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304화]첫 클랜전
* * *
[칭원 클랜의 선전포고로 클랜전이 활성화 됩니다.]
[승리 조건 : 상대가 가진 클랜 코어를 부술 것.]
[승리 시 : 패배한 클랜의 모든 것을 처분할 권리를 가짐.]
[칭원 클랜의 제안은 다음과 같습]
[클랜전이 시작됩니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놀라 검과 방패부터 뽑아 들었다.
클랜전이라는 말에 놀라 일단 전투 태세부터 갖춘 것이다.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전에 깨끗하게 총을 정비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언제든지 특수 기술 [충격과 공포]를 쓸 준비를 마쳤다.
"제길. 도대체 칭원 클랜이 어디야? 누군데 우리 파티를 망치는 거지?"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 비겁하기 그지없구만!"
탱커 노조의 클랜원들의 행동도 노련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파티를 위해 준비한 긴 식탁을 엎고 가구들을 끌고 와 엄폐물을 만들었다.
탱커들이었으니 엄폐물은 크게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뜻밖에 유지력에 큰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다.
"칭원 클랜이라니. 걔네들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우릴 공격하는 거지?"
방패를 든 도미닉 경의 등 뒤에서 상체를 살짝 숙인 채 빼곰히 고개를 내민 판데모니아가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엄폐물 판정을 같이 받고 있었다.
둘 뿐만이 아니라, 탱커들 중에선 이런 현상을 가진 이들이 종종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도미닉 경이 판데모니아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아, 이거 시너지야. 우리 탱커 노조의 시너지. 2인 이상 모일 시 아군 탱커가 엄폐물 판정을 받"
"아니, 그게 아니라 저들이 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느냔 거요."
도미닉 경은 판데모니아의 말을 정정하며 다시금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저건 또 왜 저런 건지 말이오."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떠올랐던 시스템 메시지 중 일부를 가리켰다.
[칭원 클랜의 제안은 다음과 같습]
어째서인지 부자연스럽게 끊긴 시스템 메시지.
도미닉 경은 그중 제안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아, 그거."
판데모니아가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클랜전의 꼼수인데, 뭐랄까... 일방적인 선전포고일 때 쓰는 방법이지."
"꼼수?"
"그래. 꼼수."
판데모니아는 여전히 창문을 내려치는 칭원 클랜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원래 클랜전은 선전포고 후 서로 승리 조건과 보상을 논의한 다음에 시작하거든. 그런데 그 전에 누군가가 먼저 공격하면 둘의 제안 중 무작위로 골라진단 말이야. 그걸 노려서 일방적인 제안과 보상을 주장할 수 있는 꼼수지."
유용하긴 하지만 너무 치사해서 암묵적으로 금지된 꼼수야. 라고 판데모니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하고 온 것 같아. 클랜 코어는 각자의 클랜의 중심인데, 그걸 파괴하겠다라는 건 클랜 자체를 와해시킨다는 뜻이지. 그런 조건을 걸었으면서 클랜전이 시작되자마자 공세가 몰려들기 시작했어. 이게 뭘 의미하겠어?"
"과연."
도미닉 경은 판데모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자면, 저들은 합법과 불법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쩌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미닉 경이 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슬쩍 돌렸다.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유리 주제에 칭원 클랜원의 공격을 잘 막아 내는 것도 황당하긴 하지만 결국 유리는 유리였기에 지속적인 공세에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두어 번의 공격이 이어지면 창문이 완전히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도미닉 경은 금이 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끝이 없는 인파를 무심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이제 뭘 하면 좋겠소?"
유리창을 향해 또 한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
유리창은 이제 거의 깨지기 직전이었다.
"글쎄."
또 한 번의 공격이 유리창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유리창은 깨질 듯하면서도 한 번을 더 막아 내었다.
"그런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
또 한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
쨍그랑!그제야 창문이 박살 났다.
그것을 신호로, 사방의 유리창들이 하나둘 도미노처럼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싸우다 보면 이겨 있어서."
위이이이잉! 하고 전기톱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초당 20발의 충격탄이 소나기가 되어 칭원 클랜원들을 향해 쏟아졌다.
창문을 넘어오려던 이들은 최소 5발, 최대 수십 발의 충격탄을 맞고 바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아마 그들의 본진, 클랜 건물에서 부활하고 있으리라.
도미닉 경은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금속의 관, 판데모니아의 유모이자 메이드 L003 룩이 있었다.
양옆에 있는 중기관총의 총구에서 연기를 뿜어대며.
...
탱커는 과연 딜이 약할까?
사실,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을 보면 탱커가 딜이 약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마다 성격과 외모가 다 다르듯, 탱커들도 성향과 특징이 다 달랐다.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처럼 군중 제어기를 통해 상태 이상에 집중하는 탱커도 있었고, 판데모니아처럼 순수하게 체력과 체력 재생력으로 승부를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두꺼운 갑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 방어도로 승부를 보았고, 어떤 이들은 애초에 들어올 피해를 줄임으로서 좀 더 오래 버티기도 했다.
탱커들에게 있어서 피해를 잘 견디는 것은 기본소양이었으나, 사실 탱커들의 기본소양은 또 있었다.
바로 어그로라는 기본소양이.
도미닉 경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보통의 경우 상대가 도미닉 경을 상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즉, 어그로에 끌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특수 기술 [기수]를 통해 광역 피해 감소 버프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었다.
상대의 처지에선 이 기술이 아주 껄끄럽기에 도미닉 경을 우선 처리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그로를 끄는 방법 중 하나였다.
L003 룩은 군중 제어 기술도, 광역 버프나 디 버프도 없는 순수한 스탯형 탱커였다.
이런 탱커들은 어그로를 끌기가 어려운 편이었는데, L003은 아주 간단하게 어그로를 끌 방도를 찾아내었다.
그건 바로, 무시할 수 없는데미지를 쏟아부어 상대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딜탱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L003의 공격이 한 번 흩뿌려졌으니 어지간한 딜러들은 생사를 헤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저런 방식도 있었군."
도미닉 경은 L003의 공격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도미닉 경의 감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 나 랫하트는 네놈들이 없는 놈들이라 생각한다!"
랫하트라고 자신을 부른 깡마른 쥐 수인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적들의 가랑이 사이를 가리켰다.
그야말로 도발의 정석!
당연하게도 그 말에 발끈한 이들은 당장 랫하트에게 해를 가하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랫하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일어난 진동에, 칭원 클랜원들이 대부분 그 자리에서 넘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가벼운 랫하트도 함께.
"어, 미안."
순박하지만 험악하게 생긴, 아주 모순된 얼굴을 가진 근육질의 거구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는 땅에 내려찍힌 망치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치고는 랫하트를 일으켜 세웠다.
"고, 고마워. 죽는 줄 알았네!"
랫하트는 숨을 헐떡이며 엄살을 피웠다.
물론 그도 탱커였기에 죽을 일은 없었으나, 이는 사실 적들에게 만만히 보여 도발 성공률을 높이려는 랫하트의 연기였다.
"별말씀을."
거구의 사내는 순수한 어린이처럼 웃으며 랫하트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전장의 상황을 빠르게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
상황이... 상황이 너무나도 재밌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실례!"
판데모니아는 역병에 푹 절여진 양손대검을 휘둘러 주변 적에게 디 버프를 주었다.
저 멀리 어느새 참전한 머슬만 의원은 윗옷을 벗어던진 채 서브미션으로 적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참호를 파고 그 안에서 박격포를 쏘아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전장.
물론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도미닉 경은 적어도 지금 그 말이 여기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흐."
"흐."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동시에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알겠지만, 이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행복할 때 내는 소리였다.
"이거 아주 재밌겠소."
도미닉 경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방패를 휘둘렀다.
방패의 정면에 있던 이가 스턴에 걸려 뒤에 있는 이들의 진로를 막아 버렸다.
"그 말은 틀렸어, 도미닉 경."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의 말에 반박하며 머스킷을 발사했다.
[충격과 공포] 효과가 터지며 창문을 넘어오려던 이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창틀에 끼인 채 기절 상태가 되었다.
도미니카 경은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화약의 연기를 후 불어 흩트리며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이미 재밌는걸."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소. 그렇지. 이미 재밌는 상태였소."
도미닉 경은 검으로 겨우 기절에서 깨어난 이의 목을 찔렀다.
마침 체력이 그리 높지 않았던지, 도미닉 경의 낮은 공격력으로도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기 전, 하늘에서 페럴란트의 깃발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깃발은, 마침 쓰러지려던 시체를 관통한 채 땅에 박혔다.
마치 적에게 형벌을 내린 것처럼 말이다.
"자, 그럼 좀 더 즐겨봅시다."
도미닉 경은 다시 방패를 들쳐올리고 환한 미소를 유지한 채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이 재밌는 걸 놓친다면, 참 안타깝지 않겠소?"
"그래. 맞아. 그렇지."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말에 동의하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완벽한 동선을 그리며 전장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왈츠. 아마도 에튀드. 아마도 사라방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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