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 [426화]시네마틱
* * *
블랙 그룹 본사 앞,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2.0에 대한 발표회.
"그리하여 저희는 더욱 재밌는 맵과 재밌는 컨셉으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발표회에서는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2.0에 대한 열띤 질문이 한창이었다.
그 말인 즉, 이제 얼마 안 있어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2.0의 시작을 알릴 첫 콜라보, 언찬트 콜라보 발표가 시작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도미닉 경이 늦네요."
"그러네요."
언찬트 콜라보 발표를 위해 히메와 제로는 미리 무대의 뒤편에 있던 상황이었다.
언찬트와의 콜라보였기에 언찬트 당시의 의상을 입고 나오긴 했으나, 히메는 당시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가 없는 반면 제로는 오늘의 콜라보를 위해 박사들에게 부탁해 일부러 다운그레이드를 해야만 할 정도였다.
"...언제 올까요?"
"모르겠습니다."
히메는 이 상황이 어색한 듯 계속해서 제로에게 말을 걸었으나, 제로는 안드로이드답게 효율적인 대답만 반복했다.
결국 이 어색함을 참지 못한 히메는, 눈앞에 있던 과자 하나를 꺼내 아작아작 씹어먹었다.
언찬트 콜라보로 초대된 이들을 위한 특별 간식이었다.
"도미닉 경..."
히메는 언찬트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도미닉 경과의 첫 조우를 생각했다.
도미닉 경과 처음 안면을 튼 때도 언찬트였지. 히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히메가 도미닉 경에게 애정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언찬트 덕분이었고, 도미닉 경의 매력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도 언찬트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히메의 인생을 바꾼 건 언찬트 덕분이라는 소리리라.
"기분 나쁩니다."
히메가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거리자 제로가 일침을 놓았으나, 다행스럽게도 히메는 생각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옛날에 대한 기억을 회상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후 도미닉 경과 있었던 모든 인연들을 한 번 씩 회상한 히메는 튀어나오려는 여우 귀와 꼬리를 애써 숨기며 히죽거렸다.
언찬트 당시의 히메는 여우 귀와 꼬리가 없었기에 일부러 숨겨두는 것이었다.
"애써 숨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갈 때만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럼."
후아. 하고 히메가 한숨을 내쉬자,이제는 한 몸인 듯 자연스러운 귀와 꼬리가 뿅 하고 나타났다.
히메는 날리는 털을 손으로 탈탈 털어내고는 근처의 의자에 편하게 앉아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와는 많은 게 바뀌었네요."
히메가 과자가 마음에 드는 듯 과자의 상표를 확인하며 말했다.
"도미닉 경은 당시 1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차랜드에서도 많은 사람이 아는 유명인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도미닉 경은 예외로 치더라도, 히메 당신도 제법 바뀌었습니다. 설마 여우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진짜 여우가 될 줄이야."
"커, 컨셉이에요. 컨셉. 설마 진짜 여우 귀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히메의 귀와 꼬리는 당황한 듯 맹렬하게 흔들렸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꽤 많이 바뀌었잖아요."
"기계는 언제나 진보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은 없네요."
히메는 제로의 말에 졌다는 듯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제로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대화가 좀 자연스럽게 이어지네요. 아까는 좀 뚝뚝 끊기는 느낌이었는데."
"분석 결과, 히메 씨의 긴장감이 원인이었습니다."
"...오히려 긴장한 것은 제로 씨였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기계는 긴장하지 않습니다."
히메의 말에 제로가 즉시 반발했다.
그러나 확실히 방금 전의 상황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제로가 더 긴장했던 것 같았다.
히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제로에게 말했다.
"제로 씨는 점점 진보하고 있으니까, 감정 모듈도 점점 진화하고 있을 거잖아요? 그럼 충분히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진화하지 않았을까요?"
"...놀람."
제로는 히메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건, 제로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논제였기 때문이다.
제로는 히메의 말에 곧바로 자기감정 모듈의 버전을 확인했다.
그리고... 히메의 말대로, 긴장감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에 대한 업데이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박사들이 실험 과정과 결과를 보기 위해 몰래 넣어 둔 기능인 모양이었다.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전... 긴장이란 걸 한 모양이군요."
제로가 마침내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을 흔쾌히 인정했다.
"저도 많이 바뀐 모양입니다."
"그러니까요."
히메가 제로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 모두, 그때랑은 많이 달라진 거네요."
히메는 그렇게 말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언찬트로 부터 거의 2년이나 지난 상황이었으니 변함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려나.
"그나저나 이렇게나 우리가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도미닉 경은 왜 안 오는 걸까요?"
"모릅니다."
히메는 다시금 도미닉 경이 왜 이리 늦는지에 대해 제로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제로는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게, 대화는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처음으로 돌아갔다.
...
"도색이란 것이 참 무섭군."
도미닉 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행선을 몰아 블랙 그룹 본사로 향했다.
원래 나가기로 한 시간보다 약 30분 정도 늦은 상태였다.
도미닉 경은 공중 교통법을 준수하는 선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블랙 그룹 본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한 5분에서 10분 정도 늦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도미닉 경은 전화기를 들어 감독에게 연락했다.
"아무래도 5분 정도 늦을 것 같소."
["네? 하지만 이제 순서가"]
"미안하오. 이 부분에 대한 배상은 충분히 하도록 하겠소."
["아니, 아닙니다. 5분이란 말이지요? 5분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레일러를 틀어 주고, 잠시 인터미션을 가지면"]
감독은 도미닉 경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5분의 유예기간을 벌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도미닉 경이라면 괜한 말을 할 리도 없었기에 정말 5분만 벌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도착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뒷문으로 와서 몰래 들어오시렵니까, 아니면"]
"바로 진입하겠소."
["바로 진입하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감독은 당황스러운 톤으로 도미닉 경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뒷문에서 내려서 바로 무대로 올라가겠다라는 뜻이지요?"]
"..."
["그, 그 뜻이지요?"]
도미닉 경은 묵묵히 비행선을 몰고만 있었다.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하늘에 새가 많아 까딱하면 사고로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도미닉 경은 감독과의 통화를 끊고 운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끊겠소. 새가 너무 많아서 말이오."
["새요? 무슨 새요? 여보세요? 이 새"]
감독의 말이 절묘한 선에서 끊어졌다.
도미닉 경은 아마도 감독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이런, 새라는 말을 들으니 걱정되는군요. 안전히 오세요.'라고 생각했다.
[전방 300미터 구간, 새떼 출몰 구간입니다.]
비행선에 달린 네비게이션이 도미닉 경에게 경고를 내뱉었다.
그 말대로, 도미닉 경의 비행선의 앞에는 수많은 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새들이 이동하는 철이었던지, 정말 각양각색의 새들이 무리를 이루고 날아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꽤 흥미롭게 이 광경을 구경했겠지만, 도미닉 경은 지금,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아무래도 조금 힘겨운 일이 될 것 같군..."
그렇게 말한 도미닉 경은 있는 힘껏 엑셀을 밟았다.
...물론, 제한 속도를 지키면서 말이다.
...
다시 블랙 그룹 본사 앞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2.0 발표회.
"왜 언찬트 발표가 늦어지는 건가요?"
"혹시 인선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까?"
"이건... 정말 참을 수 없군! 승냥이 같은 것들이 어디서 나를 추궁해? 질문은 여기까지다!"
감독은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와 관련된 인물들과 떠들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미 지금 시각은 발표하기로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조금 넘어간 상태였고,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겨우 그 3~4분을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었다.
"빨리 다음 콜라보 내용을 알려달라!"
"언찬트냐, 아니면 데스티니냐!"
"나, 난 상급생2라고 생각해!"
"?"
사실, 관객들이 이처럼 사납게 나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측에서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느 게임과 콜라보를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끝까지 이목을 집중시켜 홍보하려는 작전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악수로 작용했다.
"도미닉 경... 이제 1분 남았는데 어디 계신 건지..."
감독은 거의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미닉 경의 말대로 5분의 시간을 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 감독.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한계였다.
"감독님? 지금 사람들이 빨리 콜라보 내용을 알려달라며 협박하고 있습니다. 안 하면 본사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며..."
"제길..."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차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인명 경시 사상이 매우 강한 가차랜드에서는 정말 본사에 불을 질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막대한 손해는 전부 원인 제공자인 자신이 보상해야 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히메 양과 제로부터 투입해. 도미닉 경은 조금 늦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아, 넵."
그렇게 말한 감독은 다시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흐르기 시작했다.
...
"결국 도미닉 경은 안 왔네요."
"그렇습니다."
히메와 제로는 스태프의 안내받아 무대 앞쪽으로 향했다.
이제 앞쪽에 있는 사회자의 신호에 맞춰 무대로 나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히메는 잠시 도미닉 경이 있어야만 했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미닉 경..."
히메는 도미닉 경이 결국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그런 히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태프는 사회자의 신호를 받고 히메와 제로를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히메는 순간 눈부신 조명 때문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귀가 먹먹했다.
사람들이 내뱉는 환호성 때문이었다.
"...우리 그래도 꽤 인기가 있었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히메와 제로는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닌자의 비법을 배운 히메와 정교한 기술의 제로로서는 당연히 둘 다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환호성은 그칠 줄 몰랐다.
히메는 그 환호성에 고양되어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세상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기뻐할 줄은 몰랐는데.
히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히메의 시야가 서서히 빛에 적응하며 주변의 모습을 하나둘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메의 표정이 싹 굳었다.
히메는, 이 환호성이 히메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환호성은 바로...
"도오오오오미닉 겨어어엉!"
저 멀리서 불타면서 날아오는, 마치 포탄과도 같은 검은 비행선을 향한 것이었다.
하얀 해적 표식을 단 검은 비행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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