도 했다. 가르딘은 만년석균을 보자마자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단약으로 만들어 라이나와 브리안에게 먹이면 무병장수는 기본에다가 체력까지 증진된다.

  “저 이끼들을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라이젠은 보잘 것 없는 저 이끼들을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물으려고 하다가 멈추었다.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가르딘의 표정을 보니 상당히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부탁을 들어주면서 딸의 얘기를 꺼내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르딘이 보기에 만년석균을 제대로 복용만 하면 기사단의 능력을 몇 배로 키울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기연은 노력하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 되면 말고.’

  가르딘은 기사단의 실력상승을 위해 노력은 할 것이다. 허나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라이나와 브리안의 경우 가르딘이 진기를 주어 몸 안의 기운을 계속적으로 활성화해주면 되었다.

  “주겠네.”

  라이젠이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이젠님!”

  “단, 내 딸을 보살펴 주어야겠네.”

  ‘응?’

  순간 가르딘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딸을 외간 남자에게 보내며 잘 보살펴 달라는 뜻을 해석해 보면 이와 같았다.

  -내 딸과 결혼하게!

  이 말과 진배없었다. 가르딘에게는 뇌성벽력,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이 일은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저는 이미 아내와 딸이 있습니다!”

  “뭔 소리를 하는 건가! 내 딸이 유희를 하는데 자네 영지로 간다는 말이니 보살피라는 뜻인데.”

  “아, 그렇군요.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생각은 무슨! 그렇게 하게.”

  “안 됩니다.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자네 입장에서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야, 내 딸은 유희를 하는 동안 6서클 마법사로 활동을 할 것이네. 자네 영지에 이 정도의 고서클 마법사를 들일 수 있겠는가.”

  가르딘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라이젠의 말 대로였다. 마법사는 상당히 효용성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또한 드래곤이 영지에 있다면 몬스터와 마수들을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다.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가르딘은 간단히 들어주지 않았다. 입가에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협상을 해보죠.”

  “또!”

  라이젠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 인간하고 대화를 하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뭔가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은데 대화를 다 듣고 나면 이미 자신은 그 일을 약속해 버리고 있었다.

  가르딘과 라이젠이 협상하기 위해 차를 마시던 장소로 이동했다. 그들이 나가고 난 후였다.

  수만 년 동안 멈추어 있던 드래곤나이트의 눈이 빛을 발했다.

  번쩍!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가르딘 전기」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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